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의 화재안전 파수꾼 "공주소방조" 의 역사 속으로①
상태바
공주의 화재안전 파수꾼 "공주소방조" 의 역사 속으로①
  • 고순영(공주대학교 공주학연구원 전문연구원)
  • 승인 2021.03.19 16: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公州消防組 준공 기념사진(『조선신문』 1935.10.3. 기사)사진=공주대학 공주학연구원
▲公州消防組 준공 기념사진(『조선신문』 1935.10.3. 기사)사진=공주대학 공주학연구원

공주종합자료관으로서 ‘공주학아카이브’ 구축을 위해 필자는 개인의 자료 뿐만 아니라 공주 주요 관공서 기관들의 자료들도 꾸준히 수집해 오고 있다.

공주의 우체국, 법원, 교도소, 경찰서 등 각 공공기관으로부터 수집한 사진이나 문서들은 그곳의 기능과 역사를 알 수 있게 하고, 아울러 충남 행정의 수부지로서 옛 공주의 면면의 모습들을 상상할 수 있게 만들었다.

2020년 올해 마지막으로 수집한 공주의 공공기관 자료는 공주소방서였다. 관공서이니 만큼 구성원들이 자주 바뀌면서, 과거의 옛 자료가 지금까지 남아있거나 관리되고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결국 이러한 실정을 지금이라도 개선하기 위해 기록의 정리와 관리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이 소방서의 자료수집을 하다가 필자는 문득 공주 소방의 역사와 숨은 이야기는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졌다.

자, 그럼 이제 공주의 화재안전 파수꾼, 공주소방조의 옛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1935년 10월 3일 신축된 公州消防組 준공 기념사진(『조선신문』 1935.10.3. 기사)사진=공주대학 공주학연구원
▲1935년 10월 3일 신축된 公州消防組 준공 기념사진(『조선신문』 1935.10.3. 기사)사진=공주대학 공주학연구원

2005년 마곡사에서 열린 공주소방서 소방훈련 ... 그 시작은 공주소방조(公州消防組)에서

공주소방서의 기초는 바로 ‘공주소방조(公州消防組)’에서 비롯됐다. 공주소방조는 1911년 10월 공주경찰서의 산하 조직으로 결성됐다.

지금의 소방서와 같이 독립된 공공기관이 아니며, 전문 소방수가 상시 대기하는 구조가 아니었다. 즉, 기관이 아닌 의용적(義勇的) 조직체로서 불이 나면 경종을 난타해 화재 소식을 전하고, 각 처에서 종소리를 들은 소방수들은 공주경찰서 연병장으로 모인 후 경찰서장의 감독 아래 일사불란하게 불이 난 장소로 가서 불을 끄고 다시 돌아가는 구조이다.

또한 그들의 임금은 추후에 화재 출동수당을 지급받는 방식이었다.

1924년 조선총독부 관보 제3120호 중 
그러나 모든 조직은 체계가 있는 법, 공주소방조 또한 조직체계를 갖췄다. 1924년 조선총독부 관보 제3120호에 의하면 소방수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조두(組頭) 1명, 부조두(副組頭) 1명, 연대장과 같은 소두(小頭) 4명, 그리고 소방수가 70명이었다.

모두 합쳐 약 77명의 구성원으로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활동했다. 하지만 그 수가 매번 일정한 것은 아니고 조금씩 늘어나기도 했다. 소방조의 공식적인 훈련은 1년에 총 3회 정도 이뤄졌다.

연초에 이루어지는 신년 출초식(出梢式)이 있고, 4~5월에 이루어지는 춘계 소방훈련, 10월에 이루어지는 추계 소방훈련이다.

매회 아침 7∼8시경에 격종하면 소방수들은 공주경찰서 앞 연병장에 집합하여 점열을 실시한다. 때로는 도청 연병장이나 공주시장의 금강관 앞 공터에서 실시할 때도 있다. 9∼10시경이 되면 출동하여 공주금융조합 근처 제민천가에서 양수(揚水)훈련을 한다.

이때 소방조의 일본인과 조선인이 갑을 양측으로 나눠 성대한 연습을 하는데, 펌프를 통해 뻗어가는 물줄기를 보기 위해 관민 다수의 사람이 몰려 그 일대가 성황이었다고 한다.

공주소방조는 괄목할 만한 성장으로 조직된 지 약 10여 년 만인 1921년 5월 12일 건물 1층을 확장하기로 했다. 이때 양수를 위한 신식기계로서 가솔린펌프를 새로 구입하게 됐는데, 공주군민으로부터 받은 기부금 7천여 원으로 구입했다.

또 그 이듬해에는 공주 원도심 중앙에 망화대(望火臺)를 설치해 화재의 진원지를 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그 뿐만 아니라 당시 공주의 제2 부호이자 자선활동을 활발하게 하였던 김윤환(金閏煥, 1870∼1936)이 1926년 약 600원의 기부금을 내어 공주소방조의 여러 소방 기계를 추가로 구입할 수 있었다.

조선인소방조의 차별로 공주소방조 분소, 그러나 다시 부흥

그런데 1926년 8월 공주소방조가 분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의례 조선 사람과 일본인이 서로 모이며 일하는 곳에는 반드시 충돌이 있게 마련인데, 공주소방조에서도 조선인 소방수와 일본인 소방수를 차별하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당시 소방조의 표창자 중에 일본인이 13인, 조선인이 1명이라는 수적 차이만 보아도 그 차별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동아일보』 1926년 8월 16일 기사에 보면 당시의 상황이 자세하게 실려 있는데, 공주소방조를 지도 관리하는 공주경찰서장이 조선인 소방수에게 건낸 언어도단의 차별적 행동이 불씨가 됐다고 한다.

게다가 그동안 공주소방조 간부추선에 있어서도 매번 일본인이 선정됐던 부분에 이의제기가 수차례 있어 오던 중이었다.

또한 단 한 사람의 조선인 부장이라도 채용해 달라는 요청에 공주경찰서장은 차후에는 반드시 조선인 간부를 채용하겠다는 지난 서약이 있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서장은 일본인 공적자를 추대한다는 관례가 있는 데다, 조선인 간부 채용은 시기상조와 자격부족이라는 말과 함께 조선인 소방수를 무시하는 모욕적 언행을 일삼아 더욱 일을 크게 만들었다.

이에 조선인 소방수 30여 명은 공주불교 포교당에 모여 동맹 사직을 결의하고, 소방복과 기구 등 모든 것을 일본인 조두의 집으로 보내 소방활동 거부 의사를 전했다.

그럼에도 공주경찰서장의 움직임이 달라지지 않자, 결국 조선인 소방조 일동은 공주소방조를 분소(焚燒)하여 그 뜻을 전했던 것이다.

이에 소방수들의 결원으로 공주 군민의 재난관리 부재를 우려하였던 공주 유지들은 중재를 나섰다. 특히 변호사를 지낸 박춘서(朴春緖), 충청남도평의회 의원을 지내기도 했던 임창수(林昌洙), 하야가와 분코(早川分後), 마루야마 토라노스케(丸山虎之助) 등의 중재로 수일 만에 원만히 해결되어 공주소방조는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있었다.

1935년 10월 3일 신축된 公州消防組 준공 기념사진(『조선신문』 1935.10.3. 기사)
한편 처음 지어져 분소된 공주소방조 건물의 위치는 지금까지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하지만 1937년 『공주읍읍세일반』을 살펴보면 공주읍 욱정(지금의 반죽동)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고, 또 『조선신문』에 공주소방조가 공주읍사무소 부근에 신축되었다고 대서특필했다.

아마도 관리청인 공주경찰서와 가까이에 두어 화재 시 출동과 업무의 효율을 기하고자 그곳에 새롭게 건축된 것으로 보인다. 1935년 10월 공사비 약 2천여 원을 들여 신축된 공주소방조 건물의 크기는 약 평방 240 제곱미터로 약 72평의 면적이니 그 규모가 꽤 컸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1년에 약 1,485원의 경비로 공주읍의 본정, 욱정, 상반정, 대화정, 금정, 산성정 등 6개 구역의 총 2,495개 호수를 관할했다.

한편 공주에는 공주읍내를 관할하는 공주소방조 외에 유구소방조, 이인소방조, 광정소방조, 호계소방조(사곡면), 대교소방조(장기면), 탄천소방조, 경천소방조(계룡면), 우성소방조, 신하소방조(신풍면) 등이 있었다.

▲2005년 마곡사에서 열린 공주소방서 소방훈련사진=공주대학 공주학연구원
▲2005년 마곡사에서 열린 공주소방서 소방훈련사진=공주대학 공주학연구원

이 원고는 공주향토문화연구회에서 발간하는 『웅진문화』 제33집에 게재되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