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의 화재안전 파수꾼 "공주소방조" 역사 속으로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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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화재안전 파수꾼 "공주소방조" 역사 속으로②
  • 고순영(공주대학교 공주학연구원 전문연구원)
  • 승인 2021.04.07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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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소방조의 화재 진압 활약
▲공주소방조의 조두 오오니시 코우키지(『조선신문』 1931.12.25. 기사). 사진=공주대학 공주학연구원
▲공주소방조의 조두 오오니시 코우키지(『조선신문』 1931.12.25. 기사). 사진=공주대학 공주학연구원

화재란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 언제 어느 곳에서 불이 날지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바로 화재이다. 또 화재 뿐 아니라 홍수와 같은 수재(水災) 등 여러 재해 현장에 소방조의 대원들은 주야한서를 불분하고 구제 현장에 전력해 왔다.

동아일보19291228일 기사에 보면 한 겨울에 호남자동차회사 운전사 목일성(穆一成)의 집에 화재가 났다.

그의 집은 공주면 금정 지금의 교동에 있었는데, 한겨울 밤 불이 나자 각처의 경종을 난타해 소방조가 출동해 전력으로 화재를 진압해 다행히 이웃한 건물로 번지지 않게 불을 껐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19398월에는 공주와 이웃한 논산 강경의 큰 화재진압에 원조한 사례도 있었다.

장작불에서 시작된 불꽃이 강한 바람에 의해 조선미곡창고, 강경주조장으로 불이 번지며 삽시간에 대형 화재로 커지자 논산소방조 뿐만 아니라 공주소방조에서도 지원을 나서 불을 진압했다고 한다.

그런데 때로는 소방수들이 공주에 없어 큰 불을 막을 수 없었던 때도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1931년 충남도청 이전의 문제로 공주가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 있을 때이다.

그해 223조선신문에는 공주시장에서 발생한 화재가 대서특필 됐다. 시장 내 지나인(支那人) 즉 중국인의 잡화상에서 시작한 불길로 금강관, 시장사무소, 중앙사진관, 목재점 등 중요 건물 약 7동이 연소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충남도청 이전 문제로 이미 113일 공주소방조 조두 오오니시 코우키지(大西幸吉)를 비롯한 80여 명이 사표를 내 활동하지 않고 있었다.

오오니시는 공주에서 화약 및 자전거를 판매하던 농천상점(瀧川商店) 공주지점장이기도 한데(e-금강뉴스아카이브로 보는 공주이야기 공산성에서 전국자전거대회를 했다고?’ 참조), 19156월부터 공주소방조에 들어와 1925년부터 7년간 공주소방조의 조두를 맡는 등 총 17년간 공주소방조에서 활동했던 인물이다.

당시 공주 경찰은 공주소방조가 해산되었기 때문에 당황하는 중에 가솔린펌프가 있어도 사용할 줄 몰라 손으로 직접 기계를 돌려 양수하는 등, 어설픈 진화로 불길을 잡지 못해 더욱 가옥의 손실이 커졌던 것이다.

이후에도 그해 518일 밤 9시 공주의 유일한 포목 겸 잡화상을 경영하는 윤종혁(尹宗赫)의 계명상회(啓明商會)에 불이 나 불길이 이웃한 김석문(金錫文)의 집을 비롯한 3호를 전소한 일이 또 발생했다.

당시 계명상회의 주인 윤종혁이 마침 절로 요양하러 떠나 상점에는 점원들밖에 없는 상황에다 공주소방조도 해산되어, 공주경찰서에서 불을 진압하려 애를 썼지만 계명상회는 전소해 손해액이 만여 원 가량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충남도청 이전문제로 잠시 해체됐던 공주소방조는, 그 이듬해 다시 결성되어 소방활동을 진행했고, 19333월에는 공주군내 소방조들이 모두 모여 연합소방훈련을 하기도 했다.

지역사회의 신망을 받은 '공주소방조'

이 처럼 열성을 다한 공주소방조의 소방수들에게 주어지는 수당이 어느 정도였을까. 1937공주읍읍세일반에 의하면 1년 운영비가 1천 485원이라고 하는데, 구체적인 항목별 지출비가 기록되지 않아 임금의 정도가 얼마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운영비 전액이 약 77명의 소방수 전원에게 쓰인다고 하더라도 1명당 20원도 채 안되는 수당이 주어지는 셈이 되니 많은 돈은 분명 아니다.

게다가 이처럼 근소한 수당 지급에도 불구하고 소방수들은 공주 사람들을 위한 기근구제에도 나섰다. 19241231동아일보기사에 의하면 화수재해의 구제에 전략해 온 소방수들이 그 공로로 상여금을 받았는데, 그 중 조선인 소방수들이 1인당 50전씩 각출해 합 13만 원의 거액을 공주 기근구제회에 기부해 지역사회의 신망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소방수들의 노고와 선행에 1년에 세 번 있는 공식적인 소방훈련이 있을 때면 소방수들을 위한 연회가 빠지지 않고 벌어졌다.

오찬이나 석찬으로 공주시장에 있는 금강관이나 충남도청에 있는 순사교습소(지금의 KT&G 공주지점) 등에서 소방수들을 위한 위로연이 개최됐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소방조 가족 위로회도 벌어졌다. 19257월 공주소방조 주최로 경찰관 및 소방조 가족의 위안회를 금강관에서 열었는데, 활동사진을 상영하고 과자와 아이스크림도 함께 지급하는 등 성황리에 진행됐다고 한다.

▲1926년 10월 9일 공주앵산공원에서 열린 공주소방조 15주년 기념식(『매일신보』 1926. 10. 12. 기사). 사진=공주대학 공주학연구원
▲1926년 10월 9일 공주앵산공원에서 열린 공주소방조 15주년 기념식(『매일신보』 1926. 10. 12. 기사). 사진=공주대학 공주학연구원

또 소방조 활동을 꾸준하게 해온 근속자와 소방활동 또는 소방조 운영 및 관리에 특별히 힘써 온 공로자를 위해 꾸준하게 포상하는 일이 있었다.

1926109일은 공주소방조 창립 15주년이었다. 당시 기념축하식은 오전에 공주금융조합 근처 제민천변에서 공식소방훈련을 마치고, 정오부터 앵산공원 초혼사(지금의 3.1중앙공원 내 4.19학생혁명기념탑 자리)에서 열렸다.

유성준(兪星濬) 충남도지사를 비롯해, 좌백(佐伯) 충남경찰부장, 김갑순 공주군수 등 지역의 고관들과 공주유지 및 군민들이 모였다. 이때 근속자와 공로자에 대한 표창이 이어졌으며, 감사장과 함께 시계 또는 은잔의 상품도 함께 주어졌다.

광복이후 '공주의용소방대' 발족과 활약

광복 이후 공주소방조는 1945915공주(의용)소방대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발족했다.

그 후 194831일 공공기관으로서 공주소방서가 새롭게 편성되면서, 공주소방대는 소방서원을 보좌했다. 19493월에는 공주군내 각 소방간부들이 모여 타합회(打合會)를 실시했는데, 일제강점기 때의 소방훈련과 마찬가지로 많은 관민다수가 함께 자리한 가운데 공주경찰서장과 소방연대장의 훈시가 있은 후 맹열한 소방훈련이 이어졌다.

공주대학교 공주학연구원에는 194910월 당시 공주 사는 백정순의 부친이 공주의용소방대원이던 시절 공산성 쌍수정 앞에서, 공주경찰서 및 공주소방서 간부들과 의용소방대 대원들이 기념 촬영을 한 사진이 남아 있다.

이후 1950114일에는 공주읍 중동공립국민학교 2교정에서 각 관공서장 및 지방 유지가 참석해 시동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1949년 10월 공산성 쌍수정 앞에 선 공주군의용소방대(출처:공주학연구원 공주학아카이브). 사진=공주대학 공주학연구원
▲1949년 10월 공산성 쌍수정 앞에 선 공주군의용소방대(출처:공주학연구원 공주학아카이브). 사진=공주대학 공주학연구원

그 후 19506.25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공주소방대는 소방서원을 보좌해 소방을 비롯해 경비, 토벌, 방공 등 다방면에 눈부신 활약을 해왔다.

그러나 정식으로 인정된 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대우가 소홀한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이 점을 고려해 의용경찰대와 함께 방호단(防護團, 또는 방공단)’으로 통합 강화해, 정부에서 인정한 단체로서 예산을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가 의용소방대를 한국청년단에 편입시키려 하자, 각 지역 소방대의 반대에 부딪혔고, 게다가 한국전쟁의 여파로 각 지역에서 화재가 자주 발생하자 의용소방대의 역할이 더욱 필요해졌다.

그래서 결국 195312월 정부에서는 각 시도 경찰국에 의용소방대를 편성하고 예전대로 소방경찰관의 보좌협조를 맡게 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이러한 정부의 공식적인 지시 아래, 1954111일 공주에서는 소방대광장에서 각 기관장 관민다수 참석리에 공주의용소방대의 신년발대식이 거행됐고, 대장에는 전 방공단장 장동욱(張東旭) 씨가 임명됐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 이후에도 공주의용소방대는 활발하게 활동했는데, 화재 뿐만 아니라 공주군민의 안전사고에도 자주 출동해 봉사했다.

특히 공산성 주변 금강가나 고마나루 부근에서 익사 사고가 자주 발생했는데, 그때마다 공주의용소방대원들의 활약이 대단했다고 한다.

공주의용소방대는 지금도 공주소방서 직원들을 도와 공주의 안전파수꾼으로서 공주 지역사회의 안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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