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쉬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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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쉬 걸
  • 박명순 작가
  • 승인 2022.01.22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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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트랜스젠더는 누구였을까
▲ 사진=네이버 영화
▲ 사진=네이버 영화

 

고등학교시절, 가장 부진한 과목은 수학이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성적은 오르지 않았는데 그럴수록 오히려 더 공부에 매달렸던 기억이 난다. 수학공식을 열심히 외웠고, 비슷한 유형의 문제를 풀면서 새로운 문제에 대비했다. 실력이 느는 기쁨도 있었고 수학의 세계를 이해하는 기쁨도 적지 않았지만 막상 바닥 치는 성적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충분히 노력을 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기 위해 더욱 열심히 했었다. 간혹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를 푸는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부족한 머리에도 불구하고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는 자부심이 남아 있다.

사람에게 저마다 존재하는 소질과 적성이라는 게 있다. 거창한 표현을 하지 않더라도 취향이라는 게 있는 건 사실이다. 모든 걸 다 잘 할 수는 없는 법, 체험이 얄팍하거나, 전혀 문외한의 능력을 지니는 분야가 있음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 아닌가. 나의 체험과 무관하거나, 관심을 가져보지 못한 것에 대한 무식함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겪어보지 않았다고, 내가 아는 지식이 없다고, 나와 의견이 다르다고, 무조건 거부하고 틀렸다고 단정 하려는 마음과 싸워야 한다. 그게 지성인의 자세가 아닐까?

나에게 동성애나 트랜스젠더 관련 이론이나 영화는 아무리 노력해도 오르지 않는 수학 성적처럼 난감한 문제이다.(물론 나는 성의 다양성을 폭넓게 이해한다고 자처하지만 매우 얄팍한 수준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불편함의 이유가 나의 편협한 가치관 때문이 아닐까 반성하는 자세로 끝까지 감상하는 것만이 최선으로 보여진다. 영화종이비행기는 불편함이 힘들었지만, 캐롤은 편안하게 아름다운 사랑으로 주인공에게 공감할 수 있었다.

동성애나 트랜스젠더에 대한 지식과 공감능력이 부족하다고 노골적으로 고백하는 이유는 균형감각을 바로잡고 싶은 소박한 의식과 면죄부를 얻기 위함일 지도 모른다. 고교시절 수학 성적처럼 끝내 부진함을 모면하지는 못할지라도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는 자부심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경우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사는 만큼 포용한다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체험해보지 않은 것, 당사자가 아닐 경우 공감의 폭이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영역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경험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영역, 그 안에 장애나 성차별과 인종차별 등 편견의 문제가 있으며 트랜스젠더와 동성애도 빠질 수 없다.

▲ 사진=네이버 영화
▲ 사진=네이버 영화

데니쉬 걸은 우연히 본 영화였다. 제목의 평범함과 어울리지 않는, 그 참을 수 없는 무거움과 슬픔 때문에 아찔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에이나르의 불행한 삶이 오랫동안 머릿속을 무겁게 했다. 여성으로 살고 싶어 했던 사람, 세계 최초의 성전환수술을 감행했던 실존인물을 배경으로 제작한 영화. 덴마크 화가 에이나르의 일생을 트랜스젠더와 관련하여 다루고 있는데 나로서는 이해불가의 내용이 많았던 것 같다.

무엇보다 젠더의 문제가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않은 것 같은 아쉬움이 컸다. 실존인물을 조명했다는 점이 리얼리티를 보장한다 할지라도 전체적으로 짜임이 엉성한 건 아닌가 의문이 갔다. 에이나르에게 여성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관련 내용이 빈약했다. 화장하고 치장하는 모습, 외모의 아름다움에 관련된 내용을 더 많이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안타까웠다.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에이나르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런 의문이 끝내 해결되지 않았다.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고, 화가라는 명성과 실력도 갖추고 있었던 에이나르가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목숨조차 아끼지 않았던 여성성의 정체가 무엇인지 지금도 나는 혼란스럽다. 트랜스젠더의 문제는 이처럼 성정체성의 혼란과 씨름하는 삶 자체가 중요한 건가, 아아, 아직도 나는 잘 모르겠다. 혼돈의 세계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다.

▲ 사진=네이버 영화
▲ 사진=네이버 영화

하지만 영화를 보는 시각, 화가 부부의 사랑과 그들에게 닥친 시련을 감당하는 에이나르와 릴리의 이중인물 연기를 보여주는 에디레드메인의 소용돌이에 빨려들지 않을 수 없다. 화가로서의 모습도 매력적인데, 여성으로 분장한 모습은 아름답다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은 이국적인 풍모에 넋을 놓게 된다.

▲ 사진=네이버 영화
▲ 사진=네이버 영화

영화의 질감은 고전적이다. 1926년 덴마크 코펜하겐을 배경으로 하는 명화 감상의 분위기가 펼쳐진다. 고전적인 분위기와 의상이 어우러지면서 남성에서 여성으로 정체성을 묻는 내면연기는 경이롭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 멸시의 시선까지 카메라는 날카롭게 추적한다.

영화의 줄거리를 정리해 보자.

트랜스 젠더의 주인공, 에이나르 베게너는 잘 나가는 당대 최고의 풍경화 화가였고 아내 게르다는 초상화를 그리는 무명 화가였다. 아름답고 행복한 부부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모델 대역으로 남편에게 발레옷을 입혀 포즈를 취하게 했는데 그 모습이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이때 남편의 심경에 묘한 변화가 솟구쳤다는 설정이 실화를 근거로 했음에도 불가사의함이 풀리지 않는다. 베게너가 그 모델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남성으로서 부부로서 문제없는 평범한 삶을 살았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베게너에게 여성성이 감추어져 있었기에 언젠가는 터져 나왔을 것이다.

에이나르는 발레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에 반하여 그 후로도 화장을 하고 여장을 한 채 아내의 도움으로 남성과 여성의 생활을 오락가락하였지만 결국 커밍아웃을 한다. 더 이상 통제 불능으로 변화하는 자신을 어찌하지 못하고 괴로움에 휩싸인 결론이다.

▲ 사진=네이버 영화
▲ 사진=네이버 영화

1년여 짧은 기간 에이나르에게 일어난 정신과 육체의 변화는 논리적 설명이 불가해 보인다. 30여 년 남성으로 살아왔는데 갑자기 여성성을 자각한 후 진정한 삶을 찾겠다니, 이게 무슨 남의 봉창 뜯어 먹는 소리란 말인가, 그의 아내는 울며불며 매달렸지만 이미 그의 정체성은 남성으로 회복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행스러운 일은 아내가 릴리(에이나르의 여성이름)를 모델로 그린 그림으로 유명화가가 되었다는 점이다.(아내는 평생 릴리의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모델에 대한 관심까지 높아져서 릴리는 덩달아 유명인사가 되었다.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독특한 분위기의 그림과 실존인물의 신비스러움에 끌리는 사람들에게 릴리의 인기는 갈수록 높아진다.

그런데 릴리는 사랑받는 여성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한다. 육체적으로 완벽한 여성이 되고 싶은 것이다. (아내와는 우정관계를 지속하고 서로의 자유를 존중한다.) 게르다는 끝까지 릴리를 사랑했고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지원했다. 결국 성전환수술을 권유한다.

 

데니쉬 걸은 덴마크 여성이라는 의미인데 에이나르에게 부여한 영광스러운 애칭이다. 에이나르는 정신과 육체 모두 완벽한 여성이 되고 싶어 성전환수술을 시도한다. 세계 최초의 성전환수술은 아내였던 게르다의 도움을 받아 최고의 의료진으로 이루어져 마침내 성공했다.

하지만 에이나르는 수술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다. 자신의 성을 되찾기 위해 목숨까지 걸었던 여인. 늦게나마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후, 하리수나, 다니엘라 베가 등 그녀의 후예는 덕분에 조금은 나은 인생을 살고 있는 듯하다.

▲ 사진=네이버 영화
▲ 사진=네이버 영화

 

판타스틱 우먼(2017 제작, 세바스찬 렐리오 감독)은 트랜스젠더인 다니엘라 베가가 성전환수술을 받지 않은 남자의 몸으로 여자의 삶을 살아가는 마리노를 연기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트랜스젠더가 사랑하는 사람과 법적 혼인을 하지 못할 때 어떻게 비참해질 수 있는가도 보여주었다. 결국 대한민국에서도 동성혼인이 허용되어야 한다에 나의 소중한 표를 던져야 한다는 결단을 내렸다.

천하장사 마돈나는 씨름선수 몸매를 지닌, 여자가 되고 싶은, 소년의 이야기이다. 코믹한 웃음 코드가 무거운 주제를 받쳐주니 가족과 함께 만날 수 있는 트랜스젠더 영화로서 적격이다. 성정체성을 고민한다는 건 자신을 사랑하는 노력임을 말하는 장면이 특히 인상 깊은 영화였다.

(2016 제작, 미국, 톰 후퍼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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