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우리 학교, 공주여자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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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우리 학교, 공주여자중학교
  • 공주여자중학교 3학년 박서진, 박정민
  • 승인 2021.02.05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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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여자중학교 3학년 박서진, 박정민


우리 학교의 생일

▲ 여고에서 지금 우리 학교로 이사를 하던 날 떠나는 중학생이 고별사를 하고 있다. 사진=공주여자중학교
▲ 여고에서 지금 우리 학교로 이사를 하던 날 떠나는 중학생이 고별사를 하고 있다. 사진=공주여자중학교

저희는 우리 공주여자중학교에 대해 써보기로 했어요.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우리 학교의 주소를 모르는 친구들도 많을 거라고 생각해서 먼저 주소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공주여중의 주소는 공주시 용당길 54’입니다. 옛 주소는 교동이고요, 조사해보니 처음엔 우리 학교가 공주여고와 함께 있었는데 197791일에 분리가 되었어요. 여고와 여중의 합체 형태로 처음 세워졌을 때 우리 학교의 이름은 공주고등여학교였어요. 그때가 192851일이니까 일제강점기였죠. 그래서 우리 학교의 개교기념일이 51일이에요. 정말 먼 옛날이야기죠. 지금 우리가 쓰는 이 글도 100년 뒤엔 조상님의 글이 되겠죠? 그래서 다음 사항을 써둡니다. 우리 학교는 지금 (2020) 개별실을 포함하여 20개 학급이 있어요. 학생은 544, 선생님은 48명이에요. 공주 시내에선 가장 큰 학교예요.

▲공주여중 이사 풍경(1979년 7월). 제민천 전시 사진=공주여자중학교
▲공주여중 이사 풍경(1979년 7월). 제민천 전시 사진=공주여자중학교

이사 가는 학교

공주여중 이사 풍경(19797). 제민천 전시 사진

이곳에서 공주여중이 시작된 해는 197972일이에요. 노재경 선생님께서 중학교 3학년 때 여고에서 지금 우리 학교 자리로 이사를 하셨대요. 제민천에 가면 여중 학생들이 책상과 의자를 들고 길게 줄지어서 이사를 하는 사진이 걸려 있어요. 찾을 순 없지만, 이 속에 노재경 선생님도 계시겠지요.

노재경 선생님께 우리 학교 이야기를 듣기 위해 국어 선생님과 함께 진로상담실로 찾아갔어요. 공주여자중학교를 졸업하고, 그 학교의 선생님이 되기까지 긴 시간을 공주와 함께 하신 노재경 진로 상담 선생님을 만나 뵈었어요. 선생님께서는 따뜻한 차를 주셨고 학생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얼마나 재미있는지 시간 가는 줄을 몰랐어요. 어떻게 그 많은 것을 기억하고 계신지 신기했어요.

학교가 이사를 하는 것도 신기한데 이삿짐을 학생들이 나르다니 우리로선 정말 경험하기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이사하는 날, 여고에서 환송식을 해주었고 여중생들은 각자 자기 책상과 의자를 들고 여중까지 걸어갔다고 해요. 사진에 보이는 교련복을 입은 언니들은 공주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이에요. 중학생들이 혼자 짐을 나르기가 어려우니까 여고의 1학년 1반 학생들이 여중의 1학년 1반 학생들 짐 나르기를 도와주는 방식으로 함께 이사를 했답니다. 선생님 말씀으론 여고 앞 뽕나무밭을 지나서 공주고를 지나 제민천 가의 흙길을 따라 쭉 내려오셨대요. 그땐 한 반에 70명 정도의 학생들이 있었고 한 학년이 6개 반이었어요. 그 먼 길을 1200여 명의 여중 학생들과 또 그 숫자와 같은 여고생들이 줄을 지어 갔으니 끝도 없는 행렬이었겠지요. 사진을 자세히 보면 제민천에서 빨래를 하는 아주머니가 이사를 구경하는 모습이 보여요. 아이들도 흔히 멱을 감고 놀았다니 제민천이 얼마나 깨끗했는지 알겠어요.

▲교동 마을 농악대가 마중 나와 행렬의 맨 앞에서 풍물을 치면서 환영해 주고있다. 사진=공주여자중학교
▲교동 마을 농악대가 마중 나와 행렬의 맨 앞에서 풍물을 치면서 환영해 주고있다. 사진=공주여자중학교

특히 재미있던 것은 여중이 있는 교동 마을의 농악대가 마중 나와 행렬의 맨 앞에서 풍물을 치면서 인도를 해주셨다는 말씀이었어요. 그런데 막상 여중에 도착하자 학생들을 맞이한 건 허허벌판의 무덤들과 학교 아래 개망초가 우거진 교도소(당시는 형무소라 칭함)의 폐허였어요. 교도소는 옮겨 갔지만, 건물은 그대로 남아있어 학생들은 교도소의 높은 담벼락을 따라 언덕을 올랐어요. 그땐 교도소의 사택으로 쓰이던 일본식 건물 하나 말고는 학교에서 산성시장까지 집이 하나도 없었대요. 학생들은 피곤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는데 농악대가 계속 풍물을 치면서 운동장을 몇 바퀴 돌아주고 마을 주민들이 기다리고 계시다가 환영사도 읽어주시고 하니까 좀 낫더라고 하셨어요.

운동장의 돌 줍기, 콩밭 매기

교동의 여중으로 이사 온 학생들은 체육 시간마다 운동장의 돌을 주워낸 뒤 수업을 했어요. 이 세상의 모든 돌은 다 여중 운동장에 모여있는 것 같지 않았을까요? 이사 오고 곧바로 지금 예지관 있는 자리 뒤편에 콩을 심어서 여름방학이 되자 학교에 나와 콩밭의 풀을 뽑았다고 해요. 조선 시대의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그 일이 하나도 어렵지 않았대요. 왜냐하면, 새 학교로 이사 오기 전엔 방학 때 우금티 전적지의 풀도 뽑으러 갔기 때문에 그것에 비하면 학교 콩밭 매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는 거예요. 선생님은 중학교 때 충남과학고가 있는 반포면 마암리에 사셨는데 방학이 되면 통학버스를 운행하지 않았다고 해요. 시골은 버스도 하루에 몇 대밖에 들어오지 않아서 우금티에 9시까지 도착하려면 새벽에 일어나서 걸어가야 했어요. 아침 6시에 마을 아이들과 모여서 출발하고 세 시간을 걸어 우금티에 도착했는데 풀 뽑기는 30분도 채 안 되어 끝났대요. 그렇게 3일이나 우금티 고개까지 걸어 다닌 거예요.

새벽부터 걸어간 보람이 있어야 하는데, 우린 풀 뽑기가 특기인데 말이지.”

선생님은 지금도 아쉽다는 표정이셨어요.(인터뷰가 이렇게 재미있는 것인 줄 모르고 긴장만 했어요.) 그러다가 학교 콩밭을 매는 일을 하니 그건 일도 아니었대요. 통학버스 이야기가 나오자 국어 선생님과 진로 상담 선생님이 웃음을 참지 못하셨어요. 두 분의 경험이 똑같았어요. 안 그래도 복잡한 버스가 장날이 되면 장에 가는 어른들과 보따리, 광주리까지 실려 미어터졌다고 해요. 키 작은 초등학생은 그 틈에서 숨도 못 쉬고 울음을 터뜨리고 여기 애 죽어유!”하고 어른들이 소리치고 기사 아저씨는 차를 앞뒤로 흔들어서 승객들을 강제로 밀착시키는 방법으로 공간을 만들어냈어요. 의자는 사람이 앉는 자리가 아니고 창문으로 던진 가방을 산더미처럼 쌓는 곳이었고 그땐 표를 받는 차장이라는 직업이 있었는데 차장은 거의 문에 매달려서 갔어요. 그런 버스에 사람뿐 아니라 닭도 탔다니 동남아 영화 같아요.

우린 우리 학교의 규칙이 엄하다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이 중학생일 때의 규칙은 거의 군대 수준인 것 같아요. 특히 여고와 함께 있을 때 등교하면 여고의 선도부 언니들이 교문에 서서 복장 단속을 했기 때문에 중학생들은 아침마다 쫄아서 교문을 지나가곤 했어요. 머리는 귀밑 2센티, 단발머리만 할 수 있었어요. 엄마가 자주 깎아주기 힘드시니까 바짝 잘라서 머리카락이 얼굴 반밖에 안 되는 아이들이 많았어요. 귓불이 보일 정도로 머리를 잘랐죠. 애교머리가 나오지 않게 항상 핀을 착용해서 이마를 반듯하게 드러내야 했고요, 애교머리를 몇 가닥 빼는, 그것이 최선의 멋 부리기였어요. 가르마를 반대로 타는 방법도 있었다고 국어 선생님이 덧붙이셨어요.

고교야구시대

당시 학생들은 어떤 가수를 좋아했는지 궁금했어요. 그런데 뜻밖에도 당시엔 지금처럼 10대들만의 가수가 없었어요. 어른들에게 인기 있던 가수 전영록을 같이 좋아했고 아이들의 정서에 맞는 노래가 따로 없다 보니 심지어는 소풍 가서도 음악 시간에 배운 가곡을 불렀다네요. 상상이 안 돼요. 음악 시간도 아닌데 음악책에 나온 노래를 부르다니. 기계도 지금처럼 발달되어 있지 않아서 학생들은 기타와 큰 카세트를 가지고 소풍 갔어요. 소풍 장소는 언제나 곰나루 아니면 산성공원으로 정해져 있었고, 좀 잘 노는 학생들이 사회자가 되어 레크리에이션을 진행하면서 기타를 들고 노래를 했어요. 남자애들은 밴드를 직접 만들어 기타를 연주하기도 했고요. 고등학교 때가 되어서야 단발머리라는 노래를 들고나온 조용필을 보고 가수에 빠진다는 느낌이 뭔지 처음 깨닫게 되었다고 해요. 10대 가수들이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훨씬 뒤에 등장한 서태지와 아이들부터였어요. 서태지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그는 문화대통령이라 불렸고 서태지의 노래 컴백홈이 발표되자 가출했던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대요.

대신 선생님의 시대엔 야구 문화가 있었어요. 학생들은 고교야구에 열광했어요.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공주고 야구팀이 우승했을 때는 공주시민이 모두 나와 공주고등학교까지 행진하는 축하퍼레이드를 구경했어요. 공주여중 학생들이 꽃다발을 주는 역할을 했는데 노재경 선생님도 화동 중 한 명이었답니다. 그땐 공주고등학교가 공설운동장 역할을 했어요. 땅굴 사건, 도끼 만행사건 같은 것이 뉴스에 나올 때마다 공주고등학교에 모여 북한을 규탄하는 궐기대회를 많이도 했다고 해요.

선생님은 어떤 학생이었나요?

선생님들은 모두 모범생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노재경 선생님은 의외로 공부보다는 잘 노는 아이들과 친했다고 하셨어요. 돈을 걷어서 선생님 몰래 간식을 사러 나가던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 아이들과 친구였대요. 이사 오기 전의 학교 담 밑엔 아주머니들이 앉아 뽀빠이, 자야, 빵 같은 것들을 팔았어요. 물 뜨러 가는 것처럼 주전자를 들고 나가 담벼락 틈으로 돈을 내밀고 친구들이 주문한 과자랑 빵을 사서 주전자에 담아 돌아왔다는 거예요. 빵셔틀이 아니고 그땐 주전자 들고 간식 사러 나가는 아이가 잘나가는 아이였어요. 노재경 선생님도 자주 나가셨다네요. 그리고 부잣집 아이가 같은 반이었는데 그 친구는 매일 분유를 한 통씩 들고 학교에 온 것이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으신대요. 왜 분유를 들고 왔느냐고 물으니 선생님은 그게 얼마나 비싸고 맛있는 건줄 아느냐고 학교는 원래 춥고 배고픈 곳이었다고 대답해주셨어요. 그리고 양궁부 학생들을 지원하기 위한 매점(현재 우리 학교 서편 가정실 앞 계단 아래쯤) 이 있어서 쉬는 시간에 소보로빵, 단팥빵을 사 먹는 친구들로 바글거렸다고 해요.

 

▲학교 건물 옆 수풀 속 형무소 초소 흔적. 사진=장길수 선생님
▲학교 건물 옆 수풀 속 형무소 초소 흔적. 사진=장길수 선생님

선생님의 기억에서 빠뜨릴 수 없는 군것질거리가 있는데 그건 바나나빵이에요. 바나나가 들어 있는 건 아니고 모양이 바나나였던 빵이에요. 공주성결교회에서 사대부고 가는 샛길에 바나나빵집이 있었는데 먹을 게 별로 없던 시절에 바나나 모양의 그 빵은 너무나 맛있고 값싼 간식이었답니다. 10? 아니면 20? 아닌가? 100원을 내면 신문지나 잡지로 만든 종이봉투에 가득 담아주던 바나나빵. 베이킹소다 향기가 확 나는, 세상에 두 번 없을 빵이었대요. 빵집 안에 들어가서 빵을 먹는 학생들은 시커멓고 힘이 있는 오빠들이어서 선생님과 친구들은 무서워서 안에 못 들어가고 밖에서 매표소 창구 같은 구멍으로 돈을 내고 빵을 받았어요. 그땐 거기 가면 불량스러워 보일까 봐 가고 싶은 마음을 참을 때가 많았다고 해요. 그때의 오빠들 속에 우리 학교 체육 선생님이 계셨어요. 체육 선생님께서는 공주 사람이라면 바나나빵집을 모르는 사람 없다고 하시면서 체육 선생님의 아지트였다고 하셨어요. 바가지에 금방 만든 빵을 넣고 설탕을 팍 뿌려서 흔들어 주면 둘이 먹다 둘 다 죽어도 모를 만큼 맛있었다고 해요. 그 빵이 얼마였느냐고 여쭈어보니 돈 내고 먹은 적이 없어서 모르신대요. 참고로 체육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을 덧붙이면, 호서극장에 당시의 걸그룹이라 할 수 있는 토끼소녀가 왔을 때 친구들과 밀고 들어갔다가 극장 아저씨께 귀를 잡혀 끌려 나온 기억이 있으시다고 합니다.

일일고사, 월말고사

선생님 시대에 안 태어난 게 다행인 것 같아요. 중학교 1, 2학년 때는 매달 시험을 보는 월말고사가 있었고 3학년 때 교장 선생님이 바뀌면서 일일 고사를 보기 시작했대요. 지금 선생님의 입장에서 생각하니 학생들도 어려웠지만, 그때 선생님들도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으시대요. 먹지에 철필로 글씨를 새겨서 등사 잉크로 한 장 한 장 찍어내는 시험지라 시험을 보다 보면 손가락과 소매에 먹물이 묻어났어요. 일일고사 외에도 중간고사, 기말고사, 모의고사가 있었어요. 시험 보다가 학교생활을 마치셨겠어요. 게다가 시험을 보고 나면 1등부터 100등까지 순서대로 명단을 써서 학교에 붙였다고 해요. 선생님은 날마다 시험을 보는 일일고사 때문에 공부를 따로 하는 습관을 붙이지 못하셨다고 하셨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가장 놀란 것은 선생님의 기억이었어요. 국어 선생님 말씀으론 노재경 선생님께 문학적 감수성이 있고 글도 잘 쓰셔서 세밀한 장면들을 간직할 수 있는 거라고 하셨어요. 국어 시간에 왜 그렇게 장면을 강조하시는지 알게 되었어요. 구체적인 장면에서 엿볼 수 있는 것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것들이 담긴 사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쉽게도 선생님이 이사를 앞두고 짐을 모두 싸서 보관 중이라 찾기가 어렵다고 하셨어요. 지금 우리 학교의 사진, 우리 동네의 사진을 찍어서 남겨두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는 걸 알았어요.

인터뷰를 앞두고 긴장을 많이 했는데 국어 선생님이 옆에서 그냥 이야기하시는 것처럼 선생님과 말씀을 나눠주셔서 가벼운 마음으로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어요. 두 분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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