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이어지고 있었네, 정안면 쌍달리 산제당 동제(洞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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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이어지고 있었네, 정안면 쌍달리 산제당 동제(洞祭)
  • 인간 전병철
  • 승인 2024.05.20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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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기억, 추억! 이런 문화유산도 있었네! - 공주시 산제당 정리(1)

인간 전병철(작가)

 

2023년 나는 공주시에 있는 사당(祠堂)재실(齋室)제실(祭室)제단(祭壇)을 조사정리하고자 적잖은 발품을 팔며 공주지역 구석구석을 찾아다녔다. 그런 가운데 산제당(山祭堂)’이란 걸 알게 되었고, 이참에 산제당까지 조사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산제당은 대체로 산속에 있어 가는 길을 찾기 어려운데 때마침 기회가 생겼다. 정안면 재실을 조사하면서 쌍달리 산제당에 가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쌍달리 산제당은 내가 알고 있는 쌍달작은도서관양동진 선생이 사는 집 근처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양 선생 댁을 찾아가 그의 안내로 쌍달리 산제당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산속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한여름이라서 그런지 산제당까지 가는 길에 풀이 너무 많고 길도 좋지 않아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벌초도 이미 마친 가을이 끝나가는 무렵, 양 선생과 연락하면서 쌍달리 산신제가 1121일 산제당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단순히 산제당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산신제까지 참관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일거양득이요, 바라던 바였다. 원하는 게 있으면 언젠가는 이루어지는 것이려니, 고맙지 않을 수 없었다.

드디어 때가 왔다. 사람들이 모였다. 1121(음력 109) 늦은 오후 쌍달작은도서관옆 개울 건너 위쪽에 있는 개인 집 마당에 차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이곳은 산제당에 오르는 길 가운데 차로 갈 수 있는 마지막 장소였다. 차에서 내린 마을 사람들이 인사를 나누며 트렁크 안에 있던 짐을 하나씩 챙겨 산제당으로 오르는 길로 향했다. 마을 사람들은 상당히 무거워 보이는 짐을 불끈 들더니 앞장서서 걸었다. 나는 맨 뒤에서 사진을 찍으며 그들을 따랐다.

집 옆길을 지나니 산속 길이 이어졌다. 경사는 그리 높지 않은 원만한 길이지만 낙엽으로 덮여있어 조심해서 걸어야 했다. 마을 사람들은 무거운 짐을 들고서도 잘들 나아갔다. 나는 그들과 떨어지지 않으려 애써 발길을 재촉하였지만, 사진도 찍어야 하고 평평한 길이 아닌 탓에 몸도 쉽게 움직여지지 않아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중간중간 양 선생이 기다려줘 일행과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리 멀지 않은 산속에 산제당이 있다고 하는데 아직 잘 보이지 않는다.

산제당에 가려면 중간쯤에 있는 도랑을 건너야 했다. 도랑 건너편 산 언덕에 산제당이 있다고 한다. 도랑을 건너 경사가 있는 좁은 산길을 마을 사람들은 짐을 지고도 잘 오른다. 뒤처진 나도 오르는 길이라 힘을 더 내보지만, 길 같지 않은 길이 가파르고 미끄러지기 쉬워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오르니 산제당이 보이기 시작한다. 또 다행인지 오르는 길 일부에는 붙잡고 오를 수 있는 밧줄이 있어 산신당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길을 이렇게 힘들게 오르는 데에는 아마 내가 나이든 탓도 있겠지만 말이다.

드디어 산제당에 도착하니 참 아담한 건물이다. 정사각형 단칸 흙집으로, 목재 사각기둥에 양철지붕을 하고 있으며, 지붕 가운데에 상투처럼 모양을 낸 모습이 귀엽기조차 하다. 이미 도착한 마을 사람들은 가져온 짐을 산제당 안에 풀어 놓는가 하면 주변을 살펴보기도 하고 산제당 안에서 준비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한다.

산제당 안에서는 가져온 음식으로 제상(祭床)을 차리고 있었다. 높게 마련한 기다란 제단(祭壇)을 정리하고 가지런히 제물(祭物)을 올려놓았다. 다 차려놓은 제물을 보니 다양하였다. 호두, 사과, , , , 대추에 마른 명태까지 있고, 떡으로 가득 찬 떡시루에 돼지머리까지 있었다. 위패는 따로 없었으며, 산신령과 호랑이가 그려진 산신도(山神圖)가 제단 중앙에 세워져 있었다

양쪽 촛대에 꽂힌 초에 불을 붙이고 향을 핀 다음 초헌(初獻)을 올린다. 초헌은 제사를 지낼 때 신령(神靈)이나 신위(神位) 앞에 첫 번째 술잔을 올리는 일을 말한다. 마을 대표 한 분이 중앙에 무릎을 꿇고 앉아 술잔을 들고 옆에서 따라주는 술을 받은 후 신위(神位: 죽은 이의 영혼이 있는 자리) 앞으로 잔을 올린 다음 절을 하였다.

초헌에 이어 독축(讀祝)을 하였다. 독축은 제사를 지낼 때 신령(神靈)에게 올리는 글인 축문(祝文)이나 제문(祭文)을 읽는 것을 말하는데, 보통 제관(祭官)이 미리 준비해온 축문을 큰 소리로 읽어나갔다. 축문은 보통 유세차(維歲次)로 시작하여 상향(尙饗)으로 끝나는데, ‘維歲次이 해의 차례는이란 뜻이고, ‘尙饗차린 것은 적지만 흠향(歆饗:신령이 제물을 받음)하시길 바랍니다라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유세차는 제사 지내는 날짜(연월일)’이고 상향은 준비한 음식 잘 드시라는 인사이다. 이번 쌍달리 산신제 축문은 현대식으로 작성하여 맨 처음 유세차에 해당하는 부분은 맨 마지막에 나오고, 마지막 상향에 해당하는 부분은 끝부분에 있었다.

축문을 끝내고 절을 올린 다음 바구니에 준비해온 얇은 종이를 꺼내 하나씩 불을 붙여가며 소지(燒紙: 제사를 지낼 때 신령에게 소원을 비는 뜻으로 희고 얇은 종이를 불살라서 공중으로 올리는 일 또는 그 종이)를 올렸다.

이사 을미생 김○○라고 쓰여 있는 종이에 불을 붙이고 큰 소리로 이사 을미생 김○○ 몸 건강하고 집안 편안하길 산신령께 비옵니다외치며 불에 타 줄어들고 있는 종이를 두 손 번갈아 가며 위로 올리면서 공중에 띄운다. 그리고 다른 종이를 꺼내 유학 ○○○ 올해 농사에 피해 없이 잘 짓고 집안 어르신 두루 강녕하길 비옵니다소원을 빌며 소지 올리기를 계속 반복하였다.

소지할 것이 많아서인지 산제당 밖에서도 소지를 올렸다. “유학 갑진생 유○○ 마을 일에 얼굴 좀 자주 볼 수 있게 해 주시길 비옵니다” “유학 기축생 박○○ 아들이 이번에는 꼭 취직하도록 비옵니다등등 집집마다 사연을 담아 준비한 종이가 없을 때까지 소지를 올렸다.

이들 소지는 산제사(山祭祀)[산신제(山神祭)]를 준비하는 이들이 마을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받아온 것이다. 여기에 쓰여 있는 내용 가운데 유학儒學으로, 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은 사람을 이르던 말인데 보통 일반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을미생기축생갑진생乙未生‧己丑生‧甲辰生尙饗으로, 태어난 해(연도)의 간지(干支)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는 해당하는 사람의 이름을 적은 것이다. 이런 소지를 집마다 돌아다니며 받는 가운데 마을의 단결과 화합을 이루는 바탕이 된다. 이런 산신제는 마을공동체를 단단하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소지가 끝나면 마지막으로 참여한 사람 모두가 합동으로 절을 올리며 제사를 마치게 된다. 제사를 마친 후에는 제사 지낸 술과 음식을 나눠 마시는 음복(飮福)을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산신제를 추진하는데 수고한 이에게 고맙다는 인사말도 하고 마을 사람들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산신제에서 이름이 나온 이는 마을 사람 대부분이었지만, 산신제에 직접 참석한 마을 사람은 여덟 명이었다. 다들 인상도 좋고 마을의 어려운 일을 마다하지 않고 솔선수범하는 분들이었다. 마을에 대한 애정이 깊지 않고서야 이런 일에 발 벗고 나서지 않았을 것이니 이런 분들이 있기에 산신제도 끊이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을 것이다. 대단한 분들이 아닐 수 없다. 그들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기념 촬영을 하였다. 그리고 남은 음식과 가져온 물건을 정리하며 내려갈 준비를 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먼저 내려가는 동안 나는 사람이 없는 산제당 사진 촬영을 하였다. 산제당 건물은 네모 모양의 나무기둥에 흙으로 벽을 쌓은 정사각형의 단칸 집이었다. 출입문은 중앙에서 양쪽으로 여는 여닫이로 하였으며, 지붕은 양철지붕으로 한가운데에 상투 모양을 하고 있었다. 안에는 정면 벽을 높은 제단으로 꾸미고 제단 중앙에 산신도를 걸어 놓았다.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단정한 느낌을 주었다.

중앙 정면에 세워져 있는 산신도는 혹시나 하여 산신제를 다 마치고 난 직후 누가 언제 제작한 산신도인지?’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특별한 기록이나 단서를 찾지 못하였다. 아무런 기록이 없었다.

산제당 앞 아래 평평한 곳으로 내려와 산제당을 올려 보니 산제당 모습이 한 점 포근하고 아담한 것은 물론 정갈해 보이기도 하였다. 더구나 토속적인 모습에 지난 6070년대 자주 보아왔던 건물 같아 추억이 되살아나 왠지 모르게 정이 갖다.

원래 이곳 산제당으로 오르는 길은 산제당 바로 아래 평평한 곳으로 이어지는 넓은 길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이 길로 다니지 않고 계곡 옆으로 있는 길 같지 않은 좁은 길을 통해 오르내리고 있다고 한다. 길 같지 않은 좁은 길은 비록 가깝긴 하지만 오르내리기 힘들고 위험하기도 하니 넓은 길이 복원되길 바란다.

올라온 길로 그대로 이제는 거꾸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은 올라가는 길보다 힘은 덜 들지만, 올라올 때보다 더 조심해야 한다. 흙이 무너지기 쉽고, 또 미끄러지기 쉽다. 인생이 그렇기도 하다. 힘들고 어려울 때는 다들 조심하지만 잘나가고 쉬울 때는 방심하기 쉽다. 산신제에 참가할 수 있었다고 좋아하고 만족만 할 것이 아니라 산신제가 제대로 알려질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들어보니 쌍달리 산신제도 예전 같지는 않다고 한다. 산신제에 관한 관심이나 참여도가 줄어들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한다. 그래도 쌍달리는 다른 마을과는 달리 산신제를 지키려는 분들이 많아 그나마 잘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쌍달리 산제당에서 산신제를 지내는 일을 지켜보면서 한편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왜 저분들은 알아주지도 않는 일을 이어오고 있는지, 막말로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무거운 짐을 들고 산을 오르고 남을 대신해서 산신령께 빌고, 더욱이 오늘날에는 산신령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호랑이도 없는 데 이리 애쓰는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역사를 전공하고 산제당에 관심 있는 나조차도 이런 생각을 하니 산제당이 무엇인지 관심조차 없는 일반인들은 어떻겠는가!

종교인, 특히 유일신을 믿는 종교인은 산신제를 미신(迷信)이라며 거부하거나 없어져야 할 대상으로 보기도 한다. 또 호랑이도 없는 요즘 세상에 산제당이 무슨 필요가 있냐며 반문하기도 한다. 그렇다. 아니 그럴 수 있다. 산신제는 미신의 행위이고 산제당은 가치 없는 건물일 수 있다. 그러나 되돌려 생각해 보면 산제당은 우리 조상이 지켜온 유산이고, 산신제 역시 우리 조상이 이어온 문화유산이다. 현재 공주시에서 치러지는 대대적인 행사이자 대표적인 산신제인 계룡산 산신제만 봐도 그렇다. 종교행사라기보다는 문화행사이다. 지역축제다. 이렇게 산제당과 산신제를 종교가 아닌 문화유산과 문화행사로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이제는 삼척동자(三尺童子: 철이 없는 어리석은 어린아이)도 훤히 안다. 우리 주변 산에 호랑이가 살지 않을뿐더러 산신령도 실존하는 인물이 아닌 상징적인 대상임을. 산제당을 찾아보고 산신제를 지낸다고 하여 종교적으로 산신을 믿는 게 아니다. 조상들이 대대로 해왔던 유산을 통해 우리 주변(마을) 사람들과 소통하고 그들과 함께 어울리며 서로 잘 되길 비는 것뿐이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기억과 추억을 더듬으며.

누가 뭐래도 우리 문화유산은 우리가 지켜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 민족, 우리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던 것이 점점 사라져가는 요즈음,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 하나라도 잊지 않고 기억하려는 마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이런 게 아닐까. 이게 사람으로서의 예의이자 도리(道理) 아닐까.

 

*다음에 <공주시 산제당 정리(2) 아하! 우리 곁에 이런 것도 있었구나, 산제당(山祭堂)>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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