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 같은데 잘 모르는 조병갑, 조병갑보다 더한 조병식과 조병직(09)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의 공주집회 탄압과 고등재판소 판사 조병갑·조병직의 동학교주 재판 (09) 예산 보덕사 극락전 산신탱화는 조병식이 시주한 것이며,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 선정비가 공주 유구에 있다
동학농민혁명과 관련 있는 인물, 조병갑과 조병식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어 발품 팔아 조사했습니다. 하고 나니 조병직에 대한 정리도 필요하여 추가 조사하였습니다. 그 결과, A4로 200쪽 되는 글을 16회로 나누어 공유하고자 합니다. 재미없는 글이긴 하나, 조병갑ㆍ조병식ㆍ조병직을 알면 동학농민혁명을 아는 데 나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인간 전병철(작가)
3.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과 어사 이건창의 탄핵
■1876 충청도 관찰사(1)■ 강화유수 조병식은 1876년 3월(고종 13) 15일 충청감사(忠淸監司, 충청도 관찰사)로 제수되었다. 관찰사(觀察使)는 각 도에 파견된 지방 행정의 최고 책임자로, 감사(監司), 방백(方伯), 도백(道伯) 등으로도 불리었는데, 도내의 행정, 사법, 군사를 총괄하는 지방 장관으로서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겸하였다. 관찰사는 원래 종2품으로 임명하게 되었으나 정2품 이상이 임명되기도 하고, 충청·강원·황해도 등에는 종종 음관(陰官: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되지 않고 음서와 천거 등으로 임용된 관리)이나 무관(武官)이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관찰사는 상피제(相避制)에 따라 자신의 출신지에는 임명되지 않았으며, 관찰사가 감영 소재지 수령을 겸직하기도 하여 충청도 관찰사는 시기에 따라 청주목사(淸州牧使)나 공주목사(公州牧使)를 겸하기도 하였다.
【강화유수 조병식에게 충청감사를 제수하라는 전교】 전교하기를, “충청감사(忠淸監司)의 빈자리 후임으로 강화유수 조병식을 제수하라.” 하였다. -『비변사등록』 257책 고종 13년 3월 15일
1876년 9월 충청감사 조병식은 충청도에 흉년(凶年)이 들어 현물로 세금을 걷기가 어려우니 돈으로 걷을 수 있게 해달라는 장계를 올렸다. 또 세금으로 걷은 대동미(大同米)를 운반하던 대동선(大同船)이 서해 먼바다에서 난파하여 그 곡물을 건지지 못한 자초지종을 보고하면서 이와 관련된 자들이 크게 잘못한 바가 없으니 모두 용서를 바란다는 내용의 장계를 올리기도 하였다.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 도내 면 작황이 흉년이 들었음을 알리고 군포, 훈련도감의 포보, 모시 상납을 순전으로 거둘 수 있게 해줄 것을 청함】 도내 면농(綿農)이 흉년이 든 연유는 이미 전후의 장본(狀本) 속에 대강 진달(進達)하였습니다. 마른 토지에 파종했거나 가물 때 싹이 튼 것 중에 줄기가 약한 것은 벌써 시들고 뿌리가 강한 것만 겨우 살았지만, 잎사귀는 떨어지고 가지만 앙상하니 전체 이랑을 통틀어 계산하면 몇 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겨우 알을 맺은 것은 바람을 만나자마자 떨어지고 혹 터지려던 솜은 서리를 맞아 바로 오므라들어 한 이랑에서 딴 것이 이미 한 움큼도 되지 않고, 열 집에서 거둔 것이 또한 한 필(疋)을 만들기도 어렵습니다. 각종 군포는 본색(本色)으로 바치도록 독촉할 수 없는 형세이니, 각 읍의 군포는 무명으로 상납할 항목으로 금년 10월부터 내년 9월까지 병조 및 각 영문(營門)과 각 아문(衙門)에 상납할 것은 모두 순전(純錢: 세금이나 군포를 돈으로만 냄)으로 대납하고, … 만약 항식(恒式)을 고수하여 본색을 강제로 독촉한다면 끝내 거두는 바는 없고 반드시 백성들이 흩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훈국(訓局: 훈련도감)의 포보(砲保: 훈련도감의 운영을 위하여 설정한 군포)도 일체 순전으로 대신 거두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서천·한산·임천·남포·비인·부여·홍산 등 7읍의 각 군포는 모시(苧)로 상납하는 것이 본래 사목(事目: 원칙과 절차를 정한 시행 세칙)이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모시 농사가 흉년이 들어 매번 대전(代錢)으로 갖추어 상납했습니다. 금년 모시 농사가 이전에 비해 더욱 황폐하니, 서천 등 7읍의 각 군포도 내년 가을까지 돈으로 대신 상납하도록 허락할 것을 아울러 묘당(廟堂: 의정부)으로 하여금 품지(稟旨)하여 분부하게 하소서. -『충청감영계록(忠淸監營啓錄)』, 丙子 9월 9일. 고종 13년(1876년, 淸 德宗 光緖 2年, 日本 明治 9年) 9월 9일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 한산군에서 난파된 대동선의 곡물을 건지지 못한 일과 연관된 선주, 이서, 격졸 등을 취조한 내용을 보고함】 상고(相考)한 일을 아룁니다. 태안 지역의 소근진(所斤鎭) 호송 경내 막동(幕洞) 앞 서해 외양(外洋)에서 치패(致敗)된 본도 한산군(韓山郡) 대동선(大同船)이 있는 곳을 찾지 못해 부득이 곡물을 건져 내는 일을 그만둔 일과 원선주(元船主)와 실색리(實色吏: 실제 담당자) 및 흩어져 간 격졸(格卒)들을 모두 즉시 잡아와 정절(情節)을 속속들이 살펴서 구격(具格)하여 수보(修報)하도록 태안부사에게 관칙(關飭)한 연유는 이미 치계(馳啓)하였습니다. 방금 도부(到付)한 태안부사 조의현(趙儀顯)의 첩정(牒呈)에, “관찰사의 관문(關文)에 근거하여 경강(京江)의 원선주와 한산의 실색리를 모두 즉시 잡아 와 패선(敗船) 선주와 곁꾼(格軍)들에게 치패된 정절을 엄하게 따져 취초(取招)하였습니다. … 그리고 경강의 원선주 및 한산 실색리는 저지른 바를 살펴보면 별로 다시 조사할 것이 없어 우선 죄수를 보석(保釋)하였으니 각 해당 아문으로 하여금 복계(覆啓)하여 품처(稟處)하게 하며, 선한이 범용(犯用)한 쌀 1석은 본색으로 징봉(徵捧)하여 상납하도록 태안부사에게 관칙하고, 장재관(裝載官) 한산군수 김익성(金益成)은 곡물을 꾸리는 데 포흠한 것이 없어 별로 추궁할 만한 단서가 없으며, 호송 지방관인 소근첨사(小斤僉使) 차우식(車友植)은 당초 이 배가 곧장 외양으로 표류하여 호송을 베풀 곳이 아니었으니 뒤쫓아 가서 구호할 겨를이 없는 형편이고, 치패가 이미 장내가 아니니 죄를 논하는 한 조목은 모두 참작하여 용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 -『충청감영계록(忠淸監營啓錄)』, 丙子 9월 15일, 고종 13년(1876년, 淸 德宗 光緖 2年, 日本 明治 9年) 9월 15일]
그리고 10월에 들어서 충청도 서해 앞바다에 이양선(異樣船: 서양 배)이 나타난 사실을 보고하였다(1876.10.09.). 보고에 따르면 서양인이 탄 배가 표류하게 되어 이들을 조사하였으며, 이에 서양인의 생김새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배에 무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염려할 것은 없다고 하였다. 또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며 잘 보살펴주고 있으나 앞으로 더 조사하는 여부, 돌아가도록 허락할지 여부, 의복을 만들어주는 여부 등에 대해 답변해 줄 것을 의정부에 요청하였다. 또 이양선 1척이 풍도(豊島) 혹은 도리도(桃李島)에 닻을 내리고 정박하고 있는 사실을 보고(1876.10.19.)하기도 하였다. 현재 풍도는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대부동에 딸린 섬이고, 도리도는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백미리(西新面 百味里)에 속한 무인도로, 충청도 태안반도에서 관측(觀測)되는 지역이었다.
그리고 11월에는 북이면 관송리 모포(北二面 貫松里 毛浦: 현재 어느 곳인지 확인되지 않음) 앞바다에 이양선이 나타나 사라졌음을 보고(1876.11.09.)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10월과 11월에 서해에 서양 배가 자주 오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개항이 되어 문호가 개방된 만큼 조선과 통상을 하고자 하는 서양 배들이 서해를 자주 오간 것으로 보인다.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 태안 안흥 신진리 앞바다에 표류해온 이양선을 조사한 내용에 대해 보고함】 태안 안흥(安興) 신진리(新津里) 앞바다에 이양선 1척이 표류해온 형지(形止)는 태안부사 조의현(趙儀顯)이 보고한 것을 낱낱이 들어서 이미 치계(馳啓)하였습니다. 방금 태안부사 조의현의 첩정(牒呈)을 받아보니, “본부(本府) 안흥 신진리 앞바다에 표류해온 이양선을 적간(摘奸: 조사)하기 위해 떠난 연유는 이미 첩보(牒報)하였습니다. 부사가 이달 초4일 신시(申時)쯤에 나루를 넘어 신진리로 달려가니, 이양이범선(異樣二帆船) 1척이 본리(本里) 앞바다에 표류해왔었는데 뒷 범죽(帆竹)이 부서져 떨어졌었습니다. … 저 사람들의 모양은 머리는 백회(百會: 머리 꼭대기) 앞은 조금 깎았고 백회 뒤는 한 가닥 땋아서 내렸으며, … 작은 두루마기와 배자(褙子) 등속이 혹 길기도 하고 짧기도 했는데, 주석(朱錫)으로 된 단추를 오른쪽 옷섶에 연결했으며, 하의는 혹 흑백삼승바지(黑白三升袴)를 입었고, 버선은 또한 모두 흰 삼승으로 만들어 신었는데 모양은 우리나라 버선과 같았으며, … 신(鞋)은 모두 흑삼승(黑三升)으로 운두(雲頭)를 만들고 가죽 등속으로 밑창을 만들었습니다. 선체를 만든 모양은 꼬리가 높고 머리가 낮았으며 위에는 목판을 깔았었습니다. 뒷 범죽 중간이 부러지고 앞 범죽만 있었으며, 목판은 별로 손상된 곳이 없었으니, 지반이 부서졌다는 말은 모두 그들이 육지를 따라 돌아가려는 핑계일 뿐입니다. … 배 안을 살펴보니 느릅나무 껍질·양초·위석, 이외에 또 옥당미(玉糖米)·속미(粟米)·청두(靑豆) 등속이 있었으니 틀림없이 상선이고, 병기 등속은 없었습니다. 그 외 의심스러운 단서는 없었습니다. … 저 사람들이 아마도 굶주리고 추워서 구호를 바라는 뜻이 있는 듯하였으므로 양식과 반찬을 이달 초4일 저녁부터 격식대로 지급했고, 연향(讌餉: 잔치, 연회)은 또한 격식에 따라 떡·고기·국수·과일 등속을 5일 간격으로 베풀어 줄 계획이며, 의복을 만들어주는 일은 처분을 기다려 거행하겠습니다. 연유를 아울러 첩보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 저 배가 모두 장사를 하다가 표류하여 정박한 종류이고, 이미 수상하여 의심할 만한 자취가 없으니, 잘 간호하고 음식 대접을 후하게 하며, 잡인을 엄하게 금하고 선척을 살피는 등의 일을 착실히 거행하도록 각별히 신칙(申飭)하였습니다. 표류한 사람, 선척의 집물, 그의 서신을 봉한 사연은 한결같이 태안부사가 적간한 대로 성책하여 의정부에 올려보내며, 이후의 형지는 잇달아 진문(陳聞)할 계획입니다. 연유를 아울러 치계(馳啓)합니다. -『충청감영계록(忠淸監營啓錄)』, 丙子 10월 9일, 고종 13년(1876년, 淸 德宗 光緖 2年, 日本 明治 9年) 10월 9일
한편, 조병식은 1877년(고종 14)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보덕사 극락전 산신탱화(山神幁畵)를 봉안하는 불사에 크게 시주하여 부인과 함께 그 이름을 올렸다. 보덕사는 흥선대원군이 속죄하는 마음으로 은덕을 갚기 위해 지은 절이다. 흥선군 이하응은 2대에 걸쳐 왕이 나온다는 명당을 찾아 1860년 충남 가야산 아래에 있는 가야사(伽倻寺)를 불태워버리고 그 자리에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 묘를 옮겨왔다. 그래서 그런지 아들과 손자가 고종과 순종으로 즉위, 2대에 걸쳐 왕을 배출하였으며, 흥선군은 대원군에 올랐다.
1863년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이 왕위에 오르자, 흥선대원군은 은덕을 갚는다는 ‘보은(報恩)’의 뜻으로 ‘보덕사(報德寺)’라는 이름으로 남연군 묘 근처에 1865년 절을 건립하고 가야사의 맥을 잇도록 하였다. 이렇게 흥선대원군이 세운 보덕사에 흥선대원군과 연줄이 있는 조병식이 불화(佛畫)를 시주하였다. 흥선대원군과의 친분을 더더욱 공고히 하는 가운데 충청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정치적 기반을 다지고 고종의 관심과 신임을 더더욱 받고자 그리 한 것으로 짐작된다.
보통 산신(산신령)이 호랑이 옆에 앉아 있는 일반 산신도(山神圖)와 달리 보덕사 산신탱화에 그려진 산신은 호랑이를 올라타고 있는 당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산신신앙의 종교적 상징을 넘어서 조병식이 권력을 앞세우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나 위엄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은 아닌가 이렇게 해석하기도 한다.
여하튼 그림에 대해 기록해 놓은 화기(畵記)를 보면,
山神幀畵大施主 奉道觀察使 乾命壬辰生趙秉式 坤命辛卯生尹氏兩位 …(중략)… 光緖丁丑七月望日 化主比丘尼普仁
라고 쓰여 있다. 여기에서 ‘日(일)’ 앞에 해당하는 숫자 ‘ ’은 ‘二十一(21)’, ‘望(망)’ 등으로 보이는데, 일단 ‘望’으로 파악하였다. 건명(乾命)은 남자가 태어난 해, 곤명(坤命)은 여성이 태어난 해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乾命壬辰生趙秉式”은 조병식의 출생 연도가 ‘임진(壬辰, 1832)’이라는 것이다. 양주조씨대종회 족보 ‘조병식 앞부분’에 기록된 출생 연도와 같다. 더구나 이 산신탱화 기록은 조병식이 살아있을 당시에 기록된 것이라 무엇보다도 정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병식의 출생 연도는 일반 사전 등에서 소개하는 1823년보다 1832년이 더 맞을 듯하다. 그리고 ‘坤命辛卯生尹氏’는 1831년 태어난 윤씨를 가리켜 이를 통해 조병식의 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가 1831년 출생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광서(光緖)는 청(淸)나라 제11대 황제 때 연호로, 1875년부터 1908년까지 사용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갑오개혁 이전인 1894년(광서 20년)까지 사용하였다. 또 ‘광서정축(光緖丁丑)’은 광서 3년인 정축년(1877), ‘칠월(七月)’은 7월, ‘망일(望日)’은 음력 보름날인 15일을 가리킨다. 하여 이 산신탱화는 조병식이 충청남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1877년 7월 15일에 봉안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878 중추부 동지중추부사 / 이조참판, {유배}■ 1878(고종 15)년 조병식은 2년 간의 충청감사 임기를 마치고 2월 4일 왕명 출납을 관장하는 중추부(중추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종2품) 직함을 받았으며, 3월 23일에는 이조참판(吏曹參判, 종2품, 내무부 차관)에 단독으로 추천되었다.
【이조에서 송서된 전 감사 조병식의 자리를 새로 만들어 하비하겠다는 병비의 계】 병조가 아뢰기를, “전 감사 조병식이 이조에서 송서(送西)되었습니다. 임기 만료가 된 감사는 관례상 품계에 따라 중추부의 직함을 부여하는데, 이 경우는 자급이 가선대부라 동지중추부사로 하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로선 나와 있는 자리가 없으니, 전례대로 빈자리를 새로 만들어 하비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승정원일기』 2847책(탈초본 132책) 고종 15년 2월 4일 갑신 14/22 기사 1878년 光緖(淸/德宗) 4년
【이조참판에 조병식 낙점】 이조참판의 전망단자를 들이니, 조병식을 낙점하였다. -『승정원일기』 2848책(탈초본 132책) 고종 15년 3월 23일 계유 34/37 기사 1878년 光緖(淸/德宗) 4년
그런데 김병식이 충청감사로 있을 당시 저지른 실정과 비리가 밝혀졌다. 신동(神童)으로 알려지고 조선시대 최연소 과거 급제자로 알려진 이건창(李建昌, 1852년~1898년)이 1877년 충청우도(忠淸右道) 암행어사가 되어 임무를 수행한 결과, 김병식의 실정을 비롯하여 충청우도 관리들의 비리를 낱낱이 찾아내 그 사실을 1878년 왕께 보고하였다.
【충청우도 암행어사 이건창이 서계와 별단을 올렸다】 서계(書啓)에 이르기를, “신이 알기로 왕인(王人)의 서열은 반드시 제후보다 앞서고, 안사(按事: 행정을 맡아 처리하는 일)하는 법은 높은 벼슬아치도 가리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신이 전 감사 조병식이 재임하고 있을 때 그가 공공연히 불법을 저지르는 것을 목도(目睹)하고도 그를 저지하지 못하였으니, 신의 나약함이 이미 극에 달하였습니다. 사사건건 신을 업신여기고 방해하여 도착한 관문(關文)이 있으면 물리치고 받지 않는가 하면, 감영 구실아치 가운데 찾아서 잡아 올 자가 있어도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관에서 필요한 물건 가운데 비싼 것들을 신이 줄이도록 하였더니 모조리 독촉하여 거두어들이고, 명목 없는 세금을 신이 혁파하도록 하였더니 오히려 액수와 명목을 늘렸습니다. 신이 금지하도록 한 것은 서둘러 시행하고, 신이 가두라고 한 자는 빼앗아서 옮겨 버렸으며, 신이 참작하여 풀어주도록 한 자는 잡아서 다스렸습니다. 허다한 갈등이 모두 그의 제멋대로인 객기에서 나온 것이니, 조정을 욕보인 것을 신이 어찌 다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돌아오는 길에 오르기 전까지 이에 대해 노장(露章)한 일이 없고 그가 하는 일에 대해서도 전혀 따지지 않다가, 그가 교체되어 돌아가는 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감영에 들어가 장부와 아전들을 조사할 수 있었습니다. 시일이 지체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감사 이명응(李明應)은 백성들의 절박한 고통부터 먼저 제거해 주니 정령이 펼쳐지는 데 사흘이면 족하고, 복잡한 문제들을 바로잡으니 온 도내 백성들의 기대가 커지고 있습니다. 전 감사 조병식은 호강(豪強)한 자들을 모아 고을의 폐단을 제거하였으니 권위로 제압하는 것이 그의 가장 큰 장점이며, 흉년이 든 것을 구휼하고 백성들이 곤궁할까 염려하였으니 백성들을 품어주고 보호하기에 힘쓰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재결(災結)을 늘리고 환곡을 정지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니 그 진실된 마음은 장계와 보고에 드러나 있고, 호구를 조사하고 호포를 정확히 맞추도록 하였으니 그가 정력을 쏟았음을 장부와 공문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소송할 일이 있는 백성들은 곧장 관정(官庭)으로 들어가서 억울한 사정을 호소할 수 있었으며, 염객(廉客)을 외읍(外邑)에까지 두루 내보내 세세한 일까지도 모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편협한 성격을 어찌하지 못하였고, 게다가 정령이 까탈스럽고 자질구레하였습니다. 불인(不忍)하기가 마치 아녀자의 인(仁)과 같아 조그만 실수가 있더라도 바로 부수어 없애 버리고, 욕심이 끝이 없기는 천한 장부와 같아 자신의 그릇이 작은 것을 갖은 수로 가리고 꾸밉니다. 형벌이 아들에게까지 미쳐 하루에도 거듭 형신(刑訊)하니 죽은 아이의 혼백이 화기(和氣)를 손상시키고 있으며, 귀한 것을 차지하고 있다는 죄로 무덤 4곳을 한꺼번에 파내니 썩은 백골이 원한을 품게 되었습니다. 주전(廚傳)에는 걸핏하면 천금이 소모되는데 추행(楸行)이 민폐를 끼치는 것만 염려하고, 호렴(戶斂)이 10전(錢)을 넘기에 이르러도 교임(校任)들이 아부하는 것만 압니다. 각 고을의 진휼 장부를 모두 모아서 돌려보낼 때 용하(用下)와 여재(餘在)는 묻지도 않고 짐짓 헤아려서 분배하였으며, 구수(口數)·호수(戶數)와 전총(錢總)·곡총(穀總)에 있어서도 제멋대로 정해 놓고 신필(信筆)을 고쳐 관연(官捐)·민보(民補)로 채워 넣으면서 적은 것을 많다고 하고 없는 것을 있다고 하여 일 처리를 대충대충 하였습니다. 무슨 곡절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책임을 면하기는 어렵겠습니다. … 홍주·공주·석성·임천·해미·면천·서천 등지에서 광범위하게 전장(田庄)을 사들였는데, 사람들을 구슬려서 헐값에 사들인 것이 아니면 백성들이 새로 경작한 곳을 빼앗은 것입니다. 시임(時任) 도백이 경내의 땅을 사들이는 것만으로도 이미 불법을 저지른 것인데, 가을걷이를 간심(看審)하러 행차할 적에는 편비(偏裨)들을 나누어 보내어 각 고을에서 음식을 날라다 바치게 하였으니, 더욱 놀랍습니다. 비장(裨將) 신화석(辛華錫)과 청직(廳直) 최영학(崔永學) 등이 좌우에서 총애를 받으며 마치 한 꿰미에 엮인 생선같이 크고 작은 범간(犯奸)에 때마다 주구(嗾狗)가 되었는데, 당부하는 말을 살짝 그들의 귀에 흘리기만 하면 온갖 재화가 수중으로 들어왔습니다. 이에 대하여 그들이 미천하다고 하여 처벌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신이 전 감사와 서로 맞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아뢴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죄상을 나열함에 있어서 혹시 터럭만큼이라도 사실과 어긋난 점이 있다면, 모함하는 말을 지어낸 죄에 대해 신은 드릴 말씀이 없을 것입니다. … 이하 별단(別單) 포함 생략 … -『일성록』 고종 15년 4월 14일 / 고종 15년(1878년, 淸 德宗 光緖 4年, 日本 明治 11年) 4월 14일
【어사 이건창의 조병식 감찰】 조병식이 충청감사로 있을 때 그는 천안 군리(郡吏: 군의 아전) 전제홍(全濟弘)을 그의 심복으로 삼았다. 전제홍은 장물의 대소를 막론하고 그에게 바쳤다. 그 후 이건창이 어사로서 그의 비리를 캐기 위해 그곳을 갔으나, 조병식과 가까운 영리(營吏: 영의 아전)들이 모두 도주하여 한 사람도 잡을 수 없으므로 그 비리를 캘 길이 없었다. 이때 이건창은 꾀를 내어 전제홍을 데려다가 그의 목숨을 살려 주기로 약속한 후 장물기록부를 작성하도록 하자 전제홍은 3일 동안을 부복하고 울다가, “제가 죽을 사람이지만 오늘 목숨을 살려 주신다고 하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구슬을 꿰듯 조목조목 써서 바쳤다. 그 액수는 10여만 냥이나 되었다. 이 사실을 장계에 적어 올린 후 조병식은 그 말이 전제홍에게 나온 것임을 알고 그는 언제나 이를 갈며 중얼거리기를, “내가 전제홍만 죽이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 후 수년이 지나 그는 형조판서가 되어 관아로 가던 길에 전제홍을 보고, 종자들에게 그를 잡아 형조로 끌어들이라고 하고는 말 한마디도 묻지 않고 그를 곤장을 쳐서 죽였다. 그는 이와 같이 행동이 악독하였다. -『매천야록(梅泉野錄)』 제1권 下(1894년 이전) ②,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하지만 이건창이 올린 조사 내용은 다른 조사 내용과 다르다는 지적과 함께 의심을 사게 되고, 이건창이 조병식을 탄핵하는 것에 대해 왕으로부터 미움을 사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왕은 이건창이 조사한 것과 관련하여 조병식을 다시 조사하라고 명령하기까지 하였다.
【이건창의 조병식 탄핵 전말】 이건창이 조병식을 탄핵할 때 고종이 민규호(閔奎鎬)의 말을 받아들여 조병식을 두둔한 것은 그 탄핵서가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은밀히 무감(武監) 두 명을 보내 도중에서 그의 계초(啓草)를 빼앗아 포창서(褒彰書)로 바꾸었다. 이건창은 그 사실을 알고 사잇길로 가서 그 탄핵서를 직접 승정원으로 올렸다. 고종은 그 사실이 발각된 것을 크게 노하고 있던 중, 그가 입대(入對)할 때 고종의 얼굴은 더욱 노기를 띤 채 큰 소리로 “너같이 나이 어리고 어리석은 자가 어찌 조병식의 일을 다 아느냐?”라고 물었다. 이건창은 황공하게 대답하기를 “그 실상을 들어 사건을 조사하는 것은 부득이한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고종은 “그것은 너무 오랫동안 그들을 배척한 행위가 아닌가?”라고 하였다. 그것은 이건창의 선대(先代)에 조병식의 집안과 신임사화로 인하여 대대로 혐오를 가지고 있었음으로 민규호는 그 일로 인하여 중상모략을 꾀하고 있었다. 이때 그는 고종에게 대답하기를, “하늘의 해가 위에 있는데 신이 어찌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단지 신이 어사의 직분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사의 직분을 이행한 것뿐입니다”라고 한 후 그의 불법행위를 대충 아뢰었다. 그러나 고종은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물러가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고종은 이건창을 과격하게 생각하여 크게 기용할 뜻이 없었다. -『매천야록(梅泉野錄)』 제1권 上(1894년 이전) 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암행어사의 서계와 관련하여 전 감사 조병식의 탐오한 것을 조사하도록 하다】 전교하기를, “충청우도 암행어사‘ 이건창’의 서계(書啓)를 보니, 전(前) 감사 조병식이 열거한 탐오의 죄상이 매우 많은데 좌도 암행어사의 보고와는 모두 상반된다. 한 도(道) 안에서 정사를 잘하고 잘못한 것이 어떻게 이처럼 판이한가? 이것을 따로 조사하지 않을 수 없으니, 홍주목사 김선근(金善根)을 사핵관(査覈官)으로 차하(差下)하여 그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해서 계문(啓聞)하게 하라.” 하였다. -『고종실록』 15권, 고종 15년 4월 20일 己亥 1번째 기사 1878년 조선 개국(開國) 487년
이건창이 관리들의 비리를 밝히며 조병식을 탄핵하였으나 오히려 미움을 사는 가운데 암행어사 당시 무리한 조사로 죄 없는 사람을 죽게 하였다는 등의 모함을 받았다. 결국 조병식은 처벌받지 않고 도리어 이건창이 평안도 벽동군(碧潼郡)으로 유배당하고 1년이 지나서야 풀려나게 된다. 탄핵받은 조병식에게는 별다른 징계가 없었으니, 그만큼 조병식의 뒷배가 든든하고 조병식에 대한 고종의 신임이 두터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병식 유배○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것처럼 전 충청감사 조병식이 저지른 비리에 대해 아예 눈 감을 수는 없었나 보다. 마침내 충청감사 때 저지른 부정부패 일로 조병식은 1878년(고종 15) 6월 22일 전라도 나주목 지도(智島: 현 전남 신안군 지도읍에 속한 연륙도)로 유배당하게 된다. 탐관오리로 인정되어 섬에 유배된 조병식은 6개월 정도 그곳에서 지내다 1879년 2월 9일 풀려났다.
【불법을 자행한 전 충청감사 조병식을 섬에 유배하라는 전교】 이용원(李容元)에게 전교하기를, “사핵관(査覈官)의 장계를 보니, 암행어사가 논한 것과는 서로 다른 점이 있었지만 허다하게 잘못을 범한 것이 이와 같이 낭자하였다. 그는 2품 반열에 있고 한 도를 맡은 관찰사 직책에 있는 자이다. 만일 조금이라도 은혜에 보답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어찌 이 정도까지 불법을 자행하였겠는가. 전 충청감사 조병식에게 섬에 유배하는 법을 시행하도록 하라. ….” 하였다. -『승정원일기』 2851책(탈초본 132책) 고종 15년 6월 21일 기해 6/16 기사 1878년 光緖(淸/德宗) 4년
【전 충청감사 조병식의 배소를 전라도 나주목 지도로 정하여 압송할 것을 청하는 의금부의 계】 또 의금부의 말로 아뢰기를, “전 충청감사 조병식에게 섬에 귀양보내는 법을 시행하라는 승전을 계하(啓下)하였습니다. 이에 조병식을 전라도 나주목(羅州牧)에 있는 지도(智島)에 귀양보내기로 하되, 승전 내의 내용으로 죄목을 갖추어 규례대로 본부의 서리(書吏)를 보내 배소(配所)까지 압송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승정원일기』 2851책(탈초본 132책) 고종 15년 6월 22일 경자 18/20 기사 1878년 光緖(淸/德宗) 4년
【최익현, 조병식 등을 향리로 방축하라는 전교】 김명진에게 전교하기를, “흑산도(黑山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 최익현(崔益鉉), … 지도(智島)에 도배(島配)한 죄인 조병식, 벽동군(碧潼郡)에 극변원찬(極邊遠竄)한 죄인 이건창을 향리(鄕里)로 방축(放送)하라. 죄인 김세호(金世鎬), 홍훈(洪坃), 이재만(李載晩)은 모두 방송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2859책(탈초본 132책) 고종 16년 2월 9일 계미 8/29 기사 1879년 光緖(淸/德宗) 5년
■1880 오위도총부 부총관 / 승정원 승지■ 유배에서 풀려난 조병식은 1년 2개월 지난 1880년(고종 17) 4월 초 부총관(副摠管, 오위도총부의 정2품 벼슬)으로 임명되고, 다시 승지(承旨)로 임명되어 좌승지(左承旨, 정3품)로서 왕 가까이에서 일하였다. 이렇게 조병식은 죄를 지었어도 다시 복권되어 고위직 공무원으로서 왕 곁에서 활동하였다.
한편, 조병식이 탐관오리로 밝혀져 유배까지 당하는 처벌을 받았음에도 그가 예전에 유수(留守)로 근무하던 강화부(江華府)에 그의 선정비가 1880년 세워지기도 하였다. 현재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갑곶돈 ‘강화 비석군’(강화 전쟁박물관 부근) 안에 있는 ‘유수겸진무사조공병식애민선정비’(留守兼鎭憮使趙公秉式愛民善政碑)가 그것이다(이 비에 대해서는 앞에서 다른 선정비와 함께 먼저 소개‧설명하였다). 강화유수 때 선정을 베풀어 늦게라도 그 은혜를 보답하고자 선정비를 세웠을 것이나, 선정비를 세울 때는 이미 탐관오리로 알려졌을 터인데 굳이 선정비를 세웠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러고 보면 선정비가 세워졌다고 하여 해당 인물이 무조건 선정을 베푼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도 하다.
■1881 의금부 동지의금부사 / 1882 형조참판■ 1881년(고종 19) 6월 10일에는 죄인을 다스리는 업무를 담당한 의금부의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종2품)에 임명되고, 1882년 9월 29일에는 형조참판(刑曹參判, 종2품, 법무부 차관)이 되어 활동하였다.
○임오군란○ 1882년 6월 9일(양력 7월 23일) 신식 군대와 달리 차별을 당하고 있던 서울 군영(軍營)의 군인들이 임금(월급)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은 것에 더는 참지 못하고 무기를 들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1873년 실각한 흥선대원군과 위정척사파 세력과 손을 잡고 병조판서 민겸호를 비롯한 민씨 세력 제거와 비리 척결, 서양 세력 배척 등을 주장하였다. 이 임오군란은 성공하는 듯하였으나, 도망간 중전 민씨(명성황후)와 조정의 요청으로 청나라 군대가 개입함으로써 진압되었다. 7월 13일(양력 8월 26일) 흥선대원군은 중국 천진(天津, 톈진)으로 끌려가고, 위정척사파들은 제거되었으며, 청나라와 결탁한 명성황후가 환궁하면서 민씨 외척이 오히려 더 조정을 장악하고, 급진개화파 세력이 강화되었다. 이후 청의 내정 간섭이 심해졌으며, 일본은 피해를 보았다는 핑계로 책임과 보상을 요구하며 7월 17일(양력 8월 30일)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 조일강화조약) 등을 맺었다. 8월 23일(양력 10월 4일)에는 청나라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 체결되기도 하였다.
❚조병식 영세불망비(관찰사조공병식영세불망비)❚
∙현재 위치_충남 공주시 유구읍 석남리 264(중앙1길 87-1) 유구읍행정복지센터 앞마당
∙건립 시기_1882년 8월
뜬금없이 1882년 8월 충남 공주 유구에 관찰사 조병식 선정비가 세워졌다. 조병식이 1876년 3월 15일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2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1878년 2월 4일 동지중추부사로 임명되어 충청도를 떠난 지 근 4년 지난 때의 일이다. 더구나 조병식이 충청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탐학을 하여 이미 유배까지 갔다 온 시기이다. 1882년 8월이면 조병식이 중앙에서 동지의금부사 등의 고위직을 맡고 있을 때이다. 아마 중앙에 있는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조병식이 예전에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한 것을 핑계 삼아 선정비를 세운 게 아닌가 싶다. 이렇게 보면 선정비라고 해서 무조건 선정을 베풀어 세운 것은 아니라는 게 확인되기도 한다. 현실적인 이해관계 속에서 선정비가 세워지고, 탐관오리일수록 자신이 저지른 못된 행실을 감추려 오히려 더 선정비를 세웠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다음에 '4.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의 방곡령 선포'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