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 같은데 잘 모르는 조병갑, 조병갑보다 더한 조병식과 조병직(01)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의 공주집회 탄압과 고등재판소 판사 조병갑·조병직의 동학교주 재판 (01) 공주에서 시작하여 공주에서 마무리된 동학농민혁명, 사회 구조가 문제였다

2026-03-09     인간 전병철

동학농민혁명과 관련 있는 인물, 조병갑과 조병식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어 발품 팔아 조사했습니다. 하고 나니 조병직에 대한 정리도 필요하여 추가 조사하였습니다. 그 결과, A4로 200쪽 되는 글을 16회로 나누어 공유하고자 합니다. 재미없는 글이긴 하나, 조병갑ㆍ조병식ㆍ조병직을 알면 동학농민혁명을 아는 데 나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인간 전병철(작가)

 

Ⅰ. 들어가는 글_사람보다 사회 구조가 문제다

 

1894년 ‘반봉건(反封建: 근대화)ㆍ반외세(反外勢: 항일)’를 내세우며 전국적으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아무래도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일 것이고, 한편으로는 조병갑(趙秉甲, 1844~1912)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김개남(金開南, 1853~1894), 손화중(孫華仲, 1861~1895), 최시형(崔時亨, 1827~1898), 손병희(孫秉熙, 1861~1922) 등이 생각나지 않을까 싶다. 역사 교과서에도 나오는 조병갑은 모르는 이가 적을 정도로 그것도 ‘탐관오리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진 자이다.

조병갑은 당시 고부군수로 있으면서 주민들을 함부로 대하고 갖은 부당한 세금을 거둬들이는 등 온갖 못된 짓을 저지르는 가운데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게 한 계기를 마련한 장본인이다. 그러다 보니 동학농민혁명이 조병갑의 가렴주구(苛斂誅求: 세금을 심하게 거두어들이고 재물을 강제로 빼앗음)와 학정(虐政: 사납고 험악한 정치) 때문에 일어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탐관오리 조병갑 때문에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것만은 아니다. 조병갑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게 만든 하나의 가지에 불과하다. 조병갑 이전부터 조선 말기 사회는 이미 부정부패와 관리들의 가렴주구가 판을 치고 있었으며, 양반의 횡포가 일상적인 사회였다. 양반을 비롯한 관리와 왕실 등 지배층이 법을 악용하는 가운데 ‘법대로 한다’라는 이름 아래 자신들의 탐욕과 이익을 위해 아무런 짓을 저질러도 별 탈 없는 계급 사회였다. 농민과 천민 등 하층민은 잘못한 게 없어도 죄를 뒤집어쓰며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죽어 나가도 아무렇지 않은 그런 사회였다.

이른바 ‘삼정의 문란’으로 삼정[三政: 전정(田政: 토지세 부과)·군정(軍政: 군역 부과)·환곡(還穀: 양곡 대여 및 환수)]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않은 채 오히려 삼정이 지배층의 수탈 도구로 악용되던 때였다. 한마디로 사회 구조 또는 사회 시스템 자체에 문제가 있는 사회였다. 탐관오리(貪官汚吏: 백성의 재물을 탐내어 빼앗는 등 행실이 깨끗하지 못한 관리)가 있어도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을뿐더러 처벌받아도 곧 사면되어 또다시 관리가 되어 여전히 부정부패를 저지르며 떵떵거리던 봉건사회였다.

조선 말기 대표적인 탐관오리로 흔히 ‘백낙신’과 ‘조병갑’을 뽑곤 하는데, 수원백씨 백낙신(白樂莘, 1815~1887)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부정 축재와 탐학을 저질러 1862년 진주농민봉기(전국으로는 임술농민봉기)가 일어나게 한 계기를 마련한 장본인이다. 백낙신은 1836년 남선무과(南宣武科)에 급제한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1858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백낙신은 전라 좌수사로 있으면서 부정을 저지른 일로 처벌받기도 하였지만, 다시 1861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경상 우병사 백낙신은 진주목사 홍병원(洪秉元)과 결탁, 부임한 지 1년도 안 되어 약 15,000석(45,000여 냥)의 쌀을 수탈하고, 또 이전 관리들이 도결(都結: 토지 결 단위로 세금을 매겨 관리가 직접 돈으로 걷는 방식)로 빼돌린 28,000여 석(84,000여 냥)과 경상우수영의 밀린 환곡과 군포 24,000여 석(72,000여 냥)을 한꺼번에 내도록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삼정의 문란으로 파탄지경에 다다랐던 농민들은 백낙신의 가혹한 수탈에 더는 참지 않고 유계춘(柳繼春)·김수만(金守滿)·이귀재(李貴才)가 주동하여 1862년 2월 18일 들고 일어났다(진주농민봉기, 이후 전국 30여 곳에서 봉기가 일어나 임술농민봉기로 번졌다).

이들은 스스로 ‘초군(樵軍: 나무꾼 조직)’이라 부르면서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손에는 몽둥이나 농기구를 들고 진주성으로 몰려갔다. 2월 19일 농민봉기군은 우병사 백낙신과 목사 홍병원으로부터 부정부패를 혁파한다는 약속을 받아 내고, 부정 관리들을 불태워 죽이고,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부호들을 습격하였다. 조정에서는 2월 29일 박규수(朴珪壽)를 진주안핵사(晉州按覈使)로 보내 난을 수습케 하였으며, 암행어사 이인명(李寅命)을 보내 조사케 하였다. 홍병원과 백낙신은 파직당하고 체포되었으며, 백낙신은 전라도 강진현 고금도(古今島)로 유배되었다. 아울러 봉기에 앞장선 유계춘을 비롯한 3명의 핵심 주모자는 5월 30일 진주성 남문 밖의 공터에서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효수당하였다.

그러나 백낙신은 유배 간 지 1년 만인 1863년(고종 즉위년) 7월 유배지가 고향으로 옮겨졌다가, 1865년 풀려났다. 이듬해인 1866년 인천 영종진 첨절제사(永宗鎭僉節制使)로 복직하여 병인양요(丙寅洋擾: 프랑스 함대의 강화도 침입)가 일어나자, 경기중군(京畿中軍)을 겸직하여 영종진과 행주(幸州, 경기도 고양시) 방어에 나섰다. 1877년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파견되었다가 임기가 끝난 후에도 돌아오지 않아 1885년에 다시 유배되고, 1887년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막상 진주농민봉기는 백낙신 때문에 일어난 것만은 아니다. 백낙신이 진주로 오기 전부터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탐학이 이미 있었다.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지배층의 가렴주구에 대한 백성들의 저항이 백낙신의 탐학을 계기로 드러난 것이다. 마찬가지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내려오기 전부터 고부 지역에도 조필영을 비롯한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탐학이 관습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풍양조씨 조필영(趙弼永, ?~?)은 1873년 과거에 합격한 이래 1875년 사도시 주부, 홍문관 교리, 낭청(郎廳), 1876년 형조 정랑(正郎) 등을 거쳐 1878년 경모궁(景慕宮) 영(令), 창녕현감, 1881년 임피현령, 1882년 김제군수, 1885년 신천군수, 대구판관(判官), 1886년 영남가도사(嶺南假都事)․경상가도사(慶尙假都事), 대사간, 무안현감, 1887년 진주목사①, 1889년 무주부사, 옥천군수, 진주목사②, 총무관(總務官) 겸직, 1890년 진주목사③ 겸 총무관, 동부승지, 나주목사 겸 호남전운어사(湖南轉運御史=호남전운사: 호남지방 조세를 한양으로 운반하는 임무를 맡은 관리), 부호군(副護軍), 1891년 좌부승지 등을 지내면서 특히 김제군수와 대구판관으로 있을 때 일을 잘 처리하여 상을 주어야 한다고 할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조필영은 1889년 이후 세곡(稅穀) 운반을 주관하는 전운서(轉運署)의 최고 벼슬인 총무관(總務官)으로 있으면서 잘못 처리한 일로 1890년 윤2월에 징계받기도 하였다가 한 달 뒤에 사면받아 총무관에 복직하였으며, 또 일을 늦게 처리한 일로 1890년 12월에 징계를 받았다가 1891년 6월 총무관에 복직하였다. 무엇보다도 조필영은 호남전운사로 있으면서 직권을 이용하여 조세로 거둔 쌀을 쥐가 먹고 수분이 말라 줄어들었다며 농민에게 조세를 다시 내도록 강요하여 원성을 샀다. 또 1893년 공미(貢米) 운수사업을 위해 이운사(利運社)가 생기면서부터 조필영은 선박 수선비 및 파손비 명목 등으로 과외로 세금을 거두어들여 농민들의 불만이 더욱 커졌다. 총무관 겸 호남전운사 조필영은 불응하는 농민들을 붙잡아 탄압하기조차 했다. 이런 조필영의 학정과 가렴주구는 동학농민운동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으며, 결국 그의 비리가 밝혀지면서 조필영은 1894년 호남전운사에서 파면되어 전라도 함열현(咸悅縣: 현 익산시 함열읍)으로 유배되었다가 가볍게 죄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의금부의 의견에 따라 함열현보다 더 먼 강진현 고금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895년 6월 27일 내려진 칙령, 대사면령(大赦免令)으로 석방되었으며, 1904년 내장원 경(內藏院卿: 왕실 재산 관리 책임자)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백성으로부터 원성을 사고 부정을 저질러도 얼마 되지 않아 사면받고 더 높은 관직에 오르기조차 하였다.

또 김해김씨 김창석(金昌錫, 1846~?)은 호남균전사(湖南均田使: 호남지방 농지에 관한 일을 처리하고자 파견한 관리)를 지낸 관리이자 화가(畫家)로, 1890년 12월 호남균전사가 되어 농정(農政)을 잘 보살폈다고 소개되기도 하는 자이다. 그러나 호남균전사로 있으면서 ‘균전(均田: 토지에 따라 세금을 균등하게 함)’의 임무는 망각한 채 오히려 백지징세(白地徵稅: 농사를 짓지 않은 땅에 세금을 매김) 등 수탈에 나섰으며, 특히 고부에서 심한 수탈을 하였다. 이런 사실이 밝혀져 1894년 9월 홍주목(洪州牧: 충남 홍성)으로 유배당하였으나 한 달 뒤인 10월에 늙은 부모를 모셔야 하는 독자라는 이유로 감형받고 석방되었다. 1899년에는 비서원 승(秘書院丞: 오늘날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에 오르기까지 하였다.

당시 나라 사정이 이러했으니, 조병갑의 수탈로 어느 날 갑자기 고부 농민이 봉기하고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이전부터 관리들의 수탈이 전국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백낙신, 조필영과 김창석만 그런 게 아니었다. 탐관오리는 조병갑만이 아니었다. 조병식(趙秉式, 1823?, 1832~1907)도 있었다. 조병갑은 물론 조병식을 알아야 동학농민혁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하여 동학농민혁명 발발과 깊은 관련이 있는 탐관오리, 더욱이 공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조병갑과 조병식에 대해 나름 정리해 보고자 한다.

 

 

Ⅱ. 동학농민혁명을 촉발한 조병갑, 탐관오리의 대명사

 

1. 조병갑의 출신과 집안사람들

양주조씨대종회 족보에 따르면, 조병갑은 1844년 5월 15일(양력 6월 30일) 태어나 1912년 5월 23일(양력 7월 7일) 68세(옛 나이 70세) 나이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조병갑 출생지가 공주인지 예산인지, 아니면 다른 지역인지 정확하게 확인되지는 않는다. 조병갑이 어디 출신이라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며 아직 확실한 기록을 찾질 못해서이다. 그나마 조병갑의 출생지를 짐작할 수 있는 자료로 『공주와 동학농민혁명』(박맹수·정선원, 2015)이 있는데, 이 책 262쪽에 “조씨(양주조씨) 집안이 충남 보령 물포리에서 살다가 풍수가 그린 그림을 보고 명당을 찾아 사랑골로 왔다고 한다. …(중략)… 동학농민전쟁 전 수십 년 동안 사랑골에서 권력 있는 양반으로 세도를 부리던 이는 조병갑의 아버지 조규순으로 기억하고 있다. 마을 한가운데에 ㅁ자형의 큰 기와집을 짓고 주위에 딸린 가옥이 70여 호가 되었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사랑골에서 조병갑이 태어나 이곳에서 살았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는 없지만, 조병갑 아버지 조규순이 살던 곳이 사랑골이고, 조규순 집안의 집성촌이 사랑골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여기에 조병갑 무덤과 아버지 조규순 묘 등이 이곳 사랑골에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양주조씨 족보에도 조병갑 무덤이 “공주신하면평소리(公州新下面平所里)”에 있다고 밝히고 있으며, ‘공주 신하면’은 현재 공주 신풍면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런 여러 가지를 참고하면 조병갑의 고향은 공주시 신풍면 평소리 사랑골로 짐작된다.

조병갑(趙秉甲, 1844~1912)은 본관이 양주(楊州)로 양주조씨 문강공파(文剛公派)의 창수공파(倉守公派) 가운데 괴산공파(槐山公派) 사람이다. 세대로는 양주조씨 20세(世)에 해당하며, 자(字)는 치성(穉成)이다. 아버지는 태인현감을 지낸 조규순(趙奎淳, 1799~1868)이며, 할아버지는 진주목사를 지낸 조진익(趙鎭翼, 1762~1827)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의령현감을 지낸 조종철(趙鐘喆, 1737~1796), 고조할아버지는 선공부정(繕工副正: 공조 선공감 부정)을 지낸 조영극(趙榮克, 1718~1777)이다.

양주조씨 16세 조영극은 ①조종철(宗喆) ②조인철(寅喆) ③조헌철(憲喆) ④조의철(宜喆) ⑤조우철(宇喆) 딸 딸 ⑥조수철(守喆) 이렇게 6남 2녀를 두었고, 조영극의 1남 양주조씨 17세 조종철(趙宗喆)은 ①조진익(鎭翼) ②조진정(鎭靖) ③조진민(鎭敏) ④조진강(鎭剛) 딸 딸 딸 딸 이렇게 4남 4녀를 두었다. 그리고 2남 조인철(趙寅喆)은 아들 ①조진우(鎭遇) 1명을 낳고, 3남 조헌철(趙憲喆)은 아들 ①조진건(鎭健), ②조진곤(鎭坤) 2명을 두었으며, 4남 조의철(趙宜喆)은 ①양자 조진강(鎭綱)과 딸 2명을 두고, 5남 조우철(趙宇喆)은 딸 2명만 두었으며, 6남 조수철(趙守喆)은 아들 ①조진성(鎭城) ②조진근(鎭勤) 2명과 딸 1명을 두었다.

조병갑의 할아버지 조진익(양주조씨 18세)은 연산현감, 남원부사, 진주목사, 이조판서 등을 지낸 이로, 반남박씨(潘南朴氏, 1760~1812, 좌의정 박종악의 딸)와 결혼하여 아들 조두순(趙斗淳, 1796~1870), 조태순(趙台淳, 1798~1853), 조규순(趙奎淳) 3명과 딸 1명을 낳았다. 그러나 양주조씨 17세 조인철의 아들 양주조씨 18세 조진우(趙鎭愚)가 아들이 없어 양주조씨 19세 조태순이 조진우의 양자(養子: 대를 잇는 아들)로 나가 조진익의 자식은 3남 1녀에서 2남 1녀가 되었다. 일부에서 조진익은 첫째 부인에게서 조두순을 낳고, 둘째 부인에게서 조규순을 낳았다고 소개하고도 있으나 족보를 보면 조진익 부인은 반남박씨 1명뿐이다.

조병갑의 큰아버지 조두순은 예문관 대제학, 판서, 삼정이정청 총재관, 좌의정·영의정 등을 지낸 이로, 대구서씨(大丘徐氏, 1797~1870, 판중추부사 서준보의 딸)와 결혼하여 딸 1명만 낳아 조진우(趙鎭愚)의 양자로 나간 동생 조태순이 낳은 둘째 아들 조병집(趙秉集, 1832~1899)을 양자로 들여 1남 1녀를 두었다.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지낸 조병집 또한 자식을 못 낳아 조규순의 장남 조병섭의 셋째 아들 조동희(趙同熙, 1856~1899)를 양자로 들여 아들 1명만 두었으며, 양자로 간 조동희는 딸만 2명 낳아 양자로 오기 전 친형이었던 조영희(趙英熙)의 둘째 아들 조중헌(趙重獻, 1881~1944)을 양자로 들여 1남 2녀를 두었다. 이렇게 조두순-조병집-조동희 내리 3대가 조병집-조동희-조중헌을 양자로 들여 가계를 이어 나갔다.

한편, 조동희는 양자로 오기 전 친형인 조영희가 우봉이씨(牛峯李氏) 이호준(李鎬俊, 1821~1901)의 딸과 결혼하여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완용[李完用, 1858~1926, 이호석(李鎬奭=이석준:李奭俊)의 아들이나 이호준의 양자로 입양됨]과는 사돈 관계가 되었으며, 의정부 찬정(贊政), 농상공부대신, 규장각 경(卿) 등을 지내며 일제에 협력하는 가운데 일제로부터 남작(男爵) 작위를 받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인정되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또 규장각 직각(直閣)을 지낸 조중헌은 아버지 조동희의 남작 작위를 이어받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인정되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그리고 조중헌은 아들 조긍호(趙肯鎬, 1898~1933, 참봉), 조양호(趙亮鎬, 1899~1940, 참봉), 조영호(趙永鎬, 1910~1934) 3명과 딸 3명을 두었다.

조병갑의 둘째 큰아버지 조태순은 조진익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조병갑의 증조할아버지 조종철의 바로 아래 동생인 조인철(趙寅喆)의 아들 조진우(趙鎭愚)가 아들이 없어 조진우의 양자로 갔다. 남원현감, 승지(承旨),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의금부사(義禁府事), 성균관 대사성(成均館 大司成) 등을 지낸 조태순은 청주한씨(淸州韓氏, 현감 한성리의 딸)와 결혼하여 아들 조병립(趙秉立, 1820~1860)과 조병집(趙秉集) 2명과 딸 2명을 낳았으나 둘째 아들 조병집이 조두순의 양자로 나가 1남 2녀를 두었다.

동생 조병집이 출계(出系: 양자로 나가 그 집의 대를 이음)하여 외아들이 된 조병립은 금산군수를 지냈는데, 아들이 없어 조규순의 장남인 조병섭의 둘째 아들 조영희(趙英熙, 1855~1930)를 양자로 들여 자식으로 조영희 1명만 두었다.

이조판서를 지낸 조영희는 흥선대원군의 친구인 이호준[李鎬俊, 이해(李垓, ?이선?이섭)의 아들, 이식(李埴)의 양자로 입양됨. 이완용의 양아버지]의 딸과 결혼하여 이완용과 처남 매부 관계가 되었는데, 한성부 판윤과 이조판서 등을 지낸 이호준은 서자와 딸만 낳아 이호석(李鎬奭)의 아들 이완용을 양자로 들였기 때문이다. 이런 조영희는 일제강점기 중추원 참의(參議)를 지내며 일제에 협력하여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조영희는 아들 조중국(趙重國, 1871~1944)과 조중헌(趙重獻) 2명과 딸 2명을 낳았으나, 조중헌이 조동희의 양자로 나가 1남 2녀를 두었다. 그리고 시종원(侍從院) 시종(侍從)을 지낸 조중국은 조명호(趙明鎬, 1896~1946, 메이지대 졸업), 조경호(趙景鎬, 1899~1971, 경성제대 졸업), 조흥호(趙興鎬, 1906~1969, 와세다대 졸업) 3명과 딸 2명을 두었다.

조병갑의 아버지 조규순은 부인 덕수이씨(德水李氏, 1798~1846, 참판 이은모의 딸)와 결혼하여 아들 조병섭(趙秉燮, 1822~1844)과 조병협(趙秉協, 1830~1869) 2명을 낳았으며, 측실(側室: 첩) 김해김씨(金海金氏, 추정 1817~1889, 평양기생 출신이라고 전함) 사이에서 아들 조병갑(趙秉甲, 1844~1912) 1명과 딸 2명을 낳았다. 이렇게 조규순은 총 3남(장남 병섭, 차남 병협, 삼남 병갑) 2녀를 두었으며, 조병갑은 서자(庶子) 출신으로 조두순의 서질(庶姪: 서자 조카)이 된다.

조병갑의 큰형 조병섭은 승정원(承政院, 오늘날 대통령비서실)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냈으며, 아들 조성희, 조영희, 조동희 3명과 딸 1명을 낳았으나 조영희와 조동희는 각각 조태순의 아들인 조병립의 양자와 조두순의 양아들인 조병집의 양자로 나가 1남 1녀를 두었다.

함양군수를 지낸 조성희(趙誠熙, 1848~1922)는 아들 조중락과 조중한 2명과 딸 1명을 낳았으나 조중한이 조병갑의 작은형 조병협의 양자로 나가 1남 1녀를 두었다. 궁내부 주사를 지낸 조중락(趙重洛, 1870~1927)은 아들 조충호(趙忠鎬, 1891~1951)와 조기호(趙起鎬, 1922~미상) 2명과 딸 2명을 두었다.

조병갑의 작은형 조병협은 이조참판, 규장각 대교(待敎)를 지냈으며, 아들 조경희(趙庚熙, 1860~1890) 1명과 딸 2명을 두었다. 외아들 조경희는 아들이 없어 조성희의 작은아들 조중한을 양자로 들였다. 유릉참봉(裕陵參奉)을 지낸 조중한(趙重漢, 1883~1920)은 아들 조성호(趙成鎬, 1910~2008), 조영호(趙寧鎬, 1915~미상), 조정호(趙正鎬, 1920~미상) 3명과 딸 3명을 두었다.

조성호는 1950~60년대 약품 도매상을 휩쓴 백광약품(白光藥品)을 창립한 이로 크게 성공하였다. 백광약품(현 백광산업)은 1959년 제일물산과 함께 ‘중앙제약’을 세웠으며 1961년 외국 기업 화이자와 제휴를 맺어 1969년 합작(合作)법인 ‘한국화이자’로 개편한 후 1998년 ‘한국화이자제약’으로 이름을 바꿔 지금에 이르고 있다.

조병갑은 전주이씨 이병양(李秉兩, 판서 이병문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차남 조강희(趙岡熙, 1898~1966) 1명을 낳았으며, 측실 청송심씨(靑松沈氏, 1846~?, 부사 심영규의 딸) 사이에서 아들 장남 조찬희(趙瓚熙, 1880~미상) 1명과 딸 1명을 낳아 총 2남 1녀를 두었다.

조병갑의 장남 조찬희는 아버지와 마찬가지 서자 출신으로 청양에 살면서 40세 나이에 비봉면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차남 조강희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매일신보 기자로 활동하는 등 친일 언론인으로 살았다. 그리고 조강희는 연안이씨 이현희(李賢熙, 국장 이도익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조중완(趙重完, 1933~2019, 사회경영전략원 원장)과 조중덕(趙重德) 2명을 두었으며, 조중완은 조기숙(趙己淑, 전 노무현 대통령비서실 홍보수석비서관), 조연호, 조미호(화제인 대표이사), 조승호(금송글로벌 대표이사)를 두었다.

이상에 소개된 조병갑 관련 가계를 한눈에 볼 수 있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다음에 '2. 묘비 없는 조병갑 무덤과 조병갑 집안사람들의 무덤'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