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순의 영화이야기=『굿 윌 헌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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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순의 영화이야기=『굿 윌 헌팅』
  • 박명순 작가
  • 승인 2021.05.03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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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잘못이 아니다

 

 

▲ 사진=네이버 영화
▲ 사진=네이버 영화

굿 윌 헌팅의 주인공 윌은 21세 젊은이인데 독학으로 당대 최고 석학의 수준을 웃도는 실력자이다. MIT 간판교수도 풀지 못하는 수학문제를 순식간에 해결하는 천재임에도 닥치는 대로 살아가는 밑바닥 인생이다. 과시욕과 지적욕구가 강하면서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고 보호벽을 만드는 독고다이 스타일이다. 게다가 그는 어린 시절 양부로부터 버림받고 학대당했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불안 증세와 분노조절장애 등의 폭력성으로 전과자의 이력을 지니고 있다.

어쨌든 그의 천재성 능력이 입증되자, 각계에서 러브콜이 쇄도한다. 수학자, 군부대 암호해석, 증권가, 연구소 등등. 장래가 촉망되는 직장까지 보장받지만, 윌은 자신이 이용만 당하고 결국은 버려질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장밋빛 미래는 포기한 채, 막장 인생을 살아가는 데 익숙한 윌은 희망을 품는 것에 진지하지 못하다. 공사판에서 잡역부로 일당을 벌어서 생계를 유지하는 삶을 당연하게 여길 뿐 더 나은 인생을 기대하지 않는다. 버림받지 않는 최소한의 안정감을 보장받고 싶기 때문이다.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주변사람들은 짐작하나 본인은 변화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현재의 하루살이 인생에 만족한다고 여긴다.

 

그의 능력을 최초로 발견한 램보 교수는 윌의 정신과 치료를 대학 동기였던 숀에게 부탁한다. 램보 교수와 숀은 절친이면서도 삶의 방식이 정반대이다. 천재를 발굴하여 그의 능력을 가치 있게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을 지녔지만 둘의 접근방법은 전혀 다르다. 단순노동으로 인생을 낭비한다며 자신의 스타일로 해답을 제시하는 램보 교수와 달리, 숀은 무조건적으로 윌을 지지하며 스스로 길을 찾는 과정을 유도한다.

두 명의 멘토를 만난 윌은 행운아임에 분명하다.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단 한 명의 멘토를 만나기도 쉽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천재성 때문에 자신을 가치 있게 여기는 램보 교수와, 트라우마의 아픔에서 벗어나서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숀과의 진정성 있는 만남을 통해서 마침내 윌은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자신의 행운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비운의 천재와 헌신적인 멘토의 스토리가 중요한 건 아니다. 흥미부여를 위한 장치일 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도록 대단한 조력자가 등장하는 설정은 보통사람의 입장에서는 또 하나의 장벽일 뿐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천재를 위한 숨은 그림 찾기와 변별되는 진정성의 장면이 있다.

특출한 능력의 존재가 아니어도 우리 모두는 대체 불가능한 특별한 나가 아닌가. 하지만 나의 존재가 귀하다는 것을 모른 채, 무기력한 일상에 빠진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그들 역시 윌 헌팅처럼 참으로 아까운 사람들이다. 글씨를 잘 쓰고, 그림에도 조예가 깊고, 기억력이 탁월했던 시어머님은 본인보다 가족의 인생을 살았다. 며느리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충실했지만 결코 본인 의지라고 여길 수는 없다. 그 시대에는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건줄 알았기 때문인데, 누구에게 하소연할 것인가. 억울하게 살았다고 후회하는 그림자가 어머님의 표정을 안타깝게 한다.

요즘 나는 중학교 1학년 여학생을 만나면서 그 눈부신 아름다움에 날마다 감탄하는 중이다. 까르르 터지는 웃음소리, 시도 때도 없이 질러대는 괴성조차 질풍노도 젊음의 열기와 자유로운 발산의 향기가 느껴진다. 경험한 일을 발표하는 시간이었던가, 한 명의 소녀가 눈물을 쏟으면 교실전체가 울음바다가 되는 풍부한 감성의 소유자들이다. 하지만 벌써 절망과 불안과 자신의 미래를 무채색으로 바꿔치기한 나날을 보내는 학생들도 있으니 아픈 일이다. 민감한 외모 비하에 빠지고 성적으로 비관하기도 한다. 하여, 우리 모두는 금쪽같이 아까운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이다. 중심의 나를 팽개친 채, ‘에 영혼을 팔고 진보니 보수니’, 물결에 떠돌다 그 덫에 걸려드는 하루살이 인생이 되곤 한다.

 

이 영화에서 뇌리에 깊이 박힌 장면은 숀이 반복했던 문장이다.

너의 잘못이 아니다.”

이 말이 윌을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롭게 했던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머리가 좋은 윌은 이미 논리적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뼛속 깊이 각인된 두려움이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희망의 싹을 자라지 못하게 짓밟았을 뿐이다. 숀에 대한 신뢰감을 회복하면서 윌이 스스로 막혔던 숨통을 터트린 것이다. 누군가를 믿고 의지하면 저절로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 또한 힘이 실리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이 말은 마술같은 위력을 발휘한다.

너의 잘못이 아니다.”

나를 포함한 상처 입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 말이 줄 희망의 싹을 기대해본다. 위안부 피해 어르신의 트라우마, 82년생 김지영과 남편들. 그리고 화장과 헤어롤과 두발, 복장 규정으로 흔들리는 청소년들과, 취업기계가 되어버린 이 땅의 젊은이와 그들의 부모와 함께. 그리하여 재생산의 톱니바퀴를 멈추게 할 가능성을 안으로부터 키워내고 싶다. 모두들.

 

(1997 제작, 미국, 구스 반 산트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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