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공산성 뒤집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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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공산성 뒤집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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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3.18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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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들어가야 하지?

이소현, 오태림 공주여자중학교 1학년

▲야경의 금서루 사진=뉴스채널1
▲야경의 금서루 사진=뉴스채널1

공산성에 들어가려면 어디로 들어가야 하지?”

오늘, 1212일 토요일 아침 10.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님을 만나 처음 들은 질문이다. 어디로 들어가지? 갑자기 머리가 깜깜해지면서 대답이 안 나왔다.

문으로 들어가야지.”

하면서 교수님이 웃으셨다. 답이 너무 쉬워서 우리도 웃음이 나왔다. 넌센스 퀴즈 같았다.

공산성의 문이 동서남북에 하나씩 네 개인데, 그중에 우리가 조금 있다 들어가려고 하는 저 문이 서쪽 문 금서루야.”

그런데 공산성에 친구들과 놀러 갈 때, 탐방 학습 갈 때 문을 통과하여 들어가고 나왔다는 사실을 생각지도 못하고 공산성에 다녔다는 것이 갑자기 깨달아졌다. 영화 같은 데서 문지기가 창을 들고 성문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긴 했지만, 한문으로 금서루錦西樓라고 새겨있는 현판이 붙은 저것이 그 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교수님 말씀대로 문이 없는 성은 있을 수 없는 것인데 말이다.

문은 굉장히 중요한 거야. 문을 왜 만들겠어? 아무나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하는 거겠지? 그리고 주인이 허락한 장소라는 뜻이 있는 거야. 아무 데로나 드나들지 말고 이곳으로만 다니시오. 하고 말이야. 정해진 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담을 넘거나 개구멍으로 남의 집에 들어가는 사람은 어딘가 떳떳하지 않은, 주인이 원치 않는 사람이겠지. 담과 문은 말하자면 들여보내도 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걸러내는 장치야. 그래서 옛날에는 성문을 지키는 사람, 수문장이라고 하지?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었어. 수문장이 성 앞에서 처음 만나는 성의 이미지 아니야? 힘도 세고 잘생기고 말도 잘하는 사람을 수문장 시켰어.”

▲수문병교대식 사진=뉴스채널1
▲수문병교대식 사진=뉴스채널1

우리가 생각했던 문지기는 덩치가 크고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문지기의 진짜 모습은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였다. 잘생긴 문지기 이야기를 듣고부터 공산성에 흥미가 생겼다. 경복궁의 수문장 교대식처럼 공산성도 토요일에 대학생 알바생들이 수문장 교대식을 재현 한다고 하는데 우린 한 번도 못 봤다. 한번 보고 싶다. 교수님께 들은 이야기의 성격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상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너무나 당연한 것을 교수님은 계속하여 물어보셨고 우리는 기초적인 생각을 하지 않고 일단 모든 것을 공부해서 쉬운 질문에 대답을 잘할 수 없었다. 듣고 보면, ‘, 그래서 그렇게 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공산성에 올라가 우리가 선 자리에서 동서남북을 알아본 것도 처음이었다.

▲공북루를 뒤로 하고 공산성 탐방을 하고 있다.사진=공주여자중학교
▲공북루를 뒤로 하고 공산성 탐방을 하고 있다.사진=공주여자중학교

천안 쪽으로 가는 길은 북쪽, 그곳에 북문인 공북루가 있었고, 우금티 고개를 지나, 부여 쪽으로 가는 길은 남쪽. 공원빌라 쪽으로 시내 사람들이 산책하러 올라오는 길에 만나는 진남루가 남쪽 문이었다. 모든 성의 정문은 남쪽에 있는 것이라서 진남루는 가장 중요한 정문이었고, 옛날에는 진남루에서 공북루로 가는 길이 가장 중요한 길이었다. 지금까지 우린 매표소가 있는 금서루가 정문인 줄 알았는데 신기했다.

봉황중학교 지나 청양쪽으로 가는 길은 서쪽, 관광객들이 주로 올라가는 서쪽 문이 금서루. 그리고 대전 가는 길이 동쪽, 동쪽엔 영동루(동문루)가 있다. 이름에 각각 동서남북의 방향이 들어가 있다는 기초적인 사실도 오늘에서야 처음 생각한 것이다.

물론 백제 시대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다 새로 만든 것이다. 여름에 문화해설사 선생님과 탐방 왔을 때 우리는 백제 시대의 기왓장 조각 찾기 미션을 했는데 백제의 기왓조각이 여기저기 많은 것이 무척 신기했다. 없어진 것들을 새로 만들어 놓고 찾아가고 이야기를 듣고 사진을 찍으면서 우리는 공산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럼 지금 우리가 사는 2000년대의 모습도 후세 사람들은 어떻게든 복원하려고 하고 우리처럼 이곳저곳을 탐방하면서 공부하려고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원래 있는 것을 부수고 자꾸 새로 만들지 말고 가능하면 잘 보수하면서 사용하는 게 공주의 100년 뒤, 500년 뒤를 위한 선물이 되는 게 아닐까?

공주가 백제의 도읍지가 된 이유는?

공주가 백제의 도읍지, 지금으로 말하면 수도인데 도읍지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요건이 네 가지가 있어. 첫 번째가 우리가 지금 가려고 하는 곳과 같은 성. 두 번째, 왕이 사는 궁궐이 있어야겠지? 그리고 삼국시대에 중요한 세 번째가 절이었어. 사찰이라고 하지. 수도의 백성들은 물론이고 나라 전제의 백성을 교화하고 단결시키기 위해서 큰 사찰을 짓는 게 보통이야. 우리 공주에도 그런 역할을 한 절이 있었는데 어디였을까?”

우린 갑사, 라고 찍었지만, 답은 대통사였다. 사대부고에서 하숙촌 가는 길에 공원처럼 생긴 그 자리가 대통사가 있던 자리라고 하셨다.

마지막 중요한 요건이 무덤이야. 왕이 죽으면 시시하게 묻는 게 아니겠지? 국가를 상징하는 인물이니까 장례식도 엄청나게 할 뿐 아니라 무덤도 엄청나게 크게 만들어. 거기에 이것저것 껴묻고 말이야. , 그럼 성, 궁궐, 사찰, 왕릉, 이 네 가지가 공주에 다 있나, 없나? 그렇지. 그중에 우리가 가는 데가 성이지. 이걸 모르고 공산성에 가면 큰 그림이 안 그려지겠지? 다리만 아프고.”

원래는 한양의 한성을 도읍지로 하던 백제가 공주로 내려와 웅진 도읍지의 시대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고구려의 침략 때문이었다. 그건 배워서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 공주였을까? 백제의 왕족과 귀족들이 쫓겨 내려오다 보니 금강을 건너게 되었다. 그때는 다리도 없었기 때문에 고구려가 쳐들어오더라도 쉽게 강을 건널 수 없고 이쪽에서 공격하기도 방어하기도 쉽다고 백제인들은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서 피난은 공주에서 멈추었고 금강 옆에 튼튼한 담장인 성을 쌓고 궁궐을 지어 새 도읍지로 삼았던 것이다. 살다 보니 공주가 21평 아파트처럼 좁아서 40평 같은 부여로 이사를 하긴 했지만 말이다. 학교 수업 시간에 배산임수에 대해 배운 적이 있는데 배산임수는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는 자세라는 뜻으로 주택이나 건물을 지을 때 이상적으로 여기는 배치라고 한다. 공산성이 그 적절한 예시인 것 같다. 공산성은 앞에는 강이 흐르고 있어 적이 배를 타고 들어오기가 어려웠고, 뒤에는 산이 있어 쉽게 올라오기 매우 힘든 지형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공주가 도읍지가 되는데 가장 중요한 조건은 금강이었던 것이다. 공산성 앞에 있는 까페에서 이렇게 1교시가 끝나고 우린 2교시 수업을 하러 길을 건너 금서루로 향했다.

비석, 도깨비나무, 그리고 금강

▲도깨비나무를 지나며 사진=공주여자중학교
▲도깨비나무를 지나며 사진=공주여자중학교

금서루로 올라가는 길엔 비석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쳐다보기도 하고 사진도 찍고 갔다. 비석은 당시 관찰사같이 높은 사람들의 것이었다. 공주는 감영이 있던 곳이고, 충청도에서는 제일 큰 도시였기 때문에 공주에서 벼슬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이 공주를 떠날 때 그동안 정치를 잘해줘서 고맙다고 공주 사람들이 돈을 걷어서 만들어준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정치를 잘한 시장이나 국회의원 같은 사람들에게 시민들이 존경의 의식을 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는데 남들이 전하는 것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바보야. 생각해 봐. 이 많은 비석을 공주 사람들이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는 고마운 마음으로 돈을 내서 세워준 걸까? 몇 개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다 그렇다고 볼 수는 없는 거야. 공산성에 참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정말 그랬을까? 하고 뒤집어서 생각해 보는 게 중요해. 너는 그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 생각은 안 그래. 이럴 수 있어야 해.”

하고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높은 사람들이 있고 그 밑에서 아부하는 사람들이 있고 속마음은 안 그렇지만, 힘 있는 사람들이 하라니까 할 수 없이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잖아? 비석에 대해서도 상상해볼 수 있지, 공덕비를 세울 테니 얼마씩 내라, 해서 그 돈으로 비석도 세우고 먼 길 발령 나서 가시는데 노잣돈으로 쓰시라고 얼마 넣어드리기도 하고, 그랬겠지.”

이해가 되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하는데 그때는 대부분이 못사는 시기였던 만큼 높은 사람에 대한 아부가 더 심했을 것이다. 요즘 문제가 되는 뇌물이 삼국시대에도 있었다니 기분이 찝찝했다. 비석도 세우고 봉투도 주지만 그 속에서 돈을 빼돌리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 같다.

마음에 없는 비석을 세운 사람들이 비석의 곁을 지날 때 아무도 안 보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 사람들이 없을 때 발로 차거나 돌을 던지기도 했을 것이다. 유명한 비석 치기는 거기에서 유래된 놀이였다. 자세히 보니 비석들은 오래되어서도 그렇겠지만 정말 금 가고 부서지고 찍히고 상처가 많았다.

비석은 감영 앞, 시장, 나루터처럼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에 세우는 것인데 여기 공산성에 이렇게 일렬로 촘촘하게 서 있는 것은 왜 그럴까? 비석의 주인들이 알면 기분 좋겠어? 생각해봐. 자기를 기념하려고 세우는 비석인데. 처음부터 여기 서 있던 것은 아니고 몇 년 전에 공주 곳곳에 있는 비석을 다 뽑아다 여기 공산성에 데코레이션을 한 거지. 사람들이 여기 많이 지나다니기도 하고 또 볼거리를 제공해줘야 하잖아.”

비석 치기가 그 비석 치기였다니, 사실 돌치기라고 해도 되는데 왜 비석치기라고 부르는지 궁금한 적도 있었는데 이런 재밌는 유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교시는 비석 치기 때문에 재미있게 시작되었다.

비석을 지나 금서루에 다다랐다. 금서루의 뻥 뚫린 큰 문은 원래 문이 아니고 일제 때 자동차가 지나다니도록 만든 문이었고 진짜 문은 오른쪽 좁은 돌계단을 올라가야 만나는 문이었다. 교수님의 듣고 보면 쉬운, 듣기 전엔 어려운 질문이 다시 시작되었다.

문은 반드시 무엇과 연결이 되어 있지? 그게 없으면 문도 쓸 데가 없는 거지.”

답은 길이었다. 문을 열고 나왔는데 길이 없다면 열고 나온 사람이 얼마나 황당할까?ㅎㅎㅎ

우린 이제 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왼쪽 성벽을 따라 공북루쪽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길에 몸을 강 쪽으로 굽혀 고개를 숙인 듯한 큰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 나무는 공산성을 다시 복원할 때 심어 뒀던 것인데 예전에는 도깨비 나무로 불렀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성안에서 술을 마시고 누군가와 싸우다 다음날 아침 깨어나 보니 나무와 싸우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온다고 한다. 아마 도깨비는 술을 마신 사람에게만 찾아가 겁을 준 것 같다. 나무를 붙잡고 씨름을 하는 술 취한 아저씨를 상상해보니 너무 웃겼다. 우린 드디어 공산성의 포토존에 올라섰다. 금강이 보이고 다리와 신관동과 동서남북으로 뚫린 네 방향의 길이 다 보이는 곳이었다.

금강을 보면 무슨 느낌이 들어?”

그건 가장 어려운 질문이었다. 사실 아무 느낌도 없기 때문이다. “이쁘다?”하고 약간 거짓말로 답을 만들어보았지만, 금강이 우리에게 별 느낌이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신 듯했다.

  • 아까도 말했지만, 공주는 금강 때문에 생긴 도시야. 배가 닿는 곳을 나루라고 하지? 그래서 우리 공주를 곰나루라고 하는 거잖아? 한자로는 곰웅, 나루 진, 웅진이라고 하고. 공주의 옛 이름이 웅진이었다면, 백제의 도읍이 되기 전에 공주는 나루터 도시였다는 걸 짐작할 수 있겠지. 사람들이 배를 타고 오가다 보면 나루터에 주막도 생기고 집도 생기고, 시장도 생기지. 옛날 사람들이 모여 살기 가장 좋았던 장소가 어디일까? 바로 강 옆이야. 바다보다 물고기 잡기가 훨씬 쉽지. 조개도 많고.”

그래서 석장리 금강 옆에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살던 마을이 있었던 것이구나. 옛날 사람들의 삶에서 강이 무척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배웠다. 금강은 지금의 모습과는 달랐다.우리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에는 물이 깨끗했기 때문에 여름이면 금강에서 수영을 하며 놀다 그 물을 마시기도 했다고 한다. 산업이 발달하고 공장이 생기면서 강물은 더러워지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금강이 오염된 것은 푸세식이었던 화장실이 수세식으로 바뀌면서부터라고 하셨다. 거름으로 사용되던 똥이 생활폐수가 되어 하천으로 강으로 흘러들어 지금은 수영은 생각지도 못하게 되었다. 4대강 댐이 생겨 물의 속도가 느려지면서 강은 더욱 사람들에게서 멀어졌다. 금강에서 놀았던 할아버지 세대는 그 시절이 그립고 아쉬울 것 같다.

길은 땅 위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금강 배다리 사진=공주대학교부설 공주학연구원
▲금강 배다리 사진=공주대학교부설 공주학연구원

문은 길과 연결되어 있다고 하셨는데 북쪽으로 뻥 뚫린 공북루 앞은 강이었다. 길이 끊어진 것이다. 그게 바로 우리가 가진 선입견이었다. 공북루는 물길로 이어지는 문이었다. 길이란 땅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물 위에도 하늘에도 있었다. 자동차가 없었던 때 물건을 실어나르기에 효율이 높은 것은 마차보다 배였다. 물길은 옛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길이었다. 오늘 우리가 금강에서 처음 본 것이 있었는데 그건 배다리흔적이었다. 강 가운데 돌무더기 같은 게 있고 말뚝도 박혀 있는 부분이 있었다. 사실 처음 눈에 들어 온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그 돌무더기가 배다리의 흔적이라는 건 정말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1932년 금강철교가 생기기 전 공주 사람들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녔는데 강을 건너는 사람들과 물건들이 많아져서 배로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나무다리를 놓았다. 그러나 홍수가 나서 나무다리가 떠내려가고 말았다. 그래서 배를 2030척 정도 엮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배다리를 만들었다. 여태껏 그저 강 수위가 줄며 드러난 강의 바닥인 줄 알았는데 배다리였다니 더욱 신기하게 느껴졌다.

공북루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서울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누각 위에서 술도 마시고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면서 이별 세리머니를 하기도 했다. 공북루 누각엔 여러분들의 시와 글이 현판으로 걸려있는데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읽을 수 없었다. 누각과 정자도 중요하지만, 시나 글도 중요한데 좋은 시와 글은 한두 편 한글로 예쁘게 새겨서 세워 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려하고 다채로운 누각 뒤로 보이는 금강의 푸른 물결은 매우 잘 어울렸다. 예전에도 그렇게 생각을 했던 것인지 공주 학교들의 많은 졸업사진이 두 어울림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공북루를 떠나 진남루로 이어지는 길을 걸어갔다. 그 길은 옛날에는 가장 중요한 길이었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강을 바라보며 성벽을 따라 걷기 때문에 이 길은 우리도 처음 걸어보는 길이었다. 길을 걸으며 성이 의미 없어지게 된 이야기를 들었다. 칼과 화살 정도 가지고 적과 싸울 때는 성이 매우 중요했지만, 대포나 미사일과 같은 신무기가 생기자 성안에 모여 사는 것이 안전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성들은 방어나 공격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이렇게 공원이나 사적지, 관광지로 탈바꿈했다. 2000년까지는 공산성 안에도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그곳은 성안마을이라 불렸는데 한때는 이곳 공산성이 공주 부자 김갑순씨의 소유였다고 한다. 국가에서 아주 싼값에 그에게 공산성 땅을 불하했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부자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공산성 안의 땅까지 소유했다는 것은 처음 안 사실이었다.

인절미와 도루묵에 대한 생각

▲임절미 이미지 사진= 네이버
▲임절미 이미지 사진= 네이버

진남루를 거쳐 성벽을 따라 공주 시내 전경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간 곳은 쌍수정이었다. 쌍수정에선 인조임금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인조임금은 이괄의 반란이 일어난 뒤 공산성으로 피신했다. 당시 먹을 것이 없고 배가 고플 때에 임씨가 떡을 만들어 대령했다. 인조임금은 그 떡의 맛에 반했고 임씨가 만든 떡이라 하여 임절미라는 이름도 지어주었다. 시간이 지나며 발음이 어려운 임절미는 인절미가 되었다. 교수님은 이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 그런가보다, 하지 말고 그 당시를 상상해보고 이야기의 뒷면을 생각해 보라고 하셨다. ‘뒤집어 생각하기를 해보니 좀 어이가 없었다. 난이 일어났다는 것을 보니 임금이 정치를 잘한 것은 아닐 테고 또 백성들은 먹을 것이 풍족한 것도 아닐 텐데 임금님이 먹을 것을 두고 맛있다, 맛없다, 한다는 게 좀 그렇지 않나? 인절미와 비슷한 내용으로는 도루묵이 있다.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의 그 도루묵이다. 도루묵 역시 인조임금이 배고플 때 한 백성이 목어를 대령했다. 배가 고팠던 인조는 목어를 맛있게 먹었고 목어의 이름을 은어로 바꾸라 명령하였다. 서울로 돌아간 인조임금은 은어의 맛이 그리워 다시 대령시켜 먹었지만, 그때의 맛이 아니었다. 임금은 실망하여 도로 목어라고 하라고 명령하였다는 일화이다.

▲쌍수정 사진=공주여자중학교
▲쌍수정 사진=공주여자중학교

쌍수정이란 이름은 두 그루의 나무가 있던 자리에 세운 정자란 뜻이다. 임금이 된 지 1년 만에 공산성으로 피난을 와야 했던 인조임금은 두 그루의 나무에 기대어 서서 마음을 달래곤 했는데 얼마 후 반란군을 진압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동안 자기를 위로해주었던 나무에 종3품의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3품부터 고급 벼슬이 시작되는 것인데 나라와 백성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기분에 따라 나무에게 벼슬을 내리거나 인절미, 도루묵 이야기 등을 볼 때 그렇게 훌륭한 왕은 아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공산성은 나에게 ( )이다

교수님 이야기를 8교시에 걸쳐 들었다. 새로운 것도 많고 신기한 것도 많았지만 부끄러움이 컸다. 14년을 공주에 살면서 내가 사는 곳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어떻게 한 바퀴를 돌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재밌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걱정이었던 검은 마음이 뿌듯한 흰 마음으로 변한 것을 느꼈다. 오늘은 새로운 것들을 많이 배운 날이다. 오늘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유난히 오늘 하루가 소중하게 느껴진다. 우리 글을 읽고 친구들이 새로 알게 되는 것이 한 가지라도 있다면 광장한 뿌듯할 것 같다. 아침 카페에서 만난 교수님은 공산성은 나에게 무엇인지 빈칸을 채워보라고 하셨다. 당황하는 우리에게 웃으시면서 공산성은 아직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지?”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공부를 하고 알게 된 뒤엔 공산성이 나에게 무엇이라는 말이 떠올랐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처음 우리에게 공산성은 물음표 아니면 말 줄임표였다. 사실 그렇게 흥미로운 장소는 아니었다. 공산성은 그냥 웅진백제 시대의 성, 관광지일 뿐이었다. 교수님의 8교시 강의를 듣고 난 뒤 이제 우리에게 공산성은 뿌듯한 느낌표이다. 그리고 공산성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뒤집어 보기, 상식적으로 상상해보기, 이야기의 뒷면을 헤아려보기였다고 생각한다.

▲쌍수정앞에서 동아리 놀이를 하고 있다. 사진=공주여중학교
▲쌍수정앞에서 동아리 놀이를 하고 있다. 사진=공주여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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