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 같은데 잘 모르는 조병갑, 조병갑보다 더한 조병식과 조병직(12)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의 공주집회 탄압과 고등재판소 판사 조병갑·조병직의 동학교주 재판 (12) 조병식, 독립협회를 탄압한 일로 유배 가도 곧 석방되고, 일을 함부로 처리하여 면직되고 파면당해도 곧바로 사면되었다
동학농민혁명과 관련 있는 인물, 조병갑과 조병식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어 발품 팔아 조사했습니다. 하고 나니 조병직에 대한 정리도 필요하여 추가 조사하였습니다. 그 결과, A4로 200쪽 되는 글을 16회로 나누어 공유하고자 합니다. 재미없는 글이긴 하나, 조병갑ㆍ조병식ㆍ조병직을 알면 동학농민혁명을 아는 데 나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인간 전병철(작가)
6.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끄떡없는 조병식
■1896 중추원 의관 / 장례원 경 / 법부대신■ 조병식이 제대로 처벌받지 않은 것에 대한 지적이 있음에도 조병식은 종1품에 오르는 가운데 1896년(고종 33) 10월 30일(음력 9월 24일)에는 중추원(中樞院) 일등의관(一等議官)에 제수되었다. 중추원은 갑오개혁 때 관직을 잃은 고위 관료의 불만이 많아지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 설치한 자문기관으로, 의장, 부의장, 의관(議官), 참서관(參書官), 주사(主事)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중추원 위상은 조금씩 변화하는 가운데 유명무실한 기관으로 전락하기도 하였지만. 조선총독부는 조선 침략에 협력한 조선인 가운데 관료가 되지 못한 이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고, 이들을 조선 통치에 활용하고자 하여 중추원을 조선 총독의 자문기관으로 남겨두었다.
중추원 일등의관 조병식은 1896년 11월 1일 장례원 경(掌禮院卿)이 되었다. 장례원은 1895년 궁내부(宮內府)에 설치되어 궁중의 의식 등을 담당하던 기관으로, 장례원경은 장례원의 최고 높은 관직이다. 이어 조병식은 1896년 12월 12일(음력 11월 8일) 법부대신(法部大臣)으로 임명되었다. 정부 조직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군국기무처의 의안에 따라 궁내부와 의정부로 나뉘고, 의정부 아래 내무·외무·탁지·법무·학무·공무·군무·농상 등 8아문을 두었는데, 1895년 법무아문(法務衙門)이 다시 법부로 바뀌었다. 법무아문과 법부의 우두머리는 법무대신, 법부대신으로, 오늘날 법무부 장관에 해당하고 예전 같으면 형조판서에 해당한다.
【법부대신에 장례원 경 조병식을 제수하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장례원 경 조병식(趙秉式)을 법부대신으로 삼으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077책(탈초본 139책) 고종 33년 11월 8일[양력 12월 12일] 기해 3/5 기사 1896년 開國 505년 光緖(淸/德宗) 22년
■1897 비서원 경 / 궁내부 특진관 / 법부대신 / 외부대신■ 법부대신 조병식은 1897년(고종 34) 2월 12일 비서원 경(祕書院卿)으로 임명되었는데, 비서원은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던 승정원(承政院)이 1894년 승선원(承宣院)으로 바뀌었다가 1895년 다시 시종원(侍從院) 소속의 비서감(秘書監)으로 바뀌고, 그 뒤 시종원으로부터 따로 독립한 관청이다. 비서원은 경(卿) 1명, 승(丞) 3명, 낭(郞) 2명으로 구성되었고, 비서원의 우두머리인 비서원 경은 오늘날의 대통령비서실장에 해당한다. 그리고 조병식은 4월 13(음력 3월 12일) 궁내부(宮內府) 특진관(特進官)으로 임명되었다. 특진관은 1894년 궁내부 관제 제정 후 1895년 내각제 도입과 함께 관제가 축소되자, 왕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설치한 관직으로, 왕실의 전례(典禮)나 의식(儀式) 등을 자문하며 왕실에 관한 일을 보좌하던 칙임(勅任) 벼슬이다.
【비서원 경에 종1품 조병식을 제수하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종1품 조병식(趙秉式)을 비서원 경(祕書院卿)으로 삼으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079책(탈초본 139책) 고종 34년 1월 11일 신축 [양력 2월 12일] 1897년 開國 506년 光緖(淸/德宗) 23년
이어 조병식은 1897년 10월 1일 다시 법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가 한 달 만인 11월 2일 외부대신(外部大臣,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자리를 옮겼다. 이렇게 조병식은 비서실장에서 법무부 장관, 다시 외무부 장관 등 고위 관직을 두루 번갈아 가며 역임하였는데, 과연 여러 분야에 능력이 있어서 다양한 관직을 맡게 된 것인지, 아니면 정치적 수완이 좋아서 그런 건지 단정할 수 없지만, 왕의 측근으로서 그만큼 왕으로부터 신임받아 여러 분야의 관직을 역임할 수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법부대신에 궁내부 특진관 조병식을 제수하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궁내부 특진관 조병식(趙秉式)을 법부대신으로 삼으라.” 하였다-『승정원일기』 3088책(탈초본 139책) 고종 34년 9월 6일[양력 10월 1일] 임진 9/27 기사 1897년 光武 1년 光緖(淸/德宗) 23년
【외부대신에 법부대신 조병식을 제수하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법부대신(法部大臣) 조병식(趙秉式)을 외부대신(外部大臣)으로 삼으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089책(탈초본 139책) 고종 34년 10월 8일[양력 11월 2일] 갑자 4/7 기사 1897년 光武 1년 光緖(淸/德宗) 23년
■1898 의정부 참정, {면직} / 중추원 일등 의관, {유배 처분} / 의정부 찬정 / 의정부 참정, {유배 명령} ■ 1898년(고종 35) 7월 14일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에 올랐다. 의정부 참정은 1896년부터 1907년까지의 의정부 직원으로, 참정대신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설치된 의정부는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을 중심으로 운영되다가 1894년 12월 내각으로 개편되면서 폐지되었다. 그러나 1896년 9월 내각을 다시 의정부로 개칭함에 따라 부활하면서 그 구성이 의정대신(議政大臣), 참정(參政)·참정대신(參政大臣), 찬정(贊政) 등으로 바뀌었다. 의정대신은 옛 영의정, 갑오개혁 후 총리대신 또는 내각총리대신, 오늘날의 국무총리, 참정은 부총리에 해당하는 직위라고 할 수 있다, 찬정은 현직이 아닌 무임소직(無任所職: 따로 맡은 임무가 없는 관직)으로, 대신직(大臣職)에서 물러난 이가 다른 부서의 대신으로 임명될 때까지 잠정적으로 임명되었던 일종의 의정부 내 대기직(待機職)이었다. 찬정에는 전임 찬정과 각부 대신이 당연직으로 겸임하는 찬정이 있었는데, 찬정은 대기직임에도 다른 부서의 서리대신(署理大臣)으로 임명되는 등 일정한 역할이 부여되기도 하여 다른 무임소직에 비해 의정부 구성원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권위가 높았다. 이렇게 바뀌었던 의정부는 1907년 6월 내각제로 다시 돌아가면서 완전히 없어졌다.
【의정부 참정에 종1품 조병식을 제수하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종1품 조병식을 의정부 참정으로 삼으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097책(탈초본 139책) 고종 35년 5월 26일[양력 7월 14일] 무인 4/10 기사 1898년 光武 2년 光緖(淸/德宗) 24년
7월 14일 의정부 참정에 임명된 조병식은 다음 날인 7월 15일 자신은 적임자가 아니고 지난날 탄핵받은 것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는 것 등을 이유로 참정 임명을 다시 생각해 주기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고 즉시 칙명을 받들라고 하였다.
하지만 조병식은 참정으로 임명된 지 1주일 만인 7월 21일 면직을 당하게 된다. 그 이유는 ‘천숙(擅宿)’, 즉 궁궐에서 제 마음대로 잠을 잤다는 것이다. 그래서 면직을 당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8월 17일 사면받고 같은 날 중추원 의관에 제수된다. 이때도 조병식은 왕께 상소를 올려 사양한 의사를 밝혔으나 왕은 “지난 일을 굳이 인혐(引嫌: 잘못된 일에 책임을 지고 사퇴함)할 필요가 있겠는가. 사직하지 말고, 공무를 행하라” 하였다.
【함부로 궁중에 숙직하게 한 참정 조병식을 면직시키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생기(省記: 궁궐·관청의 당직 인원과 군호 등을 하루 단위로 기록해 왕에게 보고하는 문서)가 없는데 함부로 궁중에 숙직하여 사체(事體: 사리와 체면, 일이 벌어진 상태)를 어긋나게 하였으니, 죄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참정 조병식을 우선 면직시키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098책(탈초본 139책) 고종 35년 6월 3일[양력 7월 21일] 을유 2/13 기사 1898년 光武 2년 光緖(淸/德宗) 24년
【종1품 조병식 등에게 징계를 사면하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종1품 조병식, 정2품 조병직(趙秉稷)에 대해 특별히 징계를 사면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099책(탈초본 139책) 고종 35년 7월 1일[양력 8월 17일] 임자 4/12 기사 1898년 光武 2년 光緖(淸/德宗) 24년
【중추원 일등의관에 종1품 조병식 등을 제수하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종1품 조병식, 정2품 조병직, … 중추원(中樞院) 일등의관(一等議官)으로 삼으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099책(탈초본 139책) 고종 35년 7월 1일[양력 8월 17일] 임자 6/12 기사 1898년 光武 2년 光緖(淸/德宗) 24년
같은 해 9월 14일 중추원 의관 조병식을 탄핵하라는 의정부의 장계가 올라왔다. 황국중앙총상회 회장 조병식이 시전상인들에게 철시(撤市: 시장을 열지 않음)하라는 방(榜)을 붙였다는 것이다. 황국중앙총상회는 외국 상인의 침투에 대항하여 시전상인이 상권(商權) 수호를 위해 1898년 조직한 단체이다. 회장은 조병식이 맡았는데, 황국중앙총상회는 1898년 10월에 독립협회와 함께 외국 상인의 침투를 저지하는 상권수호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으나 같은 해 12월에 해체되었다.
조병식이 어떤 이유로 시전상인에게 철시하라고 하였는지 정확히 파악되지 않지만, 이 일로 조병식을 탄핵해야 한다는 장계가 연달아 올라오고, 또 한편으로는 조병식을 용서해 줄 것을 청하는 상소도 올라온다.
【총상회장을 일컬으며 상인들에게 철시하라는 방을 붙인 중추원 의관 조병식을 견책할 것을 청하는 의정부 참정 윤용선의 계】 의정부 참정 윤용선(尹容善)이 삼가 아뢰기를, “이번 궁중(宮中)의 사변(事變)은 전고에 없던 일입니다. 신민들이 놀라고 두려운 마음에 몸 둘 바를 모르는 것은 대소(大小)가 모두 같은 마음입니다. 중추원 의관 조병식(趙秉式)이 총상회장(總商會長)이라고 일컬으며 방문(榜文)을 붙여 상민(商民)들에게 철시(撤市)하도록 하였습니다. 비록 경무청이 타일러 즉시 예전처럼 점포(店鋪: 가게)를 열었지만, 사체(事體)로 헤아려 볼 때 지나간 일이라고 하여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 견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감히 아룁니다.” 하였는데, 아뢴 대로 하라는 칙지를 받들었다. -『승정원일기』 3099책(탈초본 139책) 고종 35년 7월 29일[양력 9월 14일] 경진 2/2 기사 1898년 光武 2년 光緖(淸/德宗) 24년
【총상회의 규칙을 허가한 소요와 관련하여 중추원 의관 조병식 등을 엄하게 견책할 것을 청하는 의정부 의정 심순택의 계】 의정부 의정 심순택이 삼가 아뢰기를, “이달 14일 중추원 의관 조병식이 총상회 회장(摠商會會長)으로 칭하고 상인들에게 방(榜)을 내붙여 시장 점포를 닫도록 사주한 일과 관련해서, … 총상회라는 명색을 금지하도록 하였습니다. 방금 삼가 들으니, 이달 26일 밤에 시민 7, 8십 명이 농상공부대신 이도재(李道宰)의 집에 모여 회장(會長)의 신칙이 있었다고 사칭하면서 이른바 규칙을 적은 책자와 청원서에 대해 허가하는 지령을 얻고자 끝까지 서로 대치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전(前) 의관 안명호(安明鎬)와 상공국장 송헌빈(宋憲斌)이 마침 그 자리에 있다가 모두 끌려서 나오게 되었는데, 형세상 위태롭고 어긋나는 바람에 막아낼 계책이 없어 마침내 그 규칙을 허가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조병식은 고관의 신분으로 상회에 들어간 것이 이미 옳지 않은 것이었고, 견책이 내려진 상황에서 또한 뉘우치고 반성하는 것이 도리였거늘 도리어 많은 사람을 사주하여 대관을 위협했습니다. 농상공부대신은 앞에서는 금지했다가 나중에 다시 허가하였는데, 아무리 어쩔 수 없는 형세 때문이었다고는 하나 나약하게 처리하는 잘못을 저질렀으니 심상한 사건에 비길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경무사(警務使) 민영기(閔泳綺)는 이미 미연에 방지하지도 못했고, 또한 서너 시경 소요가 일어났을 때에도 경계시키고 금단하지 못했습니다. 모두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니, 의관 조병식, 농상공부대신 이도재, 경무사 민영기의 본관을 모두 면직해야 합니다. … 감히 아룁니다.”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조병식은 고관의 신분으로 행동거지가 해괴하고 어긋났으니, 법부로 하여금 경기 연해에 찬배(竄配)하도록 하고, 이도재와 민영기는 모두 아뢴 대로 본관을 면직하고, 이채연도 또한 아뢴 대로 엄하게 견책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100책(탈초본 139책) 고종 35년 8월 14일[양력 9월 29일] 을미 13/16 기사 1898년 光武 2년 光緖(淸/德宗) 24년
【의관 조병식에 대해 용서하는 처분을 내려 줄 것을 청하는 전 참봉 이종래 등의 상소】 전 참봉 이종래(李鐘來)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종로의 육의전은 성조(聖祖)께서 건국하신 초기에 터를 하사하여 전조후시(前朝後市)의 본뜻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500여 년 동안 위로는 공역(公役)을 받들고 아래로는 상업의 기초를 다지면서 성상의 은택을 구가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래 외국인의 상업은 날로 더욱 흥성하는데 자국민의 상업은 날로 더욱 쇠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울 안의 상업계는 다 저들이 점유하고 있고 오직 중앙에 겨우 손바닥만큼의 한 조각만이 남아 있으니, 많은 백성이 분노하며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총상회(摠商會)를 설치하게 된 것인데, 상회에 주관하는 사람이 없으면 많은 사람의 뜻을 수합할 수 없기 때문에 만장일치로 의관 조병식을 회장으로 추대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마침 재앙을 만나 성상의 기후가 편찮으시니, 신들이 하늘과 땅에 빌면서 초조하고 두려워 몸 둘 바를 몰라 잠시 시장 점포를 닫았던 것인데, 경솔히 조처한 죄에 저촉되어 견책을 입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농상공부에 인가를 청하기 위해 해부(該部: 해당 부서)의 대신에게 가서 하소연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의정부의 탄핵으로 인하여 마침내 유배의 엄명을 받게 되었으니, 신들이 반복하여 생각하매 경악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금 저 일반 백성의 집에서도 부모가 경미하나마 병이 들어 조심할 일이 생기면 오는 손님도 사절하고 하던 일도 그만두어 감히 편안히 지낼 수가 없는 것이니, 이는 공경하고 사랑하는 자손의 마음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禮)는 인정(人情)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니, 어찌 여기에 대소의 차이가 있겠습니까. 또한 가서 인가를 청한 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농상공부대신 이도재(李道宰)는 절실하고 시급한 상무(商務)는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시일만 질질 끌면서 허가에 인색하였고, 이미 허가하고는 다시 번복하였습니다. 상회의 사람들이 일제히 나아가 간절하게 요청한 것은 바로 인정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괴이할 게 없는데, 의정부에서 기어이 꼬투리를 잡는 것은 과연 무슨 의도란 말입니까. 오늘날 나라의 형세가 미약하고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한 것이 진실로 어느 정도입니까. 그런데 대신이라는 자가 꾸물대며 방치한 채 진작시킬 방도는 생각지 않고 도리어 업무를 관리하는 자들과 함께 이를 저지하고 있으니, 이것이 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점입니다. 여론이 모두 답답해하고 있으므로 감히 이에 외람되이 아뢰는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속히 유음(兪音)을 내리시되 서릿발 같은 위엄을 우로(雨露)와 같은 은택으로 바꾸어 조병식에 대해 은혜로 용서하는 처분을 특별히 내리심으로써 대중의 마음을 안정시키신다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조병식을 찬배한 조치는 조정의 체모와 관련되어서이지 상회 때문이 아니었는데, 지금 이렇게 방자하게 글을 올리다니 매우 해괴하다. 상회의 규칙은 해부(該部)로 하여금 조처하도록 할 것이니, 그대들은 물러가 안심하고 상업에 종사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100책(탈초본 139책) 고종 35년 8월 14일[양력 9월 29일] 을미 15/16 기사 1898년 光武 2년 光緖(淸/德宗) 24년
○조병식 유배 처분○ 여하튼 조병식은 탄핵받아 통진군(通津郡, 경기도 북서부에 있던 군)으로 3년간 유배(流配: 귀양) 가는 처분을 받았다.
한편, 1898년 10월 들어 독립협회를 탄핵하는 상소가 올라오기도 한다. 1895년 일어난 을미사변의 충격으로 고종은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1896.02.11.~1897.02.20.)하여 1년 넘게 그곳에서 지냈다. 이에 서재필(徐載弼)을 비롯한 개화파 인사들이 1896년 7월 독립협회를 조직해 러시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는 운동을 벌였고, 만민공동회를 조직해 민중 계몽에 나섰다. 또 러시아와 가깝게 지내는 수구파 세력의 퇴진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수구파 인사들은 독립협회를 비난하며 대립하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 통진군으로 유배 3년 처분받은 조병식은 1898년 10월 11일(음력 8월 26일) 방면되고, 일주일도 안 된 10월 17일 의정부 찬정에 임명되었다.
【통진군에 3년 찬배의 처분을 받은 죄인 조병식을 풀어주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참작할 점이 없지 않으니, 통진군(通津郡)에 찬배(竄配: 장소를 정하여 죄인을 유배시킴) 3년의 처분을 받은 죄인 조병식(趙秉式)을 특별히 풀어주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100책(탈초본 139책) 고종 35년 8월 26일[양력 10월 11일] 정미 6/10 기사 1898년 光武 2년 光緖(淸/德宗) 24년
【의정부 찬정에 종1품 조병식을 제수하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종1품 조병식(趙秉式)을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으로 삼으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101책(탈초본 139책) 고종 35년 9월 3일[양력 10월 17일] 계축 2/12 기사 1898년 光武 2년 光緖(淸/德宗) 24년
나아가 의정부 찬정 조병식은 10월 31일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품계까지 받고, 11월 5일에는 의정부 참정으로 승진·복귀하였다. 그러나 조병식은 11월 10일 병을 이유로 참정 임명을 사양하는 상소를 올려 왕이 이를 허락함으로써 참정에서 사직하였다.
【의정부 참정 조병식을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에 오르다】 경효전 제조 민영소(閔泳韶), 의정부 찬정 조병식(趙秉式)을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에 올리고, … 의정부 참찬 권재형(權在衡)을 정2품 자헌대부에 특별히 올렸다. -『승정원일기』 3101책(탈초본 139책) 고종 35년 9월 17일[양력 10월 31일] 정묘 5/5 기사 1898년 光武 2년 光緖(淸/德宗) 24년
【의정부 참정에 의정부 찬정 조병식을 임용】 의정부 의정에 조병세(趙秉世)를 임용하고, 의정부 참정에 조병식(趙秉式)을 임용하고, 농상공부대신에 박제순(朴齊純)을 임용하고, 의정부 찬정에 조병직(趙秉稷), 남정철(南廷哲)을 임용하고, 외부대신에 민종묵(閔種默)을 임용하고, 탁지부 대신에 민영기(閔泳綺)를 임용하였다 -『승정원일기』 3101책(탈초본 139책) 고종 35년 9월 22일[양력 11월 5일] 임신 9/17 기사 1898년 光武 2년 光緖(淸/德宗) 24년
조병식이 병을 이유로 의정부 참정에서 사직한 지 이틀 후인 1898년 11월 12일과 14일에 조병식 등을 조사하여 심판할 것을 청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지난 11월 4일 황국협회 인사들이 독립협회 측에서 작성한 것처럼 꾸민 고시문(告示文)을 광화문과 독립문에 내걸고, “독립협회가 왕정을 폐하고 공화 체제를 세우려고 민심을 선동하는 벽보를 붙였다”라고 거짓말하며 왕께 고하여 이상재(李商在)·남궁억(南宮檍) 등 독립협회 간부 17명이 잡혀갔는데, 이 같은 일이 발생하게 된 것은 황국협회 인사 조병식(趙秉式)·민종묵(閔種默)·유기환(兪箕煥)·이기동(李基東)·김정근(金禎根) 5인, 이른바 오흉(五凶)이 모함(謀陷)하여 일어난 것이며, 잡혀간 독립협회 사람들에게 선처를 베풀고 오흉을 자세히 조사해 줄 것을 청하는 내용이었다.
【조병식 등 오흉을 심판하여 처리할 것 등을 청하는 전 승지 윤길병 등의 상소】 전(前) 승지 윤길병(尹吉炳)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고통이 있으면 반드시 호소하는 것은 자식의 상정이고 매를 맞으면서도 울며 따르는 것은 자식의 직분입니다. 그래서 신들이 형벌 받는 것도 피하지 않고 감히 거듭 소장을 올려 아뢰었는데, 삼가 성상의 비지(批旨)를 받들어 보니 명을 거역한 것을 꾸짖으면서 물러가 기다리라고 타이르셨습니다. 황공하고 두려운 마음에 진실로 곧바로 물러나려 하였습니다만, 신들이 일전의 상소에서 아뢴 다섯 가지 사안은 실로 만억 년의 종묘사직 및 2천만의 백성과 관계가 있어서 잠시도 미뤄둘 수 없는 것입니다. 첫째, 오흉(五凶)을 심판하여 처리하는 일이니, 오흉을 심판하여 처리하기 전에는 신들의 죄명을 씻을 수 없어 천지 사이에 용서받기가 어렵습니다. 둘째, 헌의 6조(獻議六條: 독립협회에서 관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채택한 6가지 국정 개혁안)를 실행하는 일이니, 헌의 6조를 실행하지 않으면 국권이 위태롭습니다. 셋째, 의정부의 신하들을 신중히 선발하여 임명하는 일이니, 의정부에 있는 신하들이 적임자가 아니면 민심이 복종하지 않습니다. 넷째, 독립협회에 대한 처리이니, 독립협회가 다시 설치되지 않아 백성이 뜻이 일치되지 않으면 국세가 약화될 것입니다. 다섯째, 조병식과 민종묵의 무리가 집권한 이후 외국과 교섭한 각종 문서를 널리 공표하는 일입니다. 조병식과 민종묵은 평소에 나라를 팔아먹는 것으로 기량을 삼으니, 그들이 집권한 며칠 동안에도 무슨 흉악한 일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무릇 이 다섯 가지 사안을 아직도 이토록 미루고만 계시니, 신들의 답답한 심정을 아득한 천지 어느 곳에 호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온 나라가 왕의 영토이고 모두가 왕의 신하이니, 신들은 죽으나 사나 폐하의 신하이며 벼슬을 하든 물러나 있든 또한 폐하의 영토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다만 오흉을 심판하여 처리하기 전에는 악명이 분별되지 않을 것이니, 신들이 비록 물러가고자 한들 장차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이에 감히 피눈물을 흘리며 다시 호소하는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천지 부모와 같으신 성상께서는 애처롭게 여기시어 특별히 처분을 내려주소서.…”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처분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이렇게 번거롭고 시끄럽게 구니 짐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그렇게 하는 것인가. 무함(誣陷)은 이미 다 명백하게 밝혀졌고 널리 공표할 만한 문서도 없다. 절대로 의심하거나 염려하지 말고 즉시 물러가도록 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102책(탈초본 139책) 고종 35년 10월 1일[양력 11월 14일] 신사 2/2 기사 1898년 光武 2년 光緖(淸/德宗) 24년
조병식 등의 죄상이 낱낱이 열거된 이와 같은 상소가 올라오게 된 자초지종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러하다. 황국협회는 고종 황제에게 충성하기 위해 1898년 6월 30일 보부상(褓負商) 중심으로 조직된 단체이다. 당시 ‘헌의 6조’ 건의와 『독립신문』 발간, 만민공동회 개최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독립협회에 대항하여 조직되었는데, 고종의 심복 이용익(李容翊)의 측근 세력인 이기동(李基東)·고영근(高永根)·홍종우(洪鍾宇)·길영수(吉永洙) 등 소위 ‘황실파 관료’들이 주도하여 결성되었다. 황국협회 발기인에는 을미사변 이후 의병 활동에 참여한 허위(許蔿)·이상천(李相天) 등도 참여했으며, 또 조병식, 심상훈(沈相薰)·민영기(閔泳綺)·신기선(申箕善)·한규설(韓圭卨) 등과 같은 정부 고위 관리들은 황국협회를 후원하였다.
1898년 10월 독립협회의 개혁 운동은 한층 격화되어 보수파 대신들에 대한 규탄과 중추원 개편을 위한 상소 시위가 잇따르고, 한편으로는 황국협회 인사들이 독립협회를 탄핵하는 상소가 이어지며 서로 대립하였다. 이런 상황에 수구파 대신들은 독립협회에서 군주제를 철폐하고 공화정을 실시하려 한다고 고종에게 모함하였다. 이에 고종은 11월 4일 독립협회 간부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고 독립협회 간부 17명이 체포하였으며, 다음날인 5일에는 독립협회를 해산시켰다. 그러자 독립협회 회원과 서울 시민들은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체포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철야농성을 하였다. 시전상인들도 철시를 단행하여 만민공동회에 대한 지지를 하였으며 참여 시민도 점점 늘어났다. 일이 이렇게 확산하자 고종 황제는 11월 10일 수구파 대신들을 해임하고 체포한 17명에 태형 40대로 가볍게 처벌하고 석방하였다.
하지만 만민공동회는 해산하지 않고 독립협회 해산을 철회할 것과 독립협회를 무고한 정부 대신들을 탄핵할 것을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보수파 관료들은 보부상과 황국협회를 이용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려 하였다. 11월 21일 몽둥이로 무장한 보부상 2,000여 명이 경운궁 앞에서 열리고 있던 만민공동회장을 습격하여 결국 만민공동회는 막대한 부상자를 내고 해산되었다. 그런데 보부상들의 습격 소식이 퍼지자 격분한 시민들이 모여 보부상들을 도성 밖으로 몰아내고 다시 만민공동회가 열리고 참가 인원이 늘어났으며 분위기도 과격해졌다. 이에 11월 23일 고종은 황국협회 관련자 처벌과 보부상 혁파 등을 약속하였다. 만민공동회도 해산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보부상들은 해산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용익은 황국협회에 자금을 대대적으로 지원하는 등 보수파 관료들은 보부상들을 이용하여 독립협회 세력 및 만민공동회를 탄압하려고 하였다. 12월 6일 만민공동회가 다시 열렸으며, 이후 독립협회 인사들이 고위 관리로 참여하여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개혁 인사 가운데 박영효가 포함된 것이 문제가 되었다. 박영효는 당시에 1895년 을미사변 때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를 받고 일본에 망명하고 있었는데, 박영효가 개혁 인사에 포함되어 있자, 고종은 크게 분노하며 12월 23일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켰다. 그리고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구금(拘禁)하였다. 이렇게 황국협회와 독립협회 사건은 끝나게 된다.
이렇게 황국협회에 의해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만민공동회마저 정부에 의해 강제 해산되는 과정에서 황국협회 배후 세력으로 지목된 조병식은 오흉(五凶)의 한 사람으로 마땅히 처벌받아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나 고종은 조병식을 비롯한 오흉을 처벌하라는 신하의 요청에 고종은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처분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이렇게 번거롭고 시끄럽게 구니 짐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그렇게 하는 것인가. 무함(誣陷)은 이미 다 명백하게 밝혀졌고 널리 공표할 만한 문서도 없다. 절대로 의심하거나 염려하지 말고 즉시 물러가도록 하라”며 조병식을 두둔(斗頓: 잘못을 감싸주거나 무조건 편들어줌)하였다.
○조병식 유배 명령○ 조병식을 두둔하던 고종은 황국협회와 독립협회가 대립하는 상황에서 독립협회가 지지받는 상황이 되자 1898년 11월 22일 조병식을 유배 보내라고 명령하였다. 하지만 더 이상의 조치가 뒤따르지 않고 조병식은 체포되지도 않은 채 지내고 있었다. 이에 기간을 정해 체포하여 엄히 시행할 것을 청하는 상소가 올라오기도 하고 왕도 이를 허락하였기도 하였지만, 그 이후에도 별다른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
【멋대로 소란을 피운 홍종우 등을 조율하여 유배하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조병식·민종묵·유기환·이기동·김정근에 대해서 지난번에 백성들의 상소로 인하여 의정부에서 재판을 주청(奏請)하였다. 해당 범인들이 범한 죄가 만일 긴중한 것이 아니라면 어찌 여론이 이렇게 들끓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겠는가. 그리고 홍종우(洪鍾宇)·길영수(吉永洙)·박유진(朴有鎭)은 멋대로 소란을 피웠으니, 그대로 놔두어서는 안 된다. 모두 법부로 하여금 조율하여 유배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102책(탈초본 139책) 고종 35년 10월 9일[양력 11월 22일] 기축 3/10 기사 1898년 光武 2년 光緖(淸/德宗) 24년
【조병식 등을 체포하도록 신칙할 것을 청하는 의정부의정임시서리 찬정 김명규의 계】 김명규(金明圭)가 삼가 아뢰기를, “조병식·민종묵·유기환·홍종우·길영수·박유진 등을 유배하도록 조칙을 내리신 지 며칠이 되었는데 아직껏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이러고서도 나라에 법과 기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체(事體)로 헤아려 볼 때 너무도 놀랍습니다. 제때에 거행하지 않은 이유는 비록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결단코 지연시켜서는 안 됩니다. 기한을 정해 놓고 체포하도록 법부로 하여금 경무청(警務廳)에 엄히 신칙(申飭)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삼가 상주합니다.” 하였는데, 아뢴 대로 하라는 칙지를 받들었다. -『승정원일기』 3102책(탈초본 139책) 고종 35년 10월 12일[양력 11월 25일] 임진 8/8 기사 1898년 光武 2년 光緖(淸/德宗) 24년
조병식에 대한 처분이 미뤄지고 있는 가운데 황국협회와 독립협회가 서로 대립하는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변화가 생겼다. 이에 고종은 독립협회에 대한 태도가 부정적으로 바뀌었다. 그래서인지 고종은 1899년 1월 20일 조병식은 무죄라면서 체포하지 말라고 하였다.
【조병식 등의 처벌에 대해 묻는 의정부 찬정 법부대신 유기환의 계】 의정부 찬정 법부대신 유기환(兪箕煥)이 삼가 아뢰기를, “작년 11월 22일 조령에, ‘조병식·민종묵·김정근을 모두 법부로 하여금 형률을 적용하여 정배(定配)하게 하라.’는 내용으로 명을 내리셨습니다만, 아직도 거행하지 않은 것은 오로지 민회(民會: 만민공동회)가 스스로 이치에 어긋난다는 것을 깨닫고 모두 도망가 흩어졌기 때문입니다. 해당 관원들이 이미 죄범이 없다는 것이 이로부터 분명히 밝혀졌으므로 본부가 그들에게 형률을 적용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삼가 상주합니다.”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조병식과 민종묵은 잡아들이는 것을 면제하고 김정근은 풀어주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104책(탈초본 139책) 고종 35년 12월 9일[양력 1월 20일] 무자 2/4 기사 1898년 光武 2년 光緖(淸/德宗) 24년
이렇게 황국협회가 독립협회를 타도하기 위해 벌인 사건에서 조병식은 ‘5흉(五凶)’이라는 오명(汚名)을 쓰기도 하였지만, 고종의 배려인지, 신임인지, 아니면 고종이 오락가락하며 상황에 따라 독립협회에 관한 입장이 자주 바뀌는 바람에 운이 좋아서 그런지 여하튼 조병식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결국은 무죄로 판명받았다.
결국 황국협회의 독립협회 탄압으로 많은 이들이 희생당하고 독립협회만 해산된 셈이 되었다. 독립협회가 해산됨으로써 자연 황국협회도 해산되기는 하였지만. 이런 과정에 조병식은 5흉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협회를 해산시키는 데 앞장서고 큰 역할을 하였다.
■1899 궁내부 특진관 / 경효전 제조 / 중추원 의장 / 임시서리법무대신사무, {면직과 사면}■ 황국협회가 독립협회를 타도하는 일에 앞장섰던 조병식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1899년(고종 36년) 3월 3일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었다. 다음 날 조병식은 병을 이유도 사양하기도 하였지만, 왕은 사직을 허락하지 않고 그대로 칙령을 받들라 하였다. 또 3월 17일에는 경효전(景孝殿) 제조(提調)로 임명되기도 하였는데, 경효전은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 민씨가 시해당하자, 국장(國葬)을 치르면서 설치한, 명성황후의 신주를 봉안한 혼전(魂殿)이다. 경효전의 모든 의식을 담당하고, 그에 따른 사무 관장을 위하여 제조(提調)·영(令)·사승(祀丞) 등의 정규 관원을 두었고, 상례·제례에 따르는 행사 때 많은 임시 관원을 차출, 임명하기도 하였다. 경효전 제조로 임명되자 조병식은 마찬가지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으나 그대로 임명되었다.
1899년 5월 30일에는 중추원 의장이 되었다. 이때도 마찬가지 6월 2일 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고 공무를 행하라 하여 그대로 임명되었다. 마치 정해진 코스처럼 임명되면 사직을 요청하고 결국 그대로 임명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또 6월 22일에는 의정부가 중추원과 상의하지 않고 단독으로 일을 추진할 일로 의정부와 마찰하게 된 조병식은 다시 사직을 요청하였으나, 왕은 이 또한 허락하지 않고 사직하지 말고, 공무를 행하라 하였다. 잘못을 저질러도 결국 그대로 유임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중추원 의장에 경효전 제조 조병식을 제수하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경효전 제조 조병식을 중추원 의장으로 삼고, … 삼으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108책(탈초본 140책) 고종 36년 4월 21일[양력 5월 30일] 무술 3/10 기사 1899년 光武 3년 光緖(淸/德宗) 25년
【의정부가 중추원을 속박하면 중추원 관원은 쓸모없게 되므로 체차해 주기를 청하는 중추원 의장 조병식의 상소】 중추원 의장 조병식이 “삼가 아룁니다. … 나라에서 중추원을 설치한 목적은 의정부와 병립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의정부는 정사를 행하는 곳이고 중추원은 정사를 논의하는 곳입니다. 논의하는 권한과 행하는 권한은 어느 한쪽도 폐지해서는 안 되는데, 어느 한쪽을 폐지하지 않으려면 각자 주장하도록 해야 하고 아울러 행하도록 해서는 안 됨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삼가 의정부에서 재가받은 장정(章程)과 규칙(規則)을 보니 ‘의정부와 중추원은 협의한다’ 하였습니다. 한 가지 일이나 한 가지 내릴 명령이 있어서 합의하려면, 장정을 정하는 초기에 더욱 합석하여 잘 의논해서 함께 이룰 것을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장정을 개정할 때에 본원은 당초에 무슨 일인지 몰랐고, 반하(頒下: 왕실·조정이 법령·규정·지시 등을 공식적으로 발행·공포·지정하는 일)한 뒤에 타당하지 않은 두세 조항을 지적하여 다시 부표(付標: 문서 가운데서 특별히 유념하거나 강조할 부분에 표지를 붙이는 것)하기를 문서로 청하였는데, 전적으로 중대한 일에 관계된다고 핑계 대고 자신들의 의견을 굳게 고집하면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중대한 문제라는 핑계로 중추원을 속박하려는 뜻에 불과하니 …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굽어살피시어 속히 신의 직임을 체차(遞差: 교체)하심으로써 사사로운 분수를 편안하게 해주소서. 그러신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상소의 내용은 의정부로 하여금 다시 서로 타협하여 의논한 다음 아뢰어 재가받도록 하겠다. 경은 사직하지 말고 공무를 행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109책(탈초본 140책) 고종 36년 5월 15일[양력 6월 22일] 신유 7/7 기사 1899년 光武 3년 光緖(淸/德宗) 25년
1899년 7월 2일에는 임시서리법부대신사무(臨時署理法部大臣事務)에 임명되었다. 이때 조병식은 김필제(金必濟)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농상공부대신 민영기(閔泳綺, 1858~1927, 일제강점기 남작 작위를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를 함부로 체포한 후 풀어준 일이 있었다. 이에 민영기는 8월 12일 왕께 상소를 올려 자신은 무고당했으며, 사직을 허락해 주는 것과 함께 재판을 통해 사실을 명백하고 통쾌하게 밝혀 법을 공평하게 하고 조정의 기강을 엄숙하게 해줄 것을 청하였다. 이런 민영기와의 갈등 문제로 법부대신임시서리 중추원 의장 조병식은 1899년 10월 9일 징계를 받아 면직당하였다.
【조병식을 임시서리법무대신사무에 임명】 궁내부 특진관에 … 임명하고, 중추원 의장 조병식을 임시서리법부대신사무에 임명하였다. -『승정원일기』 3109책(탈초본 140책) 고종 36년 5월 25일[양력 7월 2일] 신미 6/10 기사 1899년 光武 3년 光緖(淸/德宗) 25년
【법부대신임시서리 중추원의장 조병식의 본관을 면직하였다】 법부대신임시서리 중추원의장 조병식의 본관을 면직하였다. -『승정원일기』 3113책(탈초본 140책) 고종 36년 9월 5일[양력 10월 9일] 경술 7/9 기사 1899년 光武 3년 光緖(淸/德宗) 25년
면직당한 4일 뒤인 10월 13일 조병식은 상소를 올렸다. 중대한 범죄 조사를 잘못하였다며 자신을 탄핵한 의정대신 윤용선(尹容善)과 함께 재판받아 법대로 처리해 주기를 청하는 상소였다. 이런 조병식의 상소에 윤용선은 무고당하였다며 10월 19일 사직을 청하였으나, 왕은 윤용선에게 억울하게 무고당한 것을 알고 있다며 개의치 말고, 당장 돌아와 사직하지 말라 명하였다. 한편, 조병식은 1900년 1월 27일 징계받았던 것을 사면받는다.
【조병식 등에 대해 징계를 사면하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정1품 조병식, 정3품 이용태(李容泰)에 대해 모두 특별히 징계를 사면해 … 주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116책(탈초본 140책) 고종 36년 12월 27일[양력 1월 17일] 경자 3/5 기사 1899년 光武 3년 光緖(淸/德宗) 25년
■1900 궁내부 특진관, {파면․유배} / 탁지부대신 / 양지아문 총재관 / 주일특명전권공사 / 국내부 특진관 / 법규교정소 부총재 / 의정부 참정 및 경부대신임시서리■ 면직당했다가 사면받은 조병식은 1900년(고종 37) 1월 29일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었다.
【궁내부 특진관에 정1품 조병식 등을 제수하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정1품 조병식, … 종2품 정우묵(鄭佑默)을 궁내부 특진관으로 삼으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116책(탈초본 140책) 고종 36년 12월 29일[양력 1월 29일] 임인 7/16 기사 1899년 光武 3년 光緖(淸/德宗) 25년
○조병식 파면·유배○ 특진관 임명 이틀 후인 1월 31일(음력 1월 1일) 설날이자 신년하례가 있는 날, 조병식은 특진관 임명을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런데 문제가 되었다. 상소 내용에 신년하례에 참석한 의정대신 윤용선과 의정부를 비방하는 듯한 내용이 들어있었다. 하여 신년하례 행사가 늦어지게 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결국, 조병식은 특진관으로 임명된 지 이틀 만인 이날 궁내부 특진관에서 면직(파면)되고, 호남으로 귀양 가는 징계를 받았다. 하지만 귀양 가기를 기다리다 3월 12일(음력 2월 12일) 사면되어 막상 귀양 가지는 않았다.
【궁내부 특진관 조병식의 본관을 면직하였다】 궁내부 특진관 조병식의 본관(本官)을 면직하였다. -『승정원일기』 3117책(탈초본 140책) 고종 37년 1월 1일[양력 1월 31일] 갑진 10/14 기사 1900년 光武 4년 光緖(淸/德宗) 26년
【특진관 조병식에게 귀양보내는 형전을 시행하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망녕된 한 통의 상소가 대신(大臣)을 조정에 있기 불편하게 하여 하례 의식을 지체시키기까지 하였으니, 사체(事體)에 있어 어찌 이와 같을 수가 있겠는가. 특진관 조병식에게 호남으로 귀양보내는 형전(刑典)을 시행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117책(탈초본 140책) 고종 37년 1월 1일[양력 1월 31일] 갑진 5/14 기사 1900년 光武 4년 光緖(淸/德宗) 26년
【정1품 조병식에 대해 징계를 사면하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정1품 조병식에 대해 특별히 징계를 사면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118책(탈초본 140책) 고종 37년 2월 12일[양력 3월 12일] 갑신 5/15 기사 1900년 光武 4년 光緖(淸/德宗) 26년
사면된 조병식은 1900년 3월 23일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오늘날 재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탁지부는 국가 재정을 총괄하던 관청으로, 호조(戶曹)가 탁지아문(度支衙門)으로 바뀌었다가 1895년 8아문을 7부로 개편되면서 탁지부로 바뀐 기관이다.
【탁지부 대신에 정1품 조병식을 제수하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정1품 조병식을 탁지부 대신으로, 궁내부 특진관 심상훈(沈相薰)을 의정부 찬정으로, 표훈원 부총재(表勳院副摠裁) 권재형(權在衡)을 법부 대신으로 삼으라.” 하였다.-『승정원일기』 3118책(탈초본 140책) 고종 37년 2월 23일[양력 3월 23일] 을미 2/14 기사 1900년 光武 4년 光緖(淸/德宗) 26년
탁지부대신으로 임명되자 예전과 마찬가지로 조병식은 자신이 못나 실정하였던 점과 늙은 나이와 병을 이유로 사양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사직을 청하는 조병식의 상소】 의정부 찬정 탁지부대신 조병식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이 지난 섣달에 은명(恩命)을 받고서 죄를 지은 처지에 매우 황공하여 감히 죄 없는 사람처럼 버젓이 나가 응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허물을 들어 실정대로 조목조목 밝힐 때에 말을 절제할 줄 몰라 스스로 견책을 불러들였으니, 먼저 엄한 비답(批答)을 내리시고, 이어서 귀양을 보내셨습니다. 이에 설날 아침에 눈물을 흘리며 창황히 도성을 나서면서 한번 뱉은 말을 돌이킬 수 없음을 탄식하였으니, 뒤늦게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짐을 꾸려 성상의 명을 기다리며 길 떠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데, 용서해 주시는 은명을 이내 내리시고 또 며칠도 안 되어 특별히 징계를 사면해 주셨습니다. … 하물며 신은 쇠약하고 나이도 많아 고질병이 날로 심해져 집안에서 늘상 하는 일도 잘 단속하지 못하는데, 어찌 저에게 직무를 맡게 할 수 있겠습니까. … 황상께서는 굽어살피시어 신이 현재 맡고 있는 직임을 속히 체차(遞差: 교체)해 주시고 신이 아직 처벌받지 않은 형률(刑律)을 내리셔서 구료(具僚: 관직을 맡은 사람)를 경책하시고 신의 분수를 편안하게 해주소서. 그렇게 해주신다면 너무나도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는데, 비지에, “‘상소를 보고 경의 간절한 마음을 잘 알았다. 지나간 별일도 아닌 일을 지금 다시 제기할 필요는 없다. 하례하는 반열에 참석하지 못한 것은 형편상 그런 것이지 어찌 경의 정성이 부족해서이겠는가. 경이 비록 나이는 많지만, 정신과 기력은 아직도 감당할 만하다. 지금 이렇게 특별히 제수하는 것은 경으로 인해서 곤경에 처한 재정을 쇄신하고자 해서이다. 경은 사양하지 말고 즉시 칙령을 받아 짐의 기대에 부응하라’는 내용으로 부랑(部郞: 부서에서 문서·사신·행정·군사 업무를 담당한 사람)을 보내어 선유(宣諭: 임금의 뜻을 백성에게 널리 알림)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118책(탈초본 140책) 고종 37년 2월 25일[양력 3월 25일] 정유 4/8 기사 1900년 光武 4년 光緖(淸/德宗) 26년
1900년 4월 11일에는 탁지부대신으로 양지아문(量地衙門) 총재관(總裁官)으로 임명되어 겸임하였는데, 양지아문은 1898년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청으로, 관원으로는 칙임관인 총재관 3명, 부총재관 2명, 기사원(記事員) 3명 등으로 구성되었다.
【양지아문 총재관에 탁지부대신 조병식 등을 임명하였다】 탁지부대신 조병식, 종1품 박정양(朴定陽)을 양지아문 총재관에 임명하였다. -『승정원일기』 3119책(탈초본 140책) 고종 37년 3월 12일[양력 4월 11일] 갑인 4/4 기사 1900년 光武 4년 光緖(淸/德宗) 26년
1900년 8월 7일(음력 7월 13일)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로 임명되어 일본에 주재하라는 명을 받았다. 이때도 나이와 병을 시유로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왕은 “요즘 사직하는 글을 올리는 것이 하나의 풍습이 되고 있는데, 형식적으로 사양하는 것이 아니면 바로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지적하면서 사직하지 말고, 즉시 떠날 준비를 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특명전권공사에 탁지부 대신 조병식을 제수하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탁지부대신 조병식을 특명전권공사로 삼으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123책(탈초본 140책) 고종 37년 7월 13일[양력 8월 7일] 임자 4/14 기사 1900년 光武 4년 光緖(淸/德宗) 26년
【적임이 아니고 신병이 있으므로 사신 직함을 변통해 주기를 청하는 의정부 찬정 탁지부대신 조병식의 상소】 의정부 찬정 탁지부대신 조병식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이 지난번에 삼가 전권공사에 제수하는 명을 받들었습니다. 이어서 일본에 주재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이에 여러 날 방황하고 두려워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전대(專對)는 막중한 임무이므로 진실로 누구에게나 맡길 수는 없는 것인데, 더구나 신처럼 어리석고 쇠병(衰病)이 든 사람이 어찌 감당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결국에 일을 그르칠 것임을 즉시 알 수 있습니다. …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굽어살피고 불쌍히 여기시어 신의 사신 직함을 속히 변통하심으로써 나랏일로 가는 일을 중히 하고 병을 다스리기 편하게 하여 주시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상소를 보고 경의 간절한 마음을 잘 알았다. 요즘 사직하는 글을 올리는 것이 하나의 풍습이 되고 있는데, 형식적으로 사양하는 것이 아니면 바로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경은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인데 어찌 이런 무리들의 행위를 본받겠는가. 경은 나이도 많기 때문에 염려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사신의 일로 나가는 것은 의리에 해당하는 것이다. 경은 굳이 사양하지 말고 즉시 떠날 차비(差備: 채비, 준비)를 하여 위임한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는 내용으로 부랑(部郎)을 보내어 선유(宣諭)하도록 하라.” 하였다.-『승정원일기』 3123책(탈초본 140책) 고종 37년 7월 19일[양력 8월 13일] 무오 6/6 기사 1900년 光武 4년 光緖(淸/德宗) 26년
특명전권공사 조병식은 68세(옛 나이 69세)의 늙은 나이로 8월 중순에 길을 떠나 일본에 50일 정도 머물며 동경(東京, 도쿄)과 대판(大阪, 오사카) 등을 둘러보는 가운데 일본 천황을 2번 만나보고 각국 외교관과 접촉하다가 10월 말에 귀국하였다. 그가 일본에 다녀온 목적은 스위스·벨기에와 같이 우리나라를 중립화하는 일에 일본이 동의해 주길 요청하는 데 있었다. 당시 중국은 의화단 사건(1900년 6월 베이징에서 의화단이 교회를 습격하고 외국인을 박해하는 등의 일을 벌이자 이를 정부가 지지하고 대외 선전포고까지 하여 미국을 비롯한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진압한 사건)으로 청나라가 분할될 위기에 놓였다. 이를 지켜본 고종 황제는 1900년 8월 특명전권공사 조병식을 일본에 파견하여 우리나라를 중립화하는 문제에 일본의 동의를 얻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한반도 장악이 전략적 목표였으므로 우리나라 중립화에 부정적이었다. 그러자 조병식은 주일미국공사 버크(Alfred E. Buck)에게 미국 정부가 열강과 협력해서 한국의 독립과 중립에 관한 국제적인 보장을 확보하는 데 노력해 주기를 거듭 요청하였지만, 이 역시 거절당하였다.
귀국 후 조병식은 1900년 10월 27일 궁내부 특진관에 제수되고, 11월 7일에는 법규교정소(法規校正所) 부총재(副摠裁)로 임명되었으며, 또 11월 13일에는 의정부 참정 임명과 함께 임시서리경부대신사무(臨時署理警部大臣事務)에 임명되었다. 경부(警部)는 경찰 관련 업무를 총괄하던 중앙기구로, 원수부(元帥府) 설치와 대한국 국제(大韓國國制) 반포 등 고종이 황제 권력 강화를 추진하면서 1900년 6월 신설된 최고위 경찰 기관이다. 1902년 2월 경무청(警務廳)으로 재설치되었다. 경부대신은 오늘날 경찰청장에 해당한다.
<다음에 '7. 관직을 사양하고 사양해도 그대로 임명되는 조병식'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