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 같은데 잘 모르는 조병갑, 조병갑보다 더한 조병식과 조병직(13)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의 공주집회 탄압과 고등재판소 판사 조병갑․조병직의 동학교주 재판 (13) 조병식이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하고, 늙고 병들어 관직을 사양하고 사양해도 왕은 허락하지 않고 그대로 임명하였다

2026-04-06     인간 전병철

동학농민혁명과 관련 있는 인물, 조병갑과 조병식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어 발품 팔아 조사했습니다. 하고 나니 조병직에 대한 정리도 필요하여 추가 조사하였습니다. 그 결과, A4로 200쪽 되는 글을 16회로 나누어 공유하고자 합니다. 재미없는 글이긴 하나, 조병갑ㆍ조병식ㆍ조병직을 알면 동학농민혁명을 아는 데 나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인간 전병철(작가)

 

7. 관직을 사양하고 사양해도 그대로 임명되는 조병식

■1901 임시서리법부대신사무 / 기로소 당상 / 법부대신 / 궁내부 특진관■ 의정부 참정으로서 임시서리경부대신사무를 겸하던 조병식은 1901년 3월 14일 임시서리법부대신사무(臨時署理法部大臣事務)에 임명되었다가 5월 19일 법부대신으로 임명된다. 그런데 법부대신 조병식의 비리가 밝혀졌다. 지난 1900년 탁지부대신으로서 주일특명전권공사 자격으로 그해 8월 일본으로 떠나면서 공금을 횡령하였다는 것이다. 탁지부에서는 1901년 7월 25일 그가 아직 반납하지 않는 금액, 횡령한 금액을 징수할 수 있게 요청하는 장계를 올렸다.

【전임 대신 조병식에게 유용한 공금을 반납하게 할 것을 청하는 의정부 찬정 탁지부대신 육군 부장 민병석의 계】 의정부 찬정 탁지부대신 육군부장 민병석(閔丙奭)이 삼가 아뢰기를, “광무 4년(1900) 8월 15일 본부의 전임 대신 조병식이 일본공사로 출국할 때에 국고의 돈 2만 6921원을 거리낌 없이 유용(流用)했는데, 돌아와서는 지폐 3,191원 11전 8리만을 도로 반납하고 그 나머지 액수는 아직도 와서 반납하지 않아 장부상 허류(虛留)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채워 반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법부로 하여금 독촉하여 반납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감히 아룁니다.” 하였는데, 아뢴 대로 하라는 칙지를 받들었다. -『승정원일기】 3135책(탈초본 140책) 고종 38년 6월 10일[양력 7월 25일] 갑진 9/9 기사 1901년 光武 5년 光緖(淸/德宗) 27년

예전 조병식과 갈등이 있었던 의정대신 윤용선(尹容善)은 1901년 8월 11일 장계를 올려 조병식과 함께 거론되고 있는 이용직(李容直)을 함께 변호하면서 이용직은 물론 조병식 모두 용서해 주기를 청하는 장계를 올렸다.

【전 주일공사 조병식 등을 용서하여 사충사에 대한 치제에 참여하게 할 것을 청하는 의정부 의정 윤용선의 계】 의정부 의정 윤용선(尹容善)이 삼가 아뢰기를, “사충사(四忠祠)[경종 때 일어난 신임사화(辛壬士禍) 당시 소론에 의해 죽게 된 노론 4대신(四大臣), 즉 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이이명(李頤命)을 모신 사당]에 대한 치제(致祭)가 하루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의리를 동경하고 충성을 숭상하는 관리들은 모두 제사에 참가할 것인데, 하물며 그 후손들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전 주일공사 조병식은 충익공(忠翼公, 조태채)의 후손이고, 전 경상감사 이용직(李容直)은 충민공(忠愍公, 이순신)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두 신하 모두 탁지부의 논핵(論劾)을 받고 있어 제사에 참석하기 어려운 형편이니, 그 정리를 따져 보면 어찌 서글프지 않겠습니까. … 또 그 걸려든 문제로 말하면, 조병식의 경우는 공사로 갈 때 쓴 돈 1만 6000여 원을 독촉하여 받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법부의 기안(起案)을 가져다 보니, 지출한 내역에 모두 구별이 있고 모두 외부(外部)를 통하여 마감하였으니, 독촉하여 받아들이는 한 가지 문제는 애당초 거론할 것도 없습니다. 이용직으로 말하면 진주(晉州)의 천포결(川浦結)에 대한 조세를 징수하는 문제입니다. … 탁지부에서 석방하자고 결정한 문서 내용을 다시 조사해 본 바에 의하면 해당 돈이 설사 정말 납부해야 할 것이라고 하더라도 당오전 4만 냥은 을미년에 다 완납하고 석방될 때의 당오전 30여만 냥 안에 이미 포함된 것인 데다 얼마 후인 그해 6월에 또 특별히 탕감받은 것이었습니다. 확실한 증거가 있는 만큼 이제 와서 두세 번 거듭 징수하는 것은 사실 법의(法意)에 맞지 않습니다. 이용직을 속히 법부로 하여금 방면하게 하고 조병식에 대해서도 같은 규례로 용서하여 치제할 때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에 삼가 상주합니다.” 하였는데, 아뢴 대로 하라는 칙지를 받들었다. -『승정원일기』 3135책(탈초본 140책) 고종 38년 6월 27일[양력 8월 11일] 신유 2/4 기사 1901년 光武 5년 光緖(淸/德宗) 27년

조병식은 자신의 죄가 드러나 처벌받아 마땅하므로 법대로 처벌하고, 특히 겸직하고 있는 법규교정소 부총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는 상소를 1901년 8월 16일에 올렸다.

이 상소 내용에는 1900년 8월 주일특명전권공사가 되어 “신이 칠순이 다 된 나이에 왕명을 받들고 동해 바다를 건넜는데, 사신의 임무를 그르칠까 염려하면서 외람되이 맹세를 실천하려고 하여 거센 파도를 만나 몇 번의 위기를 넘기고 요행히 환국”하였다고 말하고 있으며, 또 “다행히 성대한 시대를 만나 지금 이렇게 기로사(耆老社)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으니, 병은 비록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신에게는 실로 영광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내용을 보면 조병식은 1901년에 70세(만 69세)로 기로사 당상(堂上)이 된 것으로 파악된다. 기로사(耆老社)․기로소(耆老所)는 연로한 고위 관리들에 대한 예우와 친목을 위해 설치한 기구로, 원칙적으로 정2품 이상의 문관으로서 70세 이상이면 기로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죄가 드러나 처벌받아 마땅하므로 겸임을 개차해 주기를 청하는 법규교정소 부총재 조병식의 상소】 법규교정소 부총재(法規校正所副摠裁) 조병식(趙秉式)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은 타고난 자질이 본래 어리석은 데다 늙어가면서 더욱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한 일에는 잘잘못이 있어도 마음은 실로 딴 마음이 없는데 남에게 질시를 받으니, 단지 스스로 두려워 떨기만 할 뿐입니다. 탁지부에서 아뢰어 탄핵하였을 때에도 신은 굳이 구구하게 변명할 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신이 칠순이 다 된 나이에 왕명을 받들고 동해 바다를 건넜는데, 사신의 임무를 그르칠까 염려하면서 외람되이 맹세를 실천하려고 하여 거센 파도를 만나 몇 번의 위기를 넘기고 요행히 환국하였으니, 이 모두가 황상의 총령(寵靈)이 미친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말하는 것마다 번번이 거스르고 하는 일은 도리어 낭패를 초래하게 되니, 그들은 신을 원수로 여겨 필시 복수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법사(法司)에서 자세히 심판하여 시비가 저절로 판명되었고 대신이 황상께 아뢰어 죄를 용서하라는 칙지를 내리셨습니다. 이는 실로 우리 황상 폐하께서 신축년이 돌아옴을 추모하여 특별히 선조의 사당에 은혜롭게 제사 지내라는 명을 내리신 데 연유한 것이고, 이어 또 불초한 후예를 곡진히 진념하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신처럼 절박한 처지로 대죄(待罪)하고 있는 자에게도 특별히 제사 지내는 반열에 나아가 참가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신은 명을 듣고 두려워서 문을 닫고 감읍하며 저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렀습니다. 그렇다고 감히 요행히 기회를 만났다 하여 스스로 용서하고 핑계 댈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더구나 총재의 겸임에 대해 아직도 체직을 윤허받지 못하여 날마다 방황하며 갈수록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신은 젊은 나이에 외람되이 과거에 합격하여서는 청현직(淸顯職)에 뛰어올라 갑자년부터 내직과 외직을 두루 거치고 구제(舊制)와 신제(新制)를 고루 경험하며 어느덧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타고난 성품이 융통성이 없어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논박을 하여 남의 허물을 감싸 주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매양 일이 어긋날 때면 과도하게 논박받는데, 이는 복수의 칼날을 들이댈 기회를 노리는 많은 이들이 분노하고 노여워하는 마음을 가득 품은 채 자나 깨나 가슴을 치며 벼를 뿐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직 우리 황상 폐하께서는 신에게 천지와 같고 부모와 같으시어 사사로이 덮어 주시고 은혜로 길러 주심을 끝없이 해 주셨습니다. 따뜻한 볕이 쪼이면 만물이 소생하고 비와 이슬이 내리면 군상이 자라고 윤택해지는 법입니다. 그러나 신은 노병(老病)이 점점 침투하여 기식(氣息)이 사그러져서 자신을 돌아보면 도리어 썩고 시든 육신일 뿐입니다. 이미 높은 작질에 올랐고 또 칠순이 거의 되었습니다. 본래 어리석고 병든 이가 스스로 기약할 수 있는 바가 아닌데도 혹시라도 한 번 뵙고 은혜의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리하여 제수하는 명이 내릴 때마다 응하여 직무를 수행하였습니다만, 약한 체질이 이미 쇠하였으니 성과를 거둘 가망이 없습니다. 다행히 성대한 시대를 만나 지금 이렇게 기로사(耆老社)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으니, 병은 비록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신에게는 실로 영광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겸임을 맡고 있으니 더욱 합당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피하기 어려운 죄가 드러나 처벌받아야 마땅한 처지인 데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이에 감히 외람되게 숭엄하신 성상을 번독하게 해 드립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굽어 살펴 헤아려 주시어 신을 해당하는 형률로 처벌하시고 겸임을 개차(改差)하심으로써 공기(公器)를 중하게 하고 제 분수를 편안하게 해 주시면 너무도 다행이겠습니다. ……”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자세히 조사하여 분명하게 가렸는데, 다시 무슨 괘념할 것이 있다고 이처럼 지루하게 말하는가. 경은 사직하지 말고 공무를 행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136책(탈초본 140책) 고종 38년 7월 3일 [양력8월16일] 병인 4/4 기사 1901년 光武 5년 光緖(淸/德宗) 27년

여하튼 법규교정소 부총재 겸임에서 사직하길 청하였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으며, 9월 6일에는 궁내부 특진관으로 제수하였다. 특진관으로 임명된 지 한 달이 훨씬 넘은 10월 24일 조병식은 노병(老病)이 날로 심해지고 합병증까지 생겨 더는 그대로 눌러앉아 있을 수 없으니, 궁내부 특진관과 법규교정소 부총재에서 모두 사직할 것을 왕께 청하였다. 그래도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궁내부 특진관에 정1품 조병식을 제수하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정1품 조병식(趙秉式)을 궁내부 특진관으로 삼으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136책(탈초본 140책) 고종 38년 7월 24일[양력 9월 6일] 정해 4/12 기사 1901년 光武 5년 光緖(淸/德宗) 27년

이렇게 조병식이 공금을 횡령한 일이 있었음에도 별다른 처벌 없이 지나갔다. 그런 가운데 12월 1일 의정부 찬정 이용익(李容翊)이 국가 재산을 빼돌린 전 대신 조병식을 징계하고 빼돌린 돈을 갚도록 청하는 장계를 올렸다. 이어 이용익은 12월 12일(음력 11월 2일)에도 또 장계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방곡령 사건으로 일본에 지급할 배상금 11만 원 가운데 조병식 자신이 갚아야 할 돈을 다 갚지 않아 오히려 의정부가 갚았다며 배상금을 내지 않고 미납한 전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 등을 징벌하고 미납금을 회수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방곡령 배상금 11만 원 가운데 자신의 몫을 갚지 않은 전 감사 조병식 등을 징벌할 것을 청하는 의정부 찬정 탁지부대신서리 탁지부협판 이용익의 계】 또 아뢰기를, “… 지난 계사년(1893) 4월에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는 두 도의 다섯 가지에 관한 배상금 11만 원에 대하여 지방(地方)과 사안(事案)을 구분하여 물어내게 해야 할 사람의 이름을 주명(註明)해 놓았습니다. 6만 원은 정해진 기한 내에 먼저 갚았고, 나머지 5만 원은 몇 해로 나누어 갚도록 한다는 내용으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으니, 북관(北關: 함경도)의 양곡 수출 금지 한 가지 문제와 관련된 3만 원은 조병식(趙秉式)이, 황해도의 두 차례에 걸친 양곡 수출 금지와 생복(生鰒), 수삼 등 네 가지 문제와 관련된 총 2만 원 가운데에서 1만 5,000원은 오준영(吳俊泳)이, 1,500원은 조병철(趙秉轍)이, 3,500원은 의정부가 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기록하여 입계(入啓)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후 개국 504년(1895)에 외부에서 본부에 조회하여 청하기를, 각 배상금을 응당 물려야 할 데서 미처 받아 내지 못했더라도 이것은 양국 정부의 조약과 관련되니 귀부(貴部)에서 먼저 갚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등의 말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조약대로 다 갚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물어내야 할 여러 사람 중 오직 황해감사 오준영만이 갑오 연간에 다 청산하였고, 전 감사 조병철은 단지 1년분 200원만 국고에 바쳤을 뿐 그 후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아직 청산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을 그냥 내버려둠으로써 관청 장부에 빈 숫자만 올라와 있게 할 수는 없습니다. 위에서 몇 해로 나눈 액수인 5만 원에서 오준영이 이미 청산한 1만 5,000원과 조병철이 먼저 바친 200원, 세 개 항구에서 분담하여 보상할 것 3,500원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 조병식이 바쳐야 할 3만 원, 조병철이 바쳐야 할 1,300원, 도합 3만 1,300원을 수량대로 받아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계사년에 먼저 갚은 6만 원으로 말하면, 조병식이 먼저 바친 1만 원을 제외한 나머지 5만 원은 의정부에서 대신 갚은 것인데, 이것도 오랫동안 청산하지 않았으니, 사체(事體: 사리와 체면, 일이 되어 가는 형편이나 상황)가 아닙니다. 아울러 법부(法部)로 하여금 법대로 징벌하고 독촉하여 바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감히 아룁니다.” 하였는데, 아뢴 대로 하라는 칙지를 받들었다. -『승정원일기』 3140책(탈초본 140책) 고종 38년 11월 2일[양력 12월 12일] 갑자 7/9 기사 1901년 光武 5년 光緖(淸/德宗) 27년

이용익의 상소에 따르면, 조병식은 방곡령 선포로 일본에 내야 할 배상금 가운데 자신이 낼 돈을 다 내지 않았고, 또 조병식이 주일특명전권공사로 있는 때 공금을 횡령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용익의 탄핵에 대해 조병식은 12월 28일 자신을 변명하며 억울함을 풀어주길 바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함경도 배상금 등의 문제를 살펴 신원해 주기를 청하는 조병식의 상소】 대죄신(待罪臣) 조병식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동지 가절을 맞이하여 온갖 복록이 밀려드니, 신민들의 기뻐 경하하는 마음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이어 삼가 생각건대, 신이 작년 가을부터 우연히 원인 모를 병에 걸려 두 해 동안 심하게 병치레를 하다 보니 칠순 노인의 몸으로 다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듭 뜻밖의 재앙을 당하여 모함에 걸려드는 일이 죄다 이르렀으니, 바로 함경도의 배상금과 일본에 갈 때의 여비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대죄하면서 상소를 올려 호소하는 일은 예로부터 행해 온 일이기에 성상을 성가시게 한다는 것은 헤아리지 않고 요점만 간략하게 진술합니다. 신이 기축년(1889, 고종 26) 이후로 13년 동안 함경도를 맡기도 하고 일본에 가기도 하면서 전적으로 국사에 매달리고 이르는 곳마다 직무에 힘쓸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우리 폐하의 중한 은혜와 염려 덕분이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황송하여 몸을 구부린 채 몸 둘 바를 모르겠으니 어찌 감히 진달하여 번거롭게 하겠습니까마는, 함경도의 배상금 문제를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기축년에 함경도에 기근이 들었는데 황두(黃豆) 작황이 더욱 형편없었습니다. 이에 약장(約章)에 따라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 문서를 보냈더니,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는 원산항 감리(元山港監理)에게 공문을 띄워 원산항 감리가 10월 초부터 기한을 정하고 수출을 금지하는 것을 준행하였을 뿐이고 관찰사는 관여한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몇 달이 되지 않아서 또 금령(禁令)을 풀었으니, 수출을 금지시킨 것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고 금령을 푼 것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임진년(1892, 고종 29) 윤 6월경에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는 애당초 사실을 조사하지도 않고 일본공사관에 조복(照覆)하고는 암암리에 배상금을 물도록 수락하였습니다. 그리고 차후에 기기국 사사(機器局司事) 임응호(任應鎬)를 파견하면서 문서 안의 허위 기록을 조사하라고 일렀으니, 먼저 배상금을 물겠다고 수락하고 후에 조사를 진행한 셈입니다. 막상 임응호가 돌아오자 모호한 문제들이 허다하였기에 의정부(議政府)에서 불러다 사유를 따지자, 그는 일본 상인의 청탁을 고스란히 따랐다고 대답하였으며 심지어 뇌물을 받은 것까지도 탄로났습니다. 또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主事) 이계필(李啓弼)을 파견하여 뇌물을 받고 허위 날조한 사실을 다시 조사하였으니, 신이 죄 없이 억울하게 징벌받은 것은 다시 변명하지 않고도 명백히 밝혀진 것입니다. 임응호가 뇌물을 받은 쪽지와 이계필이 조사한 문서가 모두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 있는데도 시비곡직을 따지지 않은 채 이 배상금을 액수대로 갚도록 특별히 허락한 것은 사실 이웃 나라와의 관계를 좋게 가지려는 뜻에서 나왔을 뿐 애당초 당시의 관찰사와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원통하게 징벌받아 가산을 탕진한 것이 어찌 너무도 억울하고 분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거두어 바친 66만 금(金)에는 가택까지 몰수되어 들어갔습니다. 이런 일을 한번 겪은 후에 이미 공의(公議)가 있었건만 어느덧 13년의 세월이 흘러 자연스럽게 사안이 낙착되고 말았습니다. 일본에 갈 때의 여비 출납과 청산으로 말하면 수행원 중의 한 사람인 이준상(李濬相)이 설명한 문서가 원래 있습니다. 그런데 올가을 법부에서 조사 보고하였고, 또 의정부에서도 아뢰어 재결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신은 그 무렵에 감히 가슴속에 있는 간절한 생각을 아뢰었고, 이어 분명하게 분별해 주는 비답을 받았기에 온 집안이 감격하였으니, 무엇으로 은혜에 보답한단 말입니까. 이상 두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모두 조정의 처리가 있었는데도 갑자기 탁지부에서 차례로 들어와 아뢰어 다시 전날의 사안을 들고 나섰으니, 이것은 모두 앙심을 품고 마구 몰아대면서 기어이 보복하려는 것으로서 맞서 따질 가치도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폐하께서 밝게 살펴주시는 은덕을 입고 있으니, 중병 든 늙은 신으로 하여금 죄를 뒤집어쓴 채 원통한 마음을 품고 있도록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에 감히 대죄한 채 외람되이 아뢰어 번거롭게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고 불쌍히 여기시어 특별히 신원(伸冤)의 은택을 내리심으로써 다시는 죄에 걸려들지 않도록 해주소서. 간절히 바라 마지않습니다. ……”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만일 명백히 해명하면 자연히 밝혀질 것이다.” 하였다. -『승정원일기』 3140책(탈초본 140책) 고종 38년 11월 18일[양력 12월 28일] 경진 5/5 기사 1901년 光武 5년 光緖(淸/德宗) 27년]

■1902 임시서리외부대신사무 / 외부대신■ 조병식을 탄핵하는 장계가 이어지자 1902년(고종 39) 4월 10일 조병식은 병을 이유로 궁내부 특진관에서 사직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럼에도 왕은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렇게 조병식은 죄를 짓고 스스로 사직을 청해도 왕은 번번이 그를 사직시키지 않거나 벌을 주어도 곧바로 사면하면서 여전히 측근으로 두고 나랏일을 맡겼다. 그런 관행과 사회 구조 속에서 탐관오리 조병식은 제대로 처벌받지 않고 살아남아 또 다른 불법을 저지르는 등 탐학한 짓을 계속하였다.

한편, 5월 27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조병식을 비롯한 기로소(耆老所) 당상(堂上)들에게 연회가 베풀어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궁내부 특진관 조병식은 1902년 10월 16일 임시서리외부대신사무에 임명되었다. 이어 10월 31일에는 외부대신(外部大臣, 오늘날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렇게 고종은 조병식의 수완을 믿고 계속 그를 주요 요직에 임명하였다.

【임시서리외부대신사무에 궁내부 특진관 조병식을 임명하였다】 궁내부 특진관 조병식을 임시서리외부대신사무에 임명하였다. -『승정원일기』 3150책(탈초본 140책) 고종 39년 9월 15일[양력 10월 16일] 임신 4/4 기사 1902년 光武 6년 光緖(淸/德宗) 28년

【외부대신에 궁내부 특진관 조병식을 제수하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궁내부 특진관 조병식을 외부대신(外部大臣)으로 … 삼으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151책(탈초본 140책) 고종 39년 10월 1일[양력 10월 31일] 정해 3/6 기사 1902년 光武 6년 光緖(淸/德宗) 28년

1902년 10월 4일 궁내부 특진관 조병식의 건의에 따라 숭의묘(崇義廟)가 건설되기 시작하여 1903년 완성되었다. 숭의묘는 중국의 유비, 관우, 장비, 제갈량 등을 모신 사당이다.

【숭의묘 터를 영선사 장에게 지관을 거느리고 가서 살펴보게 하다】 궁내부(宮內府)에서 아뢰기를, “숭의묘(崇義廟) 터를 영선사 장(營繕司長)으로 하여금 상지관(相地官)을 거느리고 가서 간심(看審)하게 하였더니, 서서(西署) 반송방(盤松坊)에 있는 전 기보(畿輔) 중영(中營) 뒷산 기슭 유좌(酉坐)의 땅이 좋다고 합니다. 이곳에 경계를 정하고 즉시 공사를 시작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고종실록 42권, 고종 39년 10월 23일 陽曆 1/1 기사 / 1902년 대한 광무(光武) 6년

임진왜란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관우(關羽)를 관왕(關王)으로 모시고 제사 지내는 무묘(武廟)가 적잖게 세워졌다. 왕과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꾀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1598년(선조 31)과 1601(선조 34)년 각각 서울에 남관왕묘와 동관왕묘가 건립되고, 강진·성주·안동 등 지방에도 관왕묘가 건립되었다. 이후 1883년(고종 20) 서울에 북관왕묘가 새로 세워지고, 전주와 하동 등지에도 관왕묘가 세워졌다. 이렇게 관왕묘 건립과 제사가 이어지는 가운데 1902년 조병식(趙秉式)의 상소에 따라 숭의묘 건립이 추진되어 1903년 완성을 보았다. 특히 이 시기는 대한제국의 전쟁 관련 제사가 강조되던 시기로, 숭의묘 건립에는 부국강병을 꾀하던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관우를 모신 점과 돈의문 밖에 건립되어 ‘관왕묘의 서묘(西廟)’로 여겨진 숭의묘는 관우만이 아니라 유비와 장비 및 제갈량 등을 모셔 기존 관왕묘보다 격이 높았다. 러일전쟁 발발 직후 1904년(광무 8) 4월 27일에 첫 봉안 의식이 행해진 후, 1908년 ‘국가 차원에서 지내는 모든 제사가 폐지’(순종실록 2년 7월 23일)되어 불과 4년밖에 숭의묘에서 제사를 지낸 셈이다. 숭의묘는 일제강점기 이곳을 장애인 교육기관인 제생원(濟生院) 양육부(고아원)와 맹아부(맹아원)으로 사용되다가 1933년 철거되었다.

■1903 서북철도국 총재 / 궁내부 특진관■ 1903년(고종 40) 1월 30일 외부대신 조병식은 서북철도국(西北鐵道局) 총재로 임명되었다. 3월 23일에는 궁내부 특진관으로 복귀하고 서북철도국 총재는 내장원 경(卿) 이용익이 겸임하였다. 서북철도국은 경의선 철도를 건설하기 위해 1900년 9월 설치된 정부 산하 기구로, 이용익이 주도하여 자력으로 철도를 부설하려는 노력에 따라 설치되었다. 프랑스 기사 2명을 초빙하여 노선을 측량하고, 전환국이 비용을 지원하여 공사에 착수하였으나 자금 부족과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서북철도국 총재에 외부대신 조병식을 제수하라는 조령】조령을 내리기를, “외부대신 조병식을 서북철도국 총재(西北鐵道局摠裁)로 삼으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154책(탈초본 140책) 고종 40년 1월 2일[양력 1월 30일] 임자[무오] 3/19 기사 1903년 光武 7년 光緖(淸/德宗) 29년

【궁내부 특진관에 서북철도국 총재 조병식을 제수하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서북철도국 총재 조병식을 궁내부 특진관으로, 내장원 경 이용익(李容翊)을 겸임 서북철도국 총재로, 종2품 이규환(李圭桓)을 서북철도국 감독으로 삼으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155책(탈초본 140책) 고종 40년 2월 25일[양력 3월 23일] 경술 3/5 기사 1903년 光武 7년 光緖(淸/德宗) 29년

■1904 의정부 참정 / 서리외부대신사무 / 홍문관 학사 / 표훈원 총재 / 내부대신 / 인산시돈제사■ 1904년(고종 41) 1월 21일 나이 72세(옛 나이 73세)의 조병식은 상소를 올려 늙고 병든 것은 물론 고질병이 심하여 일하기가 어려우니 모든 관직에서 물러날 수 있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왕은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사직하였던 조병식은 1904년 3월 7일 특명(特命)에 따라 의정부 참정에 임명된다. 한 달 보름 만에 다시 관직으로 돌아온 셈이다. 조병식은 이튿날 의정부 참정 임명 철회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왕은 “경험이 많은 이가 필요하여 임명하였으니 사직하지 말고, 그대로 일하라” 하였다.

같은 해 3월 12일에는 서리외부대신사무(署理外部大臣事務)에 임명되어 겸직하였다. 그리고 3월 26일 의정부 참정 외부대신서리 조병식은 늙고 신병이 있어 군국(軍國)의 사무와 아주(亞洲: 아시아), 구주(歐洲: 유럽)와의 교섭 등의 일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어 본직과 겸직을 모두 해임해 주기를 청하는 사직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왕은 모두를 해임할 수 없다며 외부대신서리 직임(職任)만 사직하게 하도록 하였다. 이런 일이 있음에도 5월 8일에는 의정부 참정 조병식에게 홍문관 학사(學士)를 겸임하게 하였다.

홍문관 학사는 1894년 궁내부 관제의 하나인 홍문관에 소속되어 경연(經筵)의 시강(侍講) 및 자문 등의 일을 맡아보던 관직이다. 원래 홍문관은 조선시대 궁중의 경서(經書)·사적(史籍)의 관리와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각종 자문에 응하는 일을 관장하던 관서로, 사헌부·사간원과 더불어 삼사(三司)라 하였다. 옥당(玉堂)·청연각(淸燕閣)이라고도 불린 홍문관의 관직은 청요직(淸要職: 청렴하고 중요한 관직)의 상징이었기에 홍문관원(弘文館員)이 되면 출세가 보장되기도 하였는데, 조선시대 정승·판서로서 홍문관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서리외부대신사무에 의정부 참정 조병식을 임명하였다】 의정부 참정 조병식(趙秉式)을 서리외부대신사무(署理外部大臣事務)에 임명하였다. -『승정원일기』 3167책(탈초본 141책) 고종 41년 1월 26일(양력 3월 12일) 을사 5/10 기사 1904년 光緖(淸/德宗) 30년

【의정부 참정 조병식에게 홍문관 학사를 겸임하게 하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의정부 참정 조병식에게 홍문관 학사를 겸임하게 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169책(탈초본 141책) 고종 41년 3월 23일(양력 5월 8일) 임인 2/4 기사 1904년 光緖(淸/德宗) 30년

1904년 5월 18일 조병식은 본직과 겸직 모두를 해임해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사정을 듣고 왕은 홍문관 학사 겸임만 해임하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고종은 조병식에게 관직을 임명하고 그러면 조병식은 사직을 요청하면 허락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게 하거나 임명한 것 일부만 철회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사람이 없었을까, 아니면 조병식에 대한 고종의 신뢰가 지나쳐서일까? 여하튼 한편으론 짜증이 날 정도로 같은 일이 자꾸 반복되었다.

이후에도 조병식이 사직을 요청하여 의정부 참정(參政)에서 그 아래 지위인 의정부 찬정(贊政)으로 임명되기도 하였지만, 1904년 6월 28일에는 표훈원(表勳院) 총재에 제수된다. 표훈원은 표창과 상훈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1899년 설치한 기관이다. 예전 의정부에 속해 있던 기공국(記功局)이 독립하여 표훈원으로 바뀐 것이며, 다시 표훈사로 바뀌기도 하였는데, 오늘날 국가보훈부에 해당하는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표훈원 총재에 정1품 조병식을 제수하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정1품 조병식을 표훈원 총재로, … 특진관 조동희(趙同煕)를 의정부 찬정으로 삼으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171책(탈초본 141책) 고종 41년 5월 15일(양력 6월 28일) 계사 5/6 기사 1904년 光緖(淸/德宗) 30년

1904년 12월 30일 내부대신(內部大臣, 오늘날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다음 날인 12월 31에는 내부대신 조병식은 인산시돈체사(因山時頓遞使)에 임명되어 겸임하였다. 인산시돈제사는 왕·황제와 관련된 국장(國葬)이 있을 때 장례 행렬이 지나갈 도로와 다리 등을 미리 수리하고 대비하는 일을 총괄하는 임시 관직이었다.

【내부대신에 표훈원 총재 조병식을 제수하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표훈원 총재 조병식을 내부대신으로 삼고, 이재현을 의정부 찬정으로 삼으라.” 하였다-『승정원일기』 3177책(탈초본 141책) 고종 41년 11월 24일(양력 12월 30일) 무술 4/11 기사 1904년 光緖(淸/德宗) 30년

【인산시돈제사에 내부대신 조병식을 임명】 조령을 내리기를, … 내부대신 조병식(趙秉式)을 인산시돈체사(因山時頓遞使)에 임명하였다. -『승정원일기』 3177책(탈초본 141책) 고종 41년 11월 25일(양력 12월 31일) 기해 8/15 기사 1904년 光緖(淸/德宗) 30년

■1905 임시서리표훈원총재사무 / 관제이정소 의정관 / 임시서리의정부의정사무, {해임․파면․사면} / 의정부 참정대신 / 궁내부 특진관 / 홍문관 학사 / 돈녕부 판돈녕사사■ 내부대신 조병식은 1905년(고종 42) 1월 2일 임시서리표훈원총재사무에 임명되어 겸직하였다. 조병식은 표훈원총재서리로 임명되자마자 사양하였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어 1월 12일에는 관제이정소(官制釐正所) 의정관(議定官)에 임명되었다.

관제이정소는 1904년 10월 일본이 고문정치를 시작하면서 대한제국 정부 조직을 개편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이다. 관제이정소 설치는 당시 탁지부 고문인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와 농상공부 고문인 가토 마스오[加藤增雄]가 주도하여 대한제국의 정부 조직을 대폭 축소하고 관원 수를 감축하는 것은 물론 군부도 축소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특히 황제권을 제한하기 위해 대한제국기에 확대된 궁내부를 축소하고 의정부 역할을 강화하려 하였다.

【임시서리표훈원총재사무에 조병식을 임명】 … 내부대신 조병식을 임시서리표훈원총재사무(臨時署理表勳院摠裁事務)에 임명하였다. -『승정원일기』 3177책(탈초본 141책) 고종 41년 11월 27일(양력 1월 2일) 신축 11/18 기사 1904년 光緖(淸/德宗) 30년

【내부대신 조병식을 관제이정소 의정관에 임명】 조령을 내리기를, “의정부 참정 김성근(金聲根), 내부대신(內部大臣) 조병식(趙秉式), … 의정부 참찬 민형식(閔衡植)을 모두 관제이정소 의정관(官制釐正所議定官)에 차하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178책(탈초본 141책) 고종 41년 12월 7일(양력 1월 12일) 신해 5/10 기사 1904년 光緖(淸/德宗) 30년

내부대신 조병식은 1904년 1월 27일 임시서리의정부의정사무에 임명되어 의정대신 역할까지 맡게 되어 오늘날로 말하면 내무부 장관에 국무총리 역할까지 대행하게 된 셈이다. 그러나 임시서리의정부의정사무까지 맡은 지 한 달을 열흘만인 3월 6일 임시서리의정부의정사무에서 해임된다. 자기 부서 내부와 관련하여 부정을 저지른 일에 대해 법부와 상의 없이 단독 처리한 일로 징계받아 해임된 것이다.

【임시서리의정부의정사무에 내부대신 조병식을 임명하였다】 내부대신 조병식을 임시서리의정부의정사무(臨時署理議政府議政事務)에 임명하였다. -『승정원일기』 3178책(탈초본 141책) 고종 41년 12월 22일(양력 1월 27일) 병인 5/7 기사 1904년 光緖(淸/德宗) 30년

【임시서리의정대신사무에서 내부대신 조병식을 해임하였다】 내부대신 조병식을 임시서리의정대신사무(臨時署理議政大臣事務)에서 해임하였다. -『승정원일기』 3180책(탈초본 141책돈) 고종 42년 2월 1일(양력 3월 6일) 갑진 6/15 기사 1905년 光緖(淸/德宗) 31년

그리고 임시서리의정부의정사무에서 해임된 다음 날인 1905년 3월 7일 내부대신 조병식의 본관(本官: 여러 관직을 겸하는 이의 주된 관직)까지 면직되어 파면당하였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은 3월 11일 사면받는다.

【조병식을 면직하길 청하는 의정부 참정대신 조병호의 계】 의정부 참정대신 조병호(趙秉鎬)가 삼가 아뢰기를, “이번에 내부에서 보내온 첩문(牒文)을 보니 … 지난번 탁지부에서 청의(請議)한 것으로 인하여 해원(該員: 해당 직원)이 비록 징계를 면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전 순찰사 홍우석(洪祐晳)의 주본(奏本: 왕·황제에게 올리는 상소문)에, 장전(贓錢: 옳지 못한 짓을 해서 얻은 돈.)한 금액이 14만여 냥에 달하는 많은 액수가 나열되어 있었으므로 이미 법부(法部)로 하여금 죄인을 잡아서 자세히 조사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결말을 기다려보지도 않고 또 신의 부(府, 의정부)의 논의도 거치지 않은 채 앞질러 연명으로 계를 올렸으니, 이것은 전에 없던 일이며 극히 해괴한 짓입니다. 원래의 주본은 속히 거두어들이도록 하고, 내부대신 조병식에게는 특별히 경고하는 조치가 없어서는 안 되니 면직의 처벌을 시행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삼가 상주합니다.”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아뢴 대로 하라. 내부대신 조병식의 본관(本官)을 면직하라.” 하였다.-『승정원일기』 3180책(탈초본 141책) 고종 42년 2월 2일(양력 3월 7일) 을사 7/10 기사 1905년 光緖(淸/德宗) 31년

【정1품 조병식에 대해 징계를 사면하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정1품 조병식(趙秉式)에 대해 특별히 징계를 사면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180책(탈초본 141책) 고종 42년 2월 6일(양력 3월 11일) 신유[기유] 3/3 기사 1905년 光緖(淸/德宗) 31년

사면받은 조병식은 다음 날인 3월 12일 의정부 참정대신(부총리)에 임명되었다. 이때도 조병식은 징계받았으므로 임명을 철회해 주고 처벌해 주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3월 14일 또다시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왕은 번거롭게 하지 말라며 임명을 철회하지 않았다. 이렇게 신하가 죄를 지었으니 처벌해 주길 청하고 관리 임명을 철회해 주기를 거듭 청하여도 고종은 처벌은커녕 오히려 그대로 고위직에 임명하였다. 이제는 한 번 사양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두 번씩이나 사양하고 왕 또한 거듭 사직을 허락하지 않는 식으로 서로 주고받는 것이 늘어났다. 그리고 3월 18일 의정부 참정대신 조병식은 관제이정소 의정관으로 다시 임명되었다. 징계받기 이전 상태로 돌아간 셈이다.

【의정부 참정대신에 궁내부 특진관 조병식을 제수하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궁내부 특진관 조병식(趙秉式)을 의정부 참정대신으로 삼으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180책(탈초본 141책) 고종 42년 2월 7일(양력 3월 12일) 임술[경술] 2/11 기사 1905년 光緖(淸/德宗) 31년

【의정부 참정대신 조병식을 관제이정소 의정관에 차하하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의정부 참정대신 조병식을 관제이정소 의정관으로 차하(差下)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180책(탈초본 141책) 고종 42년 2월 13일(양력 3월 18일) 병진 4/9 기사 1905년 光緖(淸/德宗) 31년

그런데 조병식은 3월 25일 상소를 올려 늙고 병들어 더는 업무를 수행하기가 어렵다며 사직을 요청하였다. 왕은 노쇠한 병의 증세가 심하다니 억지로 수행하게 할 수가 없다며 조병식의 청을 받아주었다. 그러나 관직에서 물러난 지 두 달 보름이 지난 5월 5일 조병식은 다시 궁내부 특진관에 제수되었다. 6월 10일 조병식은 신병을 이유로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왕은 “병들고 노쇠한 것이 염려되지만 한가한 직책이니, 경은 사직할 필요 없다.” 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사직을 허락하지 않는 이유가 ‘한가한 직책’이라서 그랬다니 참 기막힐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더 나아가 조병식은 7월 23일 홍문관 학사에 임명되었다. 늙고 병이 든 것을 이유로 일하기가 더는 어렵다며 수시로 사직을 청해도 계속 관직에 임명되었다.

홍문관 학사로 임명된 지 한 달 지난 1905년 8월 1일 조병식 또 신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자, 왕은 그의 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홍문관 학사를 해임하는 대신 8월 2일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러곤 8월 31일 다시 홍문관 학사에 임명되었다. 이때도 조병식은 신병을 이유로 사직을 요청하였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조병식은 1905년 9월 27일 판돈녕사사(判敦寧司事), 10월 30일 규장각(奎章閣) 학사(學士)에 임명되고, 11월 12일에는 다시 판돈녕사사에 제수되었다. 능력이 많았는지, 왕의 신임이 두터웠는지 벼슬을 다양하게 넘나들며 여러 일을 맡았다.

■1906 궁내부 특진관 / 의왕수책시정사 / 규장각 학사 / 장례원 경 / 각궁 사무정리위원장 / 궁내부 특진관■ 판동녕사사 조병식은 1906년(고종 43) 4월 6일에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되었다. 이어 4월 14일에는 의왕수책시정사(義王授冊時正使)로 제수되었다. 1900년 8월 고종 황제의 차남(두 번째 황태자) 이강(李堈)은 의왕(義王)[의친왕(義親王)]으로, 7남(세 번째 황태자) 이은(李垠)은 영왕(英王)[영친왕(英親王)]으로 책봉되었다. 당시 영왕은 불과 4세 나이로 금책(金冊)과 금인(金印)을 받았는데 의왕은 국외에 거주하고 있어서 받지 못하고 그의 금책과 금인은 장례원에 보관해 두었다. 1906년 이제야 의왕이 귀국하면서 받게 된다. 이때 의왕의 금책과 금인을 받도록 하는 일을 맡은 정사(正使: 사신 가운데 우두머리)가 바로 의왕수책시정사였다.

【의왕수책시정사에 궁내부 특진관 조병식을 제수】 조령을 내리기를, “궁내부 특진관 조병식을 의왕수책시정사(義王授冊時正使)로 … 삼으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193책(탈초본 141책) 고종 43년 3월 21일(양력 4월 14일) 무자 2/3 기사 1906년 光緖(淸/德宗) 32년

1906년 6월 29일에는 규장각 학사에 임명되었다. 8월 9일 노쇠하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11월 18일에는 장례원(掌禮院) 경(卿)으로 임명되었다.

장례원 경에 임명된 조병식은 11월 27일 늙고 신병이 있는 이유로 또 사직을 요청하였다. 그럼에도 12월 28일에는 각궁 사무정리위원장(各宮事務整理委員長)에 임명되고, 또 12월 30일에는 궁내부 특진관에 제수되었다. 그 뒤에는 조병식이 어느 관직에서 근무하다 은퇴하였는지 이에 대해서 더는 알려지지 않는다.

【각궁 사무정리위원장에 정1품 조병식을 임명하였다】 정1품 조병식을 각궁 사무정리위원장(各宮事務整理委員長)에 임명하고, … 임명하였다. -『승정원일기』 3202책(탈초본 141책) 고종 43년 11월 13일(양력 12월 28일) 병오 9/13 기사 1906년 光緖(淸/德宗) 32년

【궁내부 특진관에 정1품 조병식을 제수하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정1품 조병식(趙秉式)을 궁내부 특진관으로 삼으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202책(탈초본 141책) 고종 43년 11월 15일(양력 12월 30일) 무신 5/9 기사 1906년 光緖(淸/德宗) 32년

■1907 조병식 사망■ 조병식은 1907년(丁未, 광무 11, 고종 44, 순종 1) 4월 25일(음력 3월 15일 *정확한 날짜는 더 확인 필요) 75세(옛 나이 76세) 나이로 사망하였다. 조병식이 사망한 지 3개월 정도 되는 1907년 7월 20일, 고종이 헤이그 밀사 사건(1907년 6월)에 대한 책임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물러났으니, 조병식과 고종은 근 44년 나랏일을 함께 하다 거의 같은 시기에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왕위에서 밀려난 셈이다.

1910년 8월 27일 일제에 의해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자 이에 통분해 절명시(絶命詩) 4수를 남기고 소주에 다량의 아편을 타서 마시고 자결·순국한 황현(黃玹, 1855~1910,09.10.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독립유공자)이 지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三月 賜李完用勳二等章, 賜李完用勳二等章. 上初賜三等章, 完用慍曰, 侍從趙南益, 亦佩三等章, 吾大臣也, 可同南益乎? 繳納之. 上聞而改賜之. … 趙秉式·李憲稙皆卒. 秉式一生稔惡, 竟死牖下, 聞者歎惋, 謂天理不可知

[해석] 3월, 이완용(李完用)에게 2등 훈장을 하사하였다. 이때 고종이 그에게 3등 훈장을 하사하자 이완용은 화를 내며 “시종 조남익도 3등 훈장을 차고 다니는데 대신인 내가 조남익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고 그 훈장을 반납하였다. 고종은 그 소문을 듣고 2등 훈장과 바꾸어 하사하였다. … 조병식(趙秉式)과 이헌직(李憲稙)이 모두 사망하였다. 조병식이 일생 악행을 하였으나 결국 집에서 무사히 사망하므로, 이 소식을 들은 이들은 원망스럽게 탄식하며 ‘하늘의 이치를 알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완용의 행동이 안하무인(眼下無人)하고 오만방자(傲慢放恣)하여 놀랍기도 하지만, 조병식의 사망에 대해 황현이 지적한 대로 조병식이 일생 나쁜 짓을 하였음에도 처벌받는 것은커녕 오히려 떵떵거리며 잘살다가 집에서 편하게 죽었으니, 하늘이 원망스러웠을 법도 하다. 공금 횡령과 권력 남용 등 숱한 부정과 비리를 저지른 공무원이 잘살다 편하게 죽었으니, 세상이 이러니 어찌 하늘이 원망스럽지 않았으랴.

그런데 역임한 관직이 굵직굵직하고 많은 일을 하였음에도 조병식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족보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자료를 검색해도 찾아지지 않는다.

■1910 증시(贈諡)■ 조병식이 사망한 지 3년 지난 1910년(순종 4, 광무 11) 7월 26일 고(故) 참정대신 조병식에게 증시(贈諡: 신하에게 임금이 시호를 내려주는 일)하여 ‘문정(文貞)’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학문을 부지런히 하여 묻기를 좋아하는 것이 문‘文’이고, 청백하게 스스로 지키는 것이 ‘貞’이다”라고 설명까지 하고 있다.

【고 참정대신 조병식에게 시호를 내렸다】 … 고(故) 참정대신 조병식 … 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증시(贈諡)하였다. … 고 참정대신 조병식의 시호는 문정(文貞), 학문을 부지런히 하여 묻기를 좋아하는 것이 문(文)이고, 청백하게 스스로 지키는 것이 정(貞)이다. … -『승정원일기』 3246책(탈초본 141책) 순종 4년 6월 20일(양력 7월 26일) 임진 2/2 기사 1910년 先統(淸/溥儀) 2년

이렇게 증시가 이루어졌는데, 양주조씨 족보에는 “私諡文貞”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시(私諡)는 문장과 도덕이 뛰어나지만, 지위가 낮아 임금이 시호를 내리지 않을 때 친척이나 고향 사람 또는 제자들이 올리던 시호를 말한다. 굳이 ‘私諡’라고 기록한 이유에 대해서는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연 조병식이 청백(淸白: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이 곧고 깨끗함)한 관리였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조병식은 관리로써 실정(失政: 정치를 잘못함)하거나 권력을 무리하게 사용한 일로 처분을 받아 유배당하기가 한두 번이 아니고 또 공금을 횡령하여 징계받아 해임당하고 파면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청백한 관리라니! 그가 저지른 일은 분명 탐관오리에 해당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단순한 탐관오리가 아니라 엄청난 탐관오리였는데도 말이다. 역시 ‘가재는 게 편’인가 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라는 속담이 생각나기도 한다. 신하가 별별 잘못을 계속 저질러도 처벌하기는커녕 오히려 승진시켜 측근에 두었던 조정이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탐관오리 조병식보다 왕 고종이 더 문제였다는 생각마저 든다. 모름지기 지도자라면 사람을 제대로 쓸 줄 알았어야 한다. 또 한편으론 고종 혼자만의 잘못도 아닐 것이다. 당시 사회 구조 자체에 문제가 많았으니. 여기에 사람 또한 문제가 있었으니 말이다.

<다음에 '8. 조병식이 남긴 흔적들'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