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 같은데 잘 모르는 조병갑, 조병갑보다 더한 조병식과 조병직(08)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의 공주집회 탄압과 고등재판소 판사 조병갑·조병직의 동학교주 재판 (08)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들어선 조병식, 조병갑과는 8촌 형제로, 강화유수로 있을 때 제물포조약이 체결되었다

2026-03-24     인간 전병철

동학농민혁명과 관련 있는 인물, 조병갑과 조병식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어 발품 팔아 조사했습니다. 하고 나니 조병직에 대한 정리도 필요하여 추가 조사하였습니다. 그 결과, A4로 200쪽 되는 글을 16회로 나누어 공유하고자 합니다. 재미없는 글이긴 하나, 조병갑ㆍ조병식ㆍ조병직을 알면 동학농민혁명을 아는 데 나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인간 전병철(작가)

 

Ⅲ. 방곡령을 선포한 조병식, 조병갑보다 더한 탐관오리

 

방곡령(防穀令)! 이 말은 역사 교과서에도 나오는 용어인 만큼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곡물 가격을 안정시키고자 한 지역의 곡물이 다른 지역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조치가 방곡령이다. 가령 흉년 등으로 쌀이 부족해지는 경우, 지방관이 그 지역 쌀이 다른 지역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방지(금지)하는 명령이다. 이런 방곡령이 구한말 일본의 경제적 침탈에 대응하여 반포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흥선대원군의 통상 거부 또는 통산 수교 거부 정책(쇄국정책)은 1876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조일수호조규(朝日修護條規, 병자수호조약, 강화도조약)’가 체결되면서 결국 빗장을 풀고 개항하게 되었다. 이후 일본을 비롯한 외국 세력이 우리나라의 각종 이권을 서로 차지해 가는 가운데 일본은 부족한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과의 무역을 통해 막대한 양의 쌀을 값싸게 수입해 갔다. 일본으로 우리나라 곡물 유출이 점점 늘어나고 관리들의 수탈과 흉년이 겹치면서 우리나라는 먹을 식량이 부족하고 곡물 가격이 크게 오르는 등 살기가 더 어려웠다. 이에 지방관들은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 제1차(1876)_관세 면제, 양곡의 무제한 유출 허용 / 제2차(1883)_방곡령 시행 및 1개월 전 통보, 관세 설정, 최혜국 대우]을 근거로 방곡령을 선포하였다. 1889년 5월에는 황해도 관찰사 조병철(趙秉轍)이, 9월에는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이 일본에 방곡(防穀)을 통보하였으며, 1890년에는 함경도 관찰사 오준영(吳俊泳)이 방곡령을 발표하는 등 여러 지역에서 방곡령이 내려졌다.

특히 방곡령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조병식’이다. 대부분 역사 교과서에는 함경도 관찰사가 방곡령 반포를 하였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몇몇 교과서에는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 이름까지 서술하고 있다. 이렇게 조병식은 방곡령과 관련하여 역사 교과서에 이름이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만큼 조병식은 비중 있는 인물이며, 일본의 경제적 침탈에 대항하여 방곡령을 선포하였다고 소개되는 인물인 만큼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조병식을 백성이 위하고 나라를 구하려고 한 인물로 생각하기 쉽다. 과연 그럴까?

사실 조병식은 충청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교조 신원을 위해 1892년 10월과 12월 충청감영에 모인 동학교도를 탄압하며 공주집회(공주취회)를 해산시킨 장본인이다. 동학 교조(敎祖)인 최제우(崔濟愚, 1824~1864)가 ‘좌도난정(左道亂正: 삿된 도로 정도를 어지럽힘)’이라는 죄로 억울하게 처형당한 것을 풀어주고 동학에 대한 탄압을 중지해 줄 것을 호소하고자 모인 1892년 10월 공주집회는 동학농민혁명의 횃불이 타오르기 시작하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하여 공주집회를 탄압한 조병식은 동학농민혁명의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조병식은 갖은 부정부패로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으며, 그럼에도 고위 관리로 복직되어 호사를 누리며 산 자이다. 이런 점에서 조병식은 같은 집안사람인 팔촌 동생 조병갑보다 더한 탐관오리라고 할 수 있다.

조병갑은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하여 널리 알려진 만큼 그에 관한 자료가 많고 정리가 잘 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막상 공개적인 자료가 많지 않고 새로 찾아 나서야 할 게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조병식은 군수 조병갑보다 덜 알려지긴 했지만, 군수보다 더 높은 도지사나 장관 등 고위 관직을 역임한 탓인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자료만 해도 조병갑(趙秉甲) 관련 자료는 72건인 것과 비교하여 조병식(趙秉式) 관련 자료는 1,661건이나 될 정도로 많을뿐더러 다른 자료도 많고 정리도 나름 잘 되어 있었다.

그리고 조병갑의 흔적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찾아가 봐야 할 곳들은 내가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 대부분 찾아가 보았지만, 조병식은 전국적인 관직을 역임한 까닭에 확인하고자 찾아가야 할 곳이 많고 멀기도 하여 일일이 직접 찾아가 다 확인하지 못했다. 형편상 인터넷 자료나 다양한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 조병갑에 대해서는 자료 하나하나 확인하며 내용을 정리하였으나, 조병식에 대해서는 그 많은 자료를 일일이 다 정리하지 않고 널리 알려지거나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중심으로 꼼꼼하게 확인하며 정리하였다.

 

1. 조병식의 출신과 집안사람들

조병갑과 같은 양주조씨(楊州趙氏) 문강공파(文剛公派)의 창수공파(倉守公派) 가운데 괴산공파(槐山公派) 집안사람인 조병식(趙秉式, 1823?1832~1907)은 조유순(趙猷淳)의 외아들로 1832년 한양(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 연도에 대해 일반 사전(辭典) 등 적잖은 글에서 1823년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양주조씨대종회(楊州趙氏大宗會) 족보에는 “壬辰(一八三二)生”라고 기록, 1832년 출생한 것으로 밝히고 있다.

[해석] 조병식은 보국승록대부에 행(行)이조판서를 지냈다. 사시(시호)는 문정, 자는 공훈, 호는 학파이다. 임진(1832)년에 출생하고 임자(1852)년에 진사가 되고 무오(1858)년 문과에 합격하여 도당(都堂: 의정부)에 들어가 이조참의, 전라우도 암행어사, 대사헌, 황해․강원․함경․충청감사, 강화유수, 주사유사(籌司有司: 비변사 제조 당상, 실무 책임자), 진주부사(陳奏副使: 중국 파견 사신)로 청에 가고, 이조․예조 판서, 참정대신(부총리)을 지냈다. 고종 29년(임진, 1892)에 기사(耆社)에 들어갔으며, 무술(1898)년에 보국 품계로 승진하고, 경자(1900)년에 일본 주둔군 주일공사를 맡았다. / 부인 정경부인 해평윤씨는 판서 윤치정(尹致定)의 딸이다.

그런데 족보 뒷부분에는 조병식이 고종 29년 임진년(1892)에 기사(耆社)에 들어갔다고 밝히고 있다. 기사는 조선시대 70세 이상 정2품 이상의 관리를 우대하기 위해 설립한 기구이다. 조병식이 1892년에 70세가 되었다면, 태어난 해는 1823년일 것이다. 하지만 족보 앞부분에 “壬辰(一八三二)生”이라고 하여 조병식이 1832년생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 조병식이 시주하여 봉안한 예산 보덕사 극락전 산신탱화에도 “건명임진생조병식(乾命壬辰生趙秉式)”이라고 하여 족보와 마찬가지로 조병식은 ‘1832년 임진(壬辰)생’이라고 밝히고 있다. ‘1823년 계미(癸未)생’과 무려 아홉 살이나 차이가 난다.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 더 확인할 필요가 있지만, 아무래도 보덕사 산신탱화는 조병식이 살아있을 당시의 기록인 만큼 신뢰할 만하다. 아마 1892년에 기사에 들어갔다고 기록한 것은 혹 착오가 아닐까 싶다. 여하튼 조병식은 1832년 태어난 것을 기준으로 하여 서술한다.

양주조씨 20세(世)인 조병식의 자(字)는 공훈(公勳, 일반 사전에는 ‘公訓’으로 소개하고 있음)이며, 호(號)는 학파(鶴波)이다. 그는 26세(옛 나이 27세․28세) 나이인 1858년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근 50년 동안 관리를 지내며 부귀영화를 누리다 75세(옛 나이 76세․77세) 나이인 1907년 사망하였다. 그리고 문정(文靖)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조병식의 아버지는 태인현감(泰仁縣監)을 지낸 조유순(趙猷淳, 1808~?)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 1808~?)로 교리(校理: 홍문관 등의 정5품 벼슬) 홍혁(洪赫)의 딸이다. 조병식의 조부는 양근군수(楊根郡守, 양근군은 오늘날 경기도 양평군)를 지낸 조진강(趙鎭綱, 1775~1827)이며, 증조부는 조의철(趙宜喆, 1745~1792), 고조부는 조영극(趙榮克, 1718~1777)이다. 양주조씨 16세 조영극은 6남 2녀[①종철(宗喆) ②인철(寅喆) ③헌철(憲喆) ④의철(宜喆) ⑤우철(宇喆) 딸 딸 ⑥수철(守喆)]를 두었는데, 조영극의 장남인 조종철(趙宗喆, 1737~1796)의 후손이 조병갑이라면, 조병식은 조영극의 4남인 조의철의 후손이다. 이렇게 같은 고조부를 둔 조병갑과 조병식은 항렬이 같아 서로 8촌 간인 친척이다.

조병식과 조병갑에 대해 보통 4촌 간이라고 소개하고도 있으나, 정확히 말하면 8촌 간이다. 4촌인 종형제(從兄第)가 아니고 6촌인 재종형제(再從兄第)도 아닌 8촌인 삼종형제(三從兄弟)이다. 8촌 형제면 가깝다면 가까운 집안사람이며, 멀다면 먼 친척이다.

그리고 양주조씨대종회 족보에 따르면, 조병갑이 아버지 조규순과 마찬가지로 본부인과 측실(側室: 첩)을 들였다면, 조병식은 아버지 조유순과 마찬가지로 본부인만 두었다. 조병갑이 아버지 조규순의 측실 김해김씨 낳은 서자 출신이라면 조병식은 아버지 조유순의 부인 남양홍씨가 낳은 적자이다. 또 공주 출신 조병갑이 3형제 가운데 막내인 것과 비교하여 서울 출신 조병식은 외아들이다.

조병갑과 조병식 둘 다 조병갑의 큰아버지 조두순의 뒷배 아래 관직 생활을 안전하게 지냈다. 하지만 서로 차이가 있었다. 조병갑이 과거가 아닌 추천을 통해 19세 나이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면 조병식은 과거에 급제하여 26세 나이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조병갑이 주로 지방 수령으로 근무했다면 조병식은 지방 수령과 중앙 요직을 두루두루 역임하였다. 둘 다 지방 수령을 지냈지만, 직급이 달랐다. 조병갑이 군수급이었다면 조병갑은 도지사급이었다. 그러니 비리를 저질러도 조병갑보다 조병식이 훨씬 더할 수밖에 없었다. 흔히 조병갑을 ‘탐관오리의 대명사’로 평가하곤 하지만, 어쩌면 조병식에 비해 조병갑은 ‘새 발의 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혹 조병식은 조병갑보다 더한 ‘탐관오리의 거두’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다. 혹 조병갑보다 조병식의 선정비가 훨씬 많아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겠지만.

 

2. 과거를 통해 시작한 관직 생활, 강화유수 조병식과 개항

■1850 관학유생 / 1858 승정원 가주서■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철종 1년 12월 21일 기록에 ‘관학유생(館學儒生) 유학(幼學) 조병식(趙秉式)’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18세(옛 나이 19세·20세)의 조병식은 성균관이나 사학(四學) 학생으로 재학하며 과거를 준비하며 공부하였다. 그리고 20세(옛 나이 21세·22세) 나이인 1852년(철종 3) 소과(小科)에 합격, 진사(進士)에 올랐다가 6년 뒤인 1858년(철종 9)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이교익(李喬翼)과 함께 가주서(假注書)로 임명되었다. 가주서는 승정원(承政院, 오늘날의 대통령비서실)에 소속된 정7품 관리로, 임금의 말을 문장으로 만드는 일이나 승정원의 일기를 기록하는 일을 담당한 주서(注書)를 대신하는, 정원 외로 둔 임시 관직이다. 이렇게 조병식은 26세(옛 나이 27세․28세) 나이에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860 예문관 검열■ 1860년(철종 11) 4월, 왕의 칙령(勅令)과 교명(敎命)을 담당하던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 정9품)에 추천되었다. 검열은 승지(承旨)와 더불어 왕의 측근에서 일하며, 사실(史實)의 기록과 왕명의 대필(代筆) 등의 일을 맡아보았다.

■1861 성균관 전적 / 별겸춘추■ 1861년(철종 12) 1월,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成均館)의 전적(典籍)에 임명되고, 3월에는 별겸춘추(別兼春秋)에 추천되었다. 성균관 전적은 정6품 관직으로, 책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것은 물론 출납하는 일을 담당한 관직이고, 별겸춘추는 의정부·승정원·승문원(承文院: 외교문서 담당 관청)·홍문관·예문관·종친부·규장각 등의 관원으로서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을 겸임한 관직이다.

■1862 전라우도 암행어사 / 홍문관 응교 / 사헌부 집의 / 부사과 / 홍문관 교리■ 1862년(철종 13)에는 전라우도(全羅右道) 암행어사가 되어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또 별겸춘추를 여전히 맡은 가운데 1862년 6월에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를 맡기도 하였다. 응교는 홍문관·예문관의 정4품 관직으로, 학문 연구와 왕의 명령을 제찬(制撰: 대신 짓는 일)이 주된 직무였고, 경연관(經筵官)의 일원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7월에는 사헌부 집의(執義, 사헌부 최고 관직인 대사헌 다음의 직급으로 종3품 관직)가 되어 관리들을 감찰하고 인사에 대한 의견을 내는 등의 일을 맡았다.

8월에는 부사과(副司果)로 임명되기도 하였는데, 부사과는 중앙 군사 조직인 오위(五衛)에 딸린 종6품 무관 벼슬로 대개 녹봉을 주기 위한 마련한 관직으로 현직에 있지 않은 문관․무관, 그리고 기타 잡직에 있는 사람 가운데서 등용하였다. 위로 오위장(五衛將, 종2품), 상호군(上護軍, 정3품), 대호군(大護軍, 종3품), 호군(護軍, 정4품), 부호군(副護軍, 종4품), 사직(司直, 정5품), 부사직(副司直, 종5품), 사과(司果, 정6품), 부장(部將, 종6품)이 있고, 아래로 사정(司正, 정7품), 부사정(副司正, 종7품), 사맹(司猛, 정8품), 부사맹(副司猛, 종8품), 사용(司勇, 정9품), 부사용(副司勇, 종9품)이 있었다.

12월에는 홍문관 교리(校理)로 임명되었다. 교리는 집현전·홍문관·승문원·교서관 등의 정5품·종5품 관직으로, 홍문관 교리는 왕의 명령이나 글을 대신 짓는 역할뿐만 아니라 경연관·사관을 당연직으로 겸하고, 삼사(三司: 홍문관․사헌부․사간원)의 일원으로서 언론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863 예조참의 / 승정원 승지■ 1863년(철종 14) 3월에 예조참의(禮曹參議, 정3품)로 임명되어 당상관(堂上官)의 고위직에 올랐다. 7월에는 승지(承旨)가 되어 이후 우부승지 또는 좌부승지의 임무를 맡았다. 승지는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기관인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당상관 벼슬로, 도승지·좌승지·우승지·좌부승지·우부승지·동부승지 등 6승지를 일컫는다. 이렇게 조병식은 관직 생활을 시작한 지 8년 만에 고위직에 올랐는데, 그가 이렇게 승진할 수 있는 배경에는 조병갑과 마찬가지로 집안 어른 조두순의 지원 덕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고종 즉위, 대원군 섭정○ 1863년 12월 8일(양력 1864년 1월 16일) 철종(哲宗, 1831~즉위1849~1863)이 32세 나이로 사망하자, 익종(翼宗)의 부인인 대왕대비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조대비, 풍양조씨)가 왕실 어른으로서 왕위 계승을 결정할 수 있었다. 당시 조대비와 협력하던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은 자신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을 익종의 양자로 삼아 익성군(翼成君)으로 봉하였는데, 익성군은 1863년 12월 13일(양력 1964년 1월 21일) 왕위에 올라 고종(高宗, 1852~즉위1863~1919)이 되고, 흥선군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되었다. 12살 나이로 즉위한 고종은 나이가 어려 조대비가 수렴청정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흥선대원군이 섭정(1864~1873)하였다.

■1864 성균관 대사성■ 1864년(고종 1) 12월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다. 정3품 당상관인 대사성은 조선시대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의 장(長: 우두머리)이다. 성균관은 유학 교육을 책임지던 기관이었던 만큼 대사성은 문과 출신으로 임명되었으며, 대사성은 유생(儒生)을 지도하고, 성균관 내 행정 업무를 관리하였으며, 관시(館試: 성균관 유생만이 볼 수 있는 문과 초시) 운영에 참여하였다. 또한 문묘(文廟)에서 열리는 석전제(釋奠祭)를 준비하고 이때 아헌관(亞獻官: 두 번째로 술잔을 올리는 제관)으로 참여하였다.

■1865 성천부사 / 1866 관서위유사■ 1865년(고종 2) 3월 성천부사(成川府使, 성천군은 평안남도 남단에 있는 군)로 임명되어 외직으로 나갔다. 성천부사로 있으면서 1866년 8월에는 관서위유사(關西慰諭使)를 겸직하게 되었는데, 위유사는 지방에 천재지변이 있을 때 백성을 위로하기 위하여 어명으로 파견하던 임시 벼슬이다.

○병인양요○ 1866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진행된 천주교 탄압인 병인박해로 프랑스 선교사 9명이 사망하자 이를 구실 삼아 중국 천진(天津, 톈진)에 있던 프랑스 극동 사령관 로즈(Roze, P.G)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우리나라 강화도로 들어와 자기들 마음대로 수로를 탐색(1차 원정)하는가 하면 군대를 이끌고 침략(2차 원정)하여 벌어진 사건[조불전쟁(朝佛戰爭), 1866년 9월 18일(양력 10월 26일)~11월 21일(양력 12월 27)]이다. 프랑스 군대를 물리치긴 하였으나 강화도 초지진(草芝鎭)의 각종 시설이 파괴되고 왕실 도서관인 외규장각(外奎章閣)의 문화유산이 약탈당하는 등 큰 피해를 보았다.

■1867 이조참의 / 호조참의 / 승정원 승지■ 1867년(고종 4) 1월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임명되었다가 4월에 호조참의(戶曹參議)로 임명되었으며, 5월에 다시 승지가 되어 참찬관(參贊官)을 겸하면서 좌부승지 임무를 수행하였다. 1872년과 1873년에는 좌승지와 우승지를 번갈아 가며 그 임무를 수행하였다.

○일본의 통상 요구와 외교문서 접수 거부○ 당시 쇄국정책으로 통상을 거부하던 우리나라에 일본사절단이 1868년 12월 동래(東萊: 부산)에 들어와 서계(書契, 조선이 일본과 주고받던 외교문서)를 전달하자 우리는 이에 응하지 않고 접수를 거부하였다. 일본사절단은 1872년 1월 3년 만에 동래에서 철수하였으며, 통상 수교(개항)에 실패하자 일본에서는 1893년 조선을 정복하자는 정한론(征韓論)이 떠오르게 된다.

○신미양요○ 1871년 미군 함대가 강화해협에 침략하며 1866년 7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무리하게 평양까지 들어와 침몰당한 사건의 책임을 추궁하는 동시에 통상 교섭을 요구함으로써 강화도 초지진·덕진진·광성보 등에서 전투[역사상 최초의 조미전쟁(朝美戰爭)]가 벌어졌다. 4월 14일(양력 6월 1일)부터 4월 24일(양력 6월 11일)까지 전투가 이어졌다.

■1874 강화유수■ 1874년(고종 11) 7월 29일 강화유수(江華留守, 종2품)에 제수되어 외직(外職: 지방직)으로 갔다. 강화유수는 강화부(江華府)의 최고 벼슬로. 진무사(鎭撫使)를 겸직하였다. 정원은 2명으로, 나머지 1명은 경기감사가 겸직하였다.

고종은 조병식을 강화유수로 제수하면서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라는 내용의 교서를 내리기도 하였는데, 이를 통해 조병식에 대한 왕의 두터운 신임을 짐작할 수 있기도 하다.

【고종이 강화유수로 임명한 조병식에게 내린 교서】 강화유수 조병식에게 교서를 내렸는데, 왕이 이르기를, “성벽과 성루에 깃발을 바꾸어 세움에 이에 유수의 옛 호칭을 회복하였다. … 모름지기 전쟁에 대비하려는 나의 생각에 부응하라. 저 바다 복판에 있는 대도(大都)를 보니 진실로 해구(海口)의 중요한 진(鎭)이다. 손돌[孫石]은 한쪽 면의 험지를 차지하여 누로(樓櫓)를 높게 지어 아래를 멀리 바라보고 정탐하고 있다. … 서양 선박이 아무 때나 왔다 갔다 하지만 저들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우리나라의 습속이 소란한 것이 많으니, 재신(宰臣)이 아니면 어떻게 진정시킬 수 있겠는가. 오직 경은 대대로 충정(忠貞)이 독실하였으며 경국제민(經國濟民)에 뜻을 두었다. 젊은 나이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처음 벼슬을 하여 한원(翰苑)을 거쳐 은대(銀臺)의 관원을 역임하였다. 벼슬길이 순탄하여 높은 지위에 올라 성균관 대사성이 되고 이조참의가 되었다. 성도(成都)를 다스릴 때 엄격하고 명백한 정치를 한다는 칭송이 자자하였으니, 대개 직지사(直指使 암행어사의 별칭)의 남은 위엄을 두려워한 것이다. 경조윤(京兆尹)으로 청리(聽理)를 공정히 한다고 칭찬받았으니, 분사(分司)에 부임하여 처음 정사를 할 때도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미리 대비를 튼튼히 잘하면 누가 감히 깔볼 것인가. 맡은 지역을 삼가서 튼튼히 하는 데는 필공(畢公)을 기다렸다. 천시(天時)와 지리(地利)가 인화(人和)만 못한 것이거니와, 보장(保障)과 견사(繭絲)는 윤탁(尹鐸)에게 달려 있다. 이에 경에게 강화부 유수 겸 진무사를 제수하니, 경은 내가 마음에 두고 그대를 선발한 뜻을 이해하여 더욱 나라를 위하여 자신을 잊는 충성을 다하라. 백성 돌보기를 마치 자기가 굶주린 것처럼 하여 임금을 친애하고 윗사람을 위해 죽고자 하는 뜻을 고무시키고, 군사를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는 미리미리 명령을 내려서 기회에 따라 응변(應變)하는 계책을 다하라. 성을 쌓고 해자(垓字)를 파는 일에 있어서는 하루라도 태만히 하지 말고, 백성을 단련시키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일에 있어서는 백년토록 태평하리라는 것을 믿지 말라. 시행하는 데 있어서는 오직 편의에 따라 하고, 품의하여 재가를 받는 일에 있어서는 구례(舊例)를 원용하여 하라. 약자라고 하여 업신여기지 않으며 강자라고 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니, 경은 스스로 요량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공정함은 밝은 데서 생기고 위엄은 청렴한 데서 생기니, 나는 그대에게 다 맡기고 간섭하지 않겠다. 아아, 양숙자(羊叔子)가 가벼운 갖옷을 입고 느슨한 띠를 했는데도 또한 유장(儒將)의 풍류(風流)를 생각할 수 있고, 도사행(陶士行)이 벽돌을 나르고 배를 수리했지만, 어찌 옛사람의 빈틈없이 조리 있게 처리하는 것에 손색이 있었겠는가. 그대가 간다면 또 조정으로 부를 것이니, 가서 공경히 공무를 행하라.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노니 잘 알도록 하라.” 하였다. 지제교 박해순(朴海淳)이 지어 올린 것이다. -『승정원일기』 2804책(탈초본 130책) 고종 11년 8월 6일 병자 15/17 기사 1874년 同治(淸/穆宗) 13년

강화유수 조병식은 1875년(고종 12) 3월 자기 지역 행사에 중앙 인사가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하는 장계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왕은 농사철인 만큼 중앙 인사가 참여하면 폐단이 있을 수 있으니, 강화유수가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대답했다. 조병식이 생색 좀 내려고 했지만 때가 때인 만큼 거절당하였다.

【지역 행사에 종친이 참여해 줄 것을 청하는 조병식의 장계】 강화유수 조병식의 장계에, “장사각(藏史閣)과 선원각(璿源閣)을 이제 수리하려 합니다. 책자를 옮겨 봉안하고 도로 봉안하는 절차를 춘추관(春秋館)과 종친부(宗親府) 관원으로 하여금 내려와서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이에 대해 전교하기를, “지금 이렇게 봄갈이하는 때를 당하여 두 관사의 관원이 내려가게 되면 주전(廚傳)의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그만두도록 하고, 이봉(移奉)하고 도로 봉안(奉安)하는 절차를 유수가 거행하도록 묘당(廟堂: 의정부)에서 분부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2811책(탈초본 131책) 고종 12년 3월 15일 임자 13/14 기사 1875년 光緖(淸/德宗) 1년

○운요호 사건○ 1873년 흥선대원군이 권력의 핵심에서 쫓겨나자, 고종과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이 추진해 왔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포기하기로 했다. 이런 변화를 눈치챈 일본은 조선에 문호 개방을 요구하기 시작하였으나 조선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수교가 실패하자 일본은 정한론이 대두하면서 마침내 1875년 8월 21일(양력 9월 20일) 강화도 앞바다에 군함 운요호(號)라는 배를 끌고 강화도 초지진과 영종도(永宗島) 영종진(永宗鎭) 해역을 침범하였다. 이에 우리 군대는 일본 배가 물러가도록 경고하고자 포격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초지진을 공격하여 초지진을 파괴하였다. 그리고 강화도를 점령하기는 어려웠기에 방어가 다소 허술한 영종도를 노려 기습적으로 공격·상륙한 후 성(城)을 점령하고 민간인을 학살하고 불을 지르는 등 약탈하다 8월 25일(양력 9월 24일) 돌아갔다. 일본군의 피해는 별로 없었지만, 우리가 입은 피해는 컸다. 그럼에도 일본은 우리가 먼저 운요호를 공격하였다는 핑계와 그 책임을 추궁하며 개항을 요구하였다. 마침내 우리나라는 1876년 일본과 강제로 조약을 맺고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1875년 9월 조병식은 운요호 사건 당시 강화유수로서 일본 군함의 침략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고 큰 피해를 보게 한 책임으로 자신을 처벌해 줄 것을 왕께 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에 고종은 조병식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더욱 강화유수 임무에 책임을 다하라고 하였다. 이후 1876년 1월에도 조병식은 일본 배의 침입에 자신의 책임이 있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다시는 이런 사직 상소를 올리지 말라는 답변만 받았다. 고종으로부터 받는 신임이 두터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강화유수 조병식, 영종진을 엄하게 방수하지 못한 것에 대해 처벌해 줄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림】 강화유수 조병식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은 외람되게 감당하지 못할 자리에 앉아 세월만 보내면서 보장(保障)의 중임을 맡고서도 진무하지 못하고, 군민(軍民)을 통솔할 책임을 맡고서도 백성들을 감싸지 못하여 밤낮으로 전전긍긍하며 깊은 못이나 골짜기에 서 있는 듯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적의 무리가 도래(渡來)하여 한 모퉁이에 있는 영종진(永宗鎭)이 침략을 받아 관청 건물은 분탕(焚蕩)되고 사졸들은 살해되었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저도 모르게 분하고 원통한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 진(鎭)은 곧 신이 관할하는 병영의 좌해방(左海防)이니 실로 평소에 엄하게 방수했다면 어찌 뜻밖의 근심이 있었겠습니까. 첫째도 신의 죄이고 둘째도 신의 죄이니 해당하는 처벌을 받게 하소서. 신은 황공한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하필 이같이 인혐(引嫌)할 것이 있는가. 경은 사직하지 말고 더욱 보장의 책임을 다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2817책(탈초본 131책) 고종 12년 9월 18일 신해 22/22 기사 1875년 光緖(淸/德宗) 1년

【강화유수 조병식, 일본 배의 침입에 대한 자신의 책임이 있다는 상소를 올림】 강화유수 조병식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삼가 아룁니다. 외람되게 진심을 아뢰어 위벌(威罰)을 받기를 바랐는데 온유(溫諭)를 특별히 내려 신을 신칙(申飭: 단단히 타일러서 조심함)하여 직임을 살피게 하시니, 명을 받드는 것에 겨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계문에 대한 비답(批答) 가운데에 이미 수호(修好)라 하셨으니, 우리 성상의 먼 데 사람을 편안하게 하시는 성념(盛念)을 우러러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불측한 정상을 알지 못할 것이 있거니와 갑작스러운 변이 있으면, 군사의 마음이 이미 해이해졌으므로 힘쓰기 어렵고 병기를 오래 포기하였으므로 예봉(銳鋒)을 발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처지에 이르러서는 이길 계책이 있더라도 미처 손쓰지 못할 것이니, 어느 겨를에 처치할 방도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500년의 보장(保障)이 신 때문에 무너지고 3천 군사의 정용(精勇)이 신 때문에 꺾이는 것이 되니, 여러 번 신칙하시더라도 어떻게 군민(軍民)에 임하여 호령을 내겠습니까. 일찍 엄하게 처벌을 받아서 온 섬 안 백성의 울분한 마음에 사죄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전의 비답(批答)에 이미 알아듣도록 하유(下諭)하였는데 또 이렇게 거듭 아뢰니, 이것이 어찌 사체(事體)인가. 군무(軍務)를 폐기하는 것도 그 책임이 있으니, 다시는 감히 대행[替行]하여 계문(啓聞)하지 말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고종 13년(1876년, 淸 德宗 光緖 2年, 日本 明治 9年) 1월 16일]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과의 통상을 얻어내기 위해 조선과 접촉을 이어가면서 우리를 압박하는가 하면 우리나라 사정을 면밀하게 살폈다. 조일 양국이 서로 통상하기 위한 절차를 하나씩 챙겨나갔다. 이에 1876년 1월 일본 외무권대승(外務權大丞)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는 강화유수 조병식과 교섭한 경과를 변리대신(辨理大臣)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에게 보고하였는데, 그 내용을 통해 통상이 임박하고 통상 조약을 맺기 위한 일본 일행의 영접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외무권대승 모리야마 시게루, 강화유수 조병식과 교섭한 경과를 변리대신 구로다 기요타카에게 보고함】 본 일 오전 8시 35분 진해문(鎭海門)으로 들어왔습니다. 그곳에서 강화 본도를 통과하였는데 대략 우리(일본) 길이로 1리 정도를 지나 강화부에 도착했습니다. 오전 10시 30분 거류하는 아문의 대청에서 강화유수 조병식과 만나서 양 대신을 영접하는 수속을 검토했는데, 그쪽의 대신은 통진(通津, 이곳에서 떨어진 것이 대략 우리 일본의 리로 2리)에 있는데, 아직 이곳에 도착하지 않아서 그 도착까지는 지방관의 권한을 넘어서 감히 우리 대신을 영접하는 수속 등에 관한 것은 하기 어렵다. 그래도 아마 오늘 중에는 도착할 것이므로 그 후에 지령을 받아서 상세한 것을 결정해야 한다는 뜻을 알려왔으므로, 이쪽에서는 꼭 그 수속을 결정하지 않은 동안은 우리 대신에게 복명(復命: 보고)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급히 사신을 보내 그 대신을 이곳으로 맞이해서 만나 뵙고 나서 빨리 수속을 정해야 할 것이다. 또 우리들은 이것을 보고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동행한 자 몇 명을 본선에 돌려보내고 싶다. 하지만 수로에는 조수의 사정에 의해 지체되는 것이 적지 않으므로 초지(艸芝)까지 육지로 가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지당한 방법이고 몇 가지 더 이야기했는데 모두 승낙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내일까지는 담판을 마치고 배로 돌아갈 작정인데, 일단 이 일을 보고합니다. 본부에서 소관 등을 영접하는데 매우 융숭해 보였고, 부당한 것은 없었습니다. 이것도 또한 아울러 보고드립니다. / 9년 2월 6일 / 모리야마[森山] 외무권대승 (印) 야스다[安田] 개척소판관 (印) 양 대신 각하 / 추신, 육로통행수속을 해서 바로 해군과 육군 사관 2, 3명을 육로로 가게 하였습니다. 또 초지의 아래의 육로 등의 상황은 이 사관에게서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또한 별지의 약도를 1장 올립니다. -고종 13년(1876년, 淸 德宗 光緖 2年, 日本 明治 9年) 1월 11일 / 출전 『日本外交文書』 9, 문서번호 11

○조일수호조규 체결○ 운요호 사건을 핑계 삼아 그 책임을 물으며 우리를 압박해 온 일본은 1876년 2월 2일(양력 2월 26일) 결국 무력을 앞세워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강화도에서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른바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강화도조약, 병자수호조약)가 체결되어 부산, 인천, 원산 3개 항구가 개항되고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이렇게 조병식이 강화유수로 있을 때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여 우리나라는 통상 수교 거부에서 통상 수교로 돌아서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하지만 우리가 주체적으로 체결한 조약이 아닌 만큼 일본과 맺은 조약에는 불평등한 요소가 많았으며, 일제의 침략 야욕이 담겨있기도 하였다. 이후 일본 이외에 다른 나라와도 근대적 조약 체결이 이어져 일본 제국주의 침략과 함께 서양 제국주의 침략까지 밀려들어 왔다.

개항이 이루어진 한 달쯤인 1876년 3월, 조병식은 강화도의 적잖은 군인들이 병에 들고, 때가 농사철이기도 하니 도시(都試: 무사를 선발하기 위한 특별 시험)를 미뤄 가을에 치를 수 있도록 요청하는 장계를 올려 왕의 허락을 받기도 하였다.

【강화도의 도시를 늦출 것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啓)】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방금 강화유수 조병식의 장계를 보니, 본영(本營)의 무사들에게 이번 봄에 도시(都試)를 설행(設行)해야 하는데 한 달도 넘게 파수(把守)를 선 나머지 대부분 병이 든데다가 또 농사일이 한창 많을 때를 당하였으니, 가을이 되거든 합해서 설행할 것에 대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지(稟旨: 임금께 아뢰어서 받던 교지)하여 분부해 주기를 청하였습니다. 사세(事勢)가 이미 이와 같으니, 장계에서 청한 대로 시기를 물려 행하도록 분부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하였다. -『승정원일기』 2823책(탈초본 131책) 고종 13년 3월 9일 신축 6/14 기사 1876년 光緖(淸/德宗) 2년

여하튼 조병식은 1874년 7월 29일 강화유수로 임명되어 1876년 3월 15일 충청도 관찰사로 발령받기까지 1년 8개월 정도 강화유수 겸 진무사(鎭撫使)로 근무하였다. 진무사는 강화도 진무영(鎭撫營)을 총괄하는 종2품 관직으로 강화유수가 겸직하였다.

이렇게 조병식은 강화유수 겸 진무사로 근무하면서 운요호 사건으로 일본의 침략을 겪는가 하면 자신의 근무지인 강화도에서 일제에 의해 강제로 조약을 맺어 개항까지 하게 되는 일에 관여하는 등 구한말 역사의 회오리바람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한편, 조병식이 강화유수 겸 진무사로 있던 것과 관련하여 그의 선정을 기리는 선정비가 현재 3기 정도 전해지고 있다. 강화도 갑곶돈대 내 비석군 안에 있는 ‘유수겸진무사조공병식유혜망도영세불망비’와 ‘유수겸진무사조공병식애민선정비’ 2기와 그리고 강화군 석모도 석포항 앞에 있는 ‘유수겸진무사조공병식영세불망비’가 그것이다.

강화도 갑곶돈대에 있는 ‘유수겸진무사조공병식유혜망도영세불망비’는 1876년에 세워진 것이고, 유수겸진무사조공병식애민선정비’는 1880년에 세워진 것이며, 강화 석모도 석포항에 있는 ‘유수겸진무사조공병식영세불망비’는 1876년 3월에 세워진 것이다. 이들 모두 조병식이 강화유수에서 다른 곳으로 발령받은 시기나 그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파악된다.

❚조병식 영세불망비(유수겸진무사조공병식영세불망비)

∙현재 위치_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석포리 산7(삼산북로 8) 산까치식당 주변

∙건립 시기_1876년 3월

❚조병식 유혜망도영세불망비(유수겸진무사조공병식유혜망도영세불망비)❚

∙현재 위치_인천광역시 강화군·읍 갑곶리 1007-1 갑곶돈 ‘강화 비석군’(전쟁박물관 부근)

∙건립 시기_1876년

❚조병식 애민선정비(유수겸진무사조공병식애민선정비)❚

현재 위치_인천광역시 강화군·읍 갑곶리 1007-1 갑곶돈 ‘강화 비석군’(전쟁박물관 부근)

∙건립 시기_1880년(조병식이 1878년 탐관오리로 징계받은 뒤인 1880년에 세워진 것임)

 

<디음에 '3.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과 어사 이건창의 탄핵'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