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 같은데 잘 모르는 조병갑, 조병갑보다 더한 조병식과 조병직(07)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의 공주집회 탄압과 고등재판소 판사 조병갑·조병직의 동학교주 재판 (07) 조규순, 조두순, 조진익 선정비가 함양·태인, 공주·광주, 논산·남원에 전해지고, 공주 마곡사 대광보전 칠성탱화에 조병갑이 시주하였다

2026-03-23     인간 전병철

동학농민혁명과 관련 있는 인물, 조병갑과 조병식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어 발품 팔아 조사했습니다. 하고 나니 조병직에 대한 정리도 필요하여 추가 조사하였습니다. 그 결과, A4로 200쪽 되는 글을 16회로 나누어 공유하고자 합니다. 재미없는 글이긴 하나, 조병갑ㆍ조병식ㆍ조병직을 알면 동학농민혁명을 아는 데 나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인간 전병철(작가)

 

2) 조병갑 아버지 조규순 선정비

조병갑 아버지 조규순의 선정비는 현재 2기가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경남 함양 상림(上林)공원에 있는 ‘군수조후규순영세불망비’와 전북 정읍 태인 피향정(披香亭)에 있는 ‘현감조후규순영세불망비’가 그것이다. 둘 다 조병갑이 함양군수로 있으면서 이미 세워져 있는 비석을 새롭게 단장하며 다시 세운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함양 상림공원에는 조규순의 선정비와 함께 그의 막내아들 조병갑의 선정비도 전해지고 있는데, 조규순과 그의 아들 조병갑 모두 함양군수를 지낸 일로 선정비가 세워졌다. 조규순은 1845년(헌종 11) 5월 3일 함양군수로 임명되어 6월 5일 함양에 부임, 근무한 것으로 파악되며, 조병갑은 1886년 4월 29일 함양군수로 발령받아 7월 함양에 도착하여 김해부사로 발령받은 1887년 6월 18일까지 1년 2개월 정도 함양군수로 근무하였다.

❚조규순 영세불망비(군수조후규순영세불망비)❚

∙현재 위치_경남 함양군 함양읍 대덕리 251-4 상림공원 안 ‘역사인물공원’ 비석군

∙건립 시기_1849년 8월, 1886년 10월 단장

함양군수 조규순이 선정을 베푼 것을 기리고자 1849년(헌종 15) 8월에 ‘군수조후규순영세불망비’가 건립되었다. 이후 그의 계자(季子: 막내아들) 조병갑이 1886년 4월 함양군수로 발령받아 7월 함양에 도착하여 근무하면서 10월에 이미 건립된 아버지 조규순의 선정비에 비각(碑閣: 비를 보호하기 위한 지은 건물)을 만들어 새롭게 단장하며 옮겨 다시 세웠다. 그러나 현재 함양 상림공원 안 ‘역사인물공원’ 비석군에 전해지는 조규순 선정비는 비각은 없어지고 비석만 남아 설명문과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조규순 영세불망비(현감조후규순영세불망비)❚

∙현재 위치_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창리 102-2(태산로 2951) ‘피향정 비석군’

∙건립 시기_1893년 2월

조병갑 아버지 조규순은 1841년 8월 5일 태인현감(泰仁縣監)으로 임명되어 1845년 5월 3일 함양군수로 발령받기까지 3년 9개월 정도 태인현감으로 근무하였다. 조규순이 태인현감으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어 그를 기리고자 선정비가 세워졌다. 그런데 그의 아들 조병갑이 1892년 고부군수가 되어 태인에 세워져 있는 아버지 조규순의 선정비를 새롭게 단장하기 위해 고부 백성들로부터 강제로 1,000냥을 걷어 1893년 2월 조규순 선정비에 비각(碑閣)을 만들며 다시 세웠다. 자신이 담당한 지역이 고부가 아닌 함양임에도 고부 백성의 돈을 걷어 정읍 태인에 선정비를 세우는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질렀다.

그런 까닭인지, 조병갑의 탐학을 벌하였음인지 태인 조규순 선정비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이후 비각은 헐리고 비석(비갈)은 훼손되는가 하면 땅에 묻히기도 하였다. 아들을 잘못 둔 탓으로 아버지까지 수난받는 꼴이 되었다.

현재 조규순 영세불망비는 호남 제일의 정자(亭子)로 불리는 태인 피향정(披香亭, 1863년 보물로 지정)으로 옮겨져 다른 비석·비갈과 함께 비석군을 이루고 있다. 조규순 영세불망비는 이 비석군 왼쪽 구석 첫 번째에 세워져 전해지고 있다. 비갈 뒷면 새겨진 글자 가운데 ‘병갑(秉甲)’이라는 글자는 뭉개져 있다.

 

3) 기타 조병갑 집안 선정비

○조두순 선정비○ 조병갑의 큰아버지[백부(伯父)] 조두순(1796~1870)은 노론 4대신(老論四大臣: 조선 후기 경종 연간에 발생한 신임옥사 때 화를 당한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의 한 사람인 조태채(趙泰采, 양주조씨 14세)의 5대손(양주조씨 19세)으로, 자(字)는 원칠(元七), 호(號)는 심암(心菴), 시호(諡號) 문헌(文獻)이다. 1816년(순조 16) 진사시에서 합격하고, 1826년(순조 26) 황감제시(黃柑製試: 매년 제주도에서 진상한 밀감을 임금이 성균관 유생들에게 하사하면서 실시하던 과거시험)에 장원으로 뽑혔으며, 이어 1827년에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규장각 대교에 임명된 이래 1866년 영의정에 오르기까지 40년 동안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며 순조·헌종·철종·고종을 보필하였다.

조두순은 철종(哲宗) 말기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고자 설치한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 총재관(總裁官)을 지내기도 하였다. 1863년 철종이 자식 없이 사망하자 신정왕후(神貞王后, 추증 왕 익종의 왕비, 헌종의 어머니) 조대비(趙大妃, 풍양조씨)가 왕위 계승자를 결정할 수 있었다. 조대비와 손잡은 흥선군 이하응(李昰應)은 둘째 아들 명복(命福)을 조대비의 남편 이영(李旲)[효명(孝明)세자, 익종(翼宗)]의 양자로 들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흥선군 아들 명복은 고종(高宗)이 되고 흥선군(興宣君)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되었다. 이때 조두순은 조비대와 흥선군을 도와 고종이 왕위에 오르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에 조대비와 흥선대원군의 신임을 받은 조두순은 영의정이 되어 경복궁 재건과 대전회통(大典會通) 편찬, 삼군부(三軍府) 설치 등의 일을 하며 조정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조두순 선정비는 현재 충남 공주 공산성 입구 비석군에 세워져 있는 ‘우의정조공두순영세불망비’와 경기 광주 남한산성 안 비석군에 세워져 있는 ‘유수겸수어사조공두순선정비’, 이렇게 2기 전해지고 있다. 미처 알려지지 않은 게 있을 수 있지만, 현재까지 알려져 확인한 것으로는 이것뿐이다.

❚조두순 영세불망비[우의정조공두순영세불망비(右議政趙公斗淳永世不忘碑)]❚

∙현재 위치_충남 공주시 금성동 65-2(공산성길) ‘공산성 금서루 앞 비석거리’

∙건립 시기_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다.

❚조두순 선정비[유수겸수어사조공두순선정비(留守兼守禦使趙公斗淳善政碑)]❚

∙현재 위치_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1144-1(남문 안 동쪽 ‘남한산성 비석군’)

∙건립 시기_1851년 4월[뒷면에 ‘숭정기원후사신해사월 일입(崇禎紀元後四辛亥四月 日立)’이라고 새겨져 있다. *조두순이 1846년(헌종 12) 8월 25일 광주유수, 1847년 9월 21일 호조판서로 임명된 뒤인 1851년(철종 2) 4월에 세워진 비석이다.]

○조진익 선정비○ 조병갑의 할아버지 조진익(1762~1827)은 양주조씨 18세로 자(字)는 사현(士顯)이다. 1789년(정조 13) 소과(小科)인 사마시(司馬試: 생원과 진사를 뽑던 과거)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으며, 1801년 벼슬길에 들어서 여러 관직을 거쳐 1815년 12월 남원부사(南原府使)로 근무하였다. 그리고 1822년 9월 연산현감(連山縣監)으로 부임하여 근무하다가 1825년 4월 24일 평양서윤(平壤庶尹)으로 승진하였으며, 진주목사(晉州牧使) 겸 진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晉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 등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조진익의 선정비는 충남 논산 연산면 연산아문 앞에 세워져 있는 ‘현감조후진익영세불망비’와 전북 남원 광한루 안 비석군에 세워져 있는 ‘부사조공진익영세불망비’ 이렇게 현재 2기 전해지고 있다.

❚조진익 영세불망비[현감조후진익영세불망비(縣監趙候鎭翼永世不忘碑)]❚

∙현재 위치_충남 논산시 연산면 연산리 229-8 연산아문 앞 비석군

∙건립 시기_비석(비갈)에 시기를 파악할 만한 글을 찾지 못해 조성 날짜는 알 수 없다.

❚조진익 영세불망비[부사조공진익영세불망비(府使趙公鎭翼永世不忘碑)]❚

∙현재 위치_전북 남원시 천거동 78(요천로 1447) 광한루원 안 춘향사 옆 ‘30비석군’

∙건립 시기_1848년 6월[비석 뒷면에 ‘무신육월(戊申六月)’이라고 새겨져 있다. *조진익이 1815년(순조 15) 남원현감으로 임명되고 1818년(순조 18) 1월 남원부사로 승진하고, 그 뒤 한참 뒤인 1848년(헌종 14) 6월에 세워진 비석이다. 1845년 5월 3일 이조참판 겸 이조판서로 제수(贈吏參趙鎭翼贈吏判例兼)되고, 1850년 2월 10일 이조판서 겸 좌찬성으로 제수(贈吏判趙鎭翼贈左贊成例兼)된 것으로 보아 이조참판이나 이조판서를 지낼 때 세워진 것으로 짐작된다.]

 

4) 조병갑 부부가 시주한 공주 마곡사 대광보전 칠성도

공주시 태화산(泰華山) 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마곡사(麻谷寺,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567)는 전국의 통도사(양산)·부석사(영주)·봉정사(안동)·법주사(보은)·선암사(순천)·대흥사(해남)와 함께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이름으로 201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사찰이다. 이 마곡사 대광보전(大光寶殿) 안에 있는 여러 탱화(幁畵) 가운데 칠성도(七聖圖)를 모시는 일에 조병갑과 그의 부인 청송심씨가 시주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흔히 절에서 탱화 또는 불화를 마련하는 불사(佛事)를 할 때 보통 그 불사에 참여한 이들을 기록으로 남겨놓곤 한다. 대개 시주질(施主秩: 재물을 낸 사람들을 기록해 놓은 것)과 화주질(貨主秩: 재물을 마련하는 데 힘을 쓴 이들을 기록한 것), 연화질(緣化秩: 탱화를 그리는 데 참여한 사람들과 그 임무를 기록해 놓은 것) 등으로 구분하여 그 기록을 남긴다. 마곡사 대광보전 칠성도에도 그 기록이 있어 당시 칠성도를 모시는 불사에 동참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놓았다. 칠성도 시주질 맨 앞에 ‘조병갑(趙秉甲)과 심씨(沈氏) 양주(兩主: 바깥주인과 안주인, 부부)’라고 적혀 있다.

마곡사 대광보전 칠성도 시주질 내용을 살펴보면, ‘사랑동(舍郞洞)’은 공주시 신풍면 평소리 ‘사랑골’ 마을을 가리키고, 건명(乾命: 남자 또는 남자가 태어난 해) ‘갑진생조병갑(甲辰生趙秉甲)’은 1844년 출생한 조병갑 본인, 곤명(坤命: 여자 또는 여자가 태어난 해) ‘병오생심씨(丙午生沈氏)’는 1846년 출생한 청송심씨(靑松沈氏)로 조병갑의 측실(첩)을 가리킨다. 또 봉모(奉母: 봉양하는 어머니) ‘정축생김씨(丁丑生金氏)’는 1817년 출생한 김해김씨(金海金氏)로, 아버지 조규순의 첩이자 조병갑의 친어머니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양주(兩主)’는 조병갑 부부를 가리키며, ‘비남(卑男)’은 아들이란 뜻으로 조병갑 자신을 낮춰 부르는 말 같으나 정확한 뜻은 좀 더 살펴봐야 할 듯하다. 여하튼 조병갑 부부가 시주질 맨 앞에 등장하고, 함께 시주한 다른 이들과 달리 ‘봉모정축생김씨비남(奉母丁丑生金氏卑男)’이라는 글까지 있는 것을 보면 시주하는 데 조병갑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동안 조병갑의 측실 청송심씨와 친어머니 김해김씨의 출생·사망 연도를 알 수 없었는데 이곳 마곡사 칠성도에 적혀 있는 기록을 통해 조병갑의 측실 청송심씨가 1846년(병오년) 출생하고, 친어머니 김해김씨가 1817년(정축년) 출생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칠성도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이에 대한 기록은 없어 당시 조병갑이 어떤 생활을 하면서 칠성도 시주를 하게 되었는지를 비롯하여 시주한 정확한 시기를 파악할 수 없었다. 다만 조병갑이 친어머니 김해김씨를 봉양할 때 칠성도 불사가 이루어진 점과 조병갑이 1889년 고부군수로 근무한 지 3개월 후쯤에 어머니가 사망하여 조병갑이 고부군수를 사직하고 삼년상을 치른 후인 1892년 고부군수로 재발령받을 것을 고려하면 마곡사 칠성도 시주 불사는 1889년 고부군수를 지내기 이전에 있었던 일로 짐작된다. 하여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 조병갑이 공주로 도피하여 숨어지낼 때 마곡사 칠성도 불사에 시주한 것은 아닌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으로는 ‘봉모(奉母)’를 ‘봉양하는 어머니’가 아닌 ‘봉양하던 어머니, 친어머니’라는 일반적인 의미로 해석하면 꼭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마곡사 칠성도 불사에 시주한 것으로만 볼 수도 없다. 친어머니가 돌아가신 한참 뒤에 시주하면서 친어머니라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봉모(奉母)’를 사용했을 수도 있다. 그런 만큼 정확한 연대에 대해서는 좀 더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여하튼 마곡사 대광보전 칠성도 기록을 통해 조병갑이 공주 신풍면 평소리 사랑골에서 아내 청송심씨와 함께 친어머니 김해김씨를 봉양하며 살았던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다.

덧붙여 마곡사 대웅보전 칠성탱화 제작에 19세기 중반~20세기 초까지 계룡산 지역을 중심으로 전통 불화(佛畫)의 맥을 이어온 화승(畵僧)으로 유명한 금호당(錦湖堂) 약효(若效) 스님이 참여한 것으로 보아,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도 있는 만큼 눈여겨볼 만하다. 마곡사 대광보전 칠성도 외에 약효 작품으로 마곡사 청련암 석가모니불도(1861), 갑사 대비암 독성도(1883), 공주 유구읍 상세리 산신각 산신도(1896) 등이 공주에 전해지고 있다.

 

5) 기타 조병갑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이야기

조병갑이 공주에 살았던 만큼 공주와 공주 주변에 그와 관련 이야기가 종종 전해지고 있다. 조병갑이 동학농민혁명을 피해 공주 유구읍 동해리 사락골(선학동)에 은신하며 살던 집터와 특히 낮에 숨어 있던 동굴(일명 ‘조고비굴’)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또 조병갑이 동해리에 숨어 살면서 ‘공주동해리산향계’에 가입하여 산신제를 지낼 때 축문을 읽기도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에 대해서는 앞에 서술한 ‘조병갑의 관직 생활’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공주와 동학농민혁명』(박맹수·정선원, 2015)에 따르면, 조병갑이 동학농민혁명을 피해 공주로 들어와 숨어 사던 집이 공주시 사곡면 대중리 한시랭이에 있었다고 하며, 조고비(조병갑)가 유구 문금리 용수골에서 동해리 사락골로 수레를 타고 가기 위해 닦은 길(일명 ‘조고비 수레길’)도 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는 가운데 청양군 정산면 남천리 천방실 고랑이라는 곳에서 조병갑이 탄 가마의 가마채(가마 밑 양편에 앞뒤로 나오게 세로로 지르는 기다란 나무. 가마를 멜 때 이 나무 끝에 멜빵을 걸고 손으로 잡는다)가 부러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조병갑 몸이 너무 뚱뚱하여 그 몸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가마채가 부러졌다는 것인데 그만큼 가마꾼들이 고생하였다는 것과 조병갑이 뚱뚱하였던 만큼 잘 먹고 호사를 누리며 살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런 일이 구체적으로 언제 일어난 일인지 이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여하튼 조병갑은 공주 사람으로 공주시 신풍면 평소리 사랑골, 사곡면 대중리 한시랭이, 유구읍 동해리 사락골 등에서 살았던 만큼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적잖게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번 조사에서 이야기가 전해지는 현장을 일일이 다 찾아가 확인하지는 못하였다. 조병갑에 대해 전해지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은 대개 마을 사람들의 증언(구술)이나 인터넷에 소개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고, 전해지는 이야기를 뒷받침하거나 검증할 만한 구체적인 근거 자료를 찾지 못해서 그랬다.

하여 앞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폭넓게 수집하고 꼼꼼하게 검증하는 것은 물론 체계적으로 정리할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 더구나 조병갑이 공주와 멀지 않은 청양이나 예산 대흥 등에서도 살았던 만큼 이들 지역에서 전해지는 이야기까지 함께 종합적으로 조사·정리할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그럴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

어찌 보면 조병갑은 억울할 수도 있다. 조병갑 이전부터 탐관오리들이 있었고, 조병갑보다 더한 탐관오리도 있었는데, 조병갑이 탐관오리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고 있으니 말이다. 조병갑 후손들도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조병갑 선정비만 해도 여럿 전해지고 있는데 탐관오리로만 취급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일이다. 잘잘못을 말하기 이전에 지난 날을 통해 오늘날 더는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누구에게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렇게 '조병갑에 대해 마무리하고 다음부터는 '조병식'에 관한 내용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