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 같은데 잘 모르는 조병갑, 조병갑보다 더한 조병식과 조병직(06)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의 공주집회 탄압과 고등재판소 판사 조병갑·조병직의 동학교주 재판 (06) 조병갑 아들들, 일제강점기 면장, 친일신문 기자로 지내고, 조병갑 선정비가 함양·김해·천안에 전해진다
동학농민혁명과 관련 있는 인물, 조병갑과 조병식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어 발품 팔아 조사했습니다. 하고 나니 조병직에 대한 정리도 필요하여 추가 조사하였습니다. 그 결과, A4로 200쪽 되는 글을 16회로 나누어 공유하고자 합니다. 재미없는 글이긴 하나, 조병갑ㆍ조병식ㆍ조병직을 알면 동학농민혁명을 아는 데 나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인간 전병철(작가)
6. 조병갑의 자식과 자손
양주조씨 족보에 따르면 조병갑은 장남 조찬희와 차남 조강희를 두었으며 딸 1명을 두었다. 하지만 전하는 이야기를 보면 족보에 실리지 않은 자식이 더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없고 전하는 이야기만 있을 뿐이다. 조병갑 자식이나 자손에 관한 자료도 별로 없었다. 양주조씨 족보를 살펴보아도 조병갑 자손에 대한 기록은 조병갑 형제 집안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적은 편에 기록된 내용이 별로 없었다. 족보 이외에 다른 자료도 마찬가지였다. 하여 조병갑 자식과 자손 가운데 그나마 알려진 이들을 중심으로 소개할 수밖에 없다.
▣장남 조찬희(趙瓚熙, 1880~?)▣ 조병갑의 측실 청송심씨가 나은 아들인 장남 조찬희는 양주조씨대종회 족보에 따르면 참봉(參奉)을 지내고 1891년 진사(進士)가 된 것으로 나와 있다. 참봉은 조선시대 있었던 종9품 벼슬로, 원(園)·능전(陵殿) 및 사옹원(司饔院)·내의원(內醫院)·예빈시(禮賓寺)·군기시(軍器寺)·군자감(軍資監)·소격서(昭格署) 등 많은 관서에 속해 있었던 관직이다. 참봉은 최말단의 관직이지만 양반 신분을 유지할 수 있고 족보에 기재되며 비석에 직함을 새길 수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조선왕조 후기와 대한제국 최후까지 능참봉 하나라도 얻기 위해 많은 갖은 노력을 하였다고 한다.
족보에는 참봉과 진사 이외에 조찬희의 행적을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 없다. 다만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다른 자료를 통해 조찬희가 청양에서 살면서 말년의 아버지와 함께 지내며 지역 사람들과 좋지 않은 일로 몇 차례 갈등을 일으킨 일과 지역 사람과 갈등을 빚을 때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는 말까지 들었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조찬희는 일제강점기 면장·군수 역임했다고 하나 구체적인 사실은 확인되지 않으며, 1920년 40세 나이에 청양군 비봉면장(飛鳳面長)을 지냈다고 한다. 그가 언제 사망하였는지도 확인되지 않고, 족보에 따르면 묘는 청양이 아닌 예산군 대흥면에 있으며, 아내 청송심씨(靑松沈氏, 이조판서 심상훈의 딸)와 합장하였다고 한다. 더는 자료가 없어 확인되는 바가 없다. 그의 자식이나 자손으로 누가 있었는지조차도 자료가 없어 확인되지 않는다.
▣차남 조강희(趙岡熙, 1889?~?)▣ 조병갑의 본처 전주이씨 이병양(李秉兩, 판서 이병문의 딸)이 나은 아들인 차남 조강희는 언론인으로 나름 활동하여 그나마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있는 편이다. 다만 그의 출생 연도에 대해 양주조씨대종회 족보에서는 “己亥(一八八九)四月八日生”으로 나오나, ‘기해(己亥)’년은 1889년이 아닌 1899년이며, 1889년은 ‘기축(己丑)’년이다. 한편, 조강희의 호적등본에서는 출생 연도가 “西紀 壹八九八年 四月 八日”이라고 하여 1898년[무술(戊戌)]으로 나오고 있다. 이렇게 1889(己丑), 1899(己亥), 1898(戊戊)년으로 나오는데, 어느 연도가 정확한지 확인이 더 필요하다.
조강희의 원적(原籍: 혼인·입양 등으로 옮기기 전의 원래 호적)은 서울[호적등본에는 경성부 장교정(京城府 長橋町)으로 나옴]이며, 자(字)는 수여(壽如)이고, 아내는 연안이씨(延安李氏, 국장 이도익의 딸)이다. 참봉을 지냈다 하며, 일제강점기 언론인으로 활약하여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와 『매일신보』 기자로 활동하였다. 『경성일보』와 『매일신보』는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총독부 통감으로 부임한 후 침략 정책을 효율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1906년 창간한 신문이었다. 총독부는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은 후 『경성일보』(일본어), 『매일신보』(한국어), 「서울 프레스』(영어) 이렇게 3개 언어로 기관지를 발행하였다.
이후 조강희는 『동아일보』 기자, 『시대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철필구락부(鐵筆俱樂部)’ 사건에 참여하기도 하였는데, 철필구락부는 사회부 기자들이 중심이 되어 1924년에 서울에서 창립한 언론단체이다. 철필구락부는 1925년 『동아일보』·『조선일보』·『시대일보』 기자들이 사회부 기자의 급료를 인상하라고 경영진들에게 요구한 일도 있었고, 일제의 민족 언론 탄압에 항거하여 언론 옹호 연설회를 개최하기도 하는 등 1920년대 중반 언론인 단체활동의 구심점이 되었다가 192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활동이 중단되었다. 그리고 조강희는 『시대일보』 정치부장으로 일할 때 일본어로 「한국인의 이름 짓는 법」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쓰기도 하였으며, 1929년 『조선일보』 전주특파원 전주지국장으로 있으면서 「지방발전과 언론의 사명」이라는 글을 쓰기도 하였다.
조강희는 일본인 이토 간도[伊藤韓堂]가 경영하던 ‘조선사상통신사(朝鮮思想通信社)’를 거쳐 친일 신문인 『동광신문』에서 주필 겸 편집국장을 맡았다. 『동광신문』은 전북 전주에서 한국어로 발행된 일간지로 일본인이 경영하던 『전북일보』의 자매지 형식으로 1920년 11월 18일에 창간된 신문이다. 『동광신문』 사장은 『전북일보』 사장인 일본인이 겸하고, 편집국장 또는 주필은 한국인이 맡아 이에 조강희가 주필 겸 편집국장 역할을 하였다. 이 외에도 조강희는 전주에 살면서 1933년 전주 제5회 시민대운동회 준비위원회 서무부장, 1935년 전주금융조합 평의원(評議員) 등을 역임하며 지역 사회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조강희는 『매일신보』 충남지사장, 『전북일보』 편집 고문을 지냈으며, 친일 단체 대동사(大同社)의 비행기 헌납 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에는 『중앙일보』 논설위원, 『자유신문(自由新聞)』 편집부 국장을 지냈다. 이렇게 조강희는 일제강점기 통감부 기관지였던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에 근무하고, 친일 신문 『동광신문』에서는 주필 겸 편집국장, 해방 후에는 한국 신문 100인으로 소개될 정도로 영화를 누리며 살았다. 하지만 조강희는 친일 반민족 정책에 앞장섰음에도 친일반민족행위자 기준에는 들지 않았는지 『친일인명사전』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수록되지는 않았다.
이런 조강희의 활약에도 그가 언제 사망하였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또 그의 묘가 어느 곳에 있는지, 해방 후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았는지 이에 대해서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그의 손녀 조기숙이 밝힌 “할아버지가 일제 때 매일신문에서 일한 친일파였으나 8·15해방 이후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 무위도식하다 돌아가셨다”라는 이야기를 통해 일부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손자 조중완(趙重完, 1933~2019)▣ 양주조씨대종회 족보에는 아직 이름밖에 올라간 것이 없지만, 다른 자료를 통해 약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중완은 원적(原籍)이 전주[호적등본에는 전북 전주군 전주읍(全州邑) 완산정(完山町)으로 나옴] 출신으로, 대전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표준협회 부회장, 한국 1호 품질관리 컨설턴트, 사회경영전략연구원 원장(회장) 등을 역임한 품질경영 전문가로 파악된다. 그리고 ‘한국형 TQM’ 개발, 기업 수준을 고려한 맞춤식 ‘한국형 6시그마 프로그램’ 개발, 전략경영과 TQM의 방침 관리를 융합한 ‘한국형 경영혁신 프로페셔널 프로그램’ 개발, ‘맞춤식 경영혁신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 경영 분야에서 큰 역할과 함께 큰 성과를 거둔 이로 알려져 있다.
▣증손녀 조기숙(趙己淑, 1959~)▣ 조병갑과 관련하여 근래에 널리 알려진 이가 조병갑의 증손녀 조기숙이다. 이화여자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조기숙은 열린우리당 공천심사위원·정당개혁추진단장, 참언론을지지하는모임 자문위원, 노무현 대통령취임사 준비위원, 노무현 참여정부 대통령비서실 홍보수석(2005.02.~2006.02.) 등을 역임하면서 조·중·동(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 언론 등 보수 진영과 대립하기도 하였다.
이에 조선일보는 월간조선(2006년 11월호, 12월호)를 통해 그녀의 집안을 파헤쳐 ‘조기숙이 조병갑의 증손녀’임을 밝혀짐으로써 큰 파문이 일어났다. 더불어 조병갑의 선정비가 김해에도 있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고, 조병갑을 비롯한 그의 후손들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당시 조기숙은,
“저는 저의 조상에 대해 감출 것도 없고 감춘 적도 없습니다. 조상의 과거가 저의 공직 수행과 관련이 있다면 당연히 공개적으로 밝혀야겠지요. 하지만 저는 조상의 이름을 팔아 명예나 권력을 누리지도 않았고 그 재산을 물려받아 호의호식하지도 않았습니다. 저의 아버지나 저는 모두 자력으로 공부했습니다.”
“고부군수(증조부 조병갑)가 고부에 부임하기 직전 김해부사를 지냈고 그곳에서 선정을 베풀어 마을 주민들이 공덕비를 세웠습니다.”
“군수(증조부 조병갑)는 재판을 받고 귀양을 간 것이 아니라 무죄선고를 받았으며 재판을 담당했던 판사가 군수의 인물됨에 반해 사돈을 맺었습니다.”
“이미 학계에서는 저희 증조부(조병갑)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 오류일 수도 있다는 학자들의 논문이 발표된 바 있습니다. 어떤 역사적 사건은 한 개인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한때 역사학도가 되어 억울한 가족사를 바로잡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그 희생양이 된다면 그리 나쁠 것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등의 발언을 하여 증조부 조병갑과 자신을 변명하기도 하였는데, 이에 조선·중앙·동아일보 등 주요 언론사뿐만 아니라 진보 언론사로부터 반발을 사는 것은 물론 역사학계와 진보 진영, 동학농민혁명 유족으로부터 비난받기도 하였다. 결국, 조기숙은 ‘동학농민혁명 112주년 기념 유족의 밤’ 자리에 참석, “여러분의 한이 풀릴 때까지 108배 계속할 것”이라고 말하며 공개적으로 사과하기까지 하였다.
여하튼 조기숙이 참여정부 핵심 세력으로 활동하면서 조병갑과 그 후손에 대한 세상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의아하게도 조선일보에 의해 조병갑 집안의 민낯이 세상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조병갑의 선정비는 물론 아버지 조규순의 선정비에 대한 논란과 함께 증손녀 본인 조기숙과 손자 조중완, 아들 조찬희와 조강희 등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세상은 이렇게 엉뚱한 곳에서 문제가 일어나 역사의 근본 문제로 들어서기도 하니 참 알 수 없는 게 세상이다.
7. 조병갑이 남긴 흔적들
조병갑과 관련 있는 역사적 흔적으로는 우선 선정비(善政碑)가 있다. 선정비는 벼슬아치(관리)가 백성을 잘 살피고 어질게 다스려 그를 표창하고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또는 비갈)이다.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란 뜻으로 공덕비(功德碑), 공덕을 칭송하고자 세운 비석이라는 뜻에서 송덕비(頌德碑)라고도 한다. 또 그 은혜를 ‘잊지 않겠다’라는 뜻을 불망비(不忘碑)라고도 불리었으며, ‘사랑을 베풀었다’라는 뜻에서 유애비(遺愛碑)라고도 불리었는데, 유애비는 지방의 관찰사 및 고을의 수령 중 전쟁이나 재난 등으로 순절 또는 전사(戰死)하였던 이들을 위해 부르는 명칭이기도 하다.
이런 선정비는 대개 관리가 선정을 베푼 사실을 해당 관청에서 조사하고 심의하여 그 내용을 임금께 올려 허가받은 다음에 세우게 하였다. 하지만 지역 주민이 정성을 모아 직접 세우기도 하고, 관례처럼 고을 수령이 바뀔 때마다 공덕비를 세우곤 하였다. 그런데 수령 가운데는 자신이 선정을 베풀지 않았음에도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자기 돈으로 억지로 선정비를 세우는가 하면, 심지어 지역 주민을 위협하여 강제로 선정비를 세우기까지 하였다. 특히 부정부패를 일삼던 수령, 즉 탐관오리일수록 자신을 청렴한 관리로 위장하기 위해 강제로 선정비를 세우는 일이 많았다. 이에 조선 후기에 선정비를 둘러싼 분쟁이 적잖았으며, 현종 4년(1663)에 왕명으로 ‘선정비 건립 금지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때뿐이었는지 다음 왕인 숙종 10년(1684)에 왕이 “1663년 이후 세운 선정비들을 모조리 없애라”(『숙종실록』 1864년 8월 3일) 명하기도 하였다. 그래도 선정비 건립은 사라지지 않았는지 영조 42년(1776)에 “선정비를 세운 사또는 물론 숨어 있던 선정비를 발견한 사또까지 왕명 위반으로 규정해 중형을 내리도록”(『영조실록』 1766년 6월 5일) 명령하기도 하였다. 이에 선정비 건립이 줄어들긴 하였으나 삼정(三政)의 문란이 극에 달하던 19세기, 헌종 때부터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1863년 고종 즉위와 함께 급증하였다. 심지어 한 명이 여러 개의 선정비를 세우는 일까지 벌어졌다. 말이 백성에게 선정을 베푼 ‘선정비(善政碑)’지, 정작 백성을 착취한 ‘탐학비(貪虐碑)가 적잖게 있었다. 하여 선정비라고 하여 해당 관리가 백성에게 선정을 베푼 관리라고 무조건 평가하지 않고 당시 사정을 따져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조병갑 선정비
현재 조병갑 선정비로 알려진 것으로는 경남 함양과 김해, 그리고 충남 천안, 이렇게 3기 정도 전해지고 있다. 경남 하동에도 조병갑 선정비가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확인되지 않고 있다. 조병갑이 하동에 지방관으로 근무한 적도 없는 만큼 잘못 전해진 게 아닌가 싶다.
현재 전해지는 조병갑 선정비 3기 가운데 오래전부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함양 상림공원 안에 있는 ‘군수조후병갑청덕선정비’이다. 김해 생림면행정복지센터 앞 주차장가 비석군에 있는 ‘부사조후휘병갑영세불망비’는 2006년 증손녀 조기숙이 한 발언이 문제가 되면서 널리 알려진 선정비다. 그리고 2009년 천안 광덕면 매당리 길가에서 발견된 ‘군수조후병갑청휼애민선정비’는 가장 최근에 알려진 선정비이다. 이렇게 조병갑 선정비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순서는 함양, 김해, 천안에 있는 선정비 순이다.
한편, 조병갑이 지방 수령으로 근무한 이력은 예산현감(1877), 비안현감(1882), 천안군수(1882), 직산현감(1885, 부임하지 않음), 보성군수(1885), 풍기군수(1886, 부임하지 않음), 함양군수(1886), 김해부사(1887), 영동현감(1889, 부임하지 않음), 고부군수①(1889), 고부군수②(1892), 익산군수(1893, 부임하지 않음), 고부군수③(1894) 순이다. 조병갑은 고부군수를 3번 지냈는데, 1889년 고부군수로 발령받아 근무 3개월 만에 모친상으로 사직하여 삼년상을 치른 후 1892년 고부군수로 재발령받았고, 1893 익산군수로 발령받았으나 가지 않고 고부에 계속 남아 있다가 1894년 고부군수로 재임명되었다.
❚조병갑 청덕선정비(군수조후병갑청덕선정비)❚
∙현재 위치_경남 함양군 함양읍 대덕리 251-4 상림공원 안 ‘역사인물공원’
∙건립 시기_1887년 7월
조병갑은 1886년 4월 29일 함양군수로 발령받아 7월 함양에 도착하여 김해부사로 발령받은 1887년 6월 18일까지 1년 2개월 정도 함양군수로 근무하였다. 그리고 그가 함양군수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푼 것을 기리는 선정비 ‘군수조후병갑청덕선정비’는 그가 함양군수에서 김해부사로 발령받은 지 1개월 후인 1887년 7월에 세워진 것이다.
현재 조병갑 선정비는 경남 함양군 함양읍 상림(上林)공원 안 각종 비석·비갈과 인물상 등을 모아놓은 ‘역사인물공원’으로 옮겨져 전해지고 있다. 더불어 이곳에는 조병갑 아버지 조규순의 ‘군수조후규순영세불망비’ 등도 함께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함양 상림에 있는 조병갑 선정비는 비문 내용에 대한 설명문과 함께 비석(비갈)에 관한 안내문까지 설치하여 찾는 이로부터 알기 쉽게 정비해 놓았다(설명문에 한자를 해석한 내용이 없어 아쉽긴 하지만). 그리고 설명문 이외에 안내문이 설치된 데에는 조병갑 선정비에 대해 오래전부터 적잖은 논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탐학으로 동학농민혁명을 일어나게 한 계기를 마련한 대표적인 탐관오리인 조병갑이 함양군수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를 세웠다는 것, 더구나 ‘淸德(청렴하고 높은 덕)’으로 선정을 베풀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거짓이라는 지적이 계속 있었다. 이런 문제 제기와 함께 조병갑 선정비를 철거해야 한다는 움직임과 함께 2007년에는 비석을 훼손하는 일까지 벌어졌으며, 결국 함양군의회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여 최종 결정을 하였다. 그 결과 비석을 그대로 보존하는 동시에 이 선정비의 주인공 조병갑이 탐관오리였다는 사실을 안내하는 글을 함께 세워두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잘못된 역사도 역사인 만큼 아예 철거하여 없던 것처럼 하는 것보다 역사적 단죄와 함께 그대로 보존하여 역사적 교훈으로 삼자는 뜻이었다.
함양 상림 조병갑 청덕선정비에서 특이한 점은 뒷면에도 앞면과 같은 방식으로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글자가 새겨진 비석 뒷면에 또다시 같은 글자를 새겨 마치 2개의 비석인 것처럼 말이다. 뒷면 글자는 마모가 심하고 훼손된 것도 있어 글자를 알아볼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인데, 중앙에 ‘군수조후○○○○선정비(郡守趙侯○○○○善政碑)’라는 글자는 어느 정도 확인된다. 아마 훼손되어 보이지 않는 글자는 ‘병갑청덕(秉甲淸德)’이나 ‘병갑애민(秉甲愛民)’이 아닐까 싶다. 이에 대한 좀 더 면밀한 조사와 함께 설치한 설명문이나 안내문에 이런 내용까지 밝혀주면 이곳은 찾는 이가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싶다.
❚조병갑 영세불망비(부사조후휘병갑영세불망비)❚
∙현재 위치_경남 김해시 생림면 봉림리 642(봉림로 40) 생림면행정복지센터 앞마당
∙건립 시기_1889년 9월
조병갑은 1887년(고종 24) 6월 18일 김해부사로 발령받아 8월에 김해부사로 부임하여 1889년 2월까지 약 1년 6개월 동안 근무하였다. 김해부사로 부임한 지 1년이 조금 지난 1888년 9월에 자신의 선정비 ‘부사조후휘병갑영세불망비’를 세웠다. 현재 조병갑 선정비는 생림면행정복지센터 앞마당 끝에 선은대(宣恩臺)를 비롯한 다른 비석과 함께 전해지고 있다. 다만 이들 비석에 대한 설명문이나 안내문이 없어 이들이 무슨 비석인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기왕 보존할 것이라면, 설명문이나 안내문 하나라도 설치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김해 생림면에 있는 조병갑 선정비는 이에 대한 별다른 안내문이 없어 이 비석이 무슨 비석인지 알기 쉽지 않을뿐더러 비석에 새겨진 글씨마저 마모되어 그 내용 또한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파악되는 글자를 중심으로 해석하면 “조병갑이 김해부사로 온 이래 절실한 염원으로 근심을 나누어 곡식이 잘 자라 그 은혜에 감격하여 눈물이 흐르고 만민이 고마워하며 그의 행위는 천고에 빛날 것”이라는 내용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한마디로 김해부사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어 이 선정비를 세웠다는 것인데, 이에 대한 다른 주장도 있다.
김해에 조병갑 선정비가 세워진 배경은 이렇다고 한다. 1884(고종 21년)에 김해 생림면 지역은 극심한 가뭄으로 농작물이 아예 다 말라 죽어 백성들의 삶이 매우 어려웠다. 이에 지역 유지들이 피해지역의 지세(地稅: 땅세, 토지세)를 면제해 줄 것을 바라는 건의서를 부사 조병갑에게 제출하였고, 조병갑은 이를 경상도 관찰사에게 전달하였다. 관찰사 이호준(李鎬俊: 이완용의 양아버지)은 이곳을 돌아보고 그 현실을 조정에 알렸으며, 이에 영의정 심순택(沈舜澤)이 나서 세금을 전면 면제받도록 헸다. 그 후 이곳 생림면 주민의 성금으로 1888년 9월에 선은대 비석과 함께 영의정 심순택 영세불망비, 순찰사 이호준 영세불망비, 부사 조병갑 영세불망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들 비석과 병조참판 이유인(李裕寅) 송덕비를 포함한 총 5개 비석이 1982년 생림면행정복지센터 앞마당으로 옮겨져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김해 조병갑 선정비는 조병갑이 정녕 선정을 베풀어 세워졌다기보다는 당시 조병갑이 기회를 잘 잡아 영의정 심순택과 관찰사 이호준의 선정비를 세운다면서 자신의 선정비까지 세운 것이라고 한다. 재임 기간에 자신의 선정비를 세운 셈이다. 정녕 백성을 생각하고 선정을 베푼 수령이라면 자신의 선정비를 스스로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하여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진 것이 아니라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세운 것이며, 이런 게 탐관오리의 전형적인 행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조병갑 청휼애민선정비(군수조후병갑청휼애민선정비)❚
∙현재 위치_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매당리 565-1(댕댕이‧쇠골마을 사이 밭 중간)
∙건립 시기_알 수 없음
함양과 김해에 이어 천안에서도 조병갑 선정비가 있다는 사실이 2009년에 알려져 관심을 끌었다. 선정비가 발견된 곳은 천안 광덕면 매당리 댕댕이와 쇠골마을 사이 컨테이너 주택 밭 중간 지역으로, 옛날 이곳은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주변에 주막이 있던 지역이라고 한다. 현재 옛길은 없어진 편이며, 그 앞으로 큰 길이 새로 나 있다.
조병갑은 1882년 3월 비안현감(현 경북 의성군수)이 되었다가 같은 해 10월에 천안군수가 되었다. 천안군수로 있을 당시 유배 가는 죄인을 놓쳐 징계받기도 한 조병갑은 1885년 3월 직산현감으로 발령받았으나 부임하지 않다가 같은 해 4월에 보성군수로 임명되었다. 하여 조병갑은 천안군수로 약 2년 반 정도 근무하였다.
천안 광덕면에서 발견된 조병갑 선정비는 마모가 심해 글자 판독이 어려워 비갈이 세워진 연대를 파악할 수 없다. 하여 조병갑이 천안군수로 있으면서 세운 것인지,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어 세워진 것인지, 그 뒤에 세워진 것인지 알 수 없다. 확인할 수 있는 자료도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조병갑 선정비가 발견된 장소를 2024년 직접 찾아가 보니 비갈 몸뚱이는 없어지고 받침돌만 남아 있었다. 어디로 옮겨졌는지, 박물관으로 옮겨간 것은 아닌지, 조병갑 후손들이 몰래 가져가 숨겨놓은 것은 아닌지, 아니면 아예 없애버렸는지, 이에 대해 매당리 마을 사람에게 물어보니 자신들도 사라진 걸 몰랐다고 한다. 관련 있는 사람을 통해 알아봐도 파악되지 않는다.
<다음에 '2)조규순 3)조병갑 집안 관련 선정비와 4)마곡사 대광보전 칠성태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