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순의 영화이야기=자전거 도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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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순의 영화이야기=자전거 도둑
  • 박명순 작가
  • 승인 2021.01.03 09:4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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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자존감
▲영화 자전거 도둑 사진=네이버 영화
▲영화 자전거 도둑 사진=네이버 영화

 

1930년대 로마의 대공황 시기자전거 도둑의 아버지는 70년대 조치원에서 8남매를 교육시키려고 분투했던 나의 아버지와 겹쳐진다. 영화 속의 가난은 아버지의 자존심과 아들의 눈빛이 공평하게 빛나도록 배려했다. 그 흔들리지 않는 균형 감각이 오래도록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것이다. 아버지의 자존심과 아들의 믿음. 가난 속에서도 맑게 빛나는 아들의 눈빛은 삶의 자존감을 증명한다.

어린 시절 나의 눈빛은 총명함 대신 반항심이, 맑음 대신 분노가 담겼을 것 같다. 가난이 주는 서러움과 사회적 냉대에 유독 예민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아버지는 매사 자신만만했다. 가난을 극복했다는 자부심이 남달랐고 그 당당함으로 자식교육이라는 목표를 향해 매진했다. 아버지가 동시대의 아버지보다 특별했던 건 자식교육에 딸도 포함했다는 점이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존경했지만 배움이 부족한 아버지를 무시한 적도 많았다.

어른이 된 이후 아버지의 삶 전체를 존중하는 가치관을 지닐 수 있었던 건 온전히 당신의 교육열 덕분이었다. 대학졸업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수직적 인간관계와 차별적 세계관을 넘어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배움의 의미가 출세를 위한 수단이나 비교우위에 서기 위함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소중하게 가슴에 간직할 수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으리라.

▲자전거 도둑 포스터 사진=네이버 영화
▲자전거 도둑 포스터 사진=네이버 영화

 

피부가 거뭇하고 목소리가 크신, 늘 당당해서 건장하게 여겼던 아버지를 지키고 싶었던 간절한 순간이 어린 시절에도 있었다. 시장바닥에서 김과 미역을 팔던 아버지의 리어카 위에 차려놓은 물건이 발길질 한 방에 팽개쳐지는 행패를 당했다는 말을 전해들은 직후였다. 가해자는 아버지의 아들뻘 어린 사내였다. 엄마는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오래도록 억울함을 하소연했지만 아버지는 원망도, 분노도 보이지 않았다. 사장 아들과 가까운 사람에게 넘기려고 아버지 자리를 뺏은 것을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아버지가 약자였구나, 힘센 사람들에게 치이면서, 아등바등 버는 돈으로 쌀을 사고 학비를 만들었구나.’

처음으로 아버지의 사회적 지위를 직시하며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다.

 

그래서일까? 흑백영화의 영상미는 깊고 그윽하다. 특히 오래된 영화에서는 고성(古城)을 거니는 듯한 신비로움이 느껴질 때가 있다. 어두운 숲에서 만나는 원초적 풍경의 얼굴들에는 저마다의 우수가 연민을 자아낸다. 흑백의 명암이 만들어내는 인간의 표정은 단순한 만큼 정직함이 녹아 있는 것이다. 특히 로마의 뒷골목에 새겨진 군상의 가난한 현실은 시대의 거울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들이 지닌 삶의 무게는 온전히 배고픔과 싸워야 살아남는 본능을 자극하는 것이다. 때로는 도덕과 양심의 저울추가 빈곤의 고통에 짓눌릴 수밖에 없음을 일깨운다고 할까.

자전거 도둑에서 만난 아버지 안토니오(람베르토 마지오라니)의 표정에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이 삶의 전부였다. 피곤함을 담은 눈빛이 숲에서 만난 그늘처럼 그윽하게 다가왔다. 영화에 나오는 배우는 모두 기성연기인이 아니라 노동자나 거리의 소년을 캐스팅했다 하니 독특한 발상이다. 세트장을 이용하지 않고 실제 거리를 촬영한 것도, 핍진성을 높이기 위한 감독의 연출 기획이다.

2차 대전 직후 로마에는 전쟁의 여파로 실업자들이 넘쳐난다. 안토니오 역시 오랜 실직상태로 일자리가 필요하다. 그가 구한 일은 포스터를 붙이는 일로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전거가 꼭 필요하다. 집안의 이불까지 가져다 팔아 간신히 자전거를 구한 안토니오는 겨우 일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모퉁이에 세워둔 자전거를 도둑맞는다. 경찰에 신고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다. 허둥지둥 자전거 가게들을 찾아다니다 어느 젊은이가 자신의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을 보고 쫓아갔으나 증거가 없다. 자전거를 찾는 건 불가능해지면서 절망에 빠진 안토니오는 자전거를 훔칠 궁리를 한다. 아들 브루노를 집으로 보내고 마침내 자전거를 훔쳐 달아나는 것이다. 그러나 주인에게 들켜서 추격전이 벌어지다가 군중들에 포위된다. 옷은 헤쳐 풀어지고, 모자가 바닥에 짓밟힌다. 이 와중에 브루노는 모자를 집어 소중히 품에 안고 슬며시 아버지에게 다가와 손을 잡는다. 탐욕이나 부도덕함이 아닌 생활고로 짓밟히는 아버지의 자존감을 끌어안는다.

자전거 주인은 안토니오를 끌고 가는 경찰을 제지한다.

괜찮네, 돌려보내게.”

와글대는 군중들에 둘러싸인 채, 경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는데, 자전거 주인은 이들 부자를 향해 호의를 보낸다.

자식 교육 잘 시킨 덕인 줄 알게.”

혼이 빠진 듯, 시종일관 무표정하게 있던 안토니오는 모자를 쓰고 걸음을 옮긴다. 브루노는 아버지의 손을 놓지 않는다. 안토니오의 눈에서 소리 없이 흐르던 눈물이 어느 결에 얼굴에 범벅이 되고 마침내 오열이 되어 폭발한다. 카메라는 오래도록 아버지와 아들의 뒷모습을 롱샷으로 담아낸다.

흑백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가슴으로 아로새겨지는 파문의 의미는 명징하다. 아버지의 눈물방울과 오열에 담긴, 가난의 서러움과 알몸으로 땅바닥에 뒹구는, 자존심을 끝내 포기하지 않고 일으켜 세우겠다는 나레이션이 들려오는 것 같다. 아들과 손을 맞잡고 걸어가는 이들의 뒷모습을 비추는 카메라는 무한한 지지를 보내고 있다. 아들은 아픔을 먹은 만치 든든하게 성장할 것이다. 아버지의 고단함과 함께하는 자녀의 성장을 다룬 영화들, 이를테면, 아이 엠 샘, 인생은 아름다워, 참새들의 합창의 여운과 겹쳐지는 이유는 가족이 성장의 아픔이자 자존감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8남매를 교육시키며 장돌뱅이 행상을 했었던 나의 아버지 또한.

(1945 제작, 이탈리아,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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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화 2022-03-12 10:15:56
보았던 영화지만, 놓쳤던 부분들을 떠올리게 하면서 그 영화를 다시 보고 싶게 만드네요.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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