박명순의 영화이야기=바그다드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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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순의 영화이야기=바그다드 카페
  • 박명순 작가
  • 승인 2021.08.25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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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오아시스를 꿈꾸며

 

최근 한국사회는 페미니즘 담론이 대중화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지지자들과 반대자들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음은 진통의 과정이라고 보여진다. 이미 80년대 각 대학에 여성학이 자리를 잡았고 사회각계의 차별과 불평등 이슈와 더불어 개혁담론으로 여성문제가 뜨거운 화두였던 적이 아주 잠깐 있었다. 그러다가 사회문제의 일부분으로 희석화되다가 최근 대중정서로 부활하는 제스처를 보이는 것이다. 물론 방법적으로 품격 있게 차근차근 문제제기를 하는 건 아직 기대하기 어렵다. 늘 그랬듯이 사회적 약자에게 방법론적 선택의 다양성이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미투와 관련하여 피해자와 가해자의 엄중하고 객관적인 처벌과 보상 문제 역시 개인의 차원에서 집단과 가부장사회의 제의형식을 띠고 있으니 그저 속수무책으로 흙탕물이 가라앉기를 바랄 뿐이다. 문제 제기의 메타포를 이해하기를 바라면서.

메타포를 풍요롭게 지닌 영화가 있으니 바로 바그다드 카페이다. 이 영화는 사회의 편견에 맞서 스스로 행복을 쟁취하는 여성들과 그 가족의 이야기이다. 서로에게 지치고 화가 난 미란다의 가족이 운영하는 카페에 등장하는 야스민. 이 카페는 야스민에게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와 진배없다. 정작 카페는 고장 난 커피머신과 먼지투성이의 공간, 화를 내고 신경질을 부리는 사람들뿐이지만 여기에서 카페는 당연히 메타포이다. 힘들게 일하고 집에 와서 푹 쉬고 위로받고 싶은 사람들이 갈망하는 오아시스이다.

오래된 가족이 갈망하는 오아시스에 대한 메타포는 주체와 타자가 뒤바뀔 때가 종종 있다. 등장인물들은 타자의 시선에 위축되어 스스로를 루저로 여긴다. 야스민 역시 뚱뚱하고 못생겨서 남자가 떠났다고 생각한다. 카페를 배경으로 등장하는 이방인, 흑인, 무명화가와 미혼부 등 그들 역시 지쳐있다. 이후 그들이 즐겁게 일하고 때로는 음악과 차로 위안을 받기도 하는 카페로 변신한다. 사막 한복판 바그다드에서 피어나는 장미의 메타포는 살아있음의 아름다움이다.

우리는 거칠고 험한 현실의 삶 속에서 가끔 오아시스를 만난다. 포기하지 않고 꿈을 꾼 자만이 그 감동을 주체적으로 내면화하여 생명수를 만들어낼 줄 안다. 영화의 오아시스는 바그다드 카페의 변신이다. 이 오아시스가 착각이나 사상누각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해답을 찾아내야 한다. 물론 정확한 방법론은 아무도 모른다. 정답은 없지만 변화해야 한다는 것,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는 것만 어렴풋이 느낀다. 새로운 관계O.S.T. ‘콜링유가 흐른다.

‘I am calling you. (당신을 부르고 있어요.)’

부부는 사막 한가운데서 서로의 길을 떠난다. 남편은 승용차를 타고 호기롭게 자신의 길을 떠나지만 아내는 트렁크와 함께 짐짝처럼 사막에 내동댕이쳐진다. 이혼 풍경이 이처럼 남자와 여자의 처지로 상반되었던 시대의 밑그림은 오늘날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행히 땀 흘리며 걸은 보람이 있어서 그녀는 숙소와 휴식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카페를 발견한다. 그 카페 이름이 바로 바그다드이다.

이곳의 풍경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겉모습은 피아노와 그림, 그리고 차와 푹신한 의자가 마련된 완벽한 휴식처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오아시스가 신기루 못지않은 허울임을 그녀는 안다. 여주인인 브랜다는 남편과 별거 중이며, 아들과 딸은 독립능력을 갖추지 못한 채 자유를 구가하는 골칫덩어리들이다. 카페는 파리를 날릴 뿐 손님이 없으며 커피 한 잔을 제대로 만들지 못할 만큼 엉터리다. 신기루와 오아시스의 구분은 육안으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신기루일 거야, 하며 포기해버리면 영원히 오아시스를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끝까지 확인하고 그 가치를 정당하게 매겨야 할 것이다. 여기서 야스민이 등장하는 것이다.

야스민은 브랜다의 아들인 피아노 연주자에게 반한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의 음악에서 위안을 얻는다. 피아노를 신들린 것처럼 치는 그의 재능은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미혼부라는 낙인이 그를 구속할 뿐. 야스민은 카페가 있고, 자녀가 있고 또 예쁘고 건강한 브랜다가 부럽다. 하지만 이들의 사이는 냉랭하다. 현실적인 브랜다의 시선에 야스민은 수상쩍은 뚱뚱한 독일 여자이다. 돈이 많아 보이지도 않는데 왜 이곳에서 머무르려고 하는지 속내를 알 수 없으니 경계해야 할 낯선 외국인일 뿐이다.

야스민의 시선은 다르다. 물론 그녀 역시 갑작스러운 남편과의 이별 때문에 불안하고 막막하다. 여행 중 남편과의 불화, 그리고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것은 지금까지 그녀의 생활이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던 차에 이곳에 머물면서 조금씩 심리적 안정을 취하는 중이다. 자신과 정반대인 깡마르고 신경질적인 여인 브랜다에게 연민이 생긴다. 자신에게 없는 모든 걸 가지고 있지만 불행한 이 여인과 알 수 없는 친밀감이 작용하는 것, 이렇게 인연의 싹은 비죽비죽 솟아나고 있었다.

야스민은 스스로 카페를 새롭게 단장한다. 숙박비 대신 청소를 자청하고 홀 서빙을 도우며 아기를 돌보아준다. 사막처럼 삭막했던 카페는 서서히 다정다감하고 행복한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야스민의 트렁크에는 마술도구들이 있었으니 사막의 카페와 마술은 어울리는 궁합이지 않은가. 사막 한 가운데 카페에서는 장미꽃을 피워내는 마술사의 인기와 더불어 수많은 손님들로 북적댄다.

이제 바그다드 카페는 명실상부한 사막의 오아시스가 된 것이다.

갑작스럽게 변신한 카페와 함께 미란다의 가족은 행복을 되찾은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가능했을까, 이방인이었던 야스민은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오아시스와 신기루의 차이는 실재냐, 환각이냐이다. 야스민이 카페에 불어넣은 활기는 환각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야스민은 마술 이외 물리적으로 새로운 일을 한 것은 없다. 사람들의 기운을 북돋아주고, 위로해 주고, 그리고 돌봄 노동을 한 것일 뿐.

결국 여성의 돌봄 노동으로 유지되는 오래된 가족의 의미는 변화 없이 반복된다. 야스민이 마술처럼 일구어낸 위로와 행복의 공간으로 변신한 카페조차 그 원동력은 돌봄 노동인 셈이니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똑같은 일을 해도, ‘자유의지를 발휘하여 스스로 행하느냐, 시키는 대로 강제 수행하느냐의 차이는 크다. ‘오래된 가족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관계에 대한 모색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돌봄 노동의 가치를 마술과 연계하여 이해하는 것도 되새겨볼 점이다. , 그런데 돌봄 노동을 여성성으로 한정하여 해석하는 건 문제가 있어 보인다. 돌봄 노동 자체의 가치가 중요한 거니까.

(1987년 제작, 2021년 재상영, 독일 등, 퍼시 애들론 감독,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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