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불편한 영화도 좋다 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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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불편한 영화도 좋다 향수
  • 박명순 작가
  • 승인 2023.03.14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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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네이버 영화
▲자료출처=네이버 영화

 

작가들이 좋아하는 책 중에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가 있다. 시인들은 이 책을 읽으면 시가 쓰고 싶어진다 하고, 소설가 역시 창작에의 열정이 솟아난다고 한다. 내가 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도 비슷하다. ‘왜 글을 쓰는가’, ‘어떤 글이 좋은 글인가의 문제에 나를 온몸으로 적셔놓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어울리는 것도 이와 유사한데 편함과 재미를 주면서도 헤어지면 내가 풀어야 할 문제가 더 헝클어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만나면 말도 조심스럽고 간혹 불편한 상황에 부닥쳐서 힘겹기도 하지만 그 사람 덕분에 내 삶의 결이 곧고 단단해진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이다. 불편함이 주는 의미에 자신을 비추어보고 사유를 통하여 자기성찰의 과정을 거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박찬욱 영화 중에서 친절한 금자씨나 몇몇 작품들은 불편하지만 강한 끌림이 있다. 영상언어가 주는 불편함은 더욱 강렬하게 시청각을 자극하면서 상상력의 폭을 제한한다는 점이다. 불편함과 강렬함을 녹여내면서 그 안에 번득이는 또 다른 생의 만남을 발견하는 지점을 찾아내는 건 각자의 몫이다. 프랑스 영화 아모르의 고독과 슬픔의 영상은 소름 돋게 하는 늙음의 문제를 의 맨얼굴과 대면하는 강렬함이 있다.

좋은 영화라면 아무리 불편하고 힘들어도 회피하지 않는 근성이 있다. 누군가는 나에게 직업병이라고 진단을 내리고 누군가는 강심장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예술의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용기라고 생각한다. 의사가 보람을 느끼는 경우는 병이 깊은 환자를 치료했을 경우일 것이고, 교사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다양한 예술의 가능성을 지지하며, 획일적 문화와 그 쏠림을 경계하고자 할 뿐이다. 영화 향수에는 고독한 천재의 광기가 발언하는 인간다운 삶에 대한 강렬함이 반어와 풍자적인 시적영상으로 펼쳐진다.

▲자료출처=네이버 영화
▲자료출처=네이버 영화

 

향수는 파트리트 쥐스킨트의 소설을 영화로 제작한 작품이다. 원작이 주는 특별한 소재와 호기심을 자극하는 주인공 그르누이를 만나면서 관객의 호불호(好不好)가 극단적인 건 소재가 엽기적이고 절제된 대사 때문이기도 하다. 영상화를 싫어하는 작가의 성향 때문에 감독은 20년 이상을 기다려 제작허가를 받았고, 이후 심혈을 기울여 만든 역작으로 높이 평가받는 작품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문자언어의 강렬함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작품성을 높게 평가받은 영화이지만 소설이 주는 무한한 감동을 영상으로 만족스럽게 재현하는 것은 역부족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원작과 별개로 영화만을 감상하기에는 아쉬움이 많으나 둘 다를 접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영상이라도 만나기를 권유한다. 다소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특별한 이야기를 원한다면 적극 추천하고 싶다. 어쩌면,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하여 영감(靈感)에 가까운 강렬한 감성을 느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시를 읽듯이 영화를 읽는 누군가에게는.

 

이 영화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18세기 프랑스 파리를 상상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회학적 상상력과 인지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 시대와 향수의 관계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신분불평등 제도에서 오는 천재들의 불우한 삶에 대한 연민도 필요할 것이다.

같은 물을 먹어도 독사는 그것으로 독을 만들고, 소는 젖을 만든다.”

영화이야기를 하면서 자주 하게 되는 말이다. 향수의 부제는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이다. 원하는 최고의 향수를 만들기 위해서 스물다섯 명 꽃다운 처녀를 희생시킨 이야기에 매료되는 이유를 탐색하고자 이 글을 시작한다.

▲자료출처=네이버 영화
▲자료출처=네이버 영화

 

영화 최고의 명장면은 처음과 마지막이다.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첫 장면은 악취가 코를 찌르는 생선시장 귀퉁이에서 태어나는 그르누이 출생의 배경이다. 아기는 쉴 새 없이 일해야 하는 엄마의 산통 속에서 생선 다듬는 칼로 탯줄이 잘라지고 바로 버려진다. 이전에도 그르누이의 엄마는 몇 명의 아이를 그렇게 처리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생선 내장통에서 울음을 터뜨린 아이는 살아나고 영아유기죄로 엄마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아이는 이후 열악한 보육시설에서 목숨을 부지하였고, 성장하여 노예처럼 혹사당하면서도 후각에 대한 자신감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한다. 탄생의 울음 이후 그의 감정표현은 극도로 제한되어 기계처럼 무표정하고 고통도 슬픔도 보여주지 않았다. 오로지 냄새에만 반응하면서 최고의 향수를 만들겠다는 집념만을 눈덩이처럼 굴리고 있었다. 한물 간 향수장인에게 인기 있는 향수제조 방법을 가르쳐주고 본인은 인간의 체취에 집착한다.

최고의 향수와 체취의 관계가 무엇인지 영화는 친절하게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자신에게 없는 것, 불가능한 것, 부재하기 때문에 열망하는 무엇이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겠다. 그는 자신이 향내에 집착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받거나 그들을 지배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가능성이 최고의 향수제조에 있다고 확신하고 그 길을 맹목적으로 추종할 뿐이다.

후각을 통해 다른 인간을 지배할 수 있다는 믿음은 뜬금없는 소리는 아니다. 다이앤 애커먼은 감각의 박물학에서 후각을 특별하게 표현한다.

▲자료출처=네이버 영화
▲자료출처=네이버 영화

 

냄새에 관한 한 단기적인 기억은 거의 없다. 냄새에 관한 기억은 아주 오래 가고, 게다가 냄새는 학습과 저장을 격려한다. 냄새는 시각이나 소리보다 더 확실하게 심금을 울린다.”

 

영화의 메시지는 복합적이지만 왜 향수 이야기일까를 생각해본다면 실마리가 풀릴 수 있다. 후각은 형체 없이 상상력을 무한 자극하며 강렬하게 파고들 수 있는 것이다. 그르누이가 만들려고 했던 최고의 향수란 무엇인가, 왜 그는 여기에 집착하는 것인가의 문제는 결국 유한자 인간이 무한을 추구하는 어리석음이 삶의 원동력이라는 것. 멈출 수 없는 열정에 대한 맹목성으로 생명을 소진하는 것이 인간의 불가사의한 삶이라는 것으로 잠정적 결론을 내려본다.

결국 그는 최고의 향수, 일명 천국의 향수를 만들었다. 냄새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사랑의 감정을 키워내는 향수. 몇 방울의 향만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사랑의 포로로 만들어버리는 향수. 문제는 그 향수를 제조하기 위해 꽃다운 생명이 희생양으로 바쳐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르누이는 살인에 대하여 일말의 죄책감이나 도덕성도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는 인도주의적 상상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전설과 신화의 형식을 차용할 뿐이다.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여인과 그 생명력과 신성함을 오롯이 냄새로 느끼는, 그러나 본인은 체취가 없는, 후각만을 의지하여 세계 최고의 위대함을 꿈꾸는 어처구니없게 순수하며 기괴한 남자가 화면을 메울 뿐이다. 인간의 세계와 화합하지 못하는 불우한 천재의 운명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 이미 책의 내용을 알고 있지만 영상에 대한 궁금증은 새롭게 펼쳐진다.

향수제조의 천재는 마침내 자신의 목표를 이루었고, 연쇄살인범으로 체포된다. 인간 구원이나 진정한 행복이라는 어떤 명분도 만들어낼 줄 모르는 그르누이에게 향수의 의미는 자신의 존재감일 뿐이다. 짐승처럼 태어나서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한 채, 노예로 이용당하는 그에게 유형생활과 형벌의 고통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최고의 향수를 만들었다는 자족감으로 충만할 뿐이다.

마지막 장면이다. 교수형을 구경하러 모인 만여 명의 군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그르누이는 죄인의 몰골이 아니다. 천국의 향으로 관리들을 무장 해제시켜 자신의 호위무사로 만든다. 피 맛을 원하는 성난 군중들에게 둘러싸인 그르누이는 순식간에 그들을 제압한다. 군중들은 천국의 향에 취하여 그르누이에게 천사가 오셨다며 최고의 경배를 바친다. 이후 그들은 사랑과 욕망의 화신이 되어 옆사람과 무작위로 난교를 벌인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위대한 그르누이는 자신의 정체성이 증오임을 깨닫는다.

▲자료출처=네이버 영화
▲자료출처=네이버 영화

 

그는 자신의 승리가 무서웠다. 왜냐하면 자신은 단 한순간도 그 승리를 즐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평생 소유하기를 갈망해 왔던 향수, 2년에 걸쳐 만들어낸, 사람들의 사랑을 획득할 수 있는 그 향수를 바르고 마차에서 햇살이 따사로운 광장으로 내려서던 그 순간, 그 순간에 벌써 그는 향수가 저항할 수 없는 영향력으로 바람처럼 빠르게 퍼지면서 주변 사람들을 사로잡아 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에 그의 내면에서 인간에 대한 모든 역겨움이 되살아나 승리를 철저하게 무너뜨려 버렸다. 기쁨은커녕 최소한의 만족감도 느낄 수가 없었다. 항상 갈망해 왔던 일,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일에 성공한 이 순간에 그 일이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자신은 그 향기를 사랑하기는커녕 증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갑자기, 자신은 사랑이 아니라 언제나 증오 속에서만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증오하고 증오받는 것에서.

 

그루누이를 다른 말로 부른다면 살인자, 천재, 광인, 집착증환자, 향기도착증, 사회부적응자, 등 다양하다. 이 모든 것을 포함시키지 않고, 한 개의 단어만을 들이댄다면 향수의 그르누이는 부재하는 무엇이 된다. 영화에 마련된 또 하나의 마지막 장면은 에필로그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 그르누이는 자신의 몸에 향수를 쏟아 붓는다. 최후의 장소는 책에서는 묘지로 영화에서는 출생했던 생선시장으로 각기 다르다.

영화적 설정에서 탁월한 점은 이 장면이다. 태어난 곳에서 최후를 맞는다는 것. ‘천사의 향기에 매혹당한 생선시장의 추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르누이의 육체를 발기발기 찢는다. 상징적 부재가 아닌 말 그대로 육체가 사라지는 장면이다. 최고의 향기를 소유하고자 했던 그르누이는 사랑과 증오의 욕망이 정점에 도달한 인간에 의해 그토록 갈망했던 사라짐부재의 욕망을 온몸으로 체험한다. 그르누이는 그렇게 사라졌으나, 그가 만든 천사의 향마지막 한 방울은 영화가 끝난 이후부터 더욱 강렬한 향내를 발산하기 시작한다. 그 향을 사랑할 것인가, 증오할 것인가의 선택은 당신에게 달려있다.

 

 

향수, 톰 티크베어 감독, 독일 외, 2006년 제작, 2016년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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