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 같은데 잘 모르는 조병갑, 조병갑보다 더한 조병식과 조병직(10)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의 공주집회 탄압과 고등재판소 판사 조병갑·조병직의 동학교주 재판 (10) 조병식, 형조판서 때 전제홍을 때려 죽여 유배 가고, 황해도 관찰사 때 방곡령을 밀고 나가 배상금을 물게 되다
동학농민혁명과 관련 있는 인물, 조병갑과 조병식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어 발품 팔아 조사했습니다. 하고 나니 조병직에 대한 정리도 필요하여 추가 조사하였습니다. 그 결과, A4로 200쪽 되는 글을 16회로 나누어 공유하고자 합니다. 재미없는 글이긴 하나, 조병갑ㆍ조병식ㆍ조병직을 알면 동학농민혁명을 아는 데 나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인간 전병철(작가)
4.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의 방곡령 선포
■1883 형조참판, {유배} ■ 지난해에 이어 조병식은 1883년(고종 20) 4월 21일 다시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임명되었다.
○조병식 유배○ 그런데 형조참판 조병식은 6월 퇴근하던 길에 만난 전제홍(全濟弘)을 잡아들여 때려죽이는 사건이 벌어졌다. 전제홍은 조병식이 충청감사로 있던 시절 심복처럼 부리던 아전(衙前)으로, 1878년 이건창이 조병식을 탄핵할 때 전제홍이 이실직고함으로써 자신의 비리가 밝혀져 이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수년이 지나 형조참판이 된 조병식은 퇴근길에 우연히 전제홍을 만나게 되자 옛일에 대한 앙갚음으로 그를 잡아다 족친 것이다.
결국 전제홍은 죽게 되고, 이 일로 조병식은 1883년 6월 2일 유배형을 받아 평안도 중화부(中和府: 평안남도 남부에 있는 중화군)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21일경 풀려나 근 6개월 정도 귀양살이했는데, 1878년 전라도 나주목 지도로 유배당한 것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 유배였다.
【형조참판 조병식에게 찬배하는 법을 시행할 것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또 아뢰기를, “추참(秋參: 형조참판)이 사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그가 거느린 하례(下隷: 종, 하인)를 시켜 금영(錦營: 충청감영)의 퇴리(退吏: 퇴직한 관리) 전제홍(全濟弘)을 잡아서 그대로 관아로 돌아와 갑자기 그 자리에서 때려 죽게 하였으니, 행동이 매우 놀랍습니다. 평소에 죄를 지은 것이 있다면 합당한 벌로 논한들 무엇이 안 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법을 맡은 관원이면서 이처럼 명목 없이 함부로 죽이는 짓을 하였으니, 법을 지키고 죄인을 신중히 심의하는 뜻이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형조참판 조병식에게 찬배(竄配: 죄인을 지방이나 섬으로 귀양보냄)하는 법을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승정원일기』 2913책(탈초본 134책) 고종 20년 6월 2일 경술 12/46 기사 1883년 光緖(淸/德宗) 9년
【조병식의 배소를 평안도 중화부로 정해 압송할 것을 청하는 의금부의 계】 또 아뢰기를, “형조참판 조병식에게 찬배(竄配)하는 법을 시행하라는 전지가 계하되었습니다. 조병식을 평안도 중화부(中和府)에 찬배하되, 전지 내의 말뜻으로 죄목을 갖추고 규례대로 본부의 서리를 보내어 배소(配所: 유배지)로 압송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승정원일기』 2913책(탈초본 134책) 고종 20년 6월 2일 경술 23/46 기사 1883년 光緖(淸/德宗) 9년
【죄인 조병식을 풀어 보내도록 평안감사에게 분부하겠다는 의금부의 계】 의금부가 아뢰기를, “평안감사 김영수(金永壽)의 계본에, 찬배한 죄인 조병식(趙秉式)이 중화부(中和府) 배소에 도착하였다고 한 일에 관해 ‘방(放)’ 자를 써서 내리셨습니다. 조병식을 풀어 보낼 일로 해당 도신(道臣)에게 분부하도록 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승정원일기』 2918책(탈초본 134책) 고종 20년 11월 21일 무술 19/30 기사 1883년 光緖(淸/德宗) 9년
■1884 돈녕부 동지돈녕부사 / 경연청 동지경연사■ 1884년(고종 21) 7월 2일 조병식은 호군(護軍: 오위 소속의 정4품 관직)에 임명되고, 곧이어 7월 4일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돈녕부에 속한 종2품 관직)에 제수되었다. 돈녕부(敦寧府)는 종친부(宗親府)에 속하지 않은 종친과 외척을 대접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으로, 일정한 직무가 없는 명예직이었다.
그리고 9월 16일에는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경연청에 속한 종2품 벼슬)로 임명되었다. 경연청(經筵廳)은 경연(經筵: 왕이 강의를 듣고 더불어 신하들과 국정을 협의하는 일 또는 자리)을 담당하는 경연관들이 연구하며 대기하던 관청이다.
○갑신정변○ 1884년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김옥균·박영효·서재필·서광범·홍영식 등 급진개화파 세력이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과 조선 개화를 목표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10월 17일 저녁 우정국(郵政局: 우체국) 낙성식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켜 청나라에 의존하는 척족(戚族) 중심의 수구 세력을 축출하며 일부는 처형하기도 했다. 중국의 내정 간섭 배제, 문벌과 신분제 타파,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조세 개혁 등 개혁 정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하는 가운데 10월 19일 청나라의 군사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 이후 청의 내정 간섭이 심해지고, 일본과는 배상금 지불을 포함한 한성조약(漢城條約)이 1885년 1월 맺어졌으며, 청과 일본 간에는 1885년 4월 텐진조약[天津條約]이 체결되었다.
■1885 예조참판 / 진주부사 / 호조참판 / 내무협판 / 사헌부 대사헌 / 형조참판■ 1885년(고종 22) 4월 23일 예조참판(禮曹參判, 종2품, 오늘날 교육부 차관)으로 임명되고, 4월 27일에는 진주부사(陳奏副使)로 임명되어 중국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조병식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사직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고, 결국 사신으로 청에 가 흥선대원군 귀국 문제를 상의하게 되었다. 당시 흥선대원군은 1882년 임오군란에 대한 책임으로 이홍장(李鴻章, 리훙장) 일파에게 납치되어 중국에 감금되어 있었다.
국내 정세가 바뀌어 민씨 정권이 청을 견제하고 러시아와 가깝게 지내게 되자, 청은 흥선대원군을 귀국시켜 민씨 정권을 견제하려고 했다. 이에 조선과 청나라 간에 흥선대원군의 귀국이 논의되면서 조병식이 사신으로 가게 된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1885년 8월 원세개(袁世凯, 위안스카이)가 주선한 배를 타고 장남 이재면(李載冕)과 함께 인천항에 도착함으로써 3년간의 억류 생활에서 벗어났다.
【이비가 2차 정사에서 조병식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이비(吏批)가 2차 정사(政事)를 하였다. 조병식(趙秉式)을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 … 삼았다. -『승정원일기』 2935책(탈초본 135책) 고종 22년 4월 23일 신묘 20/28 기사 1885년 光緖(淸/德宗) 11년
【이조가 진주부사에 조병식을 제수하였다】 이조(吏曹)가 구전(口傳) 정사(政事)를 하였다. 조병식(趙秉式)을 진주부사(陳奏副使)로 삼았다. -『승정원일기』 2935책(탈초본 135책) 고종 22년 4월 27일 을미 7/11 기사 1885년 光緖(淸/德宗) 11년
【신병으로 사신가는 일을 감당할 수 없으므로 진주부사의 직함을 체차해 주기를 청하는 예조 참판 조병식의 상소】 “삼가 아룁니다. 신이 외람되이 사신(使臣)의 명을 받들었는데, 의리상 중한 공무를 맡고서 감히 사적인 일을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신은 체질이 본래 약하여 어릴 때부터 자주 병치레를 하였고, 그러다 보니 반평생 동안 편안한 날이 거의 없었습니다. 현재 보이는 증상으로 말해 보더라도, 고질적인 담병(痰病)에다 해수(咳嗽)가 심하며 현기증이 나고 정신도 혼미한 상태인데, 이는 살아오면서 함께 자라난 병이거니와 근자에는 또 갑작스런 감기로 몸살을 앓느라 병석에서 골골거리고 있으니, 며칠 사이에 채비하여 나갈 가망이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증세로는 분명 제때에 길을 떠날 수가 없을 것인데, 신이 만약 은명(恩命)에 급급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억지로 가게 된다면 필경 도중에서 쓰러지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신의 안위(安危)야 걱정할 것이 없다 하더라도, 낭패를 보게 될 사신의 일은 어찌한단 말입니까. …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굽어살피시어 속히 신이 띠고 있는 진주부사(陳奏副使)의 직함을 체차(遞差: 교체)하시고 감당할 만한 사람에게 돌려주심으로써, 국사를 중히 하심은 물론 신병을 조리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 마지않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 경은 사직하지 말고 조리한 뒤에 길을 떠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2936책(탈초본 135책) 고종 22년 5월 6일 갑진 20/28 기사 1885년 光緖(淸/德宗) 11년
사적인 병을 핑계로 사신으로 중국에 가기 어려움을 호소하였다가 거절당한 예조참판 조병식은 5월 8일 호조참판(戶曹參判, 종2품)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6월 10일 진주부사(陳奏副使) 문후관(問候官)으로 청나라 보정부(保定府)에 있는 흥선대원군을 만나보고 봉환(奉還: 받들어 모시고 돌아옴) 문제를 상의하고 올 것을 명령받았다.
【문후관에 부사 조병식을 임명하여 보정부에 문안하게 하라는 전교】 이헌경에게 전교하기를, “부사(副使) 조병식(趙秉式)을 그대로 문후관(問候官)에 임명하여 보정부(保定府)에 가서 문안하고 오게 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2937책(탈초본 135책) 고종 22년 6월 10일 정축 6/16 기사 1885년 光緖(淸/德宗) 11년
진주부사로 중국에 다녀온 조병식은 귀국 후 여러 관직을 번갈아 가는 가운데 1885년 11월 8일 내무협판(內務協辦, 내무부 차관) 임명되었다. 내무협판은 내무부의 협판(協辦), 곧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 종2품) 벼슬이며, 내무부는 1885년 개화와 자강 사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대궐 안에 설치한 관청으로, 갑오개혁으로 정부 조직이 대대적으로 개편되면서 1894년 폐지된 기관이다. 이어 조병식은 내무협판에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1월 19일에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고, 12월 29일에는 형조참판(刑曹參判, 법무부 차관)이 되었다. 대사헌은 관리에 대한 감찰 및 탄핵, 국왕에 대한 간쟁, 경연 참석 등의 업무를 담당한 사헌부(司憲府)의 활동 전반을 총괄하는 책임자로, 종2품 관직이다.
■1886 예조판서 / 동지정사■ 1886(고종 23)에도 여러 관직을 번갈아 지내는 가운데 2월 26일 예조판서(禮曹判書, 정2품)에 올라 종2품에서 정2품으로 승진하였다.
같은 해 7월 29일 조병식은 동지정사(冬至正使)가 되어 두 번째로 중국에 다녀왔다. 동지사(冬至使)는 해마다 동짓달에 중국으로 보내던 사신으로, 대체로 동지를 전후하여 보냈으므로 동지사라 하였다. 사신 구성은 3정승 또는 6조 판서 중에서 임명한 정사(正使)를 비롯하여 부사(副使)·서장관(書狀官)·종사관(從事官)·통사(通事)·의원(醫員)·사자관(寫字官)·서원(書員) 등 40여 명의 수행원으로 구성되었다. 우리가 특산품인 인삼, 호피, 수달 가죽, 화문석, 종이, 모시, 명주, 금 등을 공물(貢物)로 가져가면 중국 또한 특산품을 답례로 선물하여 일종의 공무역(公貿易)이 이루어졌다. 동지사 파견은 1894년 갑오개혁 때까지 계속되었다.
■1887 형조판서 / 협판내무부사 / 외무독판(독판교섭통상사무)■ 1887년(고종 24) 4월 18일에는 형조판서(刑曹判書, 오늘날 행정부의 법무부 장관, 검찰총장, 사법부의 법원행정처장)로 자리를 옮겼다가 6월에는 협판내무부사로 일하였다. 8월 4일에는 외무독판(外務督辦, 외무대신, 오늘날 외교부 장관)으로 임명하라는 명에 따라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에 조병식이 단독으로 추천되었다.
독판은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 또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에서 외교 통상 업무를 총괄하는 최고의 관직으로, 1882년에 설치한 것이다. 그리고 1894년 갑오개혁으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 의안에 따라 궁내부와 의정부로 나누어지고, 의정부 아래에 내무·외무·탁지·법무·학무·공무·군무·농상 등 8아문이 설치되었다. 외무아문(外務衙門)은 외교와 통상을 관장하던 중앙관청으로, 직제는 대신(大臣, 독판) 1인, 협판(協辦) 1인, 참의(參議) 5인, 주사 20인을 두고, 그 아래에 총무국·교섭국·통상국·번역국·기록국·회계국 등 6국을 설치하였다. 외무아문은 1895년 4월 1일 외부(外部)로 개칭되어 대신 1인, 협판 1인, 국장(局長) 2인, 참서관(參書官) 3인 등을 두었다.
아래 그림은 조병식이 1887년 외교 통상 업무를 맡고 있을 당시의 모습이 세계 최초의 주간 삽화 뉴스 잡지인 『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THE ILLUSTRATED LONDON NEWS』에 1894년 보도된 삽화로 파악되는 것이다.
■1888 영남 방곡령, 의금부 지의금부사 / 함경도 관찰사 겸 함흥부윤 / 1889 함경도 방곡령■ 조병식은 독판교섭통상사무 자격으로 1888년(고종 25) 1월 11일 영남지방 방곡령을 일본에 요청하였다. 그 결과는 확인되지 않는다. 방곡령 요청 이후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별 마찰이 없었던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조병식, 영남 방곡령 요청】 독판교섭통상사무 조병식이 일본 대리공사 곤도 모토스케[近藤眞鋤]에게 영남 방곡령의 시달(示達)을 요청하다. 경상도 연해 각 읍에 해마다 한료(旱潦: 가뭄과 장마) 황겸(荒歉: 흉작·기근·흉년)하여 인민(人民)의 입식(粒食: 먹을 곡식)도 넉넉치 못할까 염려되는데 일본 상민(商民: 상인)이 도내에 행행(遍行)하면서 미두(米豆: 쌀과 콩, 곡식)를 무운(貿運: 무역․운송)하기 때문이다. 高宗 25年 25年, 戊子(1888년, 淸 德宗 光諸 14年, 日本 明治 21年) 1月 11日(癸亥) -『구한국외교문서(舊韓國外交文書)』 제1권 일안(日案) 1093號 高宗 25年 1月 11日, 1109號 高宗 25年 2月 6日, 1110號 高宗 25年 2月 10日
조병식은 1888년(고종 25) 1월 14일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의금부의 정2품 벼슬)로 임명되고, 1888년 6월 30일 함경감사(咸鏡監司, 함경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함경도 병마수군절도사와 도순찰사 및 함흥부윤(咸鏡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都巡察使咸興府尹)을 겸하였다. 도순찰사(都巡察使)는 조선시대에 왕명으로 지방에 파견되어 군사·국방 관련 일을 처리하던 임시 관직으로 도체찰사(都體察使)·도순찰사·순찰사·찰리사(察理使) 등으로 품계에 따라 구분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조병식은 1876년 충청도 관찰사 외직으로 나가 1878년 돌아와 중앙직에 근무하다가 다시 12년 만에 함경도 관찰사로 외직에 나가게 되었다.
○조로육로통상조약 체결○ 조병식이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한 가운데 조선과 러시아[로서아(露西亞), 노국(露國), 아라사(俄羅斯)] 사이에 조로육로통상조약(朝露陸路通商條約, 조러육로통상장정, 조아육로통상장정)이 체결되었다. 그동안 조선 대표로 독판교섭통상사무 조병식과 미국인 외교 고문 데니(Denny O. N.)는 1885년 조선에 부임한 러시아 대표 베베르(Карл Ива́нович Ве́бер, 로마자_Karl Ivanovich Veber)와 교섭하면서 1888년 7월 13일(양력 8월 20일) 경흥부(慶興府) 개방을 비롯하여 조선과 러시아 사이에 육로를 통한 무역과 통상 문제에 관한 제반 사항을 규정한 조약을 체결하였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 체결로 문호가 개방된 이래 우리나라는 1882년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 중국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한 것을 필두로 이후 외국 여러 나라와 수교하여 1883년 영국과 조영수호통상조약, 독일과 조독수호통상조약, 1884년 러시아와 조러수호통상조약, 1886년 프랑스와 조불수호통상조약 등을 체결하였다. 이미 러시아는 이미 1884년 조선과 통상한다는 조약을 맺었으나 국경을 통한 육로가 아니라 부산·인천·원산을 통한 해상무역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더구나 러시아는 상선(商船)을 보유하고 있지 않아 해상무역은 무의미하였다. 이후 육로를 통한 무역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 왔으며, 1888년 7월에서야 조로육로통상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자신들이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있었다.
한편, 조병식이 함경도 관찰사로 임명된 지 한두 달이 지난 1888년 8월 중순, 고종은 12년 전인 1876년 조병식이 충청감사로 임명되어 외직으로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당부하는 교지를 내렸다. 조병식에 대한 고종의 기대와 신뢰는 대단하였다,
【변방의 일을 예비하라고 함흥부윤 조병식에게 내린 교서】 함흥부윤(咸興府尹) 조병식(趙秉式)에게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왕은 이르노라. 함흥은 왕업을 일으킨 근본이 되는 곳으로 오백 년 나라의 기업을 크게 열었으니, 이곳을 다스릴 사람은 반드시 병부를 찼던 인물 중에서 뽑되 어진 지방관을 가장 귀하게 여긴다. 누가 이 직임을 맡아 잘 다스리겠는가. 내가 그대를 가상히 여겨 등용하노라. 돌아보건대, 이 함경도의 여러 고을은 실로 태조(太祖)께서 생장하신 옛터로 원묘(原廟)의 의관(衣冠)을 꺼내어 매달 의식을 거행하니 경건히 유상(遺像)을 봉안하였고, 지형의 험준함은 하늘이 내린 것이니 크게 천명에 응하여 나라의 기틀을 열었다. 곡식, 쌀, 삼, 실, 뽕나무, 닥나무, 어류, 소금으로 말하면 비록 돌이 많고 메마른 땅이라 적다지만 금, 은, 동, 철, 인삼, 녹용, 담비 등은 본래 진기한 토산물로 일컬어졌다. 풍속은 굳세고 강하여 활 쏘고 말 타는 재주가 뛰어나고, 백성들은 어리석고 교활하여 글 읽는 소리가 드무니, 이에 열성조(列聖朝)에서는 어루만지고 회유하여 마음을 미룬 밝은 교화에 복종하게 하였다. 그런데 요사이 점차 쇠퇴해졌으니 어떻게 훌륭한 인재를 얻어 다스리겠는가. 오직 경은 훌륭한 가문에 청고한 지조를 지닌 인물로 일찍이 예문관과 경연에서 이름을 날렸으니, 모략(謀略)이 크고 깊으며, 일찍이 강화유수와 충청감사를 지내면서 치적(治績)이 성대하게 드러났다. 진주부사(陳奏副使)의 명을 받아 중국에 가서는 힘을 다해 일 처리를 하였고 외아문독판(外衙門督辦)의 직임을 맡아서는 여러 가지 일을 다 성사시켰다. 전후로 시험한 바 중임을 짊어질 재주가 있음을 알았고, 좌우에서 모두 훌륭하다고 하니 응당 지방관의 반열에 두어야 한다. 이에 경을 함경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도순찰사 함흥부윤으로 제수하니, 경은 이 직임을 맡기는 뜻을 잘 알아서 보답을 도모하는 정성에 더욱 힘쓰라. 경은 정성이 지극하니 중앙의 고관 중임으로부터 나가게 되었고, 매이는 데 없이 여유로우니 가서는 한 지방의 복성(福星: 복을 가져다주는 별. 목성)이 될 것이다. 무능한 관리는 물리치고 유능한 관리는 승진시켜 탐오(貪汚)한 풍습의 혼탁함을 씻어버리며, 잔악한 자를 제거하고 폐막을 제거하여 백성에게 희망을 심어주도록 하라. 군영에 치성(治聲)을 날려 나와 더불어 이를 함께하였거니와 요해처(要害處: 자기편에는 꼭 필요하면서도 적에게는 해로운 지점. 요충지)에서 위세와 명망을 가질 이가 경이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조처는 되도록 편리한 대로 하고 여쭈어 재가를 받을 것은 본래 법이 있을 것이다. 아, 변방의 일은 예비하는 것이 가장 좋으니 미리미리 대비하도록 하라. 그러면 나의 마음에 근심이 풀려 거의 밤잠을 편히 잘 수 있을 것이다. 도성에서 먼 이 땅을 다스릴 사람은 진실로 이 사람이다. 따라서 교시(敎示)하는 것이니 의당 잘 알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였다. 부교리 이봉덕(李鳳德)이 지어 올렸다. -『승정원일기』 2976책(탈초본 136책) 고종 25년 8월 13일 임진 14/15 기사 1888년 光緖(淸/德宗) 14년
○방곡령 선포○ 조병식은 독판교섭통상사무 자격으로 1888년 1월 11일 영남지방에 방곡령을 시행한 적이 있었다. 그 뒤 1889년 5월 황해도 관찰사 조병철(趙秉轍, 1826~1890)이 방곡령을 선포하였으며, 1889년 9월 1일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이 방곡령을 선포하였다.
방곡령(防穀令)은 자기 지역의 곡물이 다른 지역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여 곡물 가격을 안정시키고 식량 부족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조치로, 해당 지방관이 내릴 수 있었다. 개항 이후 일본 상인들이 조선에서 쌀·콩 등을 사들이며 일본으로 반출하는 바람이 곡식이 부족해지기도 하였는데, 당시 지방관 및 아전들의 수탈과 높은 세금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적잖은 곡물이 일본으로 빠져나가면서 비축량이 부족해지고 한층 심한 식량난을 겪었다. 여기에 1888년 흉년이 들면서 농민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전국적으로 소요 사태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1889년 5월 황해도 관찰사 조병철은 일본 상인이 황해도에서 구입한 곡물을 인천으로 반출하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방곡령을 내렸다가 사전 통고 없이 진행되었다는 일본의 항의를 받아 해제하였다. 그리고 1889년 9월에는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이 지역의 흉년을 구제하기 위해 원산항을 통한 콩의 유출을 금지하는 방곡령을 내렸다. 조병식은 1883년 일본과 맺은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을 근거로 1889년 9월 1일 외아문(外衙門, 외교부)에 방곡령을 내리겠다고 통고한 뒤 10월 1일부터 1년간 원산항을 통한 콩 수출을 금지했다.
방곡령 시행을 통보받은 외아문은 방곡령 시행 사실을 9월 17일 일본 측에게 통보하였다. 이에 일본 대리공사 곤도 모토스케[近藤眞鋤]는 방곡령은 1개월 전에 미리 통보되어야 한다는 점, 당시 콩이 50년 내 대풍이라는 점을 들어 방곡령의 즉각적인 해제를 요구하고 외아문을 압박하였다. 독판교섭통상사무 민종묵(閔種默, 1835~1916, 일제강점기 남작 작위를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은 1년간 곡물 반출 금지에 협조해 줄 것을 부탁하였지만, 일본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곤도의 외교적 압력에 외아문은 10월 17일 조병식에게 방곡령을 해제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조병식은 오히려 일본 상인들로부터 곡물을 압수하는 등 방곡령을 더욱 강력하게 밀고 나갔다. 곤도는 일본 상인들이 입은 손해 배상을 요구하고 조병식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였다. 할 수 없이 조정은 조병식에게 3등 감봉 처분을 내리고 조병식을 강원도 관찰사로 전출시키는 한편 함경도 지방의 방곡령을 해제하였다. 그럼에도 일본의 항의가 이어지면서 결국 우리는 1893년 청의 권고를 받아들여 일본에 11만 원의 배상금을 지급하게 되었다.
언뜻 보면 조병식은 우리 곡식이 일본으로 빠져나감으로써 어려움을 겪는 농민을 위해 방곡령을 선포한, 백성을 위하는 좋은 관리 또는 애국자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방곡령에 대해 다르게 평가하기도 한다. 일본으로 막대한 곡물이 반출되면 자기 지역에서 곡물을 통해 남겨 먹을 기회가 줄어들기에 그래서 방곡령을 시행했다는 주장도 있다. 보통 곡물 유출로 지역 내 곡식 가격이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지방관이 방곡을 실시하는데, 이를 악용하여 방곡을 시행했다는 것이다. 즉 지방관이 방곡을 실시하여 곡식 가격이 내려가면 대량 사들였다가 이후 방곡을 풀어 곡식 가격이 올라가면 다시 팔아 그 차익을 노리는 목적으로 했다는 것이다. 실제 그런 의도로 방곡을 시행한 지방관도 있었으며, 마찬가지 조병식도 백성을 위한 마음이나 애국심에서 방곡령을 밀고 나간 게 아니라 자기 이익을 챙겨야 할 곡식을 일본인에게 빼앗기기 싫어 방곡령을 선포했다는 것이다.
조병식은 이미 충청도 관찰사 시절 비리를 저지른 행위가 암행어사 이건창에 의해 밝혀진 자이며, 방곡령 이후에도 충청도 관찰사로 다시 근무하면서 비리를 저질러 쫓겨난 자인 만큼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관리는 아닐 것이다. 또한 뒷날 어용 단체인 황국협회 간부가 되어 독립협회를 때려 부수는 데 앞장선 자인 만큼 더더욱 애국자는 아닐 것이다.
황현(黃玹, 1855~1910)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기록된 ‘방곡령과 조병식’에 대한 내용을 보면, 조병식이 “백성들의 식생활을 우려하여 방곡을 한 게 아니라, 그의 성품이 고집스러운 데다가 일을 할 줄 모르고 또 일본인으로부터 뇌물을 받으려고” 방곡을 실시했다고 밝히고 있다. 즉 방곡을 실시하여 일본 상인들로부터 뇌물을 챙긴 뒤 방곡을 풀려는 생각으로, 즉 백성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사리사욕을 챙기기 위해 방곡을 했다는 것이다.
【왜인(倭人)의 황두무역과 조병식】 6. 방곡령과 조병식_일본인이 함경도에서 황두(黃豆: 누른빛이 나는 콩)를 무역하였다. 그것은 외무아문(外務衙門)의 허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사 조병식은 백성들의 기근을 핑계로 황두의 출항을 엄금하였다. 그 이유는 조병식이 백성들의 식생활을 우려한 것이 아니라, 그의 성품이 고집스러운 데다가 일을 할 줄 모르고 또 일본인에게 뇌물을 받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때 내무부에서는 일본인의 협박이 들어오므로 상계를 올려 봉급을 3등급으로 깎아 주자고 간청하였다. 그 후 을미년(1895)에 일본인은 그때의 부진한 상무(商務)로 인하여 적자를 보았다는 핑계로 손해배상금 10만 원을 청구하였다. 그리고 조병식은 그가 비록 뇌물을 탐한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가 받은 뇌물은 모두 대내(大內)와 권력층에 바쳤기 때문에, 가세가 가난하여 그들의 청구를 받아들일 수 없어 결국 그의 집안사람들에게 갹출하여 주었다. 그중 조동희(趙同熙, 조두순 손자, 조병섭 아들로 조병집의 양자로 출계, 형 조영희가 이완용의 양아버지 이호준의 딸과 결혼하여 이완용과는 사돈 관계)가 가장 부유하게 살았으므로 혼자 5만 원을 바쳐, 온 가문의 재산이 모두 탕진하였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국사료총서 > 국역 梅泉野錄 > 『梅泉野錄』 제1권 > 下(1894년 이전) ② > 6. 방곡령과 조병식
■1890 강원도 관찰사 / 이조판서 / 돈녕부 지돈녕부사■ 조병식은 방곡령 선포로 일본과 갈등을 빚은 문제에 대한 책임으로 감봉 처분을 받고, 1890년(고종 27) 2월 29일 함경도 관찰사에서 강원감사(江原監司, 강원도 관찰사)로 발령받았다. 그리고 6월 12일 이조판서(吏曹判書, 내무부 장관 또는 행정자치부 장관)로 임명되어 다시 중앙으로 돌아왔으며, 11월 22일에는 돈녕부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정2품)에 임명되었다.
<다음에 '5. 두 번째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과 동학농민혁명'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