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바나, 아프가니스탄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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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바나, 아프가니스탄의 눈물
  • 박명순 작가
  • 승인 2023.09.04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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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바나, 아프가니스탄의 눈물. 자료제공=네이버
▲파르바나, 아프가니스탄의 눈물. 자료제공=네이버

도쿄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양궁선수 안산, 치어리더 하지원 한때는 이들의 쇼컷이 인터넷에서 떠들썩했던 적이 있다. ‘쇼컷, 페미니스트, 악플 테러이런 기사들을 접하면서 페미니스트가 사회악으로 비난받는 시류가 심히 걱정스럽다. 한때 여성해방이나 성평등 담론이 진보의 중심축을 이루었던 때도 있었는데 변해버린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리둥절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호주제가 폐지된 것은 2008년으로 15년 가까이 되었으나 여전히 여성차별은 문제가 된다. 2023년 현재, 아직도 여성으로 산다는 건 남성에 비하여 더 많은 불편함을 겪고 있으며, 차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인식하고 개선을 위해 힘써야 상황임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이다.

우리가 안다는 건 매우 좁고 제한적이다. 대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아온 이력으로 세상을 느끼고 수용한다. 자신이 살아온 세상을 넓히기 위하여 사람을 만나고 여행을 하거나 독서를 통하여 식견을 키우지만 그것의 대부분은 밥벌이나 나의 명예와 활동반경을 넓히는데 활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의 권리를 양보하고 희생하고 나눈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것이 평등과 차별을 개선하고 보다 좋은 세상을 향하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게 됨으로써 세계의 여론이 시민들의 안위와 인권을 걱정하고 있다. 과거에 탈레반이 이슬람교를 앞세우며 자행했던 반근대적인 조치를 체험했었기 때문이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이 많지만 특히 탈레반이 자행했던, 남성과 동행하지 않는 여성의 단독 외출 금지, 조치는 얼마나 야만적인가.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삶에 대하여 야만적인 사회와 비교하거나 조선시대나 이전의 상황을 거론하면서 참 좋은 세상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우리는 상식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누리는 여성의 지위를 과하다고 말하거나, ‘부당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들을 우리는 반사회적인 위험한 자라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싶다.

2023년 현재 한국사회에서 여성은 법적으로 교육이나 취업의 기회에서 표면적 차별은 사라진듯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문화적 관습적 차별은 다양하게 잔존한다. 이러한 세부적인 차별에 대항하여 지금보다 나은 성평등 사회를 지향하는 움직임을 우리는 페미니즘이라고 부르며 이에 동조하며 실천을 지향한다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칭해도 좋을 것이다.

집집마다 그 풍경이 똑같지는 않겠지만 특히 60년대 전후에 태어난 여인들에게는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 교육수준과 재산분배의 성차별이 아닐까 싶다. 나의 중학 동창 친구는 최근 세종시의 친정에서 1천만 원을 받았다. 고마워해야 마땅하지만 사정은 그렇지 않다. 6남매 중에서 아들만 대학까지 교육을 시켰고 딸들은 초등학교, 중학교 졸업이 전부였으니 결혼 이후 경제사정도 아들과 딸의 차이가 컸다. 그런데 시골에 있던 논이 행정수도에 포함되면서 아들 둘은 10억대의 재산을 분배받은 것이다. 가난한 딸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주지는 못할망정 차별적인 분배법을 적용한 건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대부분의 딸들은 소송을 하지 않는다. 출가외인의 관습을 스스로 받아들였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시골에 사는 지인의 경우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5명에게 100만원씩만 주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결국은 30만원씩만 주었다고 한다. 아들에게 수십 억대의 유산을 물려주면서 말이다.

나는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지만 무조건 여성중심의 사고를 하는 건 아니다. 여성의 사회적 차별을 위하여 노력하는 일련의 움직임에 동조하는 사람을 페미니스트라고 한다면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일 뿐이다. 여성의 사회적 차별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우리는 정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할 뿐이다. 여성이 결국 우리들의 어머니, 아내, 딸들이며 우리는 누구나 이들과 존엄함을 주고받으며 살 수 있어야 하니까 말이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통치가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종교에는 남녀차별적 관점이 두드러진다고 말하면 어떨까. 불교,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교 등, 내가 알고 있는 종교 가운데 남녀차별적 시각이 이슬람교만 엄격한 건 아니다. 종교창시의 시점이 남성중심 사회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그 중에서 탈레반의 경우는 특별하며 야만적이다. 여성 억압이 이들에게 주는 만족감이나 종교적 성취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도리가 없다.

히잡, 니캅, 차도르, 부르카여성이 갖춰야 할 복장을 지칭하는 이름들이다. 이것 뿐만이 아니다. 머리 스타일이나 복장에 대한 규정은 결국 인권 침해인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여성의 머리 길이나 스타일은 영원불변의 고정된 것이 아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강요나 비웃음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눈조차 가려야 하는 부르카를 강요하는 사회에서 머리만 가리는 히잡은 여성억압의 상징이 아닌 해방의 상징이 될 수도 있음을 우리는 안다.

최근 아프가니스탄의 아비규환 속 상황을 보면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미얀마 상황에서는 지지성명이나 성금보내기에 동참할 수 있었는데, 아프가니스탄에서 자행되는 종교의 힘이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고 인권을 탄압하는 현장을 고스란히 바라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것이 고통스럽다.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 답답하다. 온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피눈물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파르바나, 아프가니스탄의 눈물을 만나는 시간 나는 조금은 덜 미안할 수 있을까. 영화를 추천하는 이유이다. 원작 동화를 기반으로 만든 애니메이션은 아프가니스탄의 실상과 여성 억압의 구체적 상황을 잘 보여준다. 여자 혼자서는 시장에서 식량조차 살 수 없는 사회에서 자존감을 지키며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영화는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남장을 하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파르바나와 그 가족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영화 속 또 다른 이야기는 씨앗을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소년의 활약이다. 이야기의 힘을 믿으면서 배고픔과 슬픔을 견뎌내는 가족의 존엄함을 우리는 만날 수 있다. 생명의 위협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 무고하게 갇혀서 가족과 헤어져야 했던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말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아프가니스탄을 떠올릴 때마다 폭력에 굴복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스스로를 지키는 그들의 존엄을 기억하고 싶다.

목소리가 아닌 말의 가치를 높여라.”

꽃을 피우는 건 비다, 천둥이 아니다.”

탈레반은 정통 이슬람교라고 할 수도 없다. 그들의 만행은 여성에 한정되는 것만도 아니다. 하지만 여성인권을 억압하는 세력의 명분은 종교처럼 막강한 권위로 위장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확인시켜주는 건 분명하다.

지구상에 잔존하는 불평등과 차별의 역사가 오래되었고, 하루아침에 개선되기는 힘들듯이 여성차별 또한 그러하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노력하는 흐름이 있음을 믿고 지지하는 건 중요하다. 페미니즘 또한 그 흐름의 일부임에 확실하다. 힘닿는 데까지 응원해야 할 것이라 믿는 이유이다.

배구여제 김연경이 증언하는 비행기 탑승권의 남녀차별적 관행(남자배구선수 전원 비지니스석, 여자배구선수 절반만 비지니스석, - 다큐멘터리 국가대표’)도 여전히 존재한다. 2023년의 대한민국 어느 곳에서 여성에게 강요되는 또 다른 의미의 히잡, 니캅, 차도르, 부르카를 생각하는 게 지나친 것일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본다.

파르바나, 아프가니스탄의 눈물, 데보라 엘리스 원작 동화, 노라 투메이 감독, 안젤리나 제작, 캐나다외, 2017 제작, 애니메이션,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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