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순의 영화이야기=『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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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순의 영화이야기=『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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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7.19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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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하고, 똑똑하고, 사랑스러운 우리들

 

 

▲ 사진=네이버 영화
▲ 사진=네이버 영화

2018년 국내 유명 항공사 오너 일가의 갑질과 불법행위들이 고구마 뿌리처럼 헤쳐지면서 한반도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땅콩’, ‘물컵등의 비인격적 욕설에서 시작되더니 기호식품, 부당이득을 취하기 위한 밀수 등등 숱한 소문에 이어 외국인 가사도우미 불법고용까지 검찰수사에 오르내렸다. 한국어를 모르는 그들을 기계처럼 부려 먹으며 비용을 절감하려는 도덕성 문제가 아닌 불법행위로 전이되었다. 법률의 선을 넘어선 이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가치관은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일뿐이다.

사회의 주요인물로 추앙받았던 사람들까지 범죄자의 잣대를 들이댈 수밖에 없는 현실이 분노를 넘어 슬프다. 늦었지만 범죄자에게 당연한 대가(그동안 받은 혜택까지 포함한)를 치르도록 조치할 수 있어 다행스럽지만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외국인 가사도우미에게 피해가 가지는 않을까 걱정스럽다. 가사도우미.

가사도우미라는 단어에 나는 유독 민감하다.

2때 가출하여 가정부 생활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식모라는 말이 많이 쓰였고 가정부라는 말이 바야흐로 도입되고 있었던 1978년도였다. 고학을 위해서 집을 나왔으니 이른바 생계형 가출이었는데 마땅한 알바를 찾기 힘들어 입주 가정부 생활을 한 달 했다.

주인집은 평화로웠고 언변으로 베풀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가족처럼 지내자며 미소 지었지만 가족들이 먹고 남은 음식만 먹도록 했고 또한 실밥이 너덜너덜한 옷을 주며 선심을 베푸는 제스처를 취했다. 초등학생 머스마들은 다소 짓궂었지만 중3 여자애는 학용품을 주며 열심히 사시라고 온정을 베풀고 싶어 했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절대로 가족처럼 지내려는 건 아니고, 가출여고생을 싸게 부려먹으려는 얌체가족임을 서서히 깨달을 수 있었다.

가난한 부모님에게 학비 타는 일이 죽기보다 싫어서 감행한 가출이었지만 얼마나 배부른 행위였는지 처절하게 깨우칠 수 있었다. 세상은 가난한 부모님의 호주머니보다 훨씬 더 각박했던 것이다. 그때 주인집 아주머니가 자주 했던 가족처럼이라는 말에 의심을 품었던 나의 판단은 옳았다. 그러니까 가족처럼이란 말은 노동력을 쥐어짜는 구실이다. 하지만 정작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이 속없이 착했다면 어땠을까? 먹여주고, 입혀주고, 함께 목욕탕을 오가면서 어쩔 수 없이 정이 들게 된다면 말이다.

영화박열의 연인 하나코는 고학을 하면서 안 해본 일이 없다. 그녀의 자서전에는 정에 굶주리다가 가정부로 들어간 주인집에서 가족처럼 도와달라고 사정하는 말에 발목이 잡혀 고생했던 일화가 나온다. 취직 기회도 미룬 채, 주인집 일을 돌보았지만 1년 일한 보수를 한 달 치만 받아야했던 황당한 사연도 나온다. 오늘날에는 법적 장치가 조금은 강화되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외국인 노동자나 지적장애인을 대상으로 이런 일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 현실을 뿌리 뽑지는 못하고 있다.

▲ 사진=네이버 영화
▲ 사진=네이버 영화

제목의 의미는 하녀(가사도우미)’이다. ‘돌봄 노동자를 지칭하는 단어는 노예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과 끊임없는 전쟁을 치르는듯하다. 한국에서는 하녀’, ‘식모’, ‘가정부를 거쳐 가사도우미로 정착된 이 언어에는 최하층의 여성이 가사와 육아의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하층신분이라는 고정관념을 견고하게 키워왔다.

▲ 사진=네이버 영화
▲ 사진=네이버 영화

 

배경은 1960년대 미국이다. 흑인은 노예에서 해방되었지만 육체노동에 종사하며 천대받는 생활을 영위하는 상황이다. 미국 중상층에서는 흑인여성을 고용하여 아이들을 키우고, 음식을 만들고 집안일을 맡겼다. 그즈음 흑인을 노예로 부리던 시대는 지났지만 흑인여성 임금은 매우 저렴했다. 출퇴근 흑인여성에게 지불하는 급료도 매우 적었다. 그러하니 법률적으로는 자유인이었고 사생활이 보장되었지만 흑인여성은 경제력이 없어서 노예와 유사한 처지였다. 그래도 안정된 고용이 보장되는 일은 핼프이외는 없었으니 울며 겨자 먹기이다. 남자들 역시 일자리를 얻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으니 적은 급료라도 굶어죽지 않을 만큼 가계에 보탬이 되는 걸 수용해야 했다. 노예 제도 폐지 이후에도 흑인의 삶은 굶주림, 일상화된 차별대우 그리고 무분별한 폭행으로 근근이 연명했다.

여성들이 유독 많이 등장하는 이 영화,

표면적으로는 흑인 가정부와 백인 안주인의 소소한 갈등이 중심축을 세운다. 가정부와 안주인의 대결이란 승자가 정해진 경마처럼 맥 빠지는 게임이지만 인종차별과 결합하여 거대담론과 맞물리면 문제가 달라진다. 노예 시대처럼 착취당하고 비인격적 처우에 내몰리던 흑인 가정부가 부당함에 서서히 분노하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자각하는 것이다.

▲ 사진=네이버 영화
▲ 사진=네이버 영화

백인 소녀 스키터는 흑인 차별이 공공연히 행해지는 현실에 분노한다. 그는 갈 곳이 없는 줄 뻔히 알면서 늙은 가정부를 해고하는 엄마에게 정나미가 떨어진다. 자신의 유모였던 그녀에게 엄마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성장했음을 상기하며 괴로워한다. 스키터는 남부 중산층 가정의 보통 소녀들처럼 흑인 가정부의 손에서 자랐지만, 백인 아이들이 자라 20년 동안 키워준 이들의 상전이 되고 심지어 그들과 화장실도 같이 사용할 수 없게 되는 모순에 모른 체 넘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친구들인 중상층 백인 안주인들은 여전히 흑인가정부에게 인종차별을 자행한다. 비오는 날 흑인용 실외화장실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가정부를 해고하는 할리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집안일과 자녀양육은 흑인 가정부에게 맡기고 자선사업 등 외부행사에 바쁜 그녀들의 위선과 이중성의 면모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스키터는 여자의 삶은 결혼이 전부라는 고정관념과 맞서며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신문사의 기자로 취업한 주체적인 여성이다. 미혼인데 외모를 치장하지 않는다며 실패자 취급을 당한다. 스키터는 신문사의 기획 칼럼을 쓰는 대신 가정부 이야기를 취재하여 출판을 기획한다. 픽션보다 더 잔인하고 슬픈 실화를, 흑인 가정부들 스스로 차별당한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식으로 생생하게 증언하는 글을 시도한 것이다.

1960년대 초 미시시피주,

백인에 관한 유색인들의 동등권을 주장하는 글을 인쇄, 출판, 배포하는 자는 체포, 투옥된다.”소수민족 행동강령이 주어졌던 시기에 무모하게도, 흑인 가정부들의 목소리를 담은 책이 출간된다.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대학물을 먹은’ 23세의 여성이 13인의 흑인들을 인터뷰하여 쓴 책, 이들은 생사를 걸고 만남을 감행한다.

그거 아세요?”

며칠 전 제 친구는 시위에 나갔다는 이유만으로 집에 불이 났어요. 제가 인터뷰를 한다는 걸 알면 저는 죽을지도 몰라요.”

그저 사실을 이야기하면 돼요. 어떤 일을 겪었는지만요.”

그것만으로도 위험하다고요.”

▲ 사진=네이버 영화
▲ 사진=네이버 영화

스키터는 에이블린(비올라 데이비스)에게 묻는다. 14살부터 평생 17명의 백인 아이를 키웠지만 정작 자신의 아이는 방치해야 했던 기분이 어떤지, 다른 꿈을 꾼 적은 없는지.

아이의 유모역할을 하는 사람은 아이들과 정이 들고 깊은 유대감으로 맺어진다는 점이 특별하다. 에이블린은 속이 깊고, 지혜로운 여성이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을 떼어놓고 남의 아이를 돌봐야 하는 아픔 속에서도 성실하게 일해 왔다. 하녀로 만난 백인아이들을 보살필 때는 수녀처럼 아름답고, 자애로운 교사처럼 사려 깊다. (영화에서 이 여인의 관점과 영향력을 보다 확장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컸다.)

어린 아이들은 다르다. 어른들의 인종차별에 물들지 않았고, 우유를 먹이고, 자장가를 불러 재워주며 자신을 보살펴주는 그녀에게 정이 듬뿍 들었다. 그런데도 할리는 자신의 아이를 사랑으로 돌보는 에이블린에게 도둑 누명을 씌워 쫒아낸다.(자신의 자녀들이 입을 상처를 걱정할 만큼의 인간미도 부족한 여인이다.) 에이블린이 스키터가 쓴 책에 협조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복수를 감행하는 인물이다.

그 책으로는 널 감옥에 넣을 수 없지만 절도죄로 보낼 순 있지.”

에이블린은 도둑으로 몰며 협박하는 할리의 속셈을 알지만 현실적으로 힘이 없다. 결국 에이블린은 억울하게 쫓겨나고, 아이들과 눈물로 이별한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을 돌보면서 에이블린이 했던 말이 진하게 아프다.

넌 친절하고, 넌 똑똑하고, 넌 사랑스러운 존재야.”

그 말을 가장 듣고 싶던 건. 바로 자신이었음을 처음에는 몰랐다. 그리고 본인이 작가가 될 것임을 에이블린 스스로 깨닫는다.

▲ 사진=네이버 영화
▲ 사진=네이버 영화

나쁜 페미니스트의 저자 록산 게이는 이 영화에 신랄하게 비평을 던진다. 대부분 맞는 말이다. 1960년대 인종차별의 상황을 재현하지만 현재 시점에서 새로운 자각이나 문제의식을 키워준다고 보기는 어려우니 말이다. 화면을 사로잡는 화려한 색감과 여자들의 수다가 공허한 만큼 흑인차별에 대한 시선이 진부한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흑인여성이 사회적 지위가 낮은 돌봄 노동자로 등장하고, 백인여성 스키터에게 의존하는 설정 또한 매우 불편하다. 가사도우미가 다양한 시간제노동자의 위상을 서서히 회복하고 있음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나는 영화소공녀(2017, 전고운 감독)의 주인공 미소가 스스로 가사도우미를 선택하여 노동의 즐거움을 누리는 장면을 사랑한다. 물론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 문제를 풍자하는 방식 또한 창의성이 넘치기에 더욱 이 영화를 좋아한다.

 

2021년 평범한 흑인여성의 입장에서, 그리고 지구 이 쪽 저 쪽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가사도우미 노동자들에게 이 영화헬프는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까. 다양한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 영화이기에 더욱 관심이 가는 영화이다.

 

(2011 제작, 미국, 테이트 테일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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