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순의 영화이야기=전쟁은 가해자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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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순의 영화이야기=전쟁은 가해자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 박명순 작가
  • 승인 2021.04.20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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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의 묘』
▲ 사진=네이버 영화
▲ 사진=네이버 영화

2000년 초반, 소도시인 청양읍에서 1년 동안 근무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보충수업, 진단평가의 굴레에서 나를 조금씩 해방시켰던 것 같다. 아이들의 시험 점수에 극성 엄마가 목을 매는 것 이상으로 교사들도 민감했으며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담당 학급 평균 점수의 서열화는 곧 교사의 능력과 열정이며 그 이상의 자존심을 걸었던 시절이다. 아이들은 이미 하얀 도화지가 아니었다. 제각기 다른 출발선에 있음을 무시한 처사이므로, 공정한 게임도 아니었다. 나 역시 열심히 한다는 미명하에 그런 분위기에 한몫 거들었으리라. 늦게나마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방법론은 서툴렀다. 과감하게 평가를 위한 평가를 지양하는 의지를 키울 수밖에 없다. 영화수업도 그 일환이었다.

본격적인 영화수업을 시도했던 선배교사 이기자 샘이 있었기에 처음 시도가 수월했다. 4시간을 배분하여 3시간은 영화를 감상하고, 1시간은 쓰기활동을 하였다. 그때도 진도에 급급하여 처음에는 감상문을 숙제로 냈었는데 끝내 제출하지 않는 아이가 있었기에 나중에는 수업시간에 전원 제출 시스템으로 바꾸었다.(글쓰기에 부정적인 남학생을 대상으로 강압적이지 않았다는 것이 성과이다.)

처음 시간에 영화읽기에 대한 10가지 유의점을 정리해주고 함께 감상하며 분위기를 잡는다. 일단 몰입하면 교실마다 영화의 세계에 푹 젖는다. 그렇게 감상이 끝나면, 하얀 종이를 나누어 주고 다시 처음부터 영화를 재생하며 장면에 대한 의문점을 주고받는 시간을 마련하면 마침내 다양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어차피 이야기의 욕구를 모두 채워줄 수는 없다. 영화의 주인공 세이타와 세츠코에게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옮기도록 유도하는 것이 그나마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아이들은 일단 펜만 잡으면 A4용지를 채우는 건 아무 것도 아니다. 앞뒷면을 채우고 2장 이상을 쓰는 아이들도 수두룩하다. 감독이 이 영화를 왜 만들었을까에 대해서도 써 보라고 말한다. 교사는 질문만을 던져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한다.

수업권에 대한 폭넓은 해석이 인색했던 시국 탓일까? 영화를 보는 2-3시간이 노는 것처럼 보이는 불편함이 문제였다. 그때는 가르치고 싶은 내용이 차고 넘쳤으며, 지켜보는 교사의 역할을 인정하지 못했던 만큼 죄의식이 꿈틀거렸다.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영화에 충분히 몰입되었다 싶은 시간에 아이스크림을 사주기로 했다. 수업시간에 아이스크림을 먹는다는 들뜬 분위기만으로 행복감은 배가된다. 그때, 눈물겨운 사연이 있었는데 끝끝내 100원짜리 아이스크림을 고집하는 아이들 때문이었다. 나는 정품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싶었는데 아이들의 생각은 달랐다. 민망해하는 나에게 첫 월급 탄 뿌듯함의 미소와 함께 건넨 1만원 미만의 거스름돈.

, 그때 그 100원짜리 아이스크림의 달콤함이 혀끝에서 살살 녹는다. 학교 앞에서만 파는 소위 불량식품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학교 앞 문방구에서는 100, 200, 500원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었다. 내가 만난 아이들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작년에 피자파티를 하였는데 아이들이 최하 가격 5,000원짜리 피자를 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달라진 점은 분명 있었다. 위장장애와 기타 등등의 이유를 들어 은수와 민영이가 끝내 피자를 먹지 않았던 것이다. 체험을 공유하기 위해 마련한 먹거리이지만 이제 교실에서 100%의 공감이 사라진 현실을 인정해야 할 듯하다.

 

남매의 죽음을 통하여 전쟁의 비극을 조명하는 줄거리이다.

모든 것은 권력자들의 전쟁 때문이다.

1945(쇼와 20) 921, 영양실조로 14살 난 주인공 세이타가 해골처럼 말라서 쓰러져 죽는 모습에서 영화는 시작한다. 지나치는 사람들 아무도 관심이 없다. 곳곳에 시체가 즐비했던 전쟁 후유증으로 사람들의 마음은 메말라 있기 때문이다. 곧이어.

쇼와 20921일 밤 나는 죽었다

망자의 영혼이 생전을 회상하며 지하철을 타고 어딘가로 향한다. ()투성이 주머니 속에 꼭 품고 있던 드로프스 깡통, 그 깡통을 역원이 어둠 속으로 집어던지자 역시 영양실조로 죽은 4살짜리 여동생 세츠코의 하얀 유골이 나뒹군다. 화면 속 반딧불들이 어지럽게 공중을 날면서 본격적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대공습으로 엄마가 숨진다. 엄마의 죽음을 세츠코에게는 비밀로 한 채 세이타는 화장된 엄마의 유골을 챙겨 친척집으로 향한다. 친척 아주머니는 처음에는 이들을 반기지만, 보상받을 가족이 없음을 확인하면서부터 노골적인 냉대를 감추지 않는다. 빨래를 널었다고, 피아노를 친다고 구박한다. 밥을 먹을 때도 세이타 남매에게 더 적게 주자 그들은 냉대를 못 이겨 근처의 방공호로 옮겨간다.

벽에 붙은 반딧불은 창문의 눈()이야.”

방공호에서 남매는 밤하늘의 가미카제 특공기의 비행등과 그 불빛을 닮은 반딧불을 본다. 고사기관포의 예광탄도, 아버지가 탑승했던 군함의 관함식 장면도 떠올린다. 다음날 아침 세이타는 죽은 반딧불의 무덤을 만들어 준다. 세츠코는 자신도 엄마가 돌아가신 사실을 전해 들었다며 울먹인다. 세츠코를 달래주기 위해 바닷가 모래밭에서 뛰어놀지만 그곳에서의 단란했던 추억은 이미 사라졌고, 곳곳에 시체가 뒹군다. 가족여행을 와서 단란했던 시절과 대척(對蹠)되는 분위기가 즐거운 나의 집으로 오버랩된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집 내집 뿐이리

,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나의 집 내 집 뿐이리.

 

이제 남매의 지상에 즐거운 나의 집은 없다. 세이타는 갈수록 여위어 가는 세츠코에게 먹일 음식을 구하기 위해 감자 몇 알을 훔치다가 농부에게 들켜 잔혹하게 맞고 경찰서에까지 끌려간다. 세이타는 패전 소식이 들려오고 연합함대의 전멸을 알았을 때 해군 대위였던 아버지의 죽음을 실감하고, 결국 세츠코도 종전 1주일 후인 822일 숨을 거둔다.

이후 유령처럼 떠도는 세이타는 사라지고, 1940년대 고베의 밤 풍경이 현대 고베 시내의 화려한 야경으로 바뀌면서, 누가 이들 남매를 죽였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다는 것. 전쟁의 가해자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리얼리즘적 시선으로 볼 때,반딧불의 묘는 전쟁 주도국인 일본을 피해자로 묘사했다는 문제제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문제점은 오히려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다. 거대담론에 접근하기 위한 문제제기의 설정으로 활용해도 좋을 것이다. 전범 당사자인 일본 천황과 전쟁에 시달리는 일본 민초들의 상황이 다르다는 설명도 필요하다. 일본이 패망하자 장교가 아닌, 사병들이 살아있는 목숨으로 조국에 돌아가게 되어 기뻐했다는 얘기도 어른들에게 실제로 들었다. 그러니까 승전보의 기쁨도 기층 민초들에겐 한갓 관념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영상의 아름다움과 섬세한 심리묘사가 주는 감동이다. 전쟁은 침략국이나 피해국이나 반딧불처럼 가장 약하고 아름답고 가난한 존재를 파괴한다는 메시지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최근 개봉한 일본영화 너의 이름은에 열광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다시 반딧불의 묘를 생각한다.

(1988 제작, 일본,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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