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의 표정은 다층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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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의 표정은 다층적이다
  • 박명순 작가
  • 승인 2024.05.16 19: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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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제공=구글영화
▲자료제공=구글영화

흑백영화가 주는 과거 회상의 영상은 현재와 과거를 구분 짓는다. 이미 지난 그 시절이 다시 올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 시절이 존재했었다는 것. 현재와 과거를 연결하는 다층적인 표정을 의미화하는 작업이다.

1970년대 멕시코시티 콜로라도의 로마 지역을 배경으로 한 중산층의 가정부 클래오가 등장한다.

남부러울 것 없이 사는 집안의 안주인 소피아는 갑작스럽게 남편이 떠나고 4명의 아이들과 남겨진다.

처음에는 아이들에게 비밀로 했지만 본인이 현실을 직시한 후 사실을 말해준다.

함께 어려움을 이겨내자고 도움을 청하는 소피아는 클래오의 상전이었다. 하지만 소피아와 클래오가 서서히 서로를 둘러싼 장벽을 깨면서 깊은 유대감을 이루는 과정을 보여준다.

카메라는 클래오를 주시하되 이동선을 따르지 않고 멈추어서 주변까지 넓게 보여준다. 알폰스 쿠아론 감독의 주기법인 롱테이크 시선이다.

1970년대 멕시코의 시장과 거리 풍경이 세심하게 재현될 수 있는 장치이다.

클래오는 소피아 집안의 가정부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장면은 이들 가족과 함께 출현한다.

영화는 1970년대 멕시코 사회를 다층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가정을 카메라에 담는다. 클래오를 중심으로 카메라가 움직이는 건 사실이지만 주인공은 시대의 표정이자 사람들의 삶이다.

소피아의 남편이자 아이들의 아버지는 외도에 빠져 가장의 책무를 외면한다.

클래오는 집안의 사건에 개입하거나 주도하는 것과 무관하게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다. 아이들의 먹거리를 챙겨주고 집안을 청소하며 종일 분주하다.

커다란 집안에서 수시로 계단을 오르내리는 클래오의 표정 변화를 세심하게 읽어내기에는 카메라의 위치가 멀다.

함께 가정부로 근무하는 친구와 보내는 저녁 시간만이 유일한 휴식이자 자유시간이지만 이들은 전기세를 아까워하는 주인집의 눈치를 보느라 불을 끄고 대화를 나눈다.

페르민은 클래오의 뱃속에 있는 아기 아빠이다. 클래오는 걱정스럽게 임신 사실을 알리자 그는 말도 없이 극장에서 사라진다.

페르민을 기다리느라 어쩔 줄 모르던 클래오는 빈자리에 남겨진 그의 외투를 들고 밖으로 나온다.

임신 사실을 알리고 조심스럽게 해고할 거냐고 묻는 클래오에게 소피아는 병원 진료를 받도록 정성을 기울인다.

이후 클래오는 불러오는 배를 끌어안고 예전처럼 생활하면서 수소문 끝에 페르민을 찾아낸다. 페르민은 무술에 자신의 인생을 걸겠다며 벌거벗은 몸으로 검을 휘두르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보여주었던 클래오의 연인이다. 남녀의 만남에 익숙하지 않았던 클래오에게 그는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연인이며 뱃속 아기의 아빠이다.

페르민과 클래오의 만남에서 영화는 특별한 장면을 삽입한다. 유명한 수도자가 와서 아주 어렵고 특별한 동작이라며 눈을 감고 한쪽 다리를 들어서 반대편 무릎에 올려놓는다.

훈련을 받는 수백 명의 수련생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비슷한 숫자의 관중들이 그 동작을 따라 하는데 모두들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린다.

그들 가운데 오직 한 사람 클래오만이 그 동작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장면이다. 군계일학(群鷄一鶴)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클래오가 얼마나 특별한 사람인가에 대하여 마련한 장치로 보인다.

페르민은 자신의 아기가 아니라며 “미친 하녀”라는 막말까지 하고 사라지는데 클레오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다.

이후 클래오는 산달을 맞아 아기 침대를 사러 백화점에 왔다가 시위대를 총으로 공격하고 무고한 시민까지 마구 죽이는 정부군을 만나는데 그 속에서 총을 든 페르민과 잠시 눈을 마주친다.

도로 사정이 여의치 않아 클래오는 양수가 터지고 2시간이 넘어서야 병원에 도착했는데 아기는 숨을 쉬지 않았다.

클래오는 퇴원 후 우울한 날들을 보내는데 아이들은 클래오를 걱정한다. 소피아는 남편의 차를 팔고 여행을 떠난다.

아이들에게는 차와의 마지막 이별 여행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아빠와의 이별을 공식화하는 여행이었다.

“이제 아빠는 집에 안 올 거야.”

“우리를 사랑하지 않나요?”

“아니야, 아빠는 너희를 아주 많이 사랑하신단다.”

“오늘 우리가 없을 때, 아빠가 짐을 챙겨서 가실 거야. 엄마는 출판 일을 할 거야.”

“엄마는 화학자잖아요?”

“아빠가 생활비를 주지 않아서 가르치는 일만으로는 먹고 살 수가 없어. 엄마가 책 좋아하잖아.”

한적한 바닷가에서 아이들은 수영을 즐긴다. 클래오는 백사장에 앉아있는데 막내 소피의 외침에 자기도 모르게 물속으로 들어간다.

어른 키를 넘는 파도 속에서 아이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 동생을 구하려고 뛰어든 파코도 두려움에 떨고 있다. 커다란 파도지만 셋이 몸을 합쳐서 움직이니 조금씩 헤쳐 나올 수가 있었다.

“클래오가 우리를 구해줬어요.”

“클래오, 고마워. 수영도 못하는데 겁 없이 물속으로 들어갔구나. 큰일 날 뻔했어. 이제 괜찮아.”

네 명의 아이와 소피아 그리고 클래오가 서로를 껴안으며 울먹인다.

“그 아이를 원하지 않았어요. 아이가 싫었어요.”

클래오의 말문이 터졌다. 죽은 아이에게 가졌던 미안함과 죄의식이 폭발한 것이다. 아빠에게 버림받고 엄마마저 지켜주지 못해서 죽은 아이. 아빠가 떠났어도 당당하게 아이를 지켜주는 소피아를 보면서 자신은 그러지 못했음을 고백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이가 태어났으면 클래오는 성심껏 아이를 돌보았겠지만 그러지 못한 것은 누구의 탓이라고 할 수 없다.

클래오가 울음을 터뜨릴 수 있는 대상, 소피아와 아이들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인 것이다. 시처럼 신비롭게 스며드는 영상언어로서의 좋은 장면들이 차고 넘치지만 클래오가 소피아의 가족과 이루는 하모니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과민반응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계층과 계급의 벽을 넘어섰다는 표현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다만 그 노력의 몸짓만은 인정하고 싶다.

영화는 이국 땅 멕시코 작은 도시 로마의 1970년대를 섬세한 장인의 솜씨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이 음향, 풍경, 시위대와 무자비한 진압까지 치밀하게 재현한다.

클래오는 한국의 봉순이나 순이처럼 구석방에서 기거하며 구정물에 손 마를 새 없이 하루 종일 집안일을 하는 저임금 노동자다.

알폰스 쿠아론 감독은 『해리포터』, 『그래비티』 등 가상세계를 완벽하게 구현해 내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의 작품에서 사회적 문제의식은 찾아보기 힘들다.

고용인과 고용주 사이의 갈등관계를 전혀 불편함 없이 매끄럽게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감싸 안는 솜씨가 유려하고 감동적이다.

하지만 자신이 고용인이나 그의 후손들 입장이라면 이 영화는 어딘가 불편함이 있을 것이다.

알폰스 쿠아론 감독이 이 작품에서 자신을 키워낸 여성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담았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를 키운 건 영화 속 할머니와 엄마에 대한 시선과, 가정부 클래오에 대하여 동일한 시선을 유지한다는 건 본인이 인정하기 어렵겠지만 자가당착의 모순이 있다.

군계일학의 이미지로 신비화했던 클래오는 이후 어떻게 살았을까? 영상에서도 클래오는 쉴 틈 없이 뒤치다꺼리를 했다.

임신한 몸으로 그리고 아기를 출산한 이후에도 무거운 가방을 들거나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한다.

소피아와 자매처럼 가족처럼 타고난 따뜻한 성품과 성실함으로 네 명의 아이들을 키워내고 가족처럼 보호해주는 그 소피아 집안의 울타리에서 행복했을까?

『로마』, 알폰스 쿠아론 감독, 미국, 2018 제작, 1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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