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산제당 산신제(山神祭)는 언제 어떻게 지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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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산제당 산신제(山神祭)는 언제 어떻게 지낼까?
  • 인간 전병철
  • 승인 2024.06.10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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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기억, 추억! 이런 문화유산도 있었네! - 공주시 산제당 정리(5)

인간 전병철(작가)

 

마을에서 산신제는 언제 지낼까? 마을에서 산신제를 지내는 날짜는 마을마다 달랐다. 마을마다 내려오던 전통과 마을 사정에 따라 산신제를 지내는 날짜가 달랐다. 현재 공주지역에 남아 있는 것으로 파악된 47개 산제당에서 언제쯤 산신제가 치러지는지 날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데, 이들 날짜는 양력이 아닌 음력 날짜이다.

날짜를 살펴보면 대개 산신제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연말이나 새해가 시작되는 연초, 또는 농사를 시작하기 전이나 농사(추수)를 마친 뒤에 지내는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정월 대보름(음력 115)이나 그 전날인 114일에 산신제를 지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47개 마을 가운데 19개 마을이 이때 산신제를 지내고 있었다. 여기에 1월 초에 지내는 곳이 9개 마을을 합한 총 28개 마을이 정월에 지내고 있었다. 반 정도가 정월에 지내고 있는 셈이었다. 정월(1)은 처음 시작하는 달로서 한해를 계획하는 달이며, 정월 대보름은 새해 첫 보름달이 뜨는 달로써 농사의 시작을 의미하는 날이었다. 하여 농경사회였던 우리나라는 대개 대보름날을 전후로 하여 새해 운수를 점치며 마을의 평안과 풍요를 비는 제사를 지내는 등 다양한 행사를 해왔으며,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정월, 특히 정월 대보름쯤에 산신제를 지내고 있는 마을이 많았다.

또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가을 추수를 마친 뒤 마을마다 무사히 한해 농사를 마치게 된 것에 감사하며 다음 농사도 풍요롭게 되기를 기원하는 다양한 풍속을 이어왔는데, 음력 10월 초가 이때쯤이라 적잖은 마을에서 10월 초에 산신제를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연말에는 올 한해 무사함에 감사하고 내년에도 무사 안녕하기를 기원하는 풍속처럼 이때 산신제를 지내는 마을도 있었다. 또 일반 마을과 달리 음력 1월 그믐이나 2월 초순, 3월 중순에 산신제를 지내는 곳도 있었다.

한편 정해진 이들 날짜에 꼭 산신제가 치러지지만은 않았다.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나 부정(不淨) 타는 일이 발생하면 뒤로 연기하여 날짜를 새로 정해 산신제를 지냈다. 그리고 예전에는 봄과 가을, 주로 음력 1월과 10월 이렇게 1년에 2번 산신제를 지내는 곳이 더 있었으나, 세상이 변하면서 현재는 줄어들어 대부분 1년에 1번만 지내는 곳이 많아 현재 47개 마을 가운데 3개 마을 정도가 1년에 2번 지내고 있었다.

그러면 마을 산신제는 어떻게 지내왔을까? 산신제도 제사의 한 종류인 만큼 일반 제사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다만 산신제는 사람이 아닌 신(신령)에게 올리는 제사인 만큼 일반 제사보다 준비하는 과정이 엄격하고 조심해야 할 것이 많았다. 산신제를 지내는 절차는 크게 ‘제사 준비 – 제사 지내기 – 부대 행사’로 진행되었다.

먼저 산신제를 준비하기 위해 우선 마을 사람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비용을 마련하였다. 비용은 동계(洞契)나 마을 기금 등으로 충당하기도 하고, 집마다 형편에 따라 걷거나 풍물패가 풍을 치며 마을을 도는 가운데 집마다 찾아가 기부받는 방식 등으로 마련하였다. 예전에는 쌀 등 곡식을 걷기도 하였지만 요즘에는 대개 돈으로 걷어 비용을 마련한다.

그런 가운데 산신제를 지낼 역할을 정하고 특히 유사(有司)‧제관(祭官)‧축관(祝官) 등을 선정하였다. 유사는 제사 일을 맡아보고, 제관은 제사를 지내는 일을 담당하고, 제관은 축문(祝文)을 읽는 역할을 하였는데, 제관은 집마다 돌아가며 맡기도 하였다. 이들 유사와 제관 및 축관은 생기복덕(生氣福德: 그날의 운수를 알아보는 방법의 하나)과 천의(天意: 하늘의 뜻이나 기운)를 따져 선정하였는데 좋지 않은 일이나 초상(初喪), 출산(出産) 등의 부정(不淨)을 겪지 않은 사람, 임산부가 없는 집, 부인이 생리 중이지 않은 사람 가운데 뽑았다. 하지만 마을에 인구가 줄어드는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생기복덕과 천의를 따지기 어려워 요즘에는 엄격하게 따지지 않는 편이다. 아예 따지지 않고 유사제관축관을 선정하기도 하며, 이장이나 마을 대표 몇몇이 대신하기도 한다.

유사나 제관, 축관으로 뽑히면 이들은 근신 생활을 해야 한다. 특히 제관은 3일(또는 1주일, 10일) 동안 집 주위에 금줄을 치고 부정한 사람이 들어갈 수 없게 하면서 외출을 자제하고 함부로 살생하지 않으며, 초상집에 가지 않는 것은 물론 집안 제사에도 참여하지 않아야 한다. 또 부부간 동침(同寢)도 금하는 등 부정(不淨)을 타지 않도록 근신(謹身)한다. 심지어 마을에 따라서는 주민 전체가 근신하기도 하는데 마음을 항상 정갈하게 하여 부정한 말은 하지도 듣지도 않고 험담과 싸움은 금하며 술과 담배는 물로 고기와 생선은 먹지 않고 음식을 먹을 때는 입을 가리고 아이들에게 꾸지람조차 하지 않는 등 피하고 조심할 금기(禁忌) 사항을 지켜야 했다. 만약 부정이 타면 정해진 제사 날짜를 연기하게 된다.

이 같은 금기 사항은 아무래도 지키기 쉽지 않아 요즘에는 줄이거나 완화하여 마을에 따라서는 제사 지내는 당일만 조심하고 제사에 참여하기도 하고 크게 부정한 일이 아니면 무시하고 제사에 참여하기도 한다. 다만 여자는 제관이 될 수 없을뿐더러 산제당에 갈 수 없었으며 음식을 조리하는 일에나 참여할 수 있었다. 요즘까지도 여전히 여자는 산신제에서 음식을 장만하고 조리하는 일로만 참여하고 있는데 산신은 원래 여성이었으나 유교 영향으로 남성으로 대체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또 산신령 가운데 여성(할머니, 아줌마)이나 부부 산신령도 적잖게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앞으로 산신제를 지내는 과정에서 무시당하고 있는 여성의 위치나 역할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는 산제당이나 마을 청소를 해야 했다. 산제당 청소는 대체로 선정된 제관이 제사 당일 청소하였는데 제관이 청소하지 않고 마을에서 총각인 남자들이 청소하는 곳도 있었으며 마을 사정에 따라 마을 주민이 청소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산제당 청소 외에 주민 전체가 마을 곳곳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곳도 있었다.

또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는 제사에 올린 음식인 제물(祭物)이나 음식을 장만해야 했다. 대개 제관이 제물이나 음식을 준비하였는데 특별히 공양주(供養主: 음식을 담당하는 사람)나 제주(祭主: 제물을 담당하는 사람)를 선정하여 제물을 마련하고 음식을 담당하게 하는 마을도 있었다. 마을에 따라서는 제물을 옮기는 짐꾼을 따로 선정하는 곳도 있었다.

제물은 보통 제사를 지내는 당일에 장만하였는데 무엇보다 신선하고 가장 좋은 물건으로 고르고, 직접 재배한 것이 아닌 것으로 하고 구입할 때에는 값은 부르는 대로 깎지 않고 사야 했다. 음식은 술, 메(밥)와 탕 또는 국, 과일(대추‧밤‧감) 생선(북어포‧명태), 다시마, 나물, 육전(산적), 고기(돼지고기‧소고기) 등을 올렸는데 마을마다 제사상을 차리는 규모나 종류가 달랐다. 기록을 보면 과일로는 대추‧밤‧감(곶감)만 보이는데 이는 산신제를 지내는 시기와 과일 출하 시기 및 저장문제로 예전 산제사에서는 대추‧밤‧감만 등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요즘에는 저장문제가 없고 또 출하 시기도 다양해져서 그런지 대추‧밤‧감 이외에 사과‧배 등을 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음식 조리는 산신당에 가서 직접 조리하였는데 산제당에 조리할 곳이 없거나 충분하지 않은 곳은 미리 만들어 갔다. 마을에 따라 돼지머리를 준비하거나 돼지 1마리를 통째로 제물로 올리는 곳이 있는가 하면 황소 1마리를 잡아 제사를 지내는 곳도 있는데 수컷 돼지나 소를 산제당으로 끌고 올라가 그곳에서 잡아 올렸다. 요즘에는 미리 잡아 올라가기도 한다. 요즘과 달리 고기 먹을 기회가 많지 않던 예전에는 산신제를 통해 고기를 먹을 수 있어 산신제는 복을 빌며 귀한 고기도 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였다.

제사 때 사용할 축문을 미리 작성하고 소지(燒紙)를 미리 준비하였다. 축문(祝文)은 신령(神靈)에게 올리는 글로 보통 유세차(維歲次)로 시작하여 상향(尙饗)으로 끝나는데, ‘維歲次’는 ‘이 해의 제사는’이란 뜻이고, ‘尙饗’은 ‘차린 것은 적지만 흠향(歆饗:신령이 제물을 받음)하시길 바랍니다’라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유세차는 ‘제사 지내는 날짜(연월일)’이고 상향은 ‘준비한 음식 잘 드시라’는 인사이다.

이런 축문을 통해 산신에게 부탁하거나 바라는 것을 알렸다. 축문은 학식이 있는 이가 해마다 작성하였으나 요즘에는 예전에 작성한 것을 날짜만 바꿔 사용하기도 한다. 소지는 제사를 지낼 때 신령에게 소원을 비는 뜻으로 희고 얇은 종이[한지(韓紙)]를 불살라서 공중으로 올리는 일 또는 그 종이를 말한다. 주민들로부터 일일이 신청을 받아 해당 이름을 종이에 적어 미리 준비해 둔다.

이런 일들이 모두 잘 진행되면 산제당에 올라가 제사를 지낸다. 제관과 축관 등은 아침‧저녁 또는 매일 찬물로 목욕재계(沐浴齋戒)하여 몸을 깨끗이 한 상태로 제사에 참여하며, 옷은 흰색 두루마기로 의관을 갖춰 참여하는 마을이 있는가 하면 의관을 갖추지 않고 일상복을 입고 지내는 마을도 있다. 제사를 지내는 시간은 마을마다 달라 한밤중에 제사를 지내며 다음 날 아침 닭이 울면 내려오는가 하면 저녁에 올라가 한밤 자정쯤에 내려오는 곳이 있는 등 다양하다. 요즘에는 적당한 시간을 정해 낮에 지내는 곳도 있다.

산제당에는 남자들만 올라갈 수 있고 여자들은 갈 수 없었다. 심지어 마을 주민도 산제당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선정된 제관이나 관계자만 들어갔는데 요즘에는 마을 사정에 따라 마을 주민이면 누구나 산신당에 올라가 함께 제사를 지내는 마을도 있고, 방문객까지 산제당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는 마을도 있다.

제사 순서는 대체로 ‘진설 – 분향 – 재배 - 초헌 - 독축 – 재배 - (아헌 – 종헌) – 소지 – (재배) - 음복’ 순으로 진행한다. 하지만 아헌이나 종헌 없이 초헌만 하는 곳도 있어 마을마다 조금씩 다르게 지내기도 한다. 또 소지를 마치고 모두 다 함께 재배하는 것으로 제사를 마무리하기도 한다.

소지는 동계(洞契)에서 주관하는 것이면 전체 계원(契員)의 소지를 각각 올리는데 만약 동계에 들지 않은 이는 별도의 기부금을 내야 소지를 올린다. 만약 마을에서 주관하는 것이면 주민 가운데 희망자를 받아 소지를 올린다.

이 같은 제사를 모두 마치면 부대 행사를 하곤 한다. 제사를 마치고 제물 가운데 일부를 남겨두고 나머지는 가지고 내려와(다음날 음식을 가져오는 곳도 있다) 음복하며 음식을 나눠 먹는가 하면 풍물을 치며 집마다 돌면서 액막이를 하거나 친목 및 화합 행사를 한다. 마을에 따라서는 가져온 제물을 돈을 내고 가져가기도 하는 곳도 있다.

산신제를 마치고 이어서 거리제[노제(路祭)]를 비롯한 장승제, 괴목제(槐木祭), 당산제(堂山祭), 이문제[里門祭: 마을을 보호하고 침입자를 단속하기 위해 마을 입구에 세운 출입문에서 지내는 제사), 여제[厲祭: 불운하게 죽었거나 제사를 지내 줄 후손이 없어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고 알려진 여귀(厲鬼)를 위로하는 제사], 탑제(塔祭) 등 다른 동제(洞祭)를 지내는 마을도 있다. 요즘에는 산신제와 거리제 등을 따로 지내지 않고 산신제를 지낸 후 이어서 거리제 등을 지내는 마을이 늘어나고 있는 편이다. 아예 산신제와 거리제 등을 한 번에 한 곳에서 지내는 마을도 늘어나고 있다.

제사를 지내는 절차는 사람마다 집안마다 문중마다 마을마다 다르고 지역마다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 사실 딱 정해진 절차가 있는 게 아니다. 절차보다 중요한 것은 제사를 지내는 사람의 마음이나 마음가짐일 것이다. 맑고 밝은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지내면 된다. 제사에 올리는 음식도 마찬가지다. 무엇은 올리고 무엇은 올려서는 안 되며, 어떤 것은 어디에 놓 아야 한다는 등 말이 많기도 하지만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왜 제사를 지내는지, 제사를 지내는 근본 의도는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 의도에 맞게 지내면 된다.

산신에게 지내는 제사는 다른 제사와 비교하여 지켜야 할 게 많고 금기 사항이 많았다. 그때는 그렇게 하는 게 옳은 줄 알고 그리 지냈다. 그러나 세상이 변한 요즘에도 그대로 지킬 필요가 있을까 싶다. 남자만 사람으로 여기고 여자를 무시하였던 문화는 그 당시(특히 서양 중세와 우리나라 조선 시대) 사회 유지를 위해 형성된 문화였다. 지금은 세상이 바뀌어 남자와 여자를 불문하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다. 세상이 변한만큼 요즘에 걸맞은 문화, 제사도 바뀌어야 할 것이다. 제사를 지내는 근본 의도를 밑바탕으로 우리 시대에 어울리는 산제사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과거 유산이라고 하여 무조건 버릴 것이 아니다. 과거 유산은 어쩌면 현재 우리의 뿌리이기도 하다. 뿌리를 아예 뽑아버리면 현재 우리의 존재 의미도 없어진다. 그렇다고 과거 유산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이미 세상이 변하고 나는 과거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거 유산을 재창조할 수밖에 없다. 과거 조상들의 삶을 본받으면서 오늘날 우리들의 삶을 가꾸면 더 풍부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무릇 세상은 변하는 법이다. 사람도 변하고 문화도 변하고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한다. 이번 일을 계기로 산제당에 관한 많은 대화가 이루어지길 바란다. 특히 역사문화도시로 일컬어지는 공주에서는.

 

*다음에 <공주시 산제당 정리(6) 끈끈히 이어지고 있었구나, 사곡면 운암1리 산제당 산신제(山神祭)>이어집니다.

*추신: 지면 관계상 <공주시 마을 산제당‧산신당‧산신각‧산제각∙산령각∙산제단 현황> 목록은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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