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순의 영화이야기=『참새들의 합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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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순의 영화이야기=『참새들의 합창』
  • 박명순작가
  • 승인 2020.11.27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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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나무는 물이 흐른다
▲ 참새들의 합창중에서 사진=블로그 아이스커피에서
▲ 참새들의 합창중에서 사진=블로그 아이스커피에서

 

산문집 아버지 나무는 물이 흐른다(천년의 시작)를 출간했다.

 

품었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낸 것뿐인데 새로운 사건인양 설레임과 쑥쓰러움의 감정이 교차한다. 한 편씩 연재했던 글과는 질감이 다른 책의 표정을 실감하는 것이다. 특히 제목이 낯설고 어색하다.

오랫동안 생각했던 제목은 아버지의 집이었다.

정선원 선생님이 공주중학교 분회장을 맡았을 때, 상담프로그램 진행과정에서 그림으로 그렸던 어린 시절의 집이 그 모태가 되었다. 도랑을 메워 만든 납작한 집.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집에서 살았다는 자격지심을 오랫동안 키워놓은 집. 그 집을 그리면서 내 마음이 촉촉한 그리움으로 피어나고 있었으니. 굳게 잠긴 유년의 빗장이 풀리는 소리였다. 가겟집의 소란스러움과 8남매의 꼬물거림이 치부가 아닌 치열한 삶의 현장일 뿐이라는 담담함으로 천장이 낮은 그 집으로 접어두었던 발걸음을 성큼 옮겼다.

그 집에는 굴뚝을 오가는 구렁이가 있었고 변소의 몽당빗자루를 휘두르며 피부병을 치료해주던 할머니의 손길이 남아 있었다. 그랬다. 기억의 바탕에 온돌의 따스함으로 잔존하는 그 할머니를 기억 속에서 잊고 살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세상을 떠나신지 15년이 흘렀을까.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세월인데 까마득하게 할머니를 잊고 살았던 것이다.

유년을 집필하면서 망각과 기억의 언저리에 아슴아슴 걸쳐있는 사연들이 삐죽삐죽 솟아나기 시작했다.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건 역시 할머니의 얼굴이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 과정에서 아버지라는 캐릭터가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할머니는 편애가 심했다. 아버지와 남동생만 위하고 나에게는 가사노동만 종용하면서 구박하기 일쑤였다. 여자는 살림 잘 하고 큰소리 내지 않고 가장에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았다. 당신의 아들에게 대놓고 의견을 내세우지 않았지만 맏딸을 살림밑천 삼지 않고 학교에 보내는 걸 못마땅해 하셨나 보다.

기집애가 공부를 해서 뭐하려구?”

숙제에 정신이 팔려 애기 울음소리를 듣지 못해 지청구를 먹기 일쑤였다.(나는 8남매의 맏딸이었다.)

이 망할 년아. 판사가 될래? 검사가 될래?

나는 숙제하던 공책에 엎어져서 펑펑 울었다. 저녁을 먹지 않는 것으로 나의 시위는 막을 내렸지만 할머니에 대한 원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의 분심(忿心)으로 오랜 세월 책에 매달렸는지도 모르겠다.

할머니를 생각하면, 성차별의 섭섭함으로 눈물겨운 기억이 많다. 하지만 그 서러움을 덮고도 남을 무한한 사랑의 영감(靈感)으로 흐르는 정을 주신 분이다. 내가 쓰고 싶었던 이야기의 뿌리가 할머니에서 비롯되었듯이 진짜 내 가슴속 맺힌 이야기는 새롭게 풀어내야 함을 안다. 그 이야기가 지닌 힘은 가슴속 DNA 언저리까지 나를 이끌어 갈 것임을 믿는다. 연암 박지원이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마다 형의 얼굴을 물에 비추어 보았듯이 나는 할머니의 잔상을 아버지에게서 만난다. 그러니까아버지나무는 물이 흐른다는 나에게 할머니를 부르기 위한 서곡과 같은 의미가 있다.

이 땅에서 여자로 태어나 차별받던 서러움의 흉터가 승화된 아름다움이 되기를 오래도록 꿈꿔왔다. 그러다가 이제금 현실에 발을 딛게 된 것일까? 언제부터였나, 흉터가 문신으로 변신했노라고 새롭게 다짐한다. 성차별의 언행을 일삼던 할머니와 아버지는 당대의 도덕성으로 경우 바른 생을 살았던 어른이었음을 깨달은 게 스스로 대견할 뿐이다. 그렇게 평범한 삶에 담긴 딱 그만큼의 품격을 그려내고 싶었다. 야생과 위악이 있을지언정 위선의 덫에 빠지지 않도록, 남루함에서 묻어나는 인간미를 담고 싶었던 것이다.

영화 천국의 아이들로 유명한 마지드 마지디 감독의 참새들의 합창에서 그려지는 아이들의 모습은 6-70년대 나의 유년기와 닮았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모습과 돈을 벌고 싶어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특히 그렇다. 가족을 위해서 쉴 틈 없이 일하는 가장의 무게와 고독감, 게다가 폭언과 폭력의 모습까지 사실적으로 와 닿았다. 줄거리는 아래와 같다.

2008년 개봉 당시 이란 사회를 담은 작은 도시와 농촌을 배경으로 영화가 전개된다. 타조농장에서 일하는 가장을 의지하며 가난하지만 오순도순 살아가는 가족들이 등장한다. 큰딸이 보청기를 잃어버리게 되어 아버지의 근심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설상가상 아버지는 탈출한 타조 때문에 해고를 당하자, 틈만 나면 타조의 탈을 쓰고 타조를 찾아 나선다. 이제 가난은 생계의 위협을 받는 비참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아버지는 도시까지 출퇴근을 하며 돈을 버는 다양한 방법을 터득하고자 기웃거린다. 그 와중에 엄마와 딸은 생활비에 보태고자 몰래 꽃을 판매하다가 아버지에게 매를 맞는다. 아이들은 집 근처 쓰레기 웅덩이를 치워 그곳에 물고기를 키워 돈을 벌겠다는 계획을 세우지만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마침내 돈을 모아 드디어 치어 10만 마리를 사서 돌아오는 마지막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다.

그 마음을 안다. 나 역시 돈을 벌기 위해서 무엇이든 했다. 아버지의 어깨를 덜어주고 싶고 배고프지 않게 살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봉투를 부쳐서 돈을 벌겠다고 팔을 벗어 부쳤고 남동생은 신문배달을 시도했다. 딱지치기를 잘 해 딱지를 많이 모으면 땔감을 사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여 한 상자를 따서 가마솥 아궁이에 지핀 적도 있었다. 그 한 상자의 딱지가 불길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태워질 때 한 장의 딱지를 넘기기 위해 힘쓰던 그 순간들이 눈물겹게 허무했다.

영화의 소년 역시 화분 나르는 일을 닥치는 대로 하면서 1년 동안 돈을 모았다. 아버지가 물고기를 키우겠다는 계획에 반대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모은 돈으로 드디어 이들은 치어를 마련한다. 치어와 함께 트럭의 짐칸에서 희망에 부푼 가슴으로 집을 향하는 길이 마지막 장면이다.

청명한 하늘아래 치어를 담은 비닐이 터지면서.

이들의 꿈은 산산조각이 난다. 숨을 할딱이는 치어들을 살려보겠다고 바둥대며 손톱에 피멍이 맺히도록 길가 작은 웅덩이의 흙을 파며 가능성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결국 힘겹게 도랑에 놓아주는 것으로 이들의 꿈은 강물을 따라 멀리멀리 떠나 가버렸다. 일 년의 고생이 날아가는 순간, 한 마리라도 더 살리겠다고 맨발로 자갈길을 가로지르는 아이들을 카메라는 숨가쁘게 담아낸다. 이란의 가난한 아이들이 강물의 물고기와 한몸이 되는 순간이다. 이 아이들이 가난에 주눅 들지 않고, 생명을 키워내는 어른으로 성장하리라는 희망이 잔잔한 음악으로 흐른다.

트럭 짐칸에서 울먹이는 아이들을 위해 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는다. 물고기를 키우겠다는 꿈을 위해 쏟았던 아이들의 노력과 실패가 비로소 아버지의 아픔으로 되는 시간. 견뎌야 하는 시간의 무게를 덜어 줄 수 있는 말이 없음을 절감하는 아버지. 아버지의 마음은 노래가 된다. 느릿느릿 아버지가 부르는 노래는 상투적 훈계나 위로와는 거리가 멀다. 마침내 눈물범벅의 아이들이 아버지와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영화 참새들의 합창은 막을 내린다.

죽은 줄 알았던 베란다의 벤자민이 살아났다.

겨울 내내 하얗게 말라가는 모습이 안쓰러웠지만 수명이 다 되었는가 보다여겼을 뿐 살려야겠다는 정성을 기울이지 않았다. 같은 아파트에서 10년째 살았지만 화초에는 세심한 눈길을 보내지 못한 채 바쁘게 지내왔다. 게으름으로 베란다에서 치우지 못한 채 가끔 물을 주며 애도의 눈길을 보냈던 나무에서 새순이 한 개 피어났다.

죽은 나무에서 새싹이?’

놀라움과 미안함으로 나의 눈길에 응원이 담기기 시작했다. 다시 살아난 나무의 힘은 어디에 있었을까. 나무의 몸 어딘가 흐르고 있던 한 방울 물기에서 시초된 게 아니었을까?

 

(2008 제작, 이란, 마지드 마지디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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