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에 이런, 어처구니 없는 비석이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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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에 이런, 어처구니 없는 비석이 있었네
  • 전병철 작가
  • 승인 2022.02.24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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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시 이인면 초봉리 ‘유림의병정난사적비’

전병철(작가, 전 역사교사)

 

공주시 이인면 초봉리에 참 이상한 공원이 있다. 입구에 무슨 공원이라는 팻말이 있는데 정작 내려가 보면 공원 같지 않다. 또 입구에 무슨 사적비라는 팻말이 있는데 정작 가보면 사적비에 대한 안내는 전혀 없고 주변에 있는 고인돌과 보호수에 관한 안내문만 있다. 또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가 400년 된 팽나무라고 안내하고 있는데 정작 400년 된 팽나무는 없고 누가 기증했다는 작은 나무만 달랑 서 있다. 도대체 어찌 된 까닭인지 헷갈릴 뿐이다.

이상한 게 이것만이 아니다. KTX(한국고속철도) 호남선 공주역은 공주와 논산 중간 지점인 공주시 이인면 신영리에 세워졌는데, 공주역이 같지 않다. 공주역이 아니라 이인역 같다. 그런데 실제 이인역이 있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120여 년 전만 해도 이인에 역이 있었다. 이인면(利仁面)은 한양(서울)과 호남(전라도)을 이어주는 큰길에 있던 교통의 요충지라 이곳에 역()이 있었다. 이인역(利仁驛)은 조선 시대 충청도 공주를 중심으로 형성된 이인도(利仁道)의 핵심이 되는 역으로써 이곳 찰방(察訪)이 주변 9개 역을 관할할 정도로 큰 역할을 하던 역이었다. 1896년 역원제가 폐지되면서 이인역은 없어지고 현재 이곳에 이인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인은 옛 이름이 이도(利途)였다고도 하며, 이인역의 원래 이름은 이도역(利道驛)이었다고 한다.

▲「동국대지도」에 나오는 이인역(붉은 색 원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동국대지도」에 나오는 이인역(붉은 색 원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옛날에는 사람 이름을 지을 때 피휘(避諱)’라 하여 왕이나 조상·성인이 사용한 이름 글자를 피하여 같은 글자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려와 조선 시대 왕은 이름[본명(本名)=()]을 지을 때 외자를 많이 사용하였으며, 기왕이면 널리 쓰이지 않는 글자를 사용하였다. 왕 이름이 두 글자로 된 것보다 한 글자면 아무래도 일반인이 이름에 사용할 글자가 늘어나기 때문이었다. 하여 태조는 이단(李旦, 이성계:李成桂), 정종은 이경(李曔, 이방과:李芳果), 세종은 이도(李祹), 영조는 이금(李昑), 정조는 이산(李祘), 고종은 이희(李㷩, 이재황:李載晃), 순종은 이척(李坧)이 본명이다. 태종은 왕이 된 뒤에도 원래 이름인 이방원의 芳遠을 그대로 휘로 사용하였다고 하며,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태조·세종·정조·순종···’은 왕이 죽은 뒤 그의 위패를 종묘(宗廟)에 모실 때 지은 이름인 묘호(廟號)이다.

피휘는 휘로 사용한 같은 글자뿐만이 아니라 음만 같아도 피하였다. 하여 이도역(利道驛)이도’(利道)가 세종 이름 이도(李祹)과 음이 같아 이인(利仁驛)으로 바꾸었다. 이인면은 1941년 이전까지 목동면(木洞面)으로 불리다가 이인역 이름을 따서 1942년 현재 이름인 이인면으로 바뀌었다 하니 결국 왕 이름에 따라 역 이름은 물론 마을 이름까지 바뀐 셈이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왕 때문에 또는 왕을 명분 삼아 벌인 싸움도 적지 않았으니 바로 이곳 이인에서도 그런 전투가 있었다. 1894년 갑오년에 벌어진 동학농민전쟁이다.

이인은 동학농민군이 공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전략상 중요한 곳이었다. 10월 중순 논산에 모인 남·북접 동학농민군은 크게 이인 방면(주력 부대), 계룡/효포 방면(전봉준 지휘 부대)과 대교(장기, 현 세종시 장군면) 방면에서 공주를 향해 진격하였는데, 이인 방면은 우금티로 이어져 당시 충청감영이 있던 공주로 들어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동학농민혁명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이 공주이고, 또 동학농민혁명 하면 우금티전투를 떠올리기 쉽다. 그만큼 우금티전투가 중요한 전투였지만, 당시 우금티에서만 전투가 있었던 게 아니라 공주와 공주 주변 산자락과 고개, 역 등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189410(양력 11) 말에 이인전투(10.23), 대교전투(10.24.), 효포/능티전투(10.24.25.), 옥녀봉전투(10.25.) 등이 치러졌으며, 11(양력 12)에 들어서 이인전투(11.08.), 송장배미산자락전투(11.09.), 오실마을산자락전투(11.09), 우금티전투(11.09.11. 양력 12.0507.) 등이 치열하게 이어졌다. 또한, 동학농민군이 공주에서 후퇴하는 가운데 크고 작은 많은 전투가 각지에서 벌어졌다.  [참고: 우리나라는 1895년 을미개혁으로 태음력을 폐지하고 태양력을 채택하여 음력 18951117일을 양력 189611일로 하였다. 따라서 우리나라 각종 연표나 역사에 등장하는 날짜는 대체로 18951116일 이전 날짜는 음력 날짜, 189611일부터는 양력 날짜를 쓴다]

▲동학농민혁명 ‘공주전투’ 주요 지역(대교, 효포/능티, 옥녀봉, 송장배미, 오실마을, 우금티 *이인은 부여 방향으로 더 밑에 있다)  ⓒ공주동학혁명이야기
▲동학농민혁명 ‘공주전투’ 주요 지역(대교, 효포/능티, 옥녀봉, 송장배미, 오실마을, 우금티 *이인은 부여 방향으로 더 밑에 있다)  ⓒ공주동학혁명이야기

동학농민혁명 당시 이인역을 중심으로 여러 차례의 큰 전투가 벌어졌다. 논산에서 올라와 이인역 주변 산에 자리 잡고 있던 동학농민군을 향해 1023(양력 1120) 새벽 일본군·관군 연합군이 산을 오르며 공격하였다. 여러 차례 공방전을 주고받는 가운데 날이 저물자 일본군·관군이 공격을 멈추고 우금티로 퇴각하였는데, 이인전투는 공주에서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관군과 벌인 최초의 전투이자 동학농민군이 공주에서 승리한 최초의 전투였다. 그리고 동학농민군은 우금티 공격에 앞서 118(양력 124) 밤 횃불을 들고 이인역을 포위한 채 공격하여 이인역을 점령하였다. 당시 이인역에는 말은 물론 역졸과 관노비 등 적잖은 인원이 있었으며, 전시에는 이들이 군인 역할을 하기에 우금티를 공격하려면 먼저 이인역을 점령할 필요가 있었다.

이외에도 이인에서는 적잖은 전투가 더 있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현재 공주 우금티에서 부여 방향으로 가다가 이인을 향해 옛 도로로 들어서면 폐교된 주봉초등학교와 이인농협주유를 지나게 된다. 이곳에서 조금만 더 가면 굽어진 길 왼쪽(공주시 이인면 초봉리 47번지 / 검바위로 421)검바위휴식공원유림 의병정난 사적비라고 쓴 팻말이 보인다.

▲[좌] 이인초등학교와 유림의병전난사적비 지도 ⓒ네이버   /   [우] 검바위휴식공원’과 ‘유림 의병정난 사적비’ 팻말(이인에서 공주 방향으로 촬영) ⓒ전병철
▲[좌] 이인초등학교와 유림의병전난사적비 지도 ⓒ네이버   /   [우] 검바위휴식공원’과 ‘유림 의병정난 사적비’ 팻말(이인에서 공주 방향으로 촬영) ⓒ전병철

유림 의병정난 사적비팻말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검바위와 크고 작은 고인돌과 함께 커다란 비석이 하나 보인다. 팻말에 유림 의병정난 사적비라고 하였지만, 정작 사적비에 대한 안내문(안내판)은 없고 고인돌에 관한 안내판과 ‘1982보호수로 지정된 400년 된 팽나무라고 새겨진 돌만 있다. 그런데 정작 400년 된 팽나무는 없고 바로 옆에 ‘2020년 기증했다고 새겨진 돌 뒤로 그다지 크지 않은 나무 하나만 있다. 이상하여 예전 사진을 찾아보니 다행히 이곳에 커다란 나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큰 나무가 어째서 없어졌는지 안내를 해주거나 아니면 400년 된 보호수라고 새긴 돌을 아예 치우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좌] 검바위와 유림의병정난사적비(현재 사진)  ⓒ전병철   /   [우] 팽나무와 유림의병정란사적비(예전 사진)   ⓒ동학농민혁명 종합지식정보시스템
▲[좌] 검바위와 유림의병정난사적비(현재 사진)  ⓒ전병철   /   [우] 팽나무와 유림의병정란사적비(예전 사진)   ⓒ동학농민혁명 종합지식정보시스템

문제는 이게 아니다. 이곳에 있는 사적비, 유림의병정난사적비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유림(儒林)이 의병을 조직하여 민보군(民保軍)으로서 일본군·관군과 함께 동학농민군을 무찌른 것을 기리는 비석이라는 점이다. 비문 내용에 따르면 유림이 조직한 민보군은 동학란을 진압하여 평온을 회복하였고, 조정으로부터 상을 받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어떻게 같은 백성인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조직한 민보군을 의병이라 할 수 있으며, 일본군에 맞서 싸운 게 아니라 일본군을 도와 일본군·관군과 함께 같은 동포를 죽이는 데 앞장선 군대를 어찌 의병이라 할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비문에는 일본군과 같은 편에 서서 함께 싸운 사실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내막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유림 의병정난 사적비라고 쓴 팻말 이름만 보고 진짜 의병으로 여길 수 있다. 참 어처구니없는 비석이 아닐 수 없다.

▲유림의병정난사적비(뒷쪽)        //         뒷면    /    옆면        ⓒ전병철
▲유림의병정난사적비(뒷쪽)        //         뒷면    /    옆면        ⓒ전병철

유림의병정난사적비 옆면에 새겨놓은 비문을 보면 이 비석은 단기 4327년 갑술년, 1994년에 공주노인회(公州老人會)와 공주유도회(公州儒道會)가 합동으로 세운 것으로 파악된다. 1994년이면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며, 공주에서는 우금티동학농민전쟁100주년기념사업회(1995년 동학농민전쟁우금티기념사업회)가 창립된 해이기도 하다. 100년 전 동학농민군이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고자 혁명을 일으킨 것에 대해 한쪽에서는 이를 기념하고 계승하고자 사업회를 만들고, 다른 한쪽에서는 반란으로 규정하고 난을 진압한 것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하니 같은 공주사람끼리 달라도 너무 달랐다.

▲1994년 동학농민혁명100주년기념 공주지역 행사 팸플릿       ⓒ동학농민전쟁우금티기념사업회
▲1994년 동학농민혁명100주년기념 공주지역 행사 팸플릿       ⓒ동학농민전쟁우금티기념사업회

갑오년인 1894년 전국에서 동학농민군이 반봉건반외세를 내세우며 자주평등대동 세상을 만들고자 들고 일어난 사건에 대해 처음에는 지배자 시각에서 바라본 동학()’, 농민폭동(暴動)’ 등으로 불리었으나 민중 의식이 성장하고 민주시민 역량이 성숙하면서 갑오혁신운동’, 갑오혁명’, 갑오농민전쟁등으로 보는 시각이 늘어났다. 여기에 516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은 우리나라 혁명은 동학혁명과 5·16혁명 둘 뿐이라고 강조하는 가운데 박정희는 그의 아버지 박성빈이 동학 접주였던 까닭인지(박성빈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도 하지 않았음은 물론 오히려 탄압했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5·16군사쿠데타를 혁명으로 호도하려는 의도에서인지 1963년 정부 주도로 전북 정읍 황토현에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을 세우고, 1973년 정부 후원으로 천도교에서 공주 우금티에 동학혁명군위령탑을 건립하였다. 이렇게 동학혁명이 강조되긴 하였지만 문제가 있었다. ‘동학혁명을 내세우는 대신 농민은 쏙 빼버리고 갑오년에 일어난 사건은 농민이 일으킨 사건이 아니라 동학교도가 일으킨 사건이라고 하였다. 비록 혁명을 강조하기는 하였지만, ‘농민의 역할과 농민운동을 외면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1980년대까지 동학혁명’, ‘갑오동학혁명이라는 시각이 확산하는 가운데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전후하여 다양한 기념사업이 이루어지면서 농민의 역할을 강조하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에 갑오농민전쟁’, ‘동학농민전쟁이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고 각 지역에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꾸려지면서 1990년 후반 이후에는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용어가 두루 사용되었다. 2004년에는 <동학농민혁명참여자등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제정되어 이제는 동학농민혁명이 대표적인 용어처럼 널리 사용되고 있다. 다만,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동학농민운동이라는 용어를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유림의병정난사적비가 세워진 1994년이면 동학이라는 말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용하지 않던 때이다. 그런데도 동학농민혁명을 굳이 동학난이라 부르고,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비석을 세워 후세에까지 영원히 남기고자 하였으니 이는 시대착오적인 행위가 아닐 수 없다. 혹 유림의병정난사적비는 당시 유림이 동학농민혁명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파악할 수 있는 비석으로써 나름 의미 있는 자료로 볼 수 있으니 문제 삼을 필요가 있냐고 말할 지도 모른다. 그럴 수 있다. 역사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고, 역사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수밖에 없으니. 하지만 유림의병정난사적비에 새겨진 내용을 보면 마치 동학농민군이 죄 없는 백성의 재산을 약탈하거나 평범한 집에 불을 지르는 등 나쁜 행위를 저지르는 흉악한 집단으로 보고 있는 등 문제가 많다. 더구나 당시 지배층에 해당하는 유림이 나라를 잘못 운영한 것에 관해서는 책임은커녕 반성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나라가 혼란스러워진 게 동학농민군 탓이라고 하니 이치에도 맞지 않는다. 적반하장의 비석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비석이 공주에 있다는 것 자체가 창피한 일이다. 더구나 이곳에서 가까운 이인면사무소 앞에 세워진,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한 순찰사이자 충청도 관찰사이던 박제순의 공덕을 기리는 거사비(去思碑)까지 있다는 사실에 더더욱 그렇다.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한 박제순은 뒷날 일제에 협력하며 나라까지 팔아먹은 을사오적의 친일반민족행위자였으니 이런 자를 위한 거사비와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유림의병정난사적비가 이곳 공주 이인에 함께 있다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다.

역사는 흐른다. 그냥 흐르는 게 아니라 발전적으로 흐른다. 이런 역사 흐름에 반하는 것을 반동(反動)이라고 하는데, 유림의병정난사적비는 반동적인 비석, 반역사적이고 반민중적이며 반민족적인 비석이다. 이런 비석이라면 유림의병정난사적비는 마땅히 청산해야 할 대상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때려 부수자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유림의병정난사적비는 어떤 비석인지, 누가 언제 세웠으며 어떤 문제가 있는 비석인지 등등을 설명하는 안내문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냥 두지 말자는 것이요, 방치하지 말고 제대로 볼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더불어 검바위휴식공원 안에 있는 보호수에 관한 안내판도 있었으면 한다. 그래야 누가 이곳에 와도 , 그렇구나!”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제대로 된 안내문이라도 있으면 문화유산을 소중히 여기고 제대로 가꿀 줄 아는 공주시민으로서의 체면이 서지 않을까 싶다.

도로 안내판이나 교통안전 표지판이 정확해야 하듯이 문화유산을 안내하는 안내문(안내판)도 정확해야 한다. 도로에 표지판이 없거나 제대로 세워지지 않으면 사람들이 헷갈리기 쉽고 교통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마찬가지로 문화유산에 대한 안내문이 없으면 오해하기 쉽고 잘못 알게 될 가능성이 많다. 하여 공주 이인 초봉리에 있는 이상한공원과 어처구니없는비석이 바로잡혔으면 좋겠다. 공주는 역사문화도시요, 교육도시 아닌가!

 

참고자료❙  유림의병정난사적비는 어떤 비석이며 누가 언제 세웠는지 등을 파악하려면 비석에 새겨진 글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정작 비문에 한자가 너무 많고 어려운 말도 적잖게 있어 알아보기 어렵다. 또 글도 길어 현장에서 다 읽기가 쉽지 않다. 하여 사적비에 새겨진 비문을 가급적 원문 그대로 하면서 나름 쉽게 읽을 수 있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앞면] 유림의병정난사적비(儒林義兵靖亂事績碑)

[뒷면] 우리[唯我] 민족은 전통사상으로 충효를 숭상하고 예의를 존중하여 왔다. ()모든 행실의 근본[百行之本]’이라 하고 충()정의지대절(正義之大節)’이라 하였으며, ()로써 질서를 정제(整齊)하고 의()로서 기강을 정명(正明)하였으니 이에 선현들은 비록 궁색하였으나 안빈낙도하여 그 본분에 충실하였고 국난에는 살신성인하여 그 대절(大節)을 사수(死守)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천강(天綱)이 배척되고 윤기(倫紀)가 와해되여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고 백성이 백성답지 못하며’[國不國而民不民]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여’[父不父而子不子] 세도(世道)가 판탕(板蕩: 어지러워지다)되고 멸천난윤(滅天亂倫: 하늘이 무너지고 인륜이 어긋남)의 사회로 전락하고 있다.

도대체 그 원인은 무엇인가? 갑오동학민란(甲午東學民亂) 이후에 국가는 멸망되고 지금까지[于今] 100여 년간에 그 잔혹한 참화를 극복하며 이질문화에 동화되여 고유의 예의범백(禮儀凡百)과 의관문물(衣冠文物)이 변질되고 시습풍속(時習風俗)이 역변(易變: 바뀌다)되었으며 아직도[尙今] 분단된 국토에 동족상쟁에 편안할 날[寧日]이 없다.

오호(嗚呼), 조선왕조 개국 500여 년에 비록 유학을 숭상하였으나 선현들의 가모양책(嘉謨良策: 나랏일에 관한 좋은 계책)이 실행되지 못하고 마침내[終乃] 탕탕(蕩蕩: 치우치지 않다)한 왕도(王道)에는 실정(失政)하였고 내우외환에 정쟁당화(政爭黨禍)로 현준(賢俊)들은 초야에 은둔하고 탐관오리들의 행패에 민생이 도탄에 빠지니 급기야에는 동학당민란(東學黨民亂)이 창궐하였다. 동학당은 본시 종교집단으로서 당초에 호국안민(護國安民)이라는 기치 아래 국정개혁을 표방하고 농궁민(農窮民)을 선동하여 대권에 반란하고 혁명을 획책하였다.

무릇[大抵] 호국안민이라는 명제는 본시에 성웅들의 큰 뜻[大志]로서 이는 3대 요도(三大要道)가 있는 것이다. 첫째 대본(大本)이요, 둘째 대기(大幾), 셋째 대법(大法)이라 한다. 대본이라 함은 인심 곧 천심 소재(所在)를 말함이요, 대기라 함은 시의(時宜: 시기에 맞음)로서 곧 대세의 변화를 말함이요, 대법이라 함은 부자간의 인도(人道)와 부부간의 가도(家道)와 군신간의 국법(國法)을 말하는 것이다. 국가라 함은 대세(大勢)에 의하여 성립되고 인심(人心)에 의하여 존속되고 법도(法道)에 의하여 인심의 향배로 변화되는 것이다. 고대혁명사에 의하면 대세에 의하여 국민을 위한 혁명이 있고 대세를 거역하고 사욕 위한 무력혁명도 있으며 혹은 집단반란으로 세상을 소란케 하고 자멸한 집단도 있었다.

동학당은 시폐(時弊)를 개혁한다는 명분으로 감히 선성(先聖)들이 성취 못한 호국안민을 제창(提唱)하였으니 과연 대세에 의합(宜合: 알맞음)한 것인가, 당시의 시폐는 누적된 고습(痼習)으로서 조야(朝野)가 공환(共患: 함께 하는 근심)된 사안이다. 국민들은 의연히 대처하고 충의심(忠義心)이 불변하였으니 이것이 대세에 변화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또한 일부 지역의 소수 집단난동으로 시국을 소란케 하여 국가에 위해(危害)하고 평온을 희구하는 국민과 괴리하였으니 이를 집단반란으로 규정한 것이다. (: 핵심)는 지자(智者)라면 자신의 입지를 성찰하고 경거망동은 자제하여야 하고 진정 애국자라면 국가장래를 예측하여야 했다. 옛말[古語]나와 네가 함께 망한다[子及汝偕亡]’는 말과 갖이 공멸(共滅)하였으니 결국 자신은 물론이요, 무구(無咎: 걱정거리 없는)한 다수의 양민을 희생케 하고 평지풍파(平地風波)를 이르켜 결국[終乃] 국가도 멸망하엿다.

동학당은 당초에 무지몽매(無知蒙昧)한 궁민(窮民)을 선동하여 농기구와 죽창 등 무모한 폭력을 의세(依勢: 세력을 좇다)하였으니 그 기세가 막대하였으나 충효사상으로 무장한 유림이 건재하고 500여 년 전승하여 온 종사(宗社)가 비록 국력은 허약할지라도 당당한 국본(國本)과 법통(法統)이 엄연한 현실을 감히 능멸하고 그 무모한 망동을 자행하였으니 우리 공주 유림들은 안연(晏然)히 좌시하지 않었다.

때는 고종조(高宗朝) 1894(갑오년) 10월 사건이다. 동학당은 성군작당(成群作黨)하여 전라도지방 관아를 습격 강점하고 그 여세로 충청도를 침범하여 공주감영을 침공하고저 이인(利仁) 취병산(翠屛山)에 집결하여 이인 찰방(察訪)을 유린하고 인근 민가에 약탈, 방화 등 악행을 자행하여 민심과 괴리되였다. 본향은 자고로 충절의 고장으로서 유림들은 전통적인 호국충절로써 단호히 이를 격퇴키로 의결하였다.

유림 대표 양재목[梁公在穆]은 세전(世傳) 유가(儒家) 출신으로 학문이 고매(高邁)하여 조야에 명망과 인망이 있고 관록(官祿)을 사양하고 초야에 은일하여 있었다. 이에 반란군의 난폭에 분연히 창의(倡義)하여 공주, 부여, 석성 등지의 의중(義衆)을 초모(招募)하여 약 400여 명이 운집하고, 탄천 박씨 문중의 비호 아래 탄천 송학리(松鶴里)에 둔거(屯據)하여 대비하였고 관군은 이인 초봉리(草鳳里) 산기슭[後麓]과 주봉리(朱峰里) 산골짜기[山峽]에 둔진대치(屯陣對峙)하였다.

반군은 공주로 진군하기 위하여 밤[夜陰]에 하산(下山)하고 정오(整伍) 준비 중임을 탐지하고 유림의병이 기습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반군을 이인 구암리(九岩里) 방향 검바위 지점으로 축출하였고, 관군이 일제히 출격하여 반군의 진로를 차단하고 의병과 전후협공하여 반군은 일패도지(一敗塗地)하고 용성리(龍城里) 산협을 통하여 계룡면 방향으로 패주(敗走)하였다. 반군은 경천(敬天)의 일부 군()과 합세하여 공주로 진군 중 효포리(孝浦里)에서 관군과 격전하여 여기에서 괴멸되였다 한다.

의병은 시종관(始終官)을 보우(輔佑)하여 공주 일우(一隅: 한쪽 구석)를 방어하고 마침내[終乃] 평온회복에 공헌하였다. 이에 국조(國朝)로부터 유림 대표에게 포공(褒功)의 은전(恩典)이 있었다. 유림들은 사도(士道) 본연의 충의대절(忠義大節)을 다하여 국난에 공헌하여 도의정신(道義情神)이 소저(昭著: 뚜렷하게 드러남)하였으니 공주의 전통이요 동방사문(東邦斯文)의 긍식(矜式: 본보기)으로 영세불면(永世不泯)하리라. 후학말예(後學末裔)들은 감히 소수(紹修: 무너진 학문을 다시 이어 닦는다)의 성()으로써 영세구전(永世久傳)하고저 근찬각석(謹撰刻石)하노라.

[옆면] 199410(檀紀四千三百二十七年甲戌十月 日)

         남원 사람 양기덕 지음(南原人 梁基德 撰書)

         공주노인회·공주유도회 공동으로 세움(公州 老人會 公州 儒道會 共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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