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 같은데 잘 모르는 조병갑, 조병갑보다 더한 조병식과 조병직(16)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의 공주집회 탄압과 고등재판소 판사 조병갑·조병직의 동학교주 재판 (16) 조병갑을 판사로 추천하여 함께 최시형에게 사형을 선고한 재판장 조병직, 늙고 병들어 사직을 청하고 청해도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2026-04-15     인간 전병철

동학농민혁명과 관련 있는 인물, 조병갑과 조병식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어 발품 팔아 조사했습니다. 하고 나니 조병직에 대한 정리도 필요하여 추가 조사하였습니다. 그 결과, A4로 200쪽 되는 글을 16회로 나누어 공유하고자 합니다. 재미없는 글이긴 하나, 조병갑ㆍ조병식ㆍ조병직을 알면 동학농민혁명을 아는 데 나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인간 전병철(작가)

 

■1896 법부대신 겸 고등재판소 재판장 / 농상공부대신 / 의정부 찬정 겸임■ 1896년(고종 33) 아관파천(俄館播遷, 1896.02.11.~1897.02.20.) 당시 조병직은 친러파(수구파, 사대당)에 가담하였다. 조병직은 학부대신에서 법부대신(法部大臣, 오늘날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고 고등재판소 재판장을 겸직하였다.

고등재판소는 대한제국 법부에 소속한 최고 법원으로, 상소재판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하였던 법원으로써 1895년 <재판소구성법>에 따라 근대적인 재판소 제도가 도입되어 형식상 사법권이 행정권으로부터 분리하면서 설치되어 1899년까지 존재하다가 1899년 평리원(平理院)으로 바뀌었다. 1899년 평리원(平理院)으로 개편되고 다시 대심원(大審院), 대심원(大審院), 통감부 고등법원(統監府高等法院) 등으로 바뀌었다. 재판장 1인, 판사 2인, 검사 2인을 두었는데, 재판장은 법부대신 또는 법부협판이 맡았다.

법부대신에 이어 조병직은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에 임명되었다. 농상공부대신은 농상공부의 최고 벼슬이며, 농상공부는 1895년 농상아문(農商衙門)과 공무아문(工務衙門)을 합쳐 만들어진 대한제국 관청으로 농상공, 우체(우편), 전신, 광산, 선박 등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한 기관이다. 오늘날의 농림축산식품부, 산업통상자원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해양수산부의 역할을 담당하던 기구이다. 농상공부대신으로 있으면서 조병직은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철도 건설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한편, 조병직은 탐관(貪官, 탐관오리)이므로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기도 했다. 하지만 조병직은 농상공부대신을 계속하였으며, 나중에는 의정부 찬정까지 겸임하였다.

찬정(贊政)은 1896년부터 1905년까지의 의정부 소속 관리로, 전임 찬정과 각부 대신이 당연직으로 겸임하는 겸임 찬정 두 종류가 있었는데, 전임 찬정은 5인이고 겸임 찬정은 각부 대신 7인이었다. 찬정은 참찬(參贊)을 거쳐 의정(議政: 의정대신, 영의정, 총리대신)에게 안건을 제출하고, 토론과 표결을 행사할 수 있었다. 조병직은 찬정으로 임명될 때 신병을 이유로 사절하기도 하였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고 그대로 임명하였다.

【흉도 서재필 등 갑신년 갑오년 을미년의 역적들에게 모두 국법을 시행할 것을 청하는 진사 정성우의 상소】 진사 정성우(鄭惺愚)가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은 우주의 동량(棟樑)이고 생민(生民)의 주석(柱石)이므로, 사람에게 이것이 없으면 의관을 갖추었어도 금수(禽獸)이고, 나라에 이것이 없으면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해 왔더라도 귀신이나 물여우인 것입니다. … 아, 이른바 개화(開化)의 무리가 외국에서 활동하다가 본국으로 돌아와서는 모양을 바꿔 기이한 차림새를 하고 외국어를 능사로 삼아, 밖으로는 부강하게 하겠다는 말로 핑계 대고 안으로는 효경(梟獍: 어미를 잡아먹는다는 올빼미와 아비를 잡아먹는 짐승) 같은 배은망덕한 마음을 품고 뱀이 서리고 지렁이가 얽히듯 서로 굳게 뭉친 다음 외국인을 부추겨 만고에 없었던 변란을 빚어내었으니, 고금의 역사에 어찌 이런 역적이 있겠으며 천하 만국에 어찌 이런 변란이 있겠습니까. 현재 역적 무리가 혹은 도망하여 아직 체포되지 못했고, 혹은 죽어서 형벌을 가하지 못하였고, 혹은 살아 있는데 아직 죽이지 못하였고, 혹은 관직에 있으면서 정치를 어지럽히고 있으니, 우리 열성조(列聖朝)께서 몇백 년 동안 이룩한 법령과 전장(典章)이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난신(亂臣)이나 역당(逆黨)에 의해 민멸되는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이 역적은 폐하의 역적일 뿐만 아니라 선왕(先王)의 큰 역적인데,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으로 지금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십니까. 아, 통탄스럽습니다. 갑신년(1884, 고종 21) 10월 법망[갑신정변(甲申政變, 1884년 10월 17일, 양력 12월 4일)]을 피하여 달아난 역적의 무리가 해외에 숨었다가 갑오년(1894, 고종 31) 6월의 난[일본의 경복궁 습격(1894년 6월 21일, 양력 7월 23일)]을 만들었고, 갑오년 6월의 난당(亂黨)이 을미년(1895, 고종 32) 8월의 큰 반역[을미사변(乙未事變, 1895년 8월 20일 양력 10월 8일]을 빚어내었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전후에 걸쳐 반역을 꾀한 자를 모두 소탕하지 못하면 반드시 나라의 화근(禍根)이 될 것이니, 어찌 진심을 토로하여 애통해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흉도(凶徒) 서재필(徐載弼)은 만고에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고 제멋대로 본국에 돌아왔으면서, 어떻게 감히 하늘 아래 살면서 나라의 권병(權柄)을 마음대로 휘두른단 말입니까. 또 더구나 폐하의 앞에서 스스로 외신(外臣)이라 일컬었으니, 그가 만약 외신이라면 어찌 조선국(朝鮮國)의 사무에 관여한단 말입니까. 그의 이른바 독립신문(獨立新聞)이라는 것은 헐뜯고 비난하기만 할 뿐 도무지 의리라고는 없으니, 이것은 나라를 위한 것도 아니고 또한 백성을 위한 것도 아니며, 다만 선왕의 법제(法制)를 고치려 하고 전적으로 본국을 전복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흉악한 역적이 어떻게 용서를 받아 천지 사이에 용납될 수 있겠습니까. 갑오년 6월의 간당(奸黨) 김가진(金嘉鎭), 안경수(安駉壽) 등은 맨 먼저 주창하여 나라를 병들게 하였는데 나라에는 병폐를 제거할 사람이 없고, 박정양(朴定陽), 조병직(趙秉稷) 등은 탐관(貪官)으로서 의리가 없었는데 의리가 사라지자 난이 일어났으며, 이윤용(李允用)은 공과 죄가 모두 컸는데 한집안 사람이 전부 탐관이었습니다. 이들 간당은 권리(權利)가 있는 직임을 장악하고 국외(局外)의 동정과 궁내(宮內)의 움직임을 살피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그날의 흉악한 재화(災禍)가 생겼으니, 그 행동거지를 따져보건대 죄를 너그러이 용서하기 어려운 자들입니다. 김윤식(金允植), 어윤중(魚允中) 등은 모역의 와주(窩主)로서 이미 외국의 공보(公報)에 나왔으니, 본국의 의리에 있어 어찌 성토하지 않겠습니까. 을미년 8월의 큰 역적 김홍집(金弘集), 유길준(兪吉濬), 정병하(鄭秉夏), 조희연(趙羲淵), 권형진(權瀅鎭), 이두황(李斗璜), 우범선(禹範善), 이범래(李範來), 이진호(李軫鎬), 장박(張博) 등은 먼저는 간당이 되었고 뒤에는 역적의 무리가 되었는데, 음모와 사악한 계책이 왕망(王莽)이나 동탁(董卓)보다 심하였고 이괄(李适)이나 신치운(申致雲)보다 심하였습니다. 김윤식과 어윤중에 이르러서는 성토하지 않을 수 없는 자들임이 분명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시원스레 결단을 내리소서. 흉도 서재필은 더욱 그대로 놓아둘 수 없는 자입니다. 지금 만약 적당히 얼버무려 놓아둔다면, 다른 날 다시 갑신년의 일을 도모하지 않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그러니 사전(赦典)을 환수하시고 속히 나라의 형전을 바로잡으소서. 갑오년의 간당에게도 국법을 시행하소서. 을미년의 큰 역적은 죽은 자는 관에서 꺼내어 사형에 처하고, 도망한 자는 붙잡아다가 사형에 처하고, 산 자에게는 속히 국법을 시행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그 자신만 죽이고 말아서는 안 되니, 모두 연좌율(連坐律)을 써서 나라의 후환을 막고 신민의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어주소서. 이처럼 제거한 연후에는 화란의 싹을 감히 다시 틔우지 못할 것이 분명한데, 폐하께서는 누구를 꺼려서 오래도록 이 일을 하지 않으십니까. 지금 난을 중지시키고 세상을 평안하게 하려면, 김홍집과 유길준이 천거한 관리들은 큰 역적이 천거하여 끌어들인 자들이므로 내외의 관질(官秩)에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니, 즉시 대관(大官) 이하를 일제히 일소하여 나라의 기강을 엄숙하고 맑게 하소서. 그리고 흉도가 정한 신식 관제(官制) 및 품등(品等) 등 여러 건의 문자는 갑오년 6월 21일 이후의 것은 모두 시행하지 말고 속히 선조(先朝)의 옛 제도를 회복하며, 속히 여러 군(郡)의 지방 병졸을 두어서 팔역(八域)의 소란을 평정하시고 내외의 병권(兵權)을 상께서 총찰(摠察)하소서. …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반박하며 논열(論列)한 것이 어찌 이리도 허점이 많은가.” 하였다. -『승정원일기』 3071책(탈초본 139책) 고종 33년 5월 29일[양력 7월 9일] 계해 4/4 기사 1896년 開國 505년 光緖(淸/德宗) 22년

■1897 임시서리법부대신사무 / 임시서리외부대신사무 / 학부대신 / 장례원 경■ 1897년(고종 34, 광무 1) 조병직은 3월에 임시서리법부대신사무(臨時署理法部大臣事務), 6월에 임시서리외부대신사무(臨時署理外部大臣事務)에 임명되었다. 10월에는 학부대신(學部大臣)에 임명되어 장례원(掌禮院) 경(卿)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이때마다 부모의 묘소에 성묘할 수 있도록, 또는 적임자가 아니라는 등을 이유로 사직을 요청하였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1898 임시서리외부대신, 외부대신 / 법부대신 겸 고등재판소 재판장, {파면 및 사면} / 중추원 일등의관 / 외부대신 / 탁지부대신 / 의정부 찬정 / 궁내부 특진관 / 경효전 제조■ 1898년 (고종 35, 광무 2) 1월과 2월에 학부대신 조병직은 신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3월에는 임시서리외부대신을 겸하였다가 다시 외부대신에 임명되었다. 이때도 신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6월 10일 다시 법부대신에 임명되고 6월 14일 고등재판소 재판장까지 겸임하였다.

【법부대신 임명】 조령을 내리기를, “정2품 조병직(趙秉稷)을 법부대신으로 삼으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096책(탈초본 139책) 고종 35년 4월 22일[양력 6월 10일] 갑진 3/3 기사 1898년 光武 2년 光緖(淸/德宗) 24년 // 법부대신(法部大臣) 이유인(李裕寅)을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정2품(正二品) 조병직(趙秉稷)을 법부 대신에 임용하고 칙임관 1등에 서임하였다. -『고종실록』 37권, 고종 35년 6월 10일 양력 3/4 기사 / 1898년 대한 광무(光武) 2년

【고등재판소재판장 겸임】 법부대신(法部大臣) 조병직(趙秉稷)을 겸임 고등재판소재판장에 임명하였다. -『승정원일기』 3096책(탈초본 139책) 고종 35년 4월 26일[양력 6월 14일] 무신 2/2 기사 1898년 光武 2년 光緖(淸/德宗) 24년 // 법부대신(法部大臣) 조병직(趙秉稷)에게 고등재판소 재판장(高等裁判所裁判長)을 겸임(兼任)하도록 하였다. -『고종실록』 37권, 고종 35년 6월 14일 양력 1/1 기사 / 1898년 대한 광무(光武) 2년

 

조병직은 법부대신으로 있으면서 최시형을 7·8차례 공초(供招: 조사)하며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하자 ‘나약하고 무르다’라는 비방을 받았는지, 이에 조병직은 비방받은 일과 신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다. 그러나 왕은 허락하지 않고 조병직에게 그대로 법부대신 책무에 힘쓰라고 하였다.

【상소로 비방받았으므로 법부대신 등의 직함을 체차해 주기를 청하는 의정부 찬정 법부대신 조병직의 상소】 의정부 찬정 법부대신 조병직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은 병으로 보자면 억지로 자리에 나아갈 힘이 없고 재주로 보자면 직무를 감당할 가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매번 현직(見職)이 내려올 때마다 온 힘을 다하여 굳이 간청하였고, 성상께서도 신의 말이 거짓으로 사양하는 것이 아님을 통촉하셨기 때문에 특별히 청한 바를 윤허하여 그 소원을 곡진히 이루어 주셨으니, 상하가 서로 믿는 것이 천 년에나 한 번 있을 법한 일이었습니다. 이에 신은 은혜에 감격하여 눈물을 줄줄 흘리며, 시골로 물러나 성상의 은택을 노래하고 병든 몸을 조리하며 여생을 마칠 것이라고 속으로 기약하였습니다. 그런데 며칠도 지나지 않아 갑자기 법부(法部)에 제수하는 명을 받들게 되었으므로 다시 전에 간청하던 것처럼 다시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끝내 윤허하지 않으시고 맡기기를 갈수록 무겁게 하시는데 번거롭게 하기도 송구하여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나아가 명에 응한 지가 이제 수십 일이 지났습니다. 신이 거취 문제에 대하여 이중성을 보인 것이야 말할 것도 없거니와, 조정의 정사가 그 마땅함을 잃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신의 병이 이전보다 덜하지 않고 신의 재주가 지금 더 나아진 것이 없는데, 매우 중요한 직무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으며 번다하고도 지체된 안건들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일을 그르치는 잘못이 산처럼 쌓이고 비방이 날로 들끓고 있는데, 의관) 조강환(曺康煥)의 상소가 나오면서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신의 실상이 더욱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 상소에 이르기를, ‘흉역(凶逆)한 자에게 죄의 실정을 캐내는 데에, 만약 사법(司法)을 담당하는 관직을 나약하고 무른 사람에게 맡긴다면 너무 너그럽게 용서하여 형벌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할 염려가 없을 수 없으니, 강직한 신하를 뽑아 속히 나라의 기강을 밝혀야 마땅합니다.’ 하였습니다. 무릇 죄인을 붙잡은 뒤에는 검사(檢事)가 먼저 심사(審査)하여 공초에 따라 문건을 작성한 다음 재판장이 비로소 재결하는 것이 현재의 율례(律例)입니다. 최시형에게 7, 8차례에 걸쳐 공초를 받았는데, 좌도(左道)로 대중을 현혹시킨 죄에 대해서는 그가 이미 자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입으로 공술(供述)한 그 나머지 도당들은 바로 갑오년 이후로 섬멸되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차례 자세히 물어보았으나 아직 마무리 짓지는 못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국외(局外)에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벌써 법의 집행이 너그러울지 엄할지를 알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들의 말이 반드시 정확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나약하고 무르다.’는 두 마디는 바로 신에게 제대로 들어맞는 말입니다. 신이 신 자신을 보더라도 오히려 강직하다고 자처하지 못하는데, 남들은 진실로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앞으로 신에 대해 논핵하는 자가 반드시 조강환 한 사람으로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부끄럽고 두려운 나머지 병 때문에 억지로 나아가기 힘들다거나 재주가 감당하기 어렵다고 세세히 설명할 겨를조차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신이 맡고 있는 법부대신 및 재판장의 직함을 특별히 체차하시고 강직한 사람에게 다시 제수하심으로써 옥사(獄事)를 완벽하게 하여 여정(輿情)에 부응하소서.……”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상소를 보고 경의 간절한 마음을 잘 알았다. 시대 흐름을 알지 못하는 전함인(前銜人)의 망녕된 말을 무어 따질 것이 있겠는가. 소장을 올려 인혐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더구나 지금 부(部)의 사무로 볼 때 경이 사사로운 사정을 말할 때가 아니니 사직하지 말고 공경하여 형벌에 신중히 하는 책무에 더욱 힘쓰라.’는 내용으로 부랑을 보내어 선유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097책(탈초본 139책) 고종 35년 5월 22일[양력 7월 10일] 갑술 9/9 기사 1898년 光武 2년 光緖(淸/德宗) 24년

그리고 법부대신 겸 고등재판소 재판장 조병직은 1898년 7월 18일(음력 5월 30일) 재판에서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를 7월 19일(음력 6월 1일) 법부에 보고하였다. 당시 재판장은 조병직, 좌우 배석판사는 주석면(朱錫冕)·조병갑(趙秉甲), 예비판사는 권재운(權在運)·김택(金澤)이었는데, 법부 민사국장(民事局長)이던 조병갑이 1898년 7월 11일(음력 5월 23일) 고등재판소 판사로 임명된 데에는 법부대신 조병직의 추천에 따라 고종이 임명한 것으로 보고 있다. 같은 집안 형제가 합심하여 최시형을 재판한 것이다.

이에 서소문감옥에 갇혀 재판받던 최시형은 1898년 5월 25일(음력 4월 6일) 체포된 지 근 2개월, 사형 선고를 받은 지 이틀 후인 7월 20일(음력 6월 2일) 좌포청(左捕廳, 좌포도청, 육군법원, 단성사 극장 뒤편) 사형 집행장(執行場) ‘처교죄인 동학괴수 최시형(處敎罪人 東學魁首 崔時亨)’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 교수대(絞首臺)에서 오후 5시경 71세(옛 나이 72세) 나이로 사형당했다.

【최시형을 교형에 처하도록 하다】 법부대신 조병직(趙秉稷)이 아뢰기를, “방금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의 문의서를 보니, ‘피고 최시형(崔時亨)의 공초에, 「병인년(1866)에 간성(杆城)에 사는 필묵(筆墨) 상인 박춘서(朴春瑞)에게 동학(東學)의 선도(善道)와 병을 치료하는 주문과 강신문(降神文)을 받아가지고 열군(列郡)의 각도(各道)를 두루 돌아다녔습니다.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13자의 주문과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 8자의 강신문(降神文)과 동학의 원문인 제1편 「포덕문(布德文)」, 제2편 「동학론(東學論)」, 제3편 「수덕문(修德文)」, 제4편 「불연기연문(不然其然文)」과 궁궁(弓弓)과 을을(乙乙) 자를 새긴 부적으로써 백성들을 현혹시켰으며 도당(徒黨)을 체결하였습니다. 또 복주된 최제우(崔濟愚)의 「만년토록 뻗어 있는 가지에 천 송이의 꽃이 피고 사해(四海)의 구름 속에 달이 한 번 비친다.((萬年枝上花千朶 四海雲中月一鑑」는 시구를 숭상하고 사모하여 법형(法兄), 법제(法弟)의 칭호를 법헌(法軒)이라는 칭호로 바꾸어서 불렀으며, 해월(海月)이라는 인장(印章)을 새겼고 교장(敎長), 교수(敎授), 집강(執綱), 도집(都執), 대정(大正), 중정(中正) 등의 두목에게 각 지방을 맡겨 두었습니다. 또한 포장회(布帳會)를 설치하였는데 모인 무리들이 수천수만 명을 헤아릴 정도였으며 최제우의 원통함을 푼다고 하였습니다. 지난 계사년(1893)에 그 도제(徒弟) 수천 명과 함께 대궐에 나아가 상소하고 곧바로 해산하였으며, 또 보은(報恩)의 포장회 안에 많은 무리들이 모였을 때는 순무사(巡撫使)의 선유(宣諭)로 인하여 각각 스스로 흩어져 갔습니다. 「갑오년(1894) 봄에 피고 전봉준(全琫準)은 고부(古阜) 지방에서 패거리들을 불러 모아서 기회를 틈타서 관리를 살해하고 성(城)과 진(鎭)을 함락시키는 바람에 호서(湖西)와 호남(湖南) 지방이 결딴이 나고 뒤흔들리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하였습니다. 피고가 지시하고 화응한 일은 없지만 그 변란이 일어나게 된 근원을 따져 보면 피고가 주문과 부적으로 백성들을 현혹시킨 데 있습니다. 피고 최시형은 대명률(大明律) 「제사편(祭祀編) 금지사무사술조(禁止師巫邪術條)」의 일체 좌도(左道)로써 바른 도를 어지럽히는 술책과 혹은 도상(圖像)을 숨겨놓고 향을 피워 사람들을 모으고 밤에 모였다가 새벽에 흩어지며 거짓으로 착한 일을 닦는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데에서 우두머리가 된 자에 대한 형률에 비추어 교형(絞刑)에 처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해당 범인 최시형을 원래 의율(擬律)한 대로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고종실록』 37권, 고종 35년 7월 18일 양력 2/2 기사 / 1898년 대한 광무(光武) 2년

○고등재판소, 최시형 등 동학교도들에 대한 선고 판결을 법부에 보고함○
연월일 고종 35년(1898년, 淸 德宗 光緖 24年, 日本 明治 31年) 7월 19일
보고서(報告書) 제33호.
법부 제73호 지령(指令)을 받고, 피고 최시형(崔時亨)은 대명률(大明律) 제사편(祭祀編) 사무 사술(師巫邪術)을 금지하는 조항의 모든 좌도(左道)로서 정도를 어지럽히는 술수나, 혹 도상(圖像)을 숨겨 보관하거나, 향을 피우고 무리를 모아 밤에 모였다가 새벽에 흩어지거나, 겉으로 착한 일을 하는 체하면서 민심을 선동하고 미혹시키는 경우의 형률을 적용하여 교형(絞刑)에 처하고, 피고 황만기(黃萬己)는 동(同) 편 동 조항의 추종한 경우의 형률을 적용하여 태(笞) 100, 징역 종신에 처하고, 피고 송일회(宋一會)는 동 편 동 조항의 추종한 경우의 형률을 적용하여 2등을 감하여 태 100, 징역 10년에 처하고, 피고 박윤대(朴允大)는 동 편 동 조항의 추종한 경우의 형률을 적용하여 1등을 감하여 태 100, 징역 15년에 처할 것을 선고하고 보고하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고등재판소 판사(高等裁判所判事) 주석면(朱錫冕)
의정부 찬정 법부 대신(議政府贊政法部大臣) 조병직(趙秉稷) 각하
광무(光武) 2년(1898) 7월 19일
접수. 광무(光武) 2년(1898) 월 일. 제455호 [출전_『司法稟報(乙)』, 光武 2년 7월 19일]

한편, 만민공동회를 탄압한 일로 조병직을 맹렬히 비난하는 것은 물론 탄핵하라는 상소가 이어졌다.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일어난 을미사변 충격으로 고종은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1896.02.11.~1897.02.20.)하여 1년 넘게 그곳에서 지냈다. 이에 서재필(徐載弼)을 비롯한 개화파 인사들이 1896년 7월 독립협회를 조직해 러시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는 운동을 벌였고, 만민공동회를 조직해 민중 계몽에 나섰다. 또 러시아와 가깝게 지내는 수구파 세력의 퇴진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에 수구파 인사들은 독립협회를 비난하며 대립하게 되었다.

당시 친러파이던 조병직은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를 탄압하기도 하였기에 그를 탄핵하는 상소가 올라오기도 하였다. 이에 조병직은 신병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을 요청하였으나 이 또한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상소로 탄핵을 받았으므로 체차하고 처벌해 주기를 청하는 의정부 찬정 법부대신 조병직의 상소】 의정부 찬정 법부대신 조병직(趙秉稷)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은 원래 허약한 체질이고 나이까지 늙었지만, 성상의 은총에 연연하여 아직껏 떠나기를 결단하지 못했습니다. 다가오는 재앙과 허물을 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스스로 알았습니다만, 비난이 이토록 심하게 이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신이 전(前) 정자(正字) 고영중(高永中)의 상소를 보았는데, 마음과 몸이 다 떨려 감히 다 읽지를 못했습니다. 그 상소 가운데에는 신을 모함하는 구절이 끝이 없었거니와, 심지어 ‘폐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느니 ‘국가를 사랑하지 않는다’느니 하는 구절까지 있었습니다. 신하가 되어 임금을 두려워하지 않고 국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는 신하의 분수가 없고 신하의 절개가 없는 것입니다. 분수와 절개가 없이 장차 어떻게 천지(天地) 사이에서 자립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비록 불초하고 보잘것없으나 구구한 견마지성(犬馬之誠)은 스스로 남보다 뒤지지 않는다고 여겼는데, 영록(榮祿)이 지나쳐 귀신이 노하고 시기하여 직무를 망치는 것이 현저히 드러나고 악명(惡名)이 마구 더해지고 있으니, 이는 창랑(滄浪)의 물처럼 스스로 자초한 것이니, 다시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그러나 도망친 자는 붙잡지 못했고 잡아 온 자는 신문을 다 끝내지 못하였는데, 저 고영중이 어떻게 옥중의 전말을 알고서 제멋대로 가로막아 두둔하였다는 등의 말을 꺼낼 수 있습니까. 이는 그 의도가 단지 신을 배척하려는 것뿐입니다. 성상의 비답(批答)에 ‘일에 앞서 사람을 논하니, 매우 근거가 없다.’라 하셨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일월같이 밝으신 성상께서 이미 그 속마음을 환하게 알고 계시니, 신이 또 무엇을 변명하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만약 사임하고 떠나지 않는다면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행위가 반드시 계속 발생할 것입니다. 신도 사람이니, 어찌 견디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불쌍히 여겨 속히 신이 맡고 있는 직명을 체차하여 감당할 수 있는 자에게 도로 제수하심으로써 옥사를 완결하시고, 이어 신이 직임을 그르친 죄를 다스리심으로써 사람들의 말에 응답하소서.……”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상소를 보고 경의 간절한 마음을 잘 알았다. 전에 벼슬하던 사람이 함부로 하는 말을 무슨 따질 필요가 있어 마침내 혐의를 피하여 사직하겠다는 글을 올리는가. 돌아보건대, 현재는 옥사에 대한 조사가 한창이니, 경이 절대로 사적인 말을 할 때가 아니다. 경은 다시 말을 꺼내지 말고 즉시 사무를 보라.’는 내용으로 부랑을 보내어 선유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098책(탈초본 139책) 고종 35년 6월 5일[양력 7월 23일] 정해 14/14 기사 1898년 光武 2년 光緖(淸/德宗) 24년

【신병이 있다는 이유로 체차해 주기를 청하는 의정부 찬정 법부대신 조병직의 상소】 의정부 찬정 법부대신 조병직(趙秉稷)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이 절박한 심정에 어떤 말을 해야 할 줄 모르고 자주 성상께 번거롭게 아뢰었으니, 그 죄가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그런데 빨리 엄벌을 내리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더 포용하시고 융성한 비답(批答)까지 내려주시니, 신이 이에 대해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빨리 죽기만을 원할 뿐입니다. 신은 보잘것없으나 임금을 섬기는 의리에 대해서는 조금이나마 들은 것이 있습니다. 밝은 시대를 만나 망극한 은혜를 받았으니,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감히 피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처럼 옥사(獄事)가 한창 벌어진 때에 어찌 감히 머뭇거리면서 편하기만을 도모하겠습니까만, 신이 처한 상황이 필시 이유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벼슬자리에 거하여 시기가 쌓이고 깊어져 함정과 그물이 앞뒤에 있는데도 오히려 방황하고 떠나지 않는다면 화(禍)를 부르고 허물을 재촉하기에 충분하여 성상의 은혜를 저버리게 될 뿐이니, 어찌 실낱같은 도움이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일월처럼 밝으신 성상께서 다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신이 면직을 바라는 것은 의리상 머물러 있기 어렵기 때문에 질병의 증세를 일찍이 장황하게 아뢰지 않았습니다만, 귀머거리 증상이 날로 심해지고 시력이 점점 어두워졌습니다. 사람이 의지하는 것은 오직 귀와 눈뿐인데 신은 지금 모두 어두워졌습니다. 본디 재주가 없고 지식이 없는 데다 눈과 귀마저 멀었으니 어떻게 공사(供辭)를 점검하며 옥안(獄案)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비방을 받고부터는 마음이 찢어지고 간이 떨어지고 정신이 혼미하여 위독한 상태로 침상에서 자리보전하고 있는데 숨이 거의 끊어질 듯하여 죽을 날이 멀지 않습니다. 심지어 계속 일어나는 설사 증세나 담화(痰火)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 정도는 보통 증상일 뿐입니다. 신이 떠날 의리가 없으나, 이러한 현재의 상태로는 공무에 나아갈 가망이 전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신의 궁박한 사정을 헤아리시고 신의 위급한 병세를 불쌍히 여겨 특별히 청한 바를 윤허하심으로써 잔약한 목숨을 보존케 해주신다면 한 가닥 숨이 남아 있는 날까지 폐하의 덕을 노래할 것이며 만 번 죽어도 잊지 못할 은덕을 죽어서라도 보답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상소를 보고 경의 간절한 마음을 잘 알았다. 망녕된 말로 인하여 인혐(引嫌)하는 것은 그만둘 때도 되었다. 반드시 사직해야만 그만두고자 하는 것은 경의 분의(分義)에 있어서 어찌 그럴 수 있는가. 비록 하루에 열 번 사직 상소를 올리더라도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이니, 경은 잘 헤아리라.’는 내용으로 부랑을 보내어 선유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098책(탈초본 139책) 고종 35년 6월 9일[양력 7월 27일] 신묘 11/12 기사 1898년 光武 2년 光緖(淸/德宗) 24년

 

조병직이 신병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을 요청했음에도 왕이 허락하지 않는 가운데 독립협회를 탄압한 일로 조병직을 탄핵하라는 상소가 그치지 않자, 마침내 왕은 1898년 7월 29일(음력 6월 11일)조병직을 면직시켰다.

【아뢰는 상소가 그치지 않으므로 법부대신 조병직의 본관을 면직하라는 조령】조령을 내리기를, “자주 신칙하는 유지를 내렸지만, 한결같이 아뢰는 상소가 그치지 않으니, 이는 국체(國體: 나라의 체면)가 손상되고 신하의 분수가 무너지는 것이다. 이를 그냥 둘 수 없으니, 법부대신 조병직(趙秉稷)의 본관을 우선 면직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098책(탈초본 139책) 고종 35년 6월 11일[양력 7월 29일] 계사 2/14 기사 1898년 光武 2년 光緖(淸/德宗) 24년

그러나 파면당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병직은 조병식과 함께 특별히 사면받았다. 나아가 조병식 등과 함께 중추원(中樞院) 일등의관(一等議官)에 임용되었다.

의관(議官)은 1894년 갑오개혁 때 설치된 중추원 소속의 관직으로, 중추원은 원래 실직한 고위 관료들의 대기 발령처로 설립되었으나, 군국기무처가 폐지된 후 그 기능을 일부 계승하여 법률 칙령안과 내각에서 요청한 사항을 자문하는 업무를 맡았다. 하지만 형식적인 자문에 그쳤으므로, 1898년 독립협회는 중추원을 개편하여 의회와 같은 기능을 부여하자고 주장하여 중추원 의관 중 반수를 인민협회(독립협회)에서 천거하는 개정안이 만들어졌으나 결국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처럼 중추원은 초기 의회 역할을 하기도 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 자문기관으로 변하여 친일반민족행위에 앞장선 기구가 되었다.

【조병식·조병직을 특별히 사면하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종1품 조병식(趙秉式), 정2품 조병직(趙秉稷)에 대해 특별히 징계(懲戒)를 사면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099책(탈초본 139책) 고종 35년 7월 1일[양력 8월 17일] 임자 4/12 기사 1898년 光武 2년 光緖(淸/德宗) 24년

【조병식 등과 함께 일등의관에 임용】 중추원 일등의관에 조병식(趙秉式), 조병직(趙秉稷), 허진(許璡), 정대영(丁大泳)을 임용하고, … 임용하였다. -『승정원일기』 3099책(탈초본 139책) 고종 35년 7월 1일[양력 8월 17일] 임자 8/12 기사 1898년 光武 2년 光緖(淸/德宗) 24년

중추원 일등의관에 이어 조병직은 외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 이때도 노쇠하다는 이유로 사직을 요청하였으나 왕은 하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외무대신 일을 하다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병을 이유로 사직을 요청하였으나 역시 거절당하였다가 다시 사직을 요청하였으나 그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거듭 요구하는 사직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가운데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으로 임명되었다. 탁지부(度支部) 또는 탁지아문(度支衙門)은 대한제국 당시 정부의 재무(財務)를 총괄하던 관청으로, 호조의 기능을 승계한 기관이다. 회계와 출납, 조세, 국채(國債), 화폐, 은행 등에 관한 사무를 맡아 처리하였으며, 각 지방의 재무를 감독하였다. 조병직은 탁지부대신에 임명되자 예전처럼 병을 이유로 사직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되고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에 다시 임명되고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되어, 또 사직을 요청했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경효전(景孝殿) 제조에 임명되었는데, 경효전은 경운궁(慶運宮, 덕수궁) 문경전(文慶殿)에 있는 명성황후 민씨의 신주를 봉안한 전각이다.

■1899 의정부 찬정 / 임시서리의정사무, {파면 및 사면} / 의정부 찬정 / 탁지부대신 / 표훈원 의정관 / 대왕 옥책문 서사관 / 임시서리내부대신사무■ 조병직은 늙은 나이와 신병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을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는 가운데 1899년(고종 36, 광무 3) 의정부 찬정(贊政), 임시서리의정사무(臨時署理議政事務)로 임명되었다.

의정(議政)은 의정부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지칭하는 말로, 조선 초기부터 말기까지 국정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 이후에는 의정부의 의정대신(議政大臣)으로 이름이 바뀌고, 이후 총리대신, 내각총리대신 등으로 바뀌었다. 임시서리의정사무는 의정부의 주요 인사가 사임하거나 공석이 되었을 때, 임시로 의정부의 행정 업무를 대신 맡아 처리하도록 임명하는 직책이다.

의정부 의정임시서리에 임명된 조병직은 예전과 마찬가지 신병을 이유로 사직을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만 아들을 전주군수로 발령한 일로 의정임시서리에서 해임되었으며, 해임되자 의정부 찬정까지 해임하여 더 벌주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마침내 의정부 찬정마저 면직되었다. 그러나 파면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면되었다.

【견책을 받은 죄가 있으므로 체차하고 더 처벌해 주기를 청하는 의정부 찬정 조병직의 상소】 의정부 찬정 조병직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은 용렬한 재주와 평범한 자질을 지녔으며 노쇠한 나이에 병까지 들었으니, 진실로 성상의 정치를 보좌할 가망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의정서리의 직임을 오랫동안 외람되이 차지하였으니, 직임을 그르치고야 말리라는 것은 스스로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해임된 뒤라고는 하지만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해 볼 때 두려운 마음이 늘 절실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제 삼가 의정부의 주본(奏本)을 보니, 삭수(朔數)를 채우지 못했는데 천전(遷轉)되었거나 청원(請願)이 없었는데 체차된 수령이 130여 군(郡)에 이를 정도로 많다는 내용이었는데, 심지어 어제의 주본은 시행하지 말도록 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상께서는 아뢴 대로 하라는 칙지를 내리시면서 의정부의 여러 신하에게 모두 견책(譴責)을 시행하도록 명하셨습니다. 근일 수령이 자주 체차되는데, 이는 정해진 법을 어기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백성의 일과 국가의 정책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의정부에서 이 논의를 제기한 것은 당연한 일이며, 또한 이를 흔쾌히 받아들이고 기꺼이 따르신 대성인의 성대한 덕은 그 어느 왕보다 탁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은 백발의 늙은 신하로서 오직 잠시나마 죽지 않고 더 살아서 덕화(德化)를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 오히려 어찌 감히 스스로 인혐하며 사직할 계책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구구한 신의 심정에 끝내 너무도 마음에 편안하지 못한 점이 있어 부득이 아뢰는 것입니다. 신이 의정부에 들어와 수령에 대하여 논의를 거친 것이 15개 군인데, 신의 아들이 전주군수(全州郡守)에 이임(移任)되었습니다. 신이 논의하는 자리에서 불가하다는 의견을 고집했건만, 여러 신료들은 모두 가하다고 하였습니다. 의정부의 회규(會規)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가부를 결정하다 보니, 신 한 사람의 개인적인 의견으로 중론(衆論)을 물리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조정에서 의논하여 논박하고 바로잡은 뒤인 지금, 신이 제대로 살피지 못한 책임에서 더욱 피할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신 자신은 직무를 유기하는 죄를 범하였고 또 불초한 자식으로 하여금 부당하게 승진하였다는 비방을 받게 하였습니다. 한꺼번에 두 가지 잘못을 저질러 일을 그르치고 말았으니, 신은 비록 수치를 모른다 하더라도 남들은 이에 대해 뭐라 하겠습니까. 공적으로 보나, 사적으로 보나 결코 직임을 그대로 차지하고 있기가 어렵기에 감히 간절한 심정을 호소하여 존엄하신 성상께 아뢰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굽어살피시어 신이 맡고 있는 찬정의 직임을 속히 체차하시고 이어 아직 다 처벌하지 않은 신의 죄를 처벌하심으로써 자리나 차지하고 있는 신료들을 경계시키소서. ……”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경은 굳이 이렇게 말할 필요가 없는데, 또한 어찌하여 사직하겠다는 말까지 하는 것인가. 경은 잘 헤아려서 더 이상 번거롭게 거론하지 말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106책(탈초본 139책) 고종 36년 2월 6일[양력 3월 17일] 갑신 4/6 기사 1899년 光武 3년 光緖(淸/德宗) 25년

【파면(의정부 찬정 면직)】 의정부 참정 심상훈(沈相薰), 의정부 찬정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의정부 찬정 조병직(趙秉稷), 의정부 찬정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 의정부 참찬 이용직(李容稙), 내부 협판 민병한(閔丙漢)의 본관을 면직하였다. -『승정원일기』 3106책(탈초본 139책) 고종 36년 2월 10일[양력 3월 21일] 무자 3/6 기사 1899년 光武 3년 光緖(淸/德宗) 25년

[사면(조병직, 민영기, 박제순, 이용직에 대해서 특별히 징계 처벌을 면제해주다)】 조령을 내리기를, “정2품 조병직(趙秉稷)․민영기(閔泳綺), 종2품 박제순(朴齊純)․이용직(李容稙)에 대해 모두 특별히 징계를 사면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106책(탈초본 139책) 고종 36년 2월 19일[양력 3월 30일] 정유 2/3 기사 1899년 光武 3년 光緖(淸/德宗) 25년

파면되었다가 사면된 조병직은 다시 의정부 찬정에 복직하고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에 임명되었는데, 이때에도 공(功)이 없음을 이유로 사직을 요청하고 이후에도 늙음과 병을 이유로 사직을 요청하였으나 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탁지부대신을 맡은 조병직은 이후에도 병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을 요청하였으나 그때마다 받아들이지 않고 표훈원(表勳院: 훈장 수여를 위해 설립된 기관) 의정관(議定官)까지 겸임하였다. 그리고 정조대왕 옥책문(玉冊文) 서사관(書寫官)에 임명되기도 하면서 여러 차례 상을 받기도 하였다. 나아가 임시서리내부대신사무까지 맡게 되었다. 이때도 의정부 찬정 탁지부대신 내부서리대신 조병직은 신병과 직무 수행의 어려움 등으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말 1필을 상으로 받는 일까지 있었다.

■1900 궁내부 특진관 / 의정부 참정 / 표훈원 의정관■ 1900년(고종 37, 광무 4) 2월, 조병직은 또다시 왕으로부터 밀 1필을 상을 받았으며, 3월에는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되었다. 특진관으로 임명된 지 한 달쯤 지난 4월 초에 조병직이 병을 이유로 모든 관직에서 사직할 것을 청하자, 왕은 그리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한 달도 안 된 4월 말에 조병직은 다시 특진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때도 병을 이유로 5월 초에 사직을 청하자, 왕은 그리하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석 달이 지난 8월에 의정부 참정(參政)으로 임명되었다. 역시 이때도 사직을 요청하는 상소를 연이어 올렸으나 그대로 임명되었다.

참정은 1896년부터 1907년까지의 의정부 관직으로, 의정대신(議政大臣) 다음에 해당하는 서열로써 오늘날의 부총리에 해당한다. 1896년 신설 당시 명칭은 참정이었고, 1905년 참정대신으로 바뀌었다. 참정·참정대신은 의정·의정대신이 병이 있거나 사고가 있을 때 그를 대신하였다. 참정이 병이나 사고를 당하였을 때는 찬정 중에서 임시로 일을 맡게 하였으나 1905년 2월 이후에는 각부 대신 중에서 임명하였다.

【말 1필을 상으로 받음】 종묘 대제를 섭행할 때의 초헌관 이하의 별단과 관련하여 조령을 내리기를, “초헌관인 의정부 의정 윤용선(尹容善)에게 구마(廏馬: 마구간에 있는 말) 1필(匹)을 면급(面給: 서로 보는 앞에서 줌)하라. 아헌관인 궁내부 특진관 민영규(閔泳奎), 종헌관인 의정부 찬정 민종묵(閔種默), 진폐찬작관(進幣瓚爵官)인 내부대신 이건하(李乾夏)에게 각각 숙마(熟馬: 길이 잘 든 말) 1필을 사급(賜給)하라. … 천조관(薦俎官)인 탁지부대신 조병직(趙秉稷)에게 숙마 1필을 사급하라. -『승정원일기』 3117책(탈초본 140책) 고종 37년 1월 20일[양력 2월 19일] 계해 36/45 기사 1900년 光武 4년 光緖(淸/德宗) 26년

【궁내부 특진관 임명】 조령을 내리기를, “종1품 조병직(趙秉稷)을 궁내부 특진관으로 삼으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118책(탈초본 140책) 고종 37년 2월 7일[양력 3월 7일] 기묘 3/6 기사 1900년 光武 4년 光緖(淸/德宗) 26년

【신병이 있으므로 특진관과 의정의 직임을 모두 체차해 주기를 청하는 궁내부 특진관 조병직의 상소】 궁내부 특진관 조병직(趙秉稷)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이 탁지부의 직임을 염치를 무릅쓰고 차지하고서 직무를 방치하는 것이 몹시 두려워 여러 번 성심으로 면직을 청하였는데 시원스레 윤허를 받았으니, 성상의 은혜에 감격하며 이 은혜는 분골쇄신하여도 보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어 삼가 생각건대, 신이 전후로 사직을 아뢴 것은 신의 재주가 미치지 못해서일 뿐만 아니라 참으로 병세로 보아 억지로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의 짐을 비록 이미 어깨에서 풀어 놓았지만, 두 개의 짐이 아직도 이렇게 몸에 매여 있으니, 설령 신에게 제대로 조복을 갖추고 온종일 분주히 일하도록 요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볼 때 모두 그대로 맡고 있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신의 나이가 이미 옛사람들의 치사(致仕)할 시기에 임박하여 수명이 다 되었는데도 무턱대고 나아가는 것을 그치지 않는다면, 설령 스스로는 부끄러워하지 않더라도 남들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신의 말은 충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지 조금이라도 형식적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한결같이 돌보아 주는 은택을 특별히 내려주시어 신의 특진관(特進官)과 의정(議定)의 직임을 모두 체차하심으로써 편안한 마음으로 조리할 수 있게 해주소서. ……” 하였는데, 비지에,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청한 바는 그대로 시행하겠다.” 하였다. -『승정원일기』 3119책(탈초본 140책) 고종 37년 3월 5일[양력 4월 4일] 정미 7/7 기사 1900년 光武 4년 光緖(淸/德宗) 26년

【궁내부 특진관 재임명】 조령을 내리기를, “종1품 조병직(趙秉稷)을 궁내부 특진관으로 삼으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119책(탈초본 140책) 고종 37년 3월 23일[양력 4월 22일] 을축 2/13 기사 1900년 光武 4년 光緖(淸/德宗) 26년

【늙고 신병이 있으므로 체차해 주기를 청하는 궁내부 특진관 조병직의 상소】 궁내부 특진관 조병직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은 늙고 병든 몸으로 꼭두각시처럼 가만히 자리나 지키는 사람일 뿐이니, 온몸을 바쳐 은혜에 보답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단순한 육체노동조차도 감당하지 못하는 처지입니다. 신이 지금까지 사직을 청한 것은 모두 진실에서 우러나온 말이며 털끝만큼도 꾸민 것이 아닙니다. 이에 폐하께서 모든 것을 살피시고 특별히 신의 소청을 윤허하셨으니, 신은 폐하의 은혜에 감격하여 마치 새로 벼슬을 받은 것처럼 기뻤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신에게 특진관의 직임을 제수하셨습니다. 이 직임이 문서가 많거나 사무가 번다하지 않은 만큼 감히 병을 핑계할 수 없었기에 예상치 못한 벼슬에 태연히 나아가 반열에 달려 나간 것이 또한 한두 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루라도 빨리 직명(職名)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마치 재갈 물린 말처럼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니, 끝내 마음 편히 요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령 신이 이 직임을 맡아 치화(治化)에 도움이 된다 하더라도 병으로 물러나고자 하는 것은 지난번이나 이번이나 다름이 없을 것인데, 신처럼 하는 일 없이 허명만 지니고 있음으로써 위로는 참된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폐하께 누를 끼치고 아래로는 무턱대고 나아간다는 비난을 부르는 처지에서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굽어살피시어 특별히 신의 직임을 체차하심으로써 개인적인 바람을 이룰 수 있도록 해주소서. ……”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청한 바는 그대로 시행하겠다.” 하였다. -『승정원일기』 3120책(탈초본 140책) 고종 37년 4월 5일[양력 5월 3일] 병자 8/9 기사 1900년 光武 4년 光緖(淸/德宗) 26년

【의정부 참정 임명】 조령을 내리기를, “종1품 조병직(趙秉稷)을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으로, 육군부장(陸軍副將) 이윤용(李允用)을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으로 삼으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123책(탈초본 140책) 고종 37년 7월 10일[양력 8월 4일] 기유 6/15 기사 1900년 光武 4년 光緖(淸/德宗) 26년

【신병이 있다는 이유 등으로 체차해 주기를 청하는 의정부 참정 조병직의 상소】 의정부 참정 조병직(趙秉稷)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이 관직에서 해임된 지 이제 여러 달이 되었습니다. 재주가 용렬한데도 나아갔다가 일만 그르쳤으니, 스스로 깊은 숲 속 초목이 무성한 곳으로 물러나 분수에 따라 먹고 마시며 성상의 은택을 누리고 살면서 일체의 명예를 모두 부질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근래 참정에 새로 제수하는 명이 위에서 내려왔습니다. 밝으신 성상께서 신에게서 무엇을 취하고자 이런 명을 내리신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출사한 지 40년에 지위가 높은 데에까지 이르렀으나 이는 본래 조금도 좋아하던 것들이 아닙니다. 작록(爵祿)이 내려옴에 사양할 만한 이유가 없다면 어찌 감히 격식만 갖추어 사양함으로써 스스로 명을 어기는 죄를 초래하겠습니까. 하지만 신의 지금 나이는 고인이 치사(致仕)하던 기한까지 두 해가 모자랄 뿐입니다. 비록 근력이 사라지고 정신이 없어진 데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구부정한 모습으로 궁궐 안의 조관(朝官)들 반열에서 홀을 차고 띠를 끌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인생이 다하였다는 탄식만 하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열병이 낫지 않고 고질이 되어 보고 숨 쉬는 것만을 겨우 유지하고 있으니, 이승에서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형편이라 번거롭고 복잡한 정무를 처리하는 일을 전혀 감당할 수 없으니, 이것이 신이 나아갈 수 없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신은 부여받은 운명이 기구하여 일찍 부모를 여의고 갖은 고생을 다하여 형편이 처절하니 매번 남들이 부모를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올해 5월은 바로 신에게 원이 서린 해이며 원이 서린 달입니다. 옛일을 떠올리자니 슬프고 한스러워 살고 싶지 않습니다. 소식(素食)을 먹고 소의(素衣)를 입으며 인사(人事)를 사절한 채 매우 깊은 한을 조금이나마 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만약 수레를 타고 사마(駟馬)를 채워 의기양양하게 달려가기를 보통 사람처럼 하는 것을 신의 정리(情理)에 있어 어찌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나아갈 수 없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신이 탁지부에 근무하면서 일 처리하기를 잘하지 못하여 허물이 백출(百出: 여러 가지로 많이 나옴)하였습니다. 더구나 신과 가까운 사람에게 자문하지 않으시고 성상께서 선발하시어 마침내 이미 시험하여 성과가 없던 사람을 임용하여 자리를 채우도록 하시고야 말았으니, 이는 거의 이른바 요행을 바람이 매우 심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나아갈 수 없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지금은 시국(時局)이 어지럽고 조정의 모양새가 어수선하니 국세(國勢)를 유지하고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참으로 의정부에서 그에 맞는 사람을 얻어야 합니다. 진실로 명망과 실제가 모두 융성하고 공적이 평소에 드러나 있어 하루아침에 명을 내리시더라도 중외(中外)가 만족하여 다른 말을 하지 않을 자가 아니면 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헐후(歇后)한 재상’이라거나 ‘저 자가 참정’이라는 기롱을 당세에 받게 될 뿐 아니라 또한 장차 후세에도 비웃음을 받게 될 것이니, 이것이 신이 나아갈 수 없는 네 번째 이유입니다. 신이 하늘 같은 은혜를 입고 보답할 길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아가고 물러나기를 때에 맞게 하고 사양하고 받기를 의리에 맞게 하는 것 또한 성은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방도라 하겠습니다. 석씨(釋氏)의 말에 ‘이 몸과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받든다.’ 하였는데, 주 부자(朱夫子)가 이를 인용하여 비유하였던 적이 있으니, 이는 은혜에 보답하지 않음으로 보답을 삼음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아, 신의 구구한 생각도 또한 이곳에서 나온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의 지극한 인자함과 지극한 밝음으로 신이 말한 바가 진실로 모두 진심에서 나온 것이고 거짓으로 꾸민 것이 아님을 거의 아실 수 있을 것이니 속히 체척하여 주소서. ……”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상소를 보고 경의 간절한 마음을 잘 알았다. 경이 충분히 쉰 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지금은 한창 어려움이 가득하고 조정의 모양새가 어수선하니 국세를 유지하고 화평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처럼 노성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 지금은 개인적인 사정을 말하고 병을 말할 때가 아니니, 사직하지 말고 즉시 일어나 명에 응하라.’는 내용으로 부랑을 보내어 선유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123책(탈초본 140책) 고종 37년 7월 15일[양력 8월 9일] 갑인 11/15 기사 1900년 光武 4년 光緖(淸/德宗) 26년

【신병이 있다는 이유 등으로 체차해 주기를 청하는 의정부 참정 조병직의 상소】 의정부 참정 조병직(趙秉稷)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은 새로 내리신 명을 받들기가 몹시 어려워 신의 고충을 다 토로하고 명을 거두어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내려온 비지(批旨)를 받들어 보니 나라를 유지하라고 권하시고 사직하지 말라고 책망하시기를 자애로운 아버지가 어린 자식을 타이르듯이 하셨습니다. 신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밝으신 성상께 이런 은혜를 받는 것입니까.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아홉 번 조아리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만 어떻게 응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신이 전의 상소에서 나아가기 어려운 이유에 대해 말씀드린 것이 네 가지였습니다. 위의 두 가지는 비록 신의 개인적인 일에 해당하는 것이었으나, 질병이 이미 위독한 지경에 이르러 억지로 할 수 없고, 또 정리(情理)에 매우 비통한 것은 진실로 누구에게나 있는 바가 아니고 거의 신 혼자에게만 있는 개인적인 것입니다. 효도로 다스리는 우리 황상께서 어찌 필부의 지키는 바를 헤아리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래의 두 가지는 더욱 치체(治體)에 관련된 것이니, 함부로 나아가 명에 응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만약 은혜에 감격하고 의리가 두려워 억지로 힘써 조정에 나아간다면 어려운 시사(時事)가 날로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어수선한 조정의 모양새가 날로 허물어질 것이니, 신이 비록 부월(斧鉞)의 형벌을 받더라도 오히려 남은 죄가 있게 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신이 허락받지 않고서는 그만두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옛날 송(宋)나라의 신하 구양수(歐陽脩)가 표문을 올려, ‘여러 번의 글을 통해 말을 이미 다 하여 거의 할 말이 없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였는데, 그 말이 간절하여 대번에 상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신이 매번 글을 읽다가 이곳에 이르면 임금과 신하가 서로 허여하는 것에 대하여 격앙되어 크게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스스로 고인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만 우리 폐하의 아랫사람을 헤아리는 인자함은 송나라 때에 비하여 훨씬 뛰어나시니 신이 구구한 의리를 다 말씀드리지 않더라도 남김없이 통촉하실 것입니다. 속히 체차하심으로써 원하는 바를 이루어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상소를 보고 경의 간절한 마음을 잘 알았다. 전의 비지로 이미 짐이 특별히 제수한 뜻을 밝게 타일렀으니, 경은 틀림없이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다시 거듭하여 사정(私情)을 말하고자 이처럼 거듭 글을 올리지 말도록 하라.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고 즉시 칙령을 받으라.’는 내용으로 부랑을 보내어 선유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123책(탈초본 140책) 고종 37년 7월 17일[양력 8월 11일] 병진 10/11 기사 1900년 光武 4년 光緖(淸/德宗) 26년

 

조병직은 참정에 임명된 뒤 1900년 9월에는 표훈원 의정관을 겸하게 되자, 또 사직을 요청하고 이후에도 신병 등으로 상소를 올려 사직을 청하였다. 마침내 왕은 표훈원 의정관 자리만 남겨두고 의정부 참정에서 물러나도록 허락하였다. 드디어 조병직은 10월(음력 윤 8월)에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표훈원 의정관 겸임】 조령을 내리기를, “홍문관 학사 서정순(徐正淳), 중추원 의장 신기선(申箕善), 전환국 관리 심상훈(沈相薰), 의정부 참정 조병직(趙秉稷), 의정부 찬정 이윤용(李允用), 농상공부대신 민병석(閔丙奭),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에게 표훈원 의정관을 겸임하게 하라.” 하였다. 표훈원 총재 민영환(閔泳煥)이 명을 받았다. -『승정원일기』 3124책(탈초본 140책) 고종 37년 8월 9일[양력 9월 2일] 무인 9/20 기사 1900년 光武 4년 光緖(淸/德宗) 26년

【신병이 있으므로 체차해 주기를 청하는 의정부 참정 조병직의 상소】 의정부 참정 조병직(趙秉稷)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이 극도로 쇠하고 병들어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은 온 조정 신료들이 다 아는 사실일 뿐만 아니라 성상께서도 아시는 바입니다. 그런데도 누차에 걸친 사직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마지못해 나가 응한 것이 이제 한 달 남짓 되었습니다. 그동안 신은 병세가 점차 심해져 자리보전하게 된 데다 설사가 자주 나고 열이 오르내리는 바람에, 때로는 정신이 아뜩하여 인사불성으로 쓰러져서는 아침저녁으로 오직 저승사자의 부름만 기다리곤 하였습니다. 의정부 회의를 열라는 명이 내려진 지금, 의정(議政)은 병이 있다고 고하였기 때문에 정부 관료들이 신에게 회의에 나오라고 재촉하고 있습니다만, 신의 지금과 같은 형편으로는 꿈쩍할 가망도 없습니다. 신은 두렵고 답답하여 병이 더해질 것만 같기에, 감히 짧은 글로 실상을 호소하여 황상께서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신의 병세를 특별히 살피시어 신의 현재 직임을 체차해 주소서. 그리하여 회의 자리를 완전하게 해주시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신은 지극히 황공하고 간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상소를 보고 경의 간절한 마음을 잘 알았다. 일시적인 우연한 병은 저절로 쾌차하게 마련이니, 사직하지 말고 몸조리를 잘하여 공무를 보라.’는 내용으로 부랑을 보내어 선유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125책(탈초본 140책) 고종 37년 윤8월 4일[양력 9월 27일] 계묘 8/9 기사 1900년 光武 4년 光緖(淸/德宗) 26년

【신병이 있으므로 본직을 체차해 주기를 청하는 의정부 참정 조병직의 상소】 의정부 참정 조병직(趙秉稷)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이 지난번에 외람되이 병세를 호소하자 성상께서는 밝게 살펴주시어 병을 조리하도록 특별히 허락하셨습니다. 신은 산처럼 크고 바다처럼 넓은 성상의 은덕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일 수 있으면 고꾸라지건 말건 힘을 다해 나아가서 하찮은 보답이나마 바칠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사이에 병세가 심해진 나머지 기진맥진한 상태로 병석에 누워 소렴(小殮)에 쓸 식건(拭巾)을 마련해 두고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한두 가지 증상을 들자면, 설사가 한이 없고 적취(積聚)가 맺혀 가로질러 막는 바람에 음식을 전혀 먹지 못하고 어지럼증과 구역질이 이는데, 그러다 보니 정신력이 떨어지고 진기(眞氣)가 소진되고 말았습니다. 보(補)하고 사(瀉)하는 것과 기온 조절이 모두 신의 병에는 효험을 보지 못하여 세상의 뛰어난 명의들조차 모두 신의 집 문을 보면 뒷걸음치는 형편이니, 살아날 가망이 전혀 없음을 스스로 잘 압니다. 그러나 신은 아직도 직명을 지니고 있는 몸이니, 마지막 한 가닥 숨이 끊기기 전이라면 어찌 직무를 방치한다는 질책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두렵고 걱정스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에 다시 성상을 번거롭게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천지 부모이신 성상께서는 신의 처지를 가련히 여기시어 신이 맡고 있는 본직을 속히 체차해 주소서. 신은 지극히 황공하고 간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상소를 보고 경의 간절한 마음을 잘 알았다. 지난번 비답(批答)에서 짐의 뜻을 이미 하유하였는데 어찌하여 사직소를 거듭 올리는가. 그러나 병세가 그러하다니, 참정의 직임은 청한 대로 하도록 특별히 윤허한다. 경은 그리 알라.’는 내용으로 부랑(府郞)을 보내어 선유(宣諭)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125책(탈초본 140책) 고종 37년 윤8월 14일[양력 10월 7일] 계축 6/6 기사 1900년 光武 4년 光緖(淸/德宗) 26년

■1901 조병직 사망■ 조병직은 관직에서 물러난 지 3개월 뒤인 1901년(고종 38, 광무 5) 1월 17일(음력 1900년 11월 27일) 68세(옛 나이 69세․70세) 나이에 사망하였다. 양주조씨 족보에는 “壬寅(一九○二) 十一月十八日卒 壽七十”이라고 기록하여 임인년인 1902년 11월 18일 70세 나이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조병직이 사망하자 고종은 “이 중신(重臣)이 갑오년에 나랏일을 위하여 수고한 것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이제는 영영 떠나갔으니 가슴 아픈 심정을 어떻게 다 말하겠는가? 죽은 의정관 조병직의 초상과 장례 비용을 후하게 실어 보내라.”라는 조령을 내렸다.

【조병직이 졸하다】 표훈원 의정관 조병직(趙秉稷)이 졸(卒)하다. 조령을 내리기를, “이 중신(重臣)이 갑오년에 나랏일을 위하여 수고한 것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이제는 영영 떠나갔으니 가슴 아픈 심정을 어떻게 다 말하겠는가? 죽은 의정관 조병직의 초상과 장례 비용을 후하게 실어 보내라.” 하였다(表勳院議定官趙秉稷卒. 詔曰 “此重臣甲午爲國事勤勞, 何可忘諸? 今焉長逝, 傷衋何言? 卒議定官趙秉稷喪, 葬需從厚輸送). -『고종실록』 41권, 고종 38년 1월 17일 陽曆 2/2 기사 / 1901년 대한 광무(光武) 5년 45책 41권 2장 B면【국편영인본】3책 196면

 

■1909 증시(贈諡)■ 조병직이 사망한 지 8년 지난 1909년(순종 3) 10월 5일 증시(贈諡)가 이루어져 ‘충간(忠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는데, “국가만 생각하고 가정을 잊는 것을 충(忠)이라 하고, 바르고 곧아서 사심(邪心)이 없는 것을 간(簡)이라 한다.” 하였다.

【이승응, 홍순목, 선우협, 조병직, 신기선에게 시호를 내리다】 태황제가 이승응의 상사(喪事)에 시종을 보내어 치제하되 제문은 직접 지을 것이며 물품을 보내라고 하였고, 이승응 등에게 증시(贈諡)하였다. 완평군(完平郡) 이승응(李昇應) 저하(邸下)의 훙서(薨逝)에 대하여 태황제 폐하(太皇帝陛下)께서 승녕부 시종(承寧府侍從)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되 제문을 친히 지어서 내릴 것이며, 장례에 소용되는 물품을 후하게 실어 보내라는 교지를 받들었다. … 고(故) 완평군 이승응(李昇應)ㆍ고 영의정 홍순목(洪淳穆)ㆍ증(贈) 이조판서 선우협(鮮于浹)ㆍ고 참정(參政) 조병직(趙秉稷)ㆍ고 제실회계감사원경(帝室會計監査院卿) 신기선(申箕善)ㆍ고 종1품 이도재(李道宰)에게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시하였다. 고 완평군 이승응은 시호(諡號)가 효헌(孝憲)이다. 인자한 은혜로 어버이를 사랑함을 효(孝)라 하고, 착한 일을 행하여 기록할 만한 것을 헌(憲)이라 한다. … 고 참정 조병직은 시호가 충간(忠簡)이다. 국가만 생각하고 가정을 잊는 것을 충(忠)이라 하고, 바르고 곧아서 사심(邪心)이 없는 것을 간(簡)이라 한다. … 고 종1품 이도재는 시호가 문정(文貞)이다. 학문에 부지런하고 묻기를 좋아함을 문(文)이라 하고, 청렴결백하여 스스로 지조를 지킴을 정(貞)이라 한다.-『승정원일기』 3237책(탈초본 141책) 순종 3년 8월 22일(양력 10월 5일) 무술 2/4 기사 1909년 先統(淸/溥儀) 1년

 

2. 탐관으로 고발돼도 처벌받지 않고 최시형에게 사형을 판결한 조병직

조병직이 남긴 저서로는 시찰기류(視察記類)인 세관사무(稅關事務)가 있다. 세관사무는 조선시대 일본 세관(관세) 업무를 보고·시찰한 기록으로, 1881년(고종 18) 12인 조선 사신 시찰단의 일본 시찰 내용을 보고서 형태로 남긴 것이다. 조병직이 남긴 저서로 소개되기도 한다.

조병직은 29세(옛 나이 30세·31세)인 1862년(철종 13) 직부(直赴) 특혜로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어선 이후 1901년(고종 38) 68세(옛 나이 69세·70세) 나이로 사망하기까지 근 40년 관직 생활을 했다. 죽기 3개월 전까지 근무하고 사망할 당시에도 표훈원 의정관이라는 관직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평생을 공무원으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조병직은 왕과 가까운 부서(승정원, 사간원)와 학문과 관련된 부서(집현전과 홍문관, 동부학당, 성균관, 춘추관) 등에서 근무하면서 호조참의를 거쳐 예조참판과 호조참판, 형조참판, 병조참판, 외무협판(외무부 차관), 이조참판에 이르고 형조판서(법무부 장관), 외무독판(외교부 장관), 학부대신(교육부 장관), 법부대신(법무부 장관) 겸 고등재판소 재판장, 농상공부대신(농림축산식품부 장관 등), 외무대신(외교부 장관), 탁지부대신(재정경제부 장관), 의정부 참정(부총리), 임시서리의정사무(총리 서리) 등 고위 관직을 역임하였다. 또한 왕·왕실 관련 전의감·내의원·봉상시·경효전 제조를 비롯하여 시종원 경, 장례원 경, 표훈원 의정관 등의 일을 맡으면서 주로 중앙에서 근무하였다. 지방에 근무한 것은 약 7년 반 정도로, 1876년 함경도 북청부사(1876.04.06.~1878.09.29.), 1883년 북청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1884년 함경북도 안무사 겸 북병사 및 경성부사(1884.03.21.~1886.05.03.), 1889년 개성유수 및 관리사(1889.06.20.~1892.02.20.), 1894년 수원유수(1894.05.22.~06.24.)를 역임하였다.

그리고 조병직은 40년 관직 생활에서 3번 정도 징계받았다. 1883년 북청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파면되었다가 1주일 만에 복직하였으며, 1898년 법부대신 겸 고등재판소 재판장으로 있으면서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를 탄압한 일과 1899년 의정부 찬정으로 있으면서 아들을 전주군수로 발령한 일로 탄핵 상소가 끊이지 않아 결국 파면을 당하였다. 그러나 파면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면받고 다시 요직에 복직하였다.

그만큼 조병직은 조선 왕이자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신하였다. 1885년 함경북도 안무사 겸 북병사로 근무하면서 경계를 확정하여 백성을 안정시키는 등의 직임을 다하지 못하여 벌받을 것을 자청하였으나 왕은 처벌하지 않았으며, 1896년 농상공부대신으로 있을 때 탐관오리라며 역적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상소가 있기도 하였지만 왕은 처벌하지 않았다. 또 1898년 법부대신 겸 고등재판소 재판장으로 있을 때 동학 2대 교조 최시형을 공초하는 일과 관련하여 지탄받게 되자 조병직은 자신을 비방한다는 상소와 신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조병직은 병과 늙은 몸을 이유로 사직을 요청한 일만 해도 많았으나 그때마다 고종은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요직에 임명하거나 상을 내리기조차 하였다. 늙고 병들어 사직을 요청하는 상소를 한두 번이 아니고 많이 올렸음에도 왕은 왜 그리 늙고 병든 신하를 붙들고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다, 그만큼 능력이 있고 그만큼 믿을만한 신하여서 그랬을까? 다른 면에서 보면 그만큼 세계 흐름과 변화에 둔감해서 그런 것을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니 나라가 병들고 결국 일본 제국주의에 나라마저 빼앗기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조병직은 외교는 물론 국내 주요 사건에 관련된 임무를 맡으면서 1881년 동래부 암행어사 이름의 조사시찰단 일원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 보고하였으며, 1882년 반접관(伴接官)으로 영국 사신을 접대하였다. 1883년에는 인천감리가 되어 개항 이후 통상사무 임무를 맡기도 하고, 1887년 외무협판(외무부 차관), 1888년 전보국 총판으로서 서울과 지방 관청과의 소통, 통신망 관리, 외국과의 통신 업무 등 국가 통신망의 운영과 대외 교섭 업무를 담당하였다. 이후 외무서리독판과 외무독판으로서 1892년 방곡령 관련 일본의 손해배상청구 문제를 처리하기도 하였으며,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외무독판(외무부 장관)으로서 외국, 특히 일본과 중국(청)을 상대하는 막중한 업무를 맡아 여러 가지 민감한 일을 해결해 나갔다. 1896년 아관파천 당시에는 친러파로 활약하고, 농상공부대신으로 경인철도 건설을 추진하기도 했다.

특히 조병직은 같은 양주조씨 집안 출신(서로 14촌 간)에 나이도 비슷한 조병식(조병직보다 1살 위)과 중앙 관직에 함께 근무하며 서로 마주하기도 하는가 하면, 둘 다 의정부 찬정이나 외무대신과 법부대신 등을 번갈아 맡기도 하였다. 심지어 징계받은 후 함께 사면받는 일도 있었다.

【종1품 조병식, 정2품 조병직을 특별히 사면하라는 조령】 조령을 내리기를, “종1품 조병식, 정2품 조병직에 대해 특별히 징계를 사면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099책(탈초본 139책) 고종 35년 7월 1일[양력 8월 17일] 임자 4/12 기사 1898년 光武 2년 光緖(淸/德宗) 24년

【의정부 참정에 조병식, 의정부 찬정에 조병직을 임용】 의정부 의정(議政)에 조병세(趙秉世)를 임용하고, 의정부 참정에 조병식(趙秉式)을 임용하고, 농상공부 대신에 박제순(朴齊純)을 임용하고, 의정부 찬정에 조병직(趙秉稷), 남정철(南廷哲)을 임용하고, 외부 대신에 민종묵(閔種默)을 임용하고, 탁지부 대신에 민영기(閔泳綺)를 임용하였다. -『승정원일기』 3101책(탈초본 139책) 고종 35년 9월 22일[양력 11월 5일] 임신 9/17 기사 1898년 光武 2년 光緖(淸/德宗) 24년]

한편, 근 50년 관직 생활을 한 조병식은 과거에 합격하여 승정원, 성균관, 홍문관, 사헌부, 의정부 등의 하위 관직을 거쳐 의금부사·돈녕부사·중추부사, 이조·형조·예조·호조·형조참판, 예조·형조·이조판서, 법부·외부·탁지부대신, 의정부 찬정·참정, 서북철도국 총재, 중추원 의관·의장, 비서원 경, 장례원 경 등의 요직을 맡으며 주로 중앙에서 근무하였으며, 전라우도 암행어사(1862)를 비롯하여 평안북도 성천부사 겸 관서위유사(1865,03.15.~1867.01.25.), 강화유수(1874.07.29.~1876.03.15.), 충청도 관찰사①(1876.03.15.~1878.03.23.), 함경도 관찰사 겸 함흥부윤(1888.06.30.~1890.윤02.29.), 강원도 관찰사(1890.윤02.29.~06.12.), 경기도 관찰사(1891.03.13.~1891.09,19), 충청도 관찰사②(1891.10.22.~1893.03.19. 파면) 등을 맡으며 9년 반 정도 지방에서 근무하였다.

이런 조병식의 관직 생활은 조병직과 비슷한 점이 많을뿐더러 조병식과 조병직 모두 만민공동회를 탄압한 일로 징계받고 둘 다 동학농민혁명을 저지하고 탄압하는 관직에 있었다는 점에서 너무 닮았다. 다만 조병직보다 조병식이 여러 지방에서 조금 더 오래 근무하였으며, 조병직은 조병식이 일으킨 방곡령 사건과 같은 큰 사건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조병직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는 계기를 제공한 조병갑을 고등재판소 판사로 추천하여 자신은 재판장, 조병갑은 판사로서 둘이 합심하여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최시형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장본인으로서 큰 오점을 남겼다. 어쩌면 ‘동학농민혁명은 조병식과 조병갑으로부터 시작하여 조병갑과 조병직으로 마무리되었다’라고 할 정도로 이들 3명의 양주조씨 형제는 동학농민혁명과 악연이 많고 깊었다.

여하튼 조병식이 ‘방곡령’으로 그나마 알려진 인물이라면, 조병직은 ‘최시형에게 사형을 내린 재판장’으로 그나마 알려진 인물이다. 이에 비해 조병갑은 ‘동학농민혁명의 원인을 제공한 탐관오리’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하지만 주로 지방관(현감·군수)으로 근무한 조병갑보다 유수와 감사(관찰사)나 부사를 비롯하여 왕의 비서와 각종 장관 등을 역임하며 중앙과 지방을 넘나들던 조병식이 더한 탐관오리가 아닐까 싶다. 조병직 또한 중앙 요직인 비서실은 물론 외무부와 법무부를 맡으면서 나라를 좀먹게 한 장관이자 재판장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런 자들을 당시 나라의 우두머리인 왕은 처벌하기는커녕 죄를 지어도 용서하고 또 용서하기를 계속하고 오히려 대접까지 하였다. 한마디로 어이없는 세상이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더 이상 반복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더구나 오늘날 같은 민주사회에서는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부정부패와 사리사욕에 물든 자라면 그냥 가만히 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누구라도 가차 없이 처벌하여 나라 기강을 바로잡고 사회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루어 나가는 것인 만큼. 좋은 세상은 거저 오거나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닌 만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고 하면서 오히려 백성을 함부로 하고, 온갖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백성을 착취하던 자들이 있었듯이 오늘날 ‘국민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떠들면서 막상 자신의 이익을 꾀하는 자는 없는지, ‘백성은 하늘’이라고 내세우면서 뒤로는 자기 실속이나 챙기는 건 않은지 두 눈 크게 뜨고 살펴볼 일이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시민이라면.

 

3. 남아 있는 조병직 흔적

조병직의 흔적으로 확인되는 게 별로 없다. 선정비 하나 전해지지 않으며, 그의 묘가 확인될 정도이다. 선정비가 없는 것은, 그가 주로 중앙직에 근무하거나 지방직에 근무해도 현재 북한 지역인 함경도와 개성 지역에서 근무하였기 때문에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곳에서도 선정비가 전혀 전해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조병직의 묘는 양주조씨 족보에 따르면 “水原郡 半月面 本五里”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현재 이곳은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 지역인데, 구체적으로 묘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그의 후손을 찾으면 확인 할 수도 있겠지만 굳이 찾지 않았다.

한편, 2018년 ‘한국의 산지 승원’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경남 양산 통도사(通度寺) 매표소에서 1km 정도 되는 무풍한송로(舞風寒松路) 주변 및 청류동천(淸流洞天) 계곡에 이름이 새겨진 바위가 많이 있다. 이들 바위를 ‘이름바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총 126개 바위에 1,818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이 이름바위 가운데 121번째에 해당하는 바위에 1881년 조산시찰단으로 일본에 다녀온 조사(朝士) 12명 가운데 조병직과 이헌영(李永, 1837~1907) 이렇게 2명을 포함하여 총 44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하지만 굳이 찾아가 확인하지는 않았다. 확인하기 위해 딱히 찾아가도 그 많은 바위 가운데 조병직 이름이 새겨진 바위를 찾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바위에 조병직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것 이외에 별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대신 그동안 이름바위 조사를 꼼꼼히 해온 자료를 소개한다.

여하튼 조병갑이나 조병식에 비해 조병직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그만큼 조병직은 조병갑이나 조병식과 비교하여 많이 알려진 인물이 아닐뿐더러 조병갑·조병식에 비해 탐관으로 알려져 있지도 않다. 다만 최시형에게 사형을 선고한 재판장으로 역사에 오명을 남기고 있다.

<끝> *이것으로 조병갑, 조병식, 조병직에 대한 정리를 총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