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 같은데 잘 모르는 조병갑, 조병갑보다 더한 조병식과 조병직(02)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의 공주집회 탄압과 고등재판소 판사 조병갑·조병직의 동학교주 재판 (02) 공주에서 태어나 살다가, 공주에서 숨어 지내다, 공주에 묻힌 조병갑의 묘에 비석 하나 없어 아버지 조규순의 묘비문을 해석해보다

2026-03-11     인간 전병철

동학농민혁명과 관련 있는 인물, 조병갑과 조병식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어 발품 팔아 조사했습니다. 하고 나니 조병직에 대한 정리도 필요하여 추가 조사하였습니다. 그 결과, A4로 200쪽 되는 글을 16회로 나누어 공유하고자 합니다. 재미없는 글이긴 하나, 조병갑ㆍ조병식ㆍ조병직을 알면 동학농민혁명을 아는 데 나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인간 전병철(작가)

 

2. 묘비 없는 조병갑 무덤과 조병갑 집안사람들의 무덤

조규순 부인 덕수이씨 아들 조병섭·조병협과는 달리 조병갑은 측실 김해김씨의 아들, 즉 서자 출신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탐관오리로 널리 알려져서 그런지는 몰라도 양주조씨 족보에 조병갑 아들과 그 후손에 대한 기록된 내용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조병갑의 아들 조찬희와 조강희의 사망 연대가 나오질 않을뿐더러 손자들에 대한 기록도 거의 없다시피 하다. 하여 다른 자료나 현장 확인을 통해 정보를 얻거나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부족한 상황에서 조병갑과 아버지 조규순의 무덤이 있는 공주시 신풍면 평소리 사랑골에는 있는 조규순 집안 관련 무덤으로는 양주조씨 족보에 기록된 것으로 총 5기가 있고, 인근 공주시 유구면 미곡리에 1기가 있다. 더불어 조병갑의 장남인 조찬희 무덤은 예산군 대흥면에 있다고 하며, 차남 조강희 무덤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고, 파악되지도 않는다.

공주 신풍면 평소리 마을 사람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곳 사랑골에는 족보에 기록된 총 5기의 무덤 이외에 조병갑 친어머니 김해김씨 묘(평소리 사람의 이야기로는 ‘평양마마 묘’)를 비롯하여 집안 무덤이 더 있다고 한다. 그리고 백광산업과 한국화이자를 창업한 조성호의 묘가 최근에 조성되어 있다.

그런데 예산 대흥면 교촌리 주민과 향토 사학자의 말에 따르면, 조병갑 친어머니 김해김씨 묘는 이곳 예산 대흥면 봉수산 중턱에 크게 조성되어 있으며, 관리가 되지 않아 동네 사람들이 벌초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신경 쓰는 이가 없어 묘소로 들어가는 길마저 많이 망가져 있는 상태라고 한다. 과연 조병갑 생모의 묘는 예산 대흥면 봉수산 중턱에 있는 묘가 맞는지, 공주 신풍면 평소리에 있는 묘가 맞는지 확인이 필요하다.

공주시 신풍면 평소리에 있는 양주조씨 무덤 가운데 조병갑 아버지 조규순 묘는 비석이 세워져 있어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조병갑 묘로 짐작되는 곳에는 비석은 물론 아무런 표지석 하나 세워져 있지 않다. 평소리 마을 주민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 무덤이 조병갑 무덤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 무덤이 조병갑 무덤이 확실한지 정확한 확인을 위해서는 후손을 만나 직접 확인해야겠지만 그렇다고 후손을 찾아가 물어보기도 그렇고, 설사 물어봐도 흔쾌히 알려줄지는 모르겠다. 후손들 처지에서 탐관오리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조상(조병갑)의 묘를 굳이 알려줘 자꾸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 자체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마을 주민이 전해주는 이야기와 무덤 주변 환경을 고려하여 조병갑 묘로 추정하고 있다.

조병갑 묘는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그런지 풀·잔디도 별로 없고 봉분이 허물어져 큰 구멍이 보이기도 하였다(조규순 묘도 마찬가지였다). 살아서는 호사를 누렸겠지만 죽어서는 그렇지 않아 보였다. 조병갑 묘에 비석이 있으면 비문(碑文)을 통해 조병갑이 살아온 길을 확인하려 하였지만, 비석이 없는 탓에 그러지 못하였다. 하는 수 없이 아버지 조규순 묘의 신도비(神道碑)를 통해 조병갑의 흔적을 알아보고자 조규순의 신도비 비문을 해석해 보았다.

[해석] 가선대부행호조참판양주조공휘규순지묘 / 배정부인덕수이씨 부좌

아! 이곳 공주시 신풍면 평소리 ‘건좌(乾坐: 서북쪽을 등지고 앉음) 자리’는 생각하면 나의 고조부 조규순(趙奎淳), 자(字)가 원오(元五)이신 가선대부 행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낸 분의 옷과 신발을 수장한 땅이다.

우리 양주조씨(楊州趙氏)는 고려 때 양주호장(楊州戶長, 호장은 고려·조선시대 향리직의 우두머리) 조통(趙通)에서 비롯하나 선조는 검증하기 어려워 고려 말에 조잠(趙岑)이 판중추원사로 추증되었고 이조(李朝)에 들어서 한양에서 가문이 번성하였다. 손자 조의(趙誼)는 서운관 정(書雲觀正)을 지냈는데 조선이 들어서자, 식솔(食率: 식구)을 다 데리고 동교(東郊: 현 수락산과 도봉산 사이)에서 은거하면서 대대로 벼슬한 의리를 생각하여 ‘망복지절(罔僕之節: 새로운 나라의 신하가 되지 않는 절개)’을 지키며 다시는 벼슬하지 않아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과 야은(冶隱) 길재(吉再) 두 선생과 더불어 모두 ‘절의(節義)’라 칭하였다. 조말생(趙末生)은 성리학과 문장으로써 헌릉(獻陵: 태종 무덤)과 영릉(英陵: 세종 무덤) 양 묘(廟) 때 지위도 높고 총애를 받아 관령(管領: 벼슬) 가운데 중추원사, 병조참판, 예문관 대제학을 지내고 시호는 문강(文剛)이다. 이로부터 대대로 자손이 번성하고 벼슬이 높아졌다. 조근(趙瑾)인 분은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3대를 지나 조무강(趙無疆)은 성종(成宗)의 의빈[儀賓: 왕의 사위인 부마․부마도위(駙馬都尉)]으로 한천위(漢川尉)가 되었다. 또 3대를 지나 조존성(趙存性)은 큰 계책과 원대한 식견으로 세상에 이름을 드날려 지동녕부사(知敦寧府事)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소민(昭敏)이다. 조계원(趙啓遠)은 충성스럽고 곧으며 효성스럽고 독실하여 효종과 현종 때 명신(名臣)이라 불렸으며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충청(忠靖)이다. 조희석(趙禧錫)은 괴산군수를 지냈으며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조태채(趙泰采)는 호(號)가 이우당(二憂堂)으로 타고난 성품이 맑고 온화하여 총명하고 민첩하며 사려가 크고 깊어 지개(志槪: 뜻과 기개)가 굳고 확실하며 엄숙하고 반듯하여 효우충의(孝友忠義)가 지성(至誠: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다. 우의정을 지냈으며, 시호는 충익(忠翼)이고 사충사(四忠祠)에 배향되어 영구히 신주(神主: 위패)를 모셔 제사를 지냈다. 이들은 공(公, 조규순)의 8·7·6·5대 조상이다. 고조 조정빈(趙鼎彬)은 비방과 협잡이 난무한 속에서도 일신(一身)을 온전히 지켰으며 돈녕부 도정(都正)을 지냈다. 증조 조영극(趙榮克)은 선공부정(繕工副正)을 지냈으며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 조종철(趙宗喆)은 현감을 지냈으며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조진익(趙鎭翼)은 목사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니는 정경부인으로 추증된 반남박씨로 영의정 충헌공(忠憲公) 박종악(朴宗岳)의 딸이다.

조규순(趙奎淳)은 정조 23년(1799, 기미년) 4월 27일 태어나 품기(禀氣: 품성과 기질)가 매우 뛰어났으며 덕을 지녀 참되고 순수하였으며 가정 다스리기를 효우(孝友)로써 하였고, 순조 신묘년(1831)에 진사가 되고 여러 주(州)·군(郡)과 삼사(三司) 및 이조참의를 지냈으며 승진하여 호조참판을 지내고 고종 5년(1868, 무진년) 2월 27일까지 70살을 살고 사망하였는데 이부인(李夫人)의 묘 오른쪽에 합장하였다. 아내 정부인(貞夫人) 덕수이씨는 문관 참판(參判) 이은모(李殷模)의 딸로 고종(고종이 아니라 정조가 맞을 듯) 22년(1789, 무오년) 6월 29일 태어나 온화한 용모에 맑고 덕이 있으며 조신(操身)한 부인의 모범으로 헌종 12년(1846, 병오년) 2월 13일 49세로 사망하였다. 아들 2명을 낳았는데 장남 조병섭(趙秉燮)은 동부승지, 차남 조병협(趙秉協)은 문관 이조참판을 지냈다. 측실(側室) 김해김씨(金海金氏)는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조병갑(趙秉甲)은 부사(府使)이고, 딸들은 무관 현감 이용일(李容一), 현감 김병이(金炳怡)에게 시집갔다. 조병섭(趙秉燮)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조성희(趙誠熙)는 함양군수이고, 조영희(趙英熙)는 문관 이조판서로 종숙(사촌 형제) 조병립(趙秉立)에게 출계(出系: 양자로 가서 그 집안의 대를 이음)하였다. 조동희(趙同熙)는 문관 좌찬성으로 종숙 대종(大宗) 조병집(趙秉集)의 양자로 가고, 딸은 군수 이연하(李秊夏)에게 시집갔다. 조병협(趙秉協)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조경희(趙庚熙)는 진사이고, 딸들은 이응재(李應宰)와 진사 김병직(金炳稷)에게 시집갔다. 조병갑(趙秉甲)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조찬희(趙瓚熙) 참봉과 조강희(趙岡熙)이고, 딸은 참봉 김태규(金泰圭)에게 시집갔다. 조성희(趙誠熙)는 2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 조중락(趙重洛)은 궁내부 주사(主事)이고, 조중한(趙重漢)은 참봉으로 종숙 조경희(趙庚熙)의 양자로 가고, 아래의 딸은 참봉 김영진(金永眞)에게 시집갔다. 조중락(趙重洛)은 2남 2녀를 길렀는데 아들은 조충호(趙忠鎬) 참봉과 조기호(趙起鎬)이고, 딸들은 송헌순(宋憲淳), 홍성규(洪性圭)에게 시집갔으며, 조중한(趙重漢)은 3남 3녀를 길렀는데 아들은 조성호(趙成鎬), 조영호(趙寧鎬), 조정호(趙正鎬)이고, 딸들은 박승철(朴勝喆), 김정원(金定元), 김건배(金健培)에게 시집갔다. 조충호(趙忠鎬)는 2명의 아들 조원승(趙源勝), 조원근(趙源根)을 낳았으며, 조기호(趙起鎬)는 1명의 아들 조원달(趙源達)을 낳았고, 조성호(趙成鎬)는 4명의 아들 조원무(趙源武), 조원배(趙源培), 조원오(趙源五), 조원도(趙源道)를 낳았으며, 조영호(趙寧鎬)는 3명의 아들 조원영(趙源永), 조원재(趙源在), 조원국(趙源國)을 낳았고, 조정호(趙正鎬)는 3명의 아들 조원갑(趙源甲), 조원덕(趙源德), 조원주(趙源柱)를 낳았다. 조원승(趙源勝)은 2명의 아들 조영식(趙英植), 조웅식(趙雄植)을 얻었고, 조원근(趙源根)은 1명의 아들 조대식(趙大植)을 얻었다. 아래의 후손과 함께 모든 외척 후손을 다 기록할 수 없다.

아! 세월이 오래되면 사적(事蹟)을 유실할까 걱정하여 그 감춰진 덕과 아름다운 행실을 기록하여 드날리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조상을 계승하고 후손이 이어 나감에 순서 없이 대략 서술하였다. 청렴하고 강직한 후손이 가난하여 제수 물품을 갖추기 힘들어 오랫동안 신도비를 세우지 못했다. 이제야 가까스로 묘갈(墓碣: 무덤 앞에 머리 부분을 둥글게 다듬어 세운 비석)을 세워 글을 새겨 영원토록 보이노라.

단기 4310년(1977) 정사 월 못난 고손자 조성호(趙成鎬) 울며 기록하여 세움

조병갑 아버지 조규순의 신도비 비문을 살펴보면, 양주조씨 시조를 비롯한 조상들을 소개하면서 조규순 본인의 약력을 밝히고 있으며, 후손들이 누구인지를 나열하고 있다. 조병갑에 관한 내용으로는, 조병갑은 측실 김해김씨의 아들로 부사를 지냈으며 2남 1녀의 자손을 두었다고 밝히고 있을 뿐이다. 족보에 있는 내용과 다를 바 없는데, 기대했던 조병갑에 관한 기록으로는 너무 짧은 내용이다. 하지만 일반인이 족보를 쉽게 볼 수 없고 조병갑 관련 자료가 거의 없던 예전에는 이 비문을 통해 조병갑이 서자 출신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조규순 신도비를 보면, 이 비석을 단기 4310년(1977) 고손자 조성호가 세웠다고 하는데 조성호가 세운 비석이 또 있다. 조규순 묘(신풍면 평소리 산15-2)와 조병갑 묘(신풍면 평소리 산15-5) 서쪽 산자락에 있는 조경희 묘(신풍면 평소리 산15-5) 비석에 새겨진 내용을 살펴보면, 이 비석도 단기 4310년 손자 조성호가 세운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조성호는 백광약품 및 한국화이자를 창립한 인물로, 조규순 후손 가운데 크게 성공하여 1977년 고조할아버지 조규순 묘와 할아버지 조경희 묘에 각각 비석을 세운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고 보면 조규순 묘와 조경희 묘에 처음부터 비석이 세워져 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조규순은 1868년 70살로 사망하고 조경희는 1890년 31살로 사망하여 비석이 세워진 1977년과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한편, 조성희가 1977년에 비석을 세울 때 조병갑 묘에도 비석을 세울 수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조병갑은 조성호의 직계 혈통이 아니므로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조병갑 묘에 비석이 없는 것은 후손들 가운데 크게 성공한 이가 없거나 아니면 이곳이 조병갑의 무덤이라고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공주 신풍면 평소리 사랑골 마을 사람이 전해주는 이야기에 따르면, “약장사로 크게 성공한 이가 때가 되면 사랑골로 찾아와 마을 분들에게 선물을 나눠주고 양주조씨 무덤을 관리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는 조성호로 여겨지는데, 조성호는 2008년 사망하여 이곳 평소리에 묘(공주시 신풍면 평소리 산15-5)가 들어섰다. 조성호 묘비석 뒷면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다음에 '3. 추천받아 시작한 관직과 예산·천안·보성·함양·김해·고부 수령 조병갑'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