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 같은데 잘 모르는 조병갑, 조병갑보다 더한 조병식과 조병직(15)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의 공주집회 탄압과 고등재판소 판사 조병갑·조병직의 동학교주 재판 (15) 직부로 곧바로 정시문과 과거에 합격하여 왕 가까이서 벼슬 생활한 조병직, 일본을 시찰하는 등 외교 일을 적잖게 맡았다

2026-04-13     인간 전병철

동학농민혁명과 관련 있는 인물, 조병갑과 조병식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어 발품 팔아 조사했습니다. 하고 나니 조병직에 대한 정리도 필요하여 추가 조사하였습니다. 그 결과, A4로 200쪽 되는 글을 16회로 나누어 공유하고자 합니다. 재미없는 글이긴 하나, 조병갑ㆍ조병식ㆍ조병직을 알면 동학농민혁명을 아는 데 나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인간 전병철(작가)

 

Ⅴ. 덧붙이는 글_조병갑·조병식 외에 조병직도 있었다

 

조병갑과 조병식을 다 정리했다 싶어 덮어두었다. 그리고 한참 뒤에 조병갑과 조병식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조병직도 함께 알아야 한다는 제안을 받았다. 생각해 보니 그럴 만도 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이었던 최시형을 재판한 재판장이 조병직 아닌가! 이 재판에 어이없게도 조병갑도 참여하기도 하였지만, 조병갑은 배석판사이고, 정작 재판장은 조병직이었던 만큼 조병직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또 조병식이 법부대신을 역임했다면 조병직 또한 법부대신을 역임한 자 아닌가! 더구나 이들 모두 파면을 당하기도 한 관리가 아닌가! 그러니 비록 조병갑․조병식에 대한 글을 다 마쳤어도 여기에 조병직이 빠진다면 혹 “이 빠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조병갑이나 조병식처럼 꼼꼼하게 살펴보지는 못할지라도 조병직에 대해서 어느 정도라도 살펴볼 이유가 생겼다.

 

1. 특혜받아 과거에 합격하여 승승장구한 대한제국 고위 관리 조병직

충간공(忠簡公) 조병직(趙秉稷)은 조선 말기 문관으로, 대한제국 고위 관료(외부대신, 탁지부대신, 법부대신 겸 고등재판소 재판장, 참정대신)를 지낸 인물이다.

본관은 양주(楊州)이며, 자는 치문(稚文, 양주조씨 족보에는 ‘致文’), 호는 창혜(蒼惠), 시호는 충간(忠簡)으로, 경기도 광주(廣州) 출신이다. 양주조씨 족보에 조병직은 계사년(癸巳年)인 1833년(순조 33) 3월 3일에서 태어나 임인년(壬寅年)인 1902년 11월 18일 70세 나이로 사망하였다고 밝히고 있으나, 고종실록(高宗實錄)과 사전 등에서는 신축년(辛丑年)인 1901년(고종 38, 광무 5) 68세(옛 나이 70세) 나이로 사망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양주조씨대종회 족보를 보면,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아들 병직(秉稷)은 정2품 품계의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내고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자는 ‘치문(致文)’이고 호는 ‘창혜(蒼惠)’이다. 계사년(癸巳, 1833) 3월 3일 태어나 임술년(壬戌, 1862)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옥당(玉堂: 홍문관) 관직에 임명된 이래 관직이 올라 문관(文官)이면서 함경도 북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군사를 지휘하는 고위 관직)를 겸하였으며, 강화(江華)와 송도(松都, 개성 *현재의 송도는 인천을 가리킴) 유수(留守)를 역임하고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임인년(壬寅, 1902) 11월 18일 졸(卒: 사망)하였는데 나이는 70세였다. 묘(墓)는 수원군 반원면 본오리(현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에 자리하였다. 아내[배(配)]는 정부인(貞夫人)으로 대구서씨(大丘徐氏) 참판(參判) 서준순(徐俊淳)의 딸이며, 묘는 남편과 합폄(合窆: 합장)하여 무술년(戊戌, 1958) 불교 장례로 하였다.

조병직은 도사(都事: 중앙과 지방 관청에서 사무를 담당한 종5품 관직) 조홍순(趙弘淳)의 외아들로 1833년[癸巳(1833)3月3日生 *양력 4월 22일] 태어났으며, 할아버지(조부, 2대조)는 승지(承旨) 조진순(趙鎭順), 증조(3대조)는 가평군수 조광규(趙光逵), 고조(4대조)는 이조판서 조영진(趙榮進), 현조(5대조)는 부평도호부사(富平都護府府使) 조규빈(趙奎彬), 6대조는 영천군수 조태휘(趙泰彙), 7대조는 괴산군수 조희석(趙禧錫)이다.

조병직은 조병갑·조병식과 마찬가지로 양주조씨(楊州趙氏) 문강공파(文剛公派)-창수공파(倉守公派)-괴산공파(槐山公派) 집안 사람이다. 하지만 고조(高祖, 4대조)가 같은 조병갑(1844~1912)과 조병식(1823?1832~1907)이 8촌 형제인 것에 비해 조병직(1833~1901)은 조병갑․조병식과는 절조(節祖, 7대조)가 같은 14촌 형제로 사실 먼 집안사람이다.

한편, 조병직의 외할아버지는 현령(縣令)과 부사(府使)를 지낸 광산김씨(光山金氏) 김영익(金永翼)이며, 조병직 부인의 아버지는 참판(參判: 6조에 둔 종2품 차관 관직)을 지낸 대구서씨 서준순(徐峻淳)이다.

양주조씨 족보에 따르면 조병직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조규희(趙珪熙, 1856~1906)는 고부군수를 지냈고, 조원희(趙瑗熙, 1884~?)는 육군(陸軍) 참위(參尉)를 지냈으며, 딸은 안동김씨 참판(參判) 김우근(金祐根)의 아들인 참봉(參奉) 김병락(金炳樂)에게 시집을 가 아들 육군 중위 김중규(金重圭)를 둔 것으로 파악된다.

■1862 과거 급제■ 조병직은 29세(옛 나이 30세·31세)인 1862년(철종 13, 임술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가주서(假注書)로 벼슬길에 들어서는데, 이때 과거에서 초시(初試)·회시(會試)를 면제받고 곧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하는 직부(直赴) 특혜를 받은 것으로 파악된다.

초시는 과거 첫 번째 단계 시험, 회시·복시(覆試)는 초시 합격자를 대상으로 치르는 두 번째 단계 시험이며, 전시는 과거의 마지막 단계로, 왕이 친림(親臨: 직접 참석함)하는 궁궐 뜰에서 복시 합격자 문과 33인과 무과 28인을 대상으로 등급을 정하기 위해서 치르는 최종 시험이다. 조선시대 과거는 이렇게 초시-회시(복시)-전시 순으로 치러졌는데, 직부전시(直赴殿試)라는 것도 있었다. 직부전시는 왕의 특명[은사직부(恩賜直赴)]에 따라 초시·회시를 거치지 않고 바로 전시에 응시하는 제도로, 성적이 우수한 유생이나 생도에게 ‘직부’라는 과거 응시의 특전을 줌으로써 학교 교육을 장려하고 학교 교육 활성화를 꾀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당시 조병직이 직부(直赴)를 통해 과거를 치른 건 그만큼 그의 실력을 인정받았거나 그가 세력 있는 집안 출신임을 짐작할 수 있다.

■1864 가주서 / 부사정■ 벼슬길에 들어선 조병직은 1864년(고종 1) 가주서(假注書), 부사정(副司正) 등의 임무를 맡았다. 가주서는 승정원(承政院: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던 행정기관으로 오늘날의 대통령비서실)에 정원 외에 두는 대리 임시 관직으로, 주서(注書: 승정원의 정7품 관직)의 주요 임무였던 승정원의 일기를 기록, 정리하는 일을 대신하였다. 부사정은 중앙 군사 조직인 오위(五衛)의 종7품 관직으로, 보직이 없는 문·무관이나 관청의 여러 잡직(雜職) 등에게 무직(武職)을 겸하게 한 관직이다.

■1865․1866 가주서 / 정언 / 지평■ 1865년(고종 2)과 1866년에 정언(正言), 지평(持平) 등을 임무를 맡아보았다. 정언은 사간원(司諫院)의 정6품 관직으로, 왕의 언행과 정책을 비판하고 시정(施政)에 대한 바른 의견을 제시하는가 하면 관료의 비위나 부정을 탄핵하는 관직이다. 지평은 사헌부(司憲府)의 정5품 관직으로, 시정(時政)을 논집(論執)하고, 백관(百官: 모든 관리)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고, 원억(寃抑: 죄가 없으면서 벌받음)을 풀어주고, 남위(濫僞: 분수에 넘치는 못된 짓)를 금하는 등의 일을 맡는 부서였다. 지평을 포함한 대관(臺官)은 사헌부의 기간요원이기 때문에 그 책무는 막중하였으므로 자기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직언할 수 있는 강직한 젊은 엘리트들이 임명되었는데, 대부분 문과에 급제한 자로서 직배(直拜: 과거 합격자 가운데 갑과 합격자를 곧바로 벼슬에 임용하던 일)하거나 승문원(承文院: 외교에 관한 문서를 담당하는 관청)·성균관·홍문관 등을 거친 자들이 임명되었다.

■1867 수찬 / 선전관 / 부수찬 / 검토관 / 헌납■ 1867년(고종 4) 조병직은 수찬(修撰)에 임명되고 선전관(宣傳官)을 겸직하였으며, 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되었다. 또 검토관(檢討官)과 헌납(獻納)에 임명되었다.

수찬과 부수찬은 집현전과 홍문관에 설치된 정6품․종6품의 관직으로, 집현전과 홍문관의 다른 관원들처럼 경연 참여와 실록 편찬, 왕명 제작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검토관은 경연청(經筵廳)에 속한 정6품 관직으로, 왕 또는 왕세자 앞에서 경서(經書)와 사기(史記) 등을 강의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의논·토론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선전관은 왕 가까이에서 형명(形名)·계라(啓螺)·시위(侍衛)·전명(傳命) 및 부신(符信)의 출납을 맡았던 관직이며, 헌납은 사간원(司諫院)의 정5품 관직으로, 임금에게 충언을 올리거나 간언하는 일을 하였다.

■1868 교리 / 수찬 / 1869 교리 / 동학교수 / 장령■ 1868년(고종 5)에는 교리(校理)와 부교리(副校理), 수찬 등에 번갈아 가며 임명되는 가운데 검토관·종사관(從事官)·시독관(侍讀官) 등의 일을 하였으며, 1869년(고종 6) 다시 교리에 임명되고 큰아버지 조두순이 치사(致仕: 관리가 나이 70세에 관직에서 물러나는 제도)하는 자리에서 선교관(宣敎官: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반포하는 교서를 읽는 일을 맡아보던 임시 벼슬)으로 교서를 읽기도 하였다. 그리고 동학교수(東學敎授), 장령(掌令), 사복정(司僕正) 등에 임명되었다.

동학교수는 동학이라는 종교의 교직(敎職) 체계인 육임(六任) 가운데 학문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두 번째 직위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여기에서 동학교수는 조선시대 서울의 5부학당(五部學堂: 동부·서부·중부·남부·북부에 세운 교육기관) 가운데 동부학당의 유교 교육을 담당한 교수로, 대개 종6품 문관이 맡던 관직이다. 장령은 사헌부의 정4품 또는 정5품 관직으로, 주로 관리 감찰과 시정(時政)의 비판, 풍속 바로잡기 등 감찰 기관 역할을 담당한 고위 관직이다. 장령을 포함한 대간[臺諫: 탄핵과 감찰을 맡은 대관(臺官)과 간쟁과 봉박(封駁)을 맡은 간관(諫官)]은 사헌부의 기간요원이기 때문에 그 직무가 막중하였으므로 자기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직언할 수 있는 강직한 젊은 엘리트들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사복정(司僕正)은 ‘사복시(司僕寺)의 정(正)’을 가리키며, 사복정은 궁중의 가마[여(輿)]와 말[마(馬)], 목장(牧場) 등 궁중의 여마(輿馬)와 구목(廐牧)을 담당하던 기관인 사복시(司僕寺) 소속 정3품 관직이다.

■1870 부수찬 / 사성■ 1870년(고종 7) 부수찬과 사성(司成) 등에 임명되었다. 사성은 성균관(成均館)의 종3품 관직으로, 대사성(大司成) 다음의 고위직 관리이다. 임무는 성균관에서 유생들을 교육하는 것이 우선이었고, 종학(宗學: 왕족의 교육을 담당하던 관청)에서 교육을 담당하였다. 또한 경연(經筵: 임금이 학문이나 기술을 강론하고 연마하며 더불어 신하들과 국정을 협의하던 일)이나 서연(書筵: 왕세자 교육)에서 강의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1871 응교 / 집의■ 1871년(고종 8) 응교(應敎)와 집의(執義) 등의 일을 맡았다. 응교는 홍문관(弘文館) 또는 예문관(藝文館)의 정4품 관직으로, 왕명 제찬(制撰: 왕의 말씀이나 명령을 신하가 대신 짓던 일)과 역사 편찬 등 문한(文翰) 업무를 담당하였다. 또 응교는 지제교(知製敎)·사관(史官)·경연관을 당연직으로 겸임했고,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예조 소속 관청)의 강관(講官)과 예문관 응교를 겸하기도 하였다. 홍문관과 예문관은 예조 소속의 행정기관이자 연구기관으로, 홍문관은 궁중의 경서(經書), 사적(史籍), 문한(文翰: 왕이 내린 문서를 비롯한 각종 공문서)을 관리하고 왕의 각종 자문에 응하는 일을 하였으며, 예문관은 왕의 칙령과 교명을 기록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집의는 사헌부(司憲府)의 종3품 관직으로, 대사헌 다음가는 자리였다.

이렇게 조병직은 실력을 인정받아 승정원, 사간원, 홍문관, 동부학당, 성균관, 사헌부 등에 근무하는 가운데 왕과 가까운 기관에서 관직 생활을 이어 나갔다.

■1872 호조참의 / 1873 동부승지■ 조병직은 벼슬길에 들어선 지 10년 되는 1872년(고종 9) 나라의 재정을 담당하는 호조(戶曹)의 참의(參議, 참판과 함께 판서를 보좌하는 정3품 벼슬)에 임명되어 당상관(堂上官)의 지위에 올랐다. 당상관은 정3품 상계(上階) 이상의 고위 관료로 조정에서 당(堂) 위에 올라 정사를 논의할 수 있는 관직이다. 그리고 1873년(고종 10)에는 동부승지(同副承旨) 일을 맡았다,

■1876 북청부사 / 1878 부승지 / 1879 부호군, {근무 태만으로 징계 고려}■ 1876년(고종 13)에는 북청부사(北靑府使)에 임명되어 그동안 중앙직에만 있다가 처음으로 외직(外職: 지방직)에 나갔다. 북청부사는 함경도 북쪽의 북청도호부(北靑都護府)를 다스리는 지방 관직으로, 북청 지역의 행정․군사․민생 문제 등을 총괄하고 고위 수령이었다.

그리고 1878년(고종 15) 북청부사에서 동부승지로 다시 중앙직에 임명되어 승정원으로 되돌아 1882년까지 우부승지와 좌부승지를 번갈아 맡아보았다. 1879년(고종 16) 부호군에 제수되고 승지에 단독으로 추천(임명)되었다. 부승지로 있으면서 출근을 제대로 하지 않아 파직 요청이 있기도 하였는데, 왕은 추고(推考: 벼슬아치의 허물을 조사하고 심문함)만 하라고 하였다. 제시간에 출근하지 않으면서도 왕실 행사에는 참여하고, 식가(式假: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 사용할 수 있도록 정식으로 규정된 휴가)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1881 동래부 암행어사 / 부경리통리기문아문사■ 부승지 조병직은 1881년(고종 18) 동래부(東萊府) 암행어사라는 이름으로 정부가 파견한 12인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 조선 사신 시찰단)에 참가하여 일본을 다녀와 실정을 보고하기도 했으며, 귀국 후에는 계속 승지로 있으면서 부경리통리기무아문사(副經理統理機務衙門事)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부경리통리아문사는 개화기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 소속 7사(칠(七)司) 가운데 하나로, 경리(經理)와 함께 통리기무아문의 행정·실무를 총괄하는 직책으로서 개화 정책의 실질적 집행과 조직 운영을 담당하였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1880년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에 파견됐던 김홍집(金弘集)이 주일청국공사관(駐日淸國公使館) 참찬관(參贊官)으로 있던 중국 개혁가 황준헌(黃遵憲)으로부터 『조선책략(朝鮮策略)』이란 책을 얻어와 왕에게 복명(復命: 일을 처리한 사람이 그 결과를 보고함)한 것이 알려지면서 ‘서양의 나쁜 문화를 받아들이려 한다’라는 여론이 유림을 중심으로 백성들 사이에 퍼지고 있었다. 『조선책략』의 요점은 우리나라가 러시아의 남침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중국과 친해지고 일본과 결별하며 미국과 연합하는 자강책을 강구하라”는 내용이다. 다분히 중국적 시각에서 집필된 내용이지만, 이를 통해 조정에서는 개화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반면 유림에서는 서양 문물을 배척하고 전통을 지키자는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이 일어나 영남 유생들이 만인소(萬人疏)를 올리는 등 나라가 시끄러웠다.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은 고종 18년 1월 11일부터 2월 26일까지 두 달에 걸쳐 3차례에 나누어 동래부 암행어사라는 이름으로 임명됐다. 암행어사로 임명한 것은 백성들의 여론을 고려해 신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일본에 시찰단을 보내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신분을 위장한 것이다. 이들은 각기 암행어사의 신분으로 부산까지 내려가 3월 25일 집결한 후 4월 10일 일본으로 떠났다. 조사시찰단은 3개월가량 일본에서 조사 활동을 편 후 윤7월 2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조사시찰단 임명을 여러 차례에 나눠서 하였듯이 도착 후 왕께 보고하는 것도 함께 하지 않았다. 이원회(李元會)가 8월 25일, 박정양(朴定陽) 등 5명이 8월 30일, 민종묵(閔種默, 1835~1916, 일제강점기 남작 작위를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과 홍영식(洪英植)이 9월 1일 보고하고, 조병직(趙秉稷)은 마지막으로 9월 2일에 보고하였다.

【동래부 암행어사 조병직을 소견하다】 동래부 암행어사 조병직(趙秉稷)을 소견(召見: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불러서 만나 봄)하였다. 복명(復命)하였기 때문이다. -『고종실록』 18권, 고종 18년 9월 2일 신묘 1/1 기사 / 1881년 조선 개국(開國) 490년

【고종, 일본에서 돌아온 조사시찰단 조병직에게 일본 세칙에 대해서 물어봄】 이경(二更). 상이 흥복헌(興福軒)에 나아갔고 암행어사가 입시하였을 때, 행 우승지 김홍집(金弘集)과 가주서 조상학(趙尙學), 기사관 김천수(金天洙)·정하원(鄭夏源), 암행어사 조병직(趙秉稷)이 차례로 나와 엎드리고 나니,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암행어사는 앞으로 나오라.” 하였다. 조병직이 앞에 나아가고 나서 상이 이르기를, “먼 바닷길을 잘 다녀왔는가?” 하니, 조병직이 아뢰기를, “왕령(王靈)이 미치는 바이므로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와 일본의 교린(交隣)이 본시 300여 년이고, 이미 통상을 허용하였으면 반드시 그 실정을 탐지해야 할 것이므로 특별히 차출하여 보낸 것이다.” 하니, 조병직이 아뢰기를, “교린하고 통상하는 처지에서는 사정을 상세히 탐지하는 것보다 먼저 할 일이 없습니다마는, 신이 어리석으므로 실정을 탐지하지 못하여 아주 황송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우리나라에 두는 뜻이 어떠한가?” 하니, 조병직이 아뢰기를, “바다를 건넌 뒤부터 지나는 곳에서 저들을 만날 때마다 으레 기꺼이 환대하고 조금도 멀리하는 뜻이 없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와 거리가 가장 가깝고 교린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온갖 응접이 매우 익숙한 것인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과연 악의가 없던가?” 하니, 조병직이 아뢰기를, “지금 본 바로는 나타난 뜻이 없습니다마는, 접대는 기쁘게 한다 할지라도 그 성질은 거의 편협하고 조급하며 오로지 이익을 좇는 것을 일삼으므로, 일을 논할 즈음에 조그만 것도 반드시 다투고, 한마디 말이라도 거슬리면 경각에 낯빛이 변하니, 오늘날 악의가 없다는 것으로 뒷날의 사정을 예측할 수 없으며, 오직 우리가 임기응변하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성질에 따르면 반드시 마음이 기쁘고, 그 뜻을 어기면 장차 말썽을 일으키겠는가?” 하니, 조병직이 아뢰기를, “먼 곳 사람을 회유하는 도리는 그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마는, 따르기 어려운 청은 반드시 경위로 사리를 들어 타이르고 한결같이 공평을 지켜야 할 것이며, 또한 대비가 어떠하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역을 나간 지 오랜만에 돌아왔으니 일어나서 우러러보도록 하라. 또 동궁이 자리에 있으니 또한 우러러보라.” 하자, 조병직이 우러러보고 나서, 상이 이르기를, “떠나서 돌아오기까지 이제 얼마나 걸렸는가?” 하니, 조병직이 아뢰기를, “부산에서 배를 타고부터 돌아와 닿기까지 모두 111일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 왕래는 신사(信使)에 견주면 조금 오래 걸렸거니와, 저들의 정상을 상세히 알았을 것이다.” 하니, 조병직이 아뢰기를, “신의 이번 길은 신사에 견주면 시일이 조금 오래 걸렸으나, 본디 재간이 없고 또 요코하마(橫濱)에 머물러 세관 외에는 두루 탐지할 겨를이 없었으므로 저들의 정상은 상세히 듣지 못하였으니, 아주 황송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들 나라의 세칙 중에 100에 대하여 100을 징수하거나 200을 징수하는 것이 있다고 하는데, 참으로 그러한가?” 하니, 조병직이 아뢰기를, “각국의 세칙 중에는 귀한 물건을 보호하기 위해서 혹 100에 대하여 100을 징수하거나 200을 징수하는 것이 있고, 이런 것 외에 또 그 물건값을 셈하여 혹 배로 징수하기도 하므로 배가세(倍價稅)라 하는데, 저 나라는 기미년(1859) 관세를 처음 정할 때에, 수입품 중에서 주류(酒類)는 100분의 35를 징수하고, 나머지는 100분의 20을 징수하고, 수출품은 100분의 5를 징수하였고, 런던 임술년(1862) 약조와 파리 갑자년(1864) 약조 이후부터는 수입세를 줄여 수출세와 같이 100분의 5를 징수하였고, 병자년(1876) 관세를 개정한 뒤로도 이제까지 100분의 5의 규례를 준행할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청국도 이처럼 관세를 정하였는가?” 하니, 조병직이 아뢰기를, “청국이 관세를 정한 것은 신미년(1871)인데 일본이 각국과 통행한 것은 이미 병인년(1866) 세목(稅目)이 있었으므로, 중동(中東)의 화약(和約)은 각국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사관에게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하고, 이어 어사에게 먼저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또 물러가라고 명하니, 승지와 사관이 차례로 물러 나왔다. -『승정원일기』 2892책(탈초본 133책) 고종 18년 9월 2일 신묘 36/36 기사 1881년 光緖(淸/德宗) 7년

■1882 반접관 / 좌윤 / 동지춘추관사 / 예조참판 / 특진관■ 조뵹식은 1882년(고종 19) 영국 사신을 접대하는 반접관(伴接官)의 임무를 맡았으며, 좌윤(左尹)으로 임명되고,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예조참판(禮曹參判), 특진관(特進官) 등에 제수되기도 하였다. 좌윤은 조선시대 한성부(漢城府)의 종2품 관직으로, 한성부의 최고 책임자인 판윤(判尹, 정2품)을 도와 한성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송사(訟事)를 비롯해 제반 업무를 담당하였다. 동지춘추관사는 춘추관(春秋館)에 둔 종2품 관직인 동지사(同知事)로, 주로 실록 편찬 등 역사 기록 관련 업무를 담당하였다.

■1883 우윤 / 북청부사(부임하지 않음), {파면} / 호조참판 / 인천감리■ 1883년(고종 20) 우윤(右尹)에 임명되고, 3월 17일 북청부사(北靑府使)로 임명되었으나 신병(身病)을 이유로 부임하지 않자, 4월 16일 파출(罷黜: 관직을 가진 사람을 현직에서 파면하고, 동시에 품계까지 낮추는 인사 조치)되었다가, 1주일 만인 4월 23일 호조참판에 임명되었다. 8월에는 개항 이후 통상사무를 보는 감리인천항통상사무(監理仁川港通商事務)[인천감리(仁川監理)]로 임명되어 이전에 일본 조사시찰단원으로 얻은 지식을 실무에 활용하기도 하였다.

■1884·1885 안무사 겸 북병사 / 경성부사■ 조병직은 1884년(고종 21) 함경도 안무사(安撫使) 겸 북병사(北兵使,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고, 또 경성부사(鏡城府使)까지 겸직하였다. 두 번째로 지방직에 나가게 되었는데, 안무사는 전쟁이나 변란이 일어났을 때 임금의 명령을 받아 지방에 파견되어 백성들을 안무(按撫: 사정을 살피고 달래고 위로함)하던 벼슬이다. 안무사는 당상관으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는데, 당하관일 경우에는 안무어사(安撫御史)라 하였다. 북병사는 함경북도 지역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가리키며, 주로 경성(鏡城: 함경북도 중앙에 있는 군)과 북청(北靑) 등 함경북도 일대의 군사를 통솔하던 고위 장군직이었다.

조병직은 함경북도 안무사로 있으면서 일을 소홀히 처리한 일 등으로 왕께 대죄(待罪: 죄인이 처벌을 기다림)하였으나 처벌받지 않았다. 그리고 1886년 5월 조병직은 병을 핑계로 안무사와 북병사에서 사직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경계를 확정하여 백성을 안정시키는 등의 직임을 다하지 못하였으므로 대죄한다는 함경북도 안무사 조병직의 장계】 함경북도 안무사 조병직의 장계에, “훈춘(琿春)의 승판(承辦)이 조회한 것과 관련하여, 경계를 확정[정계(定界)]하기 전에는 경작을 금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전후의 문건에 분명하게 적어 보냈는데, 조사하기도 전에 갑자기 먼저 경작을 금하고는 농막을 불태우고 백성들을 내쫓았습니다. 신은 안무사의 직책에 있으면서 경계를 확정하고 백성들을 안정시키지 못하여 이렇게 분란을 일으켰으니, 황공하여 대죄합니다.” 하였는데, 이에 대해 이헌경(李軒卿)에게 전교하기를, “대죄하지 말라고 회유(回諭)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2936책(탈초본 135책) 고종 22년 5월 7일 을사 9/16 기사 1885년 光緖(淸/德宗) 11년
【신병이 있으므로 체차해 주기를 청하는 안무사 조병직의 상소】 안무사 조병직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이 직무를 감당하지 못하는 죄를 짊어지고 치료하기 어려운 병을 안고서 잊지 않고 늘 염두에 두는 것은, 일찌감치 무거운 짐을 벗고 병을 치료하는 데에 마음을 쏟아 다행히 다시 일어나 사람 구실을 하게 되면 혹 성명(聖明)의 치세에 도움이 되어 다시 옛 허물을 씻고 큰 은혜에 보답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작년 겨울에 매우 다급하게 호소하고 우러러 성상께 간청하여 체차해 주시는 은혜가 내려지기를 채비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비답(批答) 전지(傳旨)가 내린 것을 보니 체차(遞差)해 주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안무사의 책무에 더욱 힘쓰라고 유시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신은 이에 놀랍고 두려워 더욱 몸 둘 바를 알지 못했으니, 다만 마땅히 은혜로운 유지를 감사히 받들어야 하기에 감히 다시는 말씀을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신의 급박하고 절실한 사정은 전날보다 더 심하니, 이에 부득불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조금이라도 굽어살펴 주소서. 다만 신의 재주가 미치지 못하고 지혜가 두루 미치지 못하는 것은, 이미 성상께서 환히 아시는 바이고 온 조정이 다 같이 아는 바이거니와, 군제(軍制)가 허술한 것에 대한 우려와 군량미가 부족한 것에 대한 걱정과 민정(民情)이 매우 다급한 상황에 대해서도 이미 전의 상소에서 다 아뢰었으니, 신이 다시 장황하게 논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눈앞의 병세는 풍화(風火)에 상한 지 오래된 데다가 수토(水土)에 병이 겹치니, 눈이 어둡고 귀가 막혀 동작이 부자유스럽고 혈기가 사그라들어 모습도 변하였습니다. 날씨가 추워지면 한층 병세가 악화되어 방과 문 사이도 걸음을 옮겨 움직일 수가 없으니, 이 때문에 공무가 밀리고 원망과 비방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습니다. 신 자신의 낭패는 제쳐두고라도 변방을 맡은 중요한 자리를 어찌 병들고 비도록 내버려둘 수 있겠습니까. 신의 정황이 여기까지 이르니 더욱 마음이 위축되어 견딜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임기가 임박했으니, 법에 있어서도 당연히 체차되어야 합니다. 신이 어찌 한 번 상소하고 두 번 상소하여 스스로 겉으로만 사양하는 체하는 죄를 짓고 거듭 성상을 번거롭게 하는 죄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실로 중요한 자리로서 질병을 요양하는 자리가 아니고 보잘것없는 몸은 사느냐 죽느냐 하는 근심이 있기에 잠시도 외람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수 없는 것이 확실합니다. 말이 가슴속에서 나와 재제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바라건대 천지와 같고 부모와 같으신 성상께서는 굽어살펴서 속히 신이 아뢴 의견에 대해 비준하여 주시고, 특별히 신의 직함을 체차해 주시어 신으로 하여금 조속히 서울로 돌아와 분수대로 쉴 수 있게 하고 공무가 비지 않게 하며, 남은 목숨을 조금이라 연장하여 생성해 주시는 은택을 마칠 수 있게 해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하니, 답하기를, “상소는 잘 살펴보았다. 청한 바는 그대로 시행하겠다.” 하였다. -『승정원일기』 2948책(탈초본 135책) 고종 23년 5월 3일 을미 9/10 기사 1886년 光緖(淸/德宗) 12년

■1886 동지경연사 / 형조참판 / 동지돈녕부사■ 1886년(고종 23) 5월 병을 핑계로 안무사와 북병사에서 사직하고 서울로 돌아온 조병직은 한 달 후쯤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에 임명되고, 형조참판(刑曹參判),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등에 임명되었다.

동지경연사는 조선시대 경연청(經筵廳)에 소속된 종2품 동지사(同知事) 관직으로, 겸직이었다. 형조참판은 형조에 소속된 종2품 관직으로, 오늘날의 법무부 차관에 해당하는 자리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참판은 협판(協辦)이라 하였으며, 왕이 직접 임명하는 칙임관(勅任官)이었다. 동지돈녕부사는 조선시대 돈녕부(敦寧府) 소속의 종2품 관직으로, 왕실 인사에 대한 예우 차원의 명예직에 가까웠다. 돈녕부 이외의 동지사(同知事)는 다른 기관의 관리가 겸임하였으나 동지돈녕부사만은 주로 왕의 친족이나 외척 중에서 임명되었다.

■1887 병조참판 / 동지춘추관사 / 동지성균관사 / 외무협판 / 동지의금부사 / 좌승지■ 1887년(고종 24)에는 병조참판(兵曹參判, 오늘날 국방부 차관)에 임명되고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호군(護軍) 등을 겸직하였다.

동지성균관사는 성균관(成均館: 국립대학교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최고 교육기관)에 소속된 종2품 동지사 관직으로, 정원은 2명이었다. 주로 대제학(大提學: 홍문관·예문관의 으뜸 벼슬) 등이 겸임하였으며, 실무보다는 상징적·명예직에 가까웠다.

호군(護軍)은 조선시대 오위 소속의 정4품 벼슬로, 궁성 사대문과 도성 내외의 수호 및 순찰 임무를 맡았던 군사 관직이다. 조선 전기에는 실직(實職)이었으나 후기에는 실제 직무가 없는 산직(散職)으로 변했으며, 실제 군사 지휘보다는 상징적·행정적 역할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조병식은 외무협판(外務協辦, 협판외무부사),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좌승지(左承旨) 등에 임명되었는데, 외무협판은 대한제국 시기 외무아문(外務衙門) 또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에서 근무하던 고위 관직으로, 통상과 무역 관련 외교·교섭 업무를 담당하였다. 오늘날의 외무부 차관에 해당하며, 외무대신(外務大臣, 오늘날 외무부 장관) 바로 아래 관직이었다.

동지의금부사는 죄인을 다스리던 사법기관인 의금부에 소속된 종2품 동지사 관직으로, 위로 판사(判事, 종1품, 판의금부사) 1명, 지사(知事, 정2품, 지의금부사) 1명이 있었다. 동지사는 지사(知事)를 도와주는 보좌역으로 다른 직책과 겸직할 수 있었다. 의금부는 1894년에 의금사(義禁司)로 고쳐 법무아문(法務衙門)에 소속되었다가 1895년 고등재판소로 변경되고, 1899년 평리원(平理院)으로 개편되고 다시 대심원(大審院)과 공소원(控訴院)으로 분리․개편되었다.

■1888 우윤 / 좌승지 / 전보국 총판 / 이조참판■ 1888년(고종 25)에 좌승지에서 우윤(右尹), 다시 좌승지(左承旨), 전보국 총판(電報局摠辦)에 임명되었다.

전보국 총판은 개화기 통신․전신(電信)·전보 업무를 보는 전보국(電報局: 우체국)을 총괄하는 최고 책임자로, 서울과 지방 관청과의 소통, 통신망 관리, 외국과의 통신 업무 등 국가 통신망의 운영과 대외 교섭을 담당하였다.

이어 조병식은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임명되었는데, 이조참판은 문관의 임용, 공훈 및 봉작, 인사 고과, 정무 등을 담당하는 6조의 으뜸 부서인 이조에 속한 종2품 관직으로, 위로 이조판서(정2품), 아래로 이조참의(정3품) 1명 이조정랑·좌랑 각 2명이 이었다. 이조참판은 오늘날의 내무부 차관에 해당한다.

■1889 서리독판교섭통상사무 / 호조참판 / 동지성균관사 / 개성유수 및 관리사 / 외무서리독판 / 내무협판 / 개성유수■ 1889년(고종 26)에는 서리독판교섭통상사무(署理督辦交涉通商事務)를 수행하고 호조참판(戶曹參判, 오늘날 재무부 또는 기획재정부 차관)에 임명되었다. 또 동지성균관사에 임명되고, 개성유수(開城留守)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외무서리독판(外務署理督辦), 외무협판(外務協辦, 오늘날 외무부 차관), 내무협판(內務協辦, 협판내무부사, 오늘날의 내무부 차관) 등에 임명되고, 다시 개성유수에 임명되었다.

개성유수는 수도 방위의 요충지인 개성부(開城府)를 다스리던 종2품 문관직으로, 정원은 2명이었는데, 1명은 경기감사(京畿監司)가 겸임하였다. 그리고 개성유수는 관리사(管理使)를 겸직하였는데, 관리사는 수도 방위와 군수물자 관리 등 중요한 임무를 맡은 관리영(管理營)의 으뜸 벼슬이었다.

■1890·1891 개성유수 / 1891 자헌대부■ 조병직은 1890년(고종 27)과 1891년에도 개성유수(開城留守) 직을 계속 맡으면서 근무하였다. 그리고 1891년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 품계)에 가자(加資)되기도 하였는데, 가자는 관리에게 임기가 끝났거나 근무 성적이 좋을 때 또는 왕실에 경사가 있을 때 관직의 품계를 올려 주는 승진․포상 제도이다.

■1892 형조판서 / 동지정사 겸 사은정사 / 지의금부사 / 외무독판․독판교섭통상사무 / 전의감 제조■ 1892년(고종 28)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임명되었다. 형조판서는 형조의 으뜸 벼슬인 정2품 관직으로, 오늘날의 법무부 장관에 해당한다. 그리고 동지정사(冬至正使)로서 사은정사(謝恩正使)을 겸한 동지겸사은정사(冬至兼謝恩正使)로 중국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동지사(冬至使)는 동지(冬至: 1년 중 밤이 가장 긴 날. 보통 양력 12월 21일~23일경) 때 중국 황제에게 보내던 사신, 사은사(謝恩使)는 중국 황제에게 사은의 뜻을 전하고자 보내던 사신이다. 사절단은 보통 정사(正使) 1인, 부사(副使) 1인, 서장관 1인, 당상 역관 1인 등으로 꾸려졌다.

그리고 조병직은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임명되었는데, 지의금부사는 국왕 직속의 최고 사법기관인 의금부(義禁府)에 소속된 정2품 관직으로, 의금부의 최고 관직인 판사(判事, 종1품, 판의금부사)를 보좌하는 의금부의 차관으로서 아래로 동지의금부사가 있었다. 또 조병직은 외무독판(外務督辦, 오늘날 외무부 장관)과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에 임명되고, 전의감(典醫監) 제조(提調)를 맡기도 하였다. 전의감은 조선시대 왕실과 신하의 진찰, 의약(醫藥) 제조 및 공급, 약재 재배·채취, 의학 편찬 및 의학 교육을 총괄한 관청으로, 제조(提調: 잡무 및 기술 계통 기관에 겸직으로 임명한 고위 관직) 2명(員)을 두었다.

1892년 독판교섭통상사무를 맡은 조병직은 1890년 2월 황해도 관찰사 오준영(吳俊泳)이 내린 방곡령으로 일본이 손해 배상을 요구하자 이에 반박하며 일 처리를 해나갔다.

○독판교섭통상사무, 황해도 방곡 손해배상 청구에 대해 반박함○
연월일 고종 29년(1892년, 淸 德宗 光緖 18年, 日本 明治 25年) 11월 30일
발신 조병직
수신 일본 대리공사 杉村濬
대조선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조(趙, 趙秉稷)가 회답 조회(照會)를 보내는 일
살피건대 우리나라 역법으로 9월 28일, 귀 변리공사(辨理公使) 가지야마 데스케[梶山鼎介]로부터 조회를 받은 바 있습니다. 이를 받고 주고받은 공독(公牘) 및 전후의 보고서, 그리고 그때 해당 도(道)의 관찰사 오준영(吳俊泳)이 그 전후 사정을 조사한 것을 살펴보니, 이 사안의 실재 정형을 손바닥 보듯이 훤히 알게 되어 하나하나 따져볼 것도 없이 저절로 명백해졌습니다. 해당 도에서 미곡을 운송하여 내보내는 것을 잠시 금지한 것은 가뭄으로 식량이 부족하여 그 유출을 막음으로써 백성들의 식량을 부유하게 하려는 데서 나온 것으로, 이는 백성과 가까이하는 관원이라면 마땅히 행해야 할 조치였습니다. 그러나 다만 내지의 상민이 몰래 무역해서 바다로 내보내서 세금을 탈루하려고 하는 자만을 금지하였던 것입니다. 애초에 외국 상민들이 무역해서 운송하는 것을 막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으니, 해당 금령을 내리고 철회함에는 귀국 상인들이 곡식을 무역하는 것과는 조금도 관련이 없었으며, 또한 통상 항구에서 무역해서 운반하는 것을 방해하려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본 관서의 전임 독판(督辦) 민종묵(閔種默)이 귀국의 전임 공사 곤도 마스키[近藤眞鋤]가 보내온 조회를 받았는데, 마땅히 해당 도의 관찰사에게 관문(關文)을 보내 지시하여 해당 방곡령을 당장 철폐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곧바로 회답을 받았는데, 관문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금령을 해제했다는 보고였습니다.
재차 살피건대 그 방곡령은 비록 가뭄 탓에 백성의 식량이 부족할까 걱정했던 것이지만, 특별히 귀국과 우리나라 상민들이 무역하는 데에 불편함을 끼쳤으니 곧바로 정지하고 폐지함으로써 상로(商路)를 융통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본 정부의 이 조치는 백성의 식량이 어려움은 돌아보지 않고 특별히 상업을 온전히 하게 하려던 것이니, 교제의 우의와 화목함이 지극하고도 지극했던 것입니다. 그때 곤도 공사 역시 교의(交誼)에 부합되는 것이라 하여 누차 만나 감사의 뜻을 표하였고, 그 상민들 역시 무역에 편리해졌다 하여 우리 정부의 혜정(惠政)에 젖어든 바라고 인정한 바 있습니다.
또한 해당 금령이 시행된 것은 경인년(1890) 2월 10일이고, 윤2월 14일에 본 관서의 관문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정지되었으므로, 날짜를 합쳐보아도 20여 일에 지나지 않으니, 그 일본 상인들이 어떤 손해가 있었다는 것입니까. 지금까지 3년 동안 이에 대해 한마디도 없다가 이제 갑자기 그때 원래 곡식을 매입했던 가격의 몇 배나 되는 수를 가지고 날린 비용이라고 울부짖고 있으니, 3년의 이자를 거듭하여 쌓고 쌓아 큰 금액을 만든 것으로 채무를 날조한 것입니다. 이 공소에 있어 해당 상인들이 없는 것을 꾸며낸 것은 대단히 사체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바라건대 귀 임시대리공사께서는 이 실재(實在) 정형(情形)을 인천항 주재 영사 노세 다쓰고로[能勢辰五郞]에게 전달하시어 해당 상민들을 잡아다가 그들이 무고를 꾸며낸 흔적을 밝히고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막아 그들로 하여금 분수에 맞게 법을 지키면서 분규를 면하게 하는 것이 실로 양국의 우의와 화목함에 지극히 타당할 것입니다. 이치상 마땅히 사실에 근거하여 회답 조회를 보내니, 청하건대 번거롭겠지만 귀 임시대리공사께서는 잘 살펴 전달해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모름지기 이 회답 조회가 이르기를.
이상과 같이 조회를 보냅니다.
대일본 임시대리공사 스기무라[杉村]
임진년(1892) 11월 30일
출전 『舊韓國外交文書』 2, 日案 2, 고종 29년 11월 30일, 문서번호 2176

1889년 5월 황해감사 조병철이 내린 방곡령은 일본의 항의를 받은 외무독판 조병직의 해제 명령 지시로 해제되었다. 그러나 1889년 9월 함경감사 조병식이 내린 방곡령은 외무독판 민종묵(閔種默, 1835~1916, 친일반민족행위자)이 일본의 압력에 따라 해제하도록 명령하였으나 조병식은 이에 따르지 않고 오히려 곡물을 일본 상인들로부터 압수하는 등 더욱 강력하게 방곡령을 고수하였다. 이에 일본은 방곡령의 폐지는 물론 조병식 처벌을 요구하였으며, 결국 정부는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여 1893년 일본 상인에게 11만 엔을 지급하게 되었다. 한편, 1890년 2월 황해감사 오준영이 내린 방곡령은 민종묵의 해제 명령을 받아들여 곧바로 해결되었으며, 그 사후 처리를 1892년 독판교섭통상사무 조병직이 담당하였던 것이다.

■1893 전보국 총판 / 내무협판 / 지경연사 / 형조판서 / 관리전우사무 / 내의원 제조 / 외무독판 및 독판교섭통상사무■ 1893년(고종 30) 다시 전보국 총판의 임무를 맡고, 내무협판(협판내무부사, 내무부 차관), 지경연사(知經筵事)로 임명되었으며, 다시 형조판서로 임명되고 관리전우사무(管理電郵事務), 내의원(內醫院)은 제조, 외무독판(外務督辦, 외무부 장관) 및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등에 임명되었다.

관리전우사무는 1893년 설치된 전우총국(電郵總局)의 으뜸 벼슬로, 전신(電信)과 우편(郵便) 업무를 총괄하는 최고 책임자이다. 내의원은 조선시대 국왕 이하 왕족과 궁중에서 쓰이는 약을 짓고, 치료를 담당하던 왕실 의료기관이다. 도제조(都提調), 제조, 부제조를 각 1명씩 두었으며 부제조는 승지가 겸하였다.

■1894 외무독판 / 봉상시 제조 / 선공감 제조 / 평상시 제조 / 수원유수■ 1894년(고종 31) 외무독판(外務督辦) 조병직은 봉상시(奉常寺) 제조, 선공감(繕工監) 제조까지 맡았다.

봉상시는 국가 제례 및 왕의 묘호(廟號)와 시호(諡號)의 제정 등을 맡아보던 관청이고, 선공감은 토목(土木: 땅과 하천 따위를 고쳐 만드는 공사)과 영선(營繕: 건축물 따위를 새로 짓거나 수리함)에 관한 일을 맡았던 관청이다. 선공감은 공조(工曹)에 속하였는데, 공조는 오늘날 국토교통부에 해당하는 기관이다.

외무독판 조병직은 신병으로 독판교섭통상사무 사직을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고 잠시 쉬는 동안 서리가 그 일을 대신하기만 하고 그대로 외무독판으로서 독판교섭통상사무를 계속 맡았다. 이때는 동학농민혁명으로 일본과 청나라를 비롯한 외국과 외교적으로 처리할 일이 많은 시기였다. 특히 군대를 끌고 온 일본과 많은 연락을 하게 되어 외무독판의 임무가 막중한 시기였다. 이때 조병직은 일본의 침투를 막기 위하여 노력하는 등 사대당(事大黨: 수구파)으로 활약하였는데, 청일전쟁 중에 일본의 압력으로 한때 실각하기도 하였으나 왕의 신임이 두터웠던지 다시 중용되었다.

○독판교섭통상사무, 일본군의 서울 파병 강행에 대해 항의함○
연월일 고종 31년(1894년, 淸 德宗 光緖 20年, 日本 明治 27年) 5월 7일
발신 조병직
수신 일본 임시 대리공사 杉村濬
삼가 답변드립니다. 지난번 귀 서리 공사의 제44호 서한을 받고 모두 살펴보았으며, 이번에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공사가 병사를 거느리고 서울에 오는 것은 조약의 뜻과 부합하지 않으니 즉시 철수해 돌아가서 놀라게 하여 소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해야 함은 이미 오늘 제10호 공문으로 세세하게 성명한 바 있습니다. 귀 서한에서 마음대로 시행하기 어려워 보내온 내용을 따를 수 없다고 한 것은 진정으로 화목하게 판리하는 법이 아니니 본 독판은 개탄스럽고 애석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무릇 각국에서 사신을 선발해 파견하여 상호 주차함에 양국의 교섭상 중대한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이 나라 정부에서 저 나라 사신을 통해 일에 따라 논의해 처리하여 타협에 이르도록 힘쓰는 것이 각국의 통례인데, 어찌 귀 서리 공사는 본 독판이 전후에 진술한 바를 듣지 않은 것처럼 완고하게 미루어 놓으니, 이는 본 독판이 바라는 바를 벗어났을 뿐 아니라 또한 귀 서리 공사의 직분으로 마땅히 책임을 행한 것도 아닙니다. 또한 한성은 국왕이 소재한 중요한 지역이며 옥백(玉帛)이 모인 곳인데, 만약 안정되고 무사한 때에 병사가 갑자기 들어오면 놀라고 소란해질 것이니, 설령 귀 서리 공사가 마음대로 자행한다고 해도 본 독판은 오직 약장에 비추어 반박할 따름입니다. 귀 서리 공사가 잘 생각하여 호위 병사를 돌려보내면 실로 양국 간에 큰 다행일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답변합니다.
갑오(1894) 5월 7일
조병직(趙秉稷) 올림
[출전_『舊韓國外交文書』 2, 日案 2, 고종 31년 5월 7일, 문서번호 2840]

동학농민혁명이 진행되는 가운데 조병직은 평시서(平市署: 도량형과 시장, 유통, 물가를 조절 기관) 제조를 겸하기도 하고, 수원유수(水原留守)에 임명되어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장계를 올리기도 한다.

【동학당 괴수를 잡은 엄태영 등에게 포상할 것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이채연이 의정부의 말로 아뢰기를, “방금 수원유수(水原留守) 조병직(趙秉稷)의 장계를 등보(謄報)한 것을 보니, ‘동학당 괴수를 생포하여 바친 본영의 집사(執事) 엄태영(嚴泰永)에게 상을 주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를 해당 아문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해주소서.’ 하였습니다. 위험을 무릅쓴 채 포위를 뚫고서 비적의 괴수를 잡아 바쳤으니 지극히 가상한 일입니다. 격려하는 차원에서 응당 포상하는 은전이 있어야 하니, 엄태영을 좋은 지방의 변장(邊將) 자리를 비운 다음 차송(差送)하고 그가 거느린 아병(牙兵: 대장을 수행하는 병사)에게는 해당 수신(守臣)으로 하여금 넉넉히 상을 주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승정원일기』 3052책(탈초본 139책) 고종 31년 11월 11일 계미 8/13 기사 1894년 開國 503년 光緖(淸/德宗) 20년 -고종실록 32권, 고종 31년 11월 11일 계미 2/2 기사 / 1894년 조선 개국(開國) 503년

■1895 시종원 경 / 장례원 경 / 학부대신■ 1895년(고종 32) 시종원(侍從院) 경(卿), 장례원(掌禮院) 경, 학부대신(學部大臣)에 임명되었다.

시종원은 임금의 시종(侍從)과 시강(侍講) 등의 사무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다. 장례원은 종래의 통례원(通禮院)이 담당하던 궁중 의식과 조회의례(朝會儀禮)뿐만 아니라 예조에서 장악하고 있던 제사와 모든 능·종실·귀족에 관한 일을 하던 관청으로, 경(卿) 1인, 장례 3인, 주사 8인을 두었다. 노비 소송과 관리를 담당한 기관인 장례원(掌隷院)과는 다른 것이다. 학부대신’은 대한제국 학부(學部)의 최고 관직으로, 오늘날의 교육부 장관에 해당한다.

○양력 사용○ 을미개혁으로 우리나라는 1895년 9월 9일 태음력을 폐지하고 태양력을 채택, 음력 개국 504년 11월 17일을 양력 개국 505년 1월 1일로 결정하였다. 즉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우리나라 각종 연표나 역사에 등장하는 날짜는 일반적으로 1895년 11월 16일 이전 날짜는 예전대로 음력 날짜이며, 1895년 11월 17일부터는 1896년 1월 1일로 시작하는 양력 날짜를 사용한다.

<다음에 '최시형에게 사형을 선고한 법부대신 조병직'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