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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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 박명순 작가
  • 승인 2022.05.06 03: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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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네이버 영화
▲ 사진=네이버 영화

스페인 내전이 영화의 현실적 배경이다.

주인공 오필리아는 동화책을 좋아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어린 소녀이다. 봉제공인 아빠를 잃고 생활방편으로 재혼할 수밖에 없었던 엄마를 따라 먼 길을 가는 중에 숲의 요정을 만난다. 오필리아가 등장하는 장면은 현실과 환상의 뒤섞임으로 출발한다. 엄마는 국민군과 반대편의 잔인한 인물로 설정된 비달 대위의 아기를 임신하였다. 그는 아내의 생명 따위는 자신의 아들(반드시 아들이어야 한다고 믿고 있는 태아)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희생당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포악한 사람이다.

▲ 사진=네이버 영화
▲ 사진=네이버 영화

 

영화에서 또 하나의 배경은 환상이자 신화적 상상력이 지배하는 지하세계이다.

기예르모 델 토르 감독의 영화는 어둡고 무겁고 기괴함으로 정평이 나 있다. 최근에 만난 세이브 오브 워터역시 그러하다. 그의 작품이 모두 독특하고 아름답지만 판의 미로는 판타지 영화가 창조할 수 있는 최고의 작품성과 미학적 완성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전범(典範)이 된다고 알려져 있다. 슬프고 아름답고 무섭고 기괴한 삶의 표면과 이면을 동시에 보여주면서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로서 감독은 판타지를 적절하게 활용한다.

▲ 사진=네이버 영화
▲ 사진=네이버 영화

 

환상의 세계에서 오필리아는 신화 속 공주님이다. 주어진 과업을 완성하고 신화세계 아버지의 왕위를 물려받아야 한다. 현실세계에서는 그 능력이 죽은 무화과나무를 꽃피워 생명을 살려낼 수 있는 것인데, 그 과업을 지시하는 자가 이라 불리는 상상의 괴력자이다.

▲ 사진=네이버 영화
▲ 사진=네이버 영화

 

영화는 환상과 현실의 상상력이 버무려져서 펼쳐진다. 소름끼치리만큼 사실적인 디테일의 장면들이 환상적인 기법으로 독특하게 상승작용을 일으켜서 두 개의 세계는 절묘한 균형으로 각자의 몫을 지켜낸다. 환상과 현실 둘 다 진정성의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오필리아와 비달 대위의 대립은 현실과 상상의 교접지점이다.

오필리아와 대위는 의붓아버지와 의붓딸이지만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다.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엄마의 말을 듣지 않고, 끝까지 대위님이라고 부르는 오필리아. 대위 역시 오필리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책을 들고 있기 때문에 왼손을 내밀어 악수하는 오필리아에게 장갑 낀 손으로 그 작은 손을 비틀 듯이 잡으며 말하는 대위의 냉혹함을 오필리아는 본능적으로 거부한다.

악수는 오른손으로 하는 거란다.”

▲ 사진=네이버 영화
▲ 사진=네이버 영화

 

어린 소녀와 시골 최고 권력자의 대결이 팽팽하게 전개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예상대로 엄마는 아기를 낳다가 죽고, 태어난 아기(아들이다)를 데리고 오라는 판의 말을 듣고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오필리아는 희생의 피를 흘린다. 비달 대위는 반란군에게 죽고, 오필리아는 자신의 피를 흘려 생명을 살리는 마지막 과업을 완수한 것이다.

바리데기 신화에서 세상은 좋은 사람, 나쁜 사람으로 이분화 되지 않는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바리공주가 아버지를 살리는 생명수를 길어오는 이야기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이 없다. 하지만 판의 미로에서 세상은 이분화 되어 있다. 어느 편에 서느냐가 중요하며 오필리아는 의붓아버지의 반대편인 메르세데스를 지지한다. 스페인내전의 반란군은 참혹하게 죽어가면서도 투쟁을 멈추지 않는다.

승산 없는 싸움을 하는 것은 아닐까?”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 아닐까?”

정보원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하녀생활을 하는 메르세데스는 대위의 곁에서 보았던 정부 측의 막강한 권력과 포로를 다루는 대위의 잔인함에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메르세데스의 연인이자, 반란군의 대표인 패드로는 단호하다.

우리가 당당할 수 있으려면 싸우는 수밖에 없어. 이길 수는 없을지 몰라도, 적어도 그들에게 작은 타격을 줄 수는 있겠지.”

▲ 사진=네이버 영화
▲ 사진=네이버 영화

 

남편의 정년퇴임 기념으로 떠난 유럽여행에서 만난 스페인은 바람의 나라, 축구의 나라였다. 스페인 내란의 흔적이 지역감정으로 불붙는 축구 응원으로 남아있었다. 카페나 레스토랑에 TV가 켜 있으면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축구경기가 화면에 담겨 있었다. (스무 번 이상 목격함.)

나에게 스페인은 와인과 노래와 춤, 또는 투우의 나라정도의 피상적 지식밖에 없었는데 영화 판의 미로를 통하여 스페인 내전의 역사를 떠올리게 되었다. 스페인 해변의 일몰을 만날 때나 오렌지향 물씬 풍기는 스페인 바람에서도 숨결마다 스페인 내전의 아픔이 스며있을 거라 믿었다. 스페인의 천재화가 피카소는 게르니카로 절규했고,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써서 참전기록을 세상에 알렸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 역사에서 한 나라의 내전에 전 세계인들이 개인 자격으로 참전해 불의에 항거한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스페인 내전은 그래서 인류 양심의 전쟁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정권 쟁취에는 실패한 싸움이었지만 인간의 위대함을 극명하게 입증했던 정의의 투쟁이었던 것이다.

메르세데스가 오필리아에게 불러주었던 그 음울한 자장가가 판의 미로주제곡이다. 파시즘의 지원으로 집권한 독재정권을 향하여 지는 싸움을 멈추지 않았던 반란군의 수장 페드로와 그의 연인 메르세데스를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 또한 오필리아가 마지막 흘린 피, 그 소름끼치는 아름답고 무섭고 엽기적인 장면들의 판타스틱한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스페인 내전에서 흘린 피의 의미를 극대화해 해석할 때, 오필리아의 죽음이 주는 고결함과 아름다움과 슬픔의 깊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만난 최고의 판타지 영화였다. 판타지가 현실문제의 열쇠가 되고, 현실이 판타지의 비유와 상징으로 해석되는 마술, 그 한복판에 영화 판의 미로가 있다. 물론 영화의 해석은 열린 결말과 환상적 기법으로 인해 사회학적 상상력과 동화적 상상력으로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다. 좋은 영화는 다양한 해석을 유도하는 힘이 있다. ‘의 중립적 존재도 예사롭지 않으니 말이다. 다만 그 다양함 속에서 나만의 해석이 중요할 뿐이다.

▲ 사진=네이버 영화
▲ 사진=네이버 영화

 

(스페인 멕시코 스페인합작, 2006,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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