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순의 영화이야기=쿵따리 샤바라 빠빠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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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순의 영화이야기=쿵따리 샤바라 빠빠빠
  • 박명순작가
  • 승인 2020.12.13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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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통화하는 이름을 내 식으로 저장한다.
▲ 박명순작가
▲ 박명순작가

 

빨간머리 앤’, ‘키다리 아저씨’, ‘내 사랑’, ‘알 이즈 웰전화기에 떠오르는 이름들. 영화나, 소설 속 이름은 혈육과 애정관계를 넘어 특별한 의미상승을 일으켜 내 나름의 소소한 행복을 맛보기 위한 방법이다. 그 가운데 즐겨찾기 1호는 단연 알 이즈 웰이다. 일주일에 한두 번 만나지만 하루에도 서너 번씩 전화를 주고받는 여동생 박도화의 닉네임이다. 휴대폰 화면에 떠오르는 알 이즈 웰은 행운이자 기적이며 마술인 하루의 삶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고.

알 이즈 웰’.

부르면 부를수록 더 많은 행운이 올 것 같은 기대감의 이름이다. 그래서 하루하루의 삶을 기적이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는 빈부귀천 없이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이나 마음을 다스리면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을 증명하고 싶다.

하루하루 살얼음판의 위태로움으로 다가오는 강박증세는 특별한 게 아니다. 현대인은 너나없이 스트레스와 불안증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 그 불안함을 가족에 기대어 미래의 행복을 꿈꾸지만 가족 사랑이 나의 행복이 되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만치나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미래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억지 믿음일지언정 좋은 예감을 기대할 수 있다면 일단 실행에 옮겨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하루에 한두 번 호흡을 길게 가다듬고 발음해 본다.

알 이즈 웰!”

마을을 순찰하는 야경꾼이 있었는데 그는 이상이 없다는 의미의 말을 이렇게 했다.

-이즈-!”

이 말이 울리면 마을사람들은 안심을 하고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었단다. 알고 보니 이 야경꾼은 야맹증 환자였다니 놀랍지 않은가?

이 영화를 만난 후 자기 충족적 예언 효과라는 심리적 용어 피그말리온 효과를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나를 자주 만난다. 그리스 신화에서 조각가였던 피그말리온은 아름다운 여인상을 조각하고, 그 여인상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여신(女神) 아프로디테는 그의 사랑에 감동하여 여인상에게 생명을 주었다고 한다. 타인의 기대나 관심으로 좋은 결과가 가능해진다는 믿음을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하는데, 현실이 마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나는 강하게 믿는 편이다.

잘 될 거야.”

아무 이상 없어.”

불안할 때마다 이 말을 반복하여 자신감을 키웠던. 란초, 파르한, 라쥬가 영화의 주인공들이다. 세 얼간이로 국내에서 개봉된 영화를 나는 알 이즈 웰(All is well)’로 기억한다. 인도 영화 특유의 노래와 춤으로 버무려지는 젊은이의 애환에 공대 생활의 중압감과 동료의 자살사건이 펼쳐지는데 많은 부분이 키팅 선장의 죽은 시인의 사회와 겹쳐지는 분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코드는 비극적 음울이 아닌, 역경을 딛고 성공신화로 이어지는 유쾌발랄함이다. 그래서 리얼리티가 조금 아쉽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옥의 티라 하겠다.

등장인물은 3명의 공학도와 그들의 가족이며 학교이야기가 펼쳐진다. 자신의 꿈이 아닌, 가족의 욕망으로 살아야 하는 천재들의 이야기를 펼쳐내기 위한 인도의 명문 공대가 등장한다. ‘명문중에서 공대라니 미래에의 전망이 확실한 간판이 아닌가? 1980년대 지방대를 다니던 필자는 서울대 재학 중인 동생 덕분에 가끔 신림동에 드나들었다. 동생은 대학생이었지만 집에서 생활비를 지원받지 않고 재수생 동생 뒷바라지까지 감당했다. 딱한 처지였지만 동생은 오히려 누나인 나를 위로하며, ‘과외 알바로 가족을 먹여 살리는 친구들이 많다며 웃었다. 당시 서울대생 절반 이상이 학비를 걱정해야 할 만큼 어려웠기에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기도 했었던 것 같다. 너나없이 가족의 짐을 어깨에 맨 채 억눌려 살았던 시대였다. 졸업하면 연봉이 높은 조건으로 취업이 보장되었기에 학벌이 최고의 재테크였던 시대의 이야기는 우리나라의 입시 흐름과 유사하다.

어디서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학벌과 집안의 명예와 부모의 욕망, 그 틈에서 정작 소외된 진정한 꿈과 행복의 문제. 한동안 이런 주제로 한국사회는 매우 뜨거웠다. 이상석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가 영화와 뮤지컬로 다양하게 대중을 흡입했던 것처럼, 인도에서도 명문대가 희망이다라는 명제를 꺾으려는 열풍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게 된다.

세 인물들은 기계적인 주입식 교육현장에 불과한 명문 학교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방황한다. 괴짜 행세를 하며 캠퍼스를 누비면서도 란초는 성적이 매우 좋지만 그의 벗 파르한과 라쥬는 낙제의 위험에 놓여있다. 파르한은 사진작가의 꿈을 포기할 수 없기에 학업에 집중하지 못한다. 라쥬는 가족에 짓눌린 부담감 때문에 고민에 에너지를 낭비하는 스타일이다. 이들이 자신감을 찾고 가족 사랑을 책임지면서 자신의 꿈과 행복을 찾아가는 이야기. 그 중심에서 웃음을 유발하고 감동적으로 상황을 바꾸는 역할은 전적으로 란초에 달려있다. 때로는 장난기 가득한 악동처럼, 때로는 괴짜처럼 그리고 구원자처럼 란초는 종횡무진 막강한 존재로 군림하는 이 영화의 히로인이다. 특히 두 명의 생명을 구하는 경이로운 출산의 과정에서 보여주는 웃음과 진지함의 절묘한 궁합은 진정한 공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환생한 듯 다재다능한 캐릭터인 란초는 부잣집 아들이 싫어했던 배움과 맞바꾼 이름임이 밝혀진다, 주인집 아들이 팽개친 교복을 입고 도강(도둑 수강)을 했던 배움에 목마른 가난한 집 태생이었던 것이다. 대리 학위 취득을 위해 입학한 초테는 란초의 이름으로 학위를 받고 행적을 감출 수밖에 없는 속사정이 있었음을 어찌 알겠는가. 란초의 행방을 찾아 길을 떠나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궁금증을 유발하는 건 영화의 재미를 높이는 요소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 매료되는 힘은 권위에 주눅 들지 않는 다양한 캐릭터들이다. 이발사는 파르한과 라쥬 둘 중 한 명이라도 취직을 하면 자신의 트래이드 마크인 콧수염을 밀어버리라는 총장(비루교수)의 말을 실행한다. 이 영화의 부정 인물인 바이러스는 총장이라는 직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아들을 부정입학시킬 수 있었겠지만 그런 편법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동시에 젊은이들과 코드가 맞지 않아 사사건건 부딪치는 보수적 인물이지만 진정한 자존심을 위해 스스로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인물이다. 학생이 아니면서 학생보다 더욱 학구적인 인물 밀리리터의 재치 있는 입담, 란초와 대립적인 차투르의 코믹연기는 약방의 감초이다. 피아와 란초의 로맨스는 떡볶이의 매콤한 양념처럼 혀끝을 자극하며, 소심한 란초를 사로잡는 피아의 당당함이 돋보인다. (두 번 버림받는 가격표에 대한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아쉬움과는 별개로.)

 

별똥별이 떨어지는 순간 강렬하고 짧게 하나의 소망을 빌어야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간절한 소망이 있다면 반드시 이루도록 우주가 합심하여 도와야 한다는 기대심리를 대변하는 건지도 모른다. 아침저녁 정한수를 떠놓고 가족의 무병장수를 빌었던 나의 할머니를 떠올린다. 할머니의 기도가 헛되지 않기를. 가족이 무거운 짐이 아니라, 꿈을 펼치는 힘이 될 수 있기를 빌어본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즈-.’

(세 얼간이, 2009 제작, 2016 woroqd, 인도, 라즈쿠마르 히라니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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