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순의 영화이야기=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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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순의 영화이야기=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 박명순작가
  • 승인 2020.12.16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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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에 대하여』
▲ 케빈에 대하여 포스터 사진=인생이라는 푸른숲
▲ 케빈에 대하여 포스터 사진=인생이라는 푸른숲

 

학교폭력 피해자의 담임으로 한 달 가까이 시달렸던 적이 있습니다. 교사로서 자주 겪는 마음고생일 뿐인데도 굳이 시달렸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학부모끼리 합의 지점을 찾으려는 노력이 빗나가면서 담당교사에게 시달렸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입니다.

정작 학생들은 후유증이 없는 상황이라 즈이끼리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관계에서도 쉽게 화해했지만, 학부모의 입장은 복잡하게 엉겨서 끝내 수습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피해자 학부모들은 학교 측에 강한 불신을 드러냈고, 시시콜콜한 불만사항을 터뜨리며 서너 명의 교사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바람에 그야말로 난감했지요. 피해자 학생이 사실은 가해자였을 때가 많았다는 과거의 행적은 이 사건에서만큼은 무의미했습니다.

가해자는 벌을 받고, 피해자는 보상받아야 하지만 정확하게 양을 측정하여 그에 응당한 대가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저에게는 없습니다. 한 인간의 성장이 진공상태에서 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가족과 사회와 인간관계가 얽혀있는 그물망에서 누구도 가해자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지요. 적어도 교육의 실천을 염두에 둔다면, 가해자와 피해자 논리를 넘어서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마침 비스름한 고민을 압축하여 그려낸 영화가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붉은색 이미지를 변주하여 무겁고 깊게 그려낸 영화 케빈에 대하여(2011)는 모성애에 집중하면서도 다양한 통로의 문을 열어놓았습니다. 모성신화에 대한 원초적 물음이 영상 곳곳에 배어 있다고나 할까요. 권력은 남자들이 독차지하고, 골치 아픈 문제들 (육아라든지 기타 등등)의 최종 책임과 의무를 부여하는 이중적 잣대 등 가부장 사회가 요구하는 모성애의 이중성을 비판하는 날카로운 시선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아들이 살인자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매장당하는 엄마 이야기를 다큐처럼 담백하게 담아내며 피해와 가해의 문제가 얽혀있는 인간관계를 새롭게 조명합니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2006)는 미국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기난사사건(1999) 주범의 엄마가 쓴 책입니다. ‘잘못된 가정교육’, ‘왕따’, ‘사이코패스’, ‘집단 괴롭힘등 상식적 관점에서 사건을 단순화하는 사회여론을 비판하고, 문제의 원인은 복합적이고 난해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글이지요. 재발 방지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성찰을 이끌어냅니다. 영화와 책을 함께 읽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책은 영화에서 케빈이 행했던 집단살해와 그 이후를 사이코패스와 모성이 부족한 엄마라는 단선적 관점에서 벗어나 보통 엄마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책이더군요. 분노조절 장애, 자학, 관심끌기가 복합되어 발생하는 잔인한 청소년범죄를 새롭게 직시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짐작하겠지만 책, 영화 모두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충격과 성찰의 순간들이 너무도 강렬하여 한동안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막막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뭔가 하고 싶은 말들을 정리하여 끄집어낼 수 있는 마력이 있었지요. 영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엄마라면 당연한 품성으로 갖추어야 할 모성애가 편견과 고정관념이 아닌지 영화는 집요하게 물음을 던집니다. 모성애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상식으로 재단하지 않도록 다양한 상황을 보여줍니다.

온몸에 붉은 물감을 뒤집어쓴 알몸의 여인,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면서 영화가 시작됩니다. 그 붉은 이물질이 불길한 격정으로 다가왔는데, 토마토축제의 퍼포먼스를 군중의 야수성과 폭력성의 이미지와 오버랩시켰다는 걸 알아채었습니다. 처음에 그 장면이 나오면서 음악은 난해하고 칙칙하면서도 강렬한 느낌의 음색이 끊임없이 진행됩니다. 알 수 없는 불안과 초조함의 분위기에서 침착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이 모든 상황을 견뎌내는 여성이 등장하는 데 그가 케빈의 엄마 에바입니다. 모성신화의 무의식으로 들이미는 잣대의 폭력성을 피의 질감과 빛깔을 닮은 붉은색 토마토즙액의 흩뿌려짐으로 이미지화하고 있습니다. 그 상황을 고통스러움과 환희로 태연히 감당하는 에바는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파멸했던 이름 없는 여인들의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아인쉬타인의 첫 번째 아내였던 밀레바 마리치는 상대성이론의 탄생에 공을 세운 촉망받는 과학자였지만 병약한 아들을 독박육아하면서 학계에서 잊힌 존재가 됩니다. 소아마비를 앓았던 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아인쉬타인이 결혼 이후에도 학자의 삶을 함께할 것을 맹세하며 프로포즈를 했었다는 점입니다. 이후 그녀는 남편에게 이혼당하고 병약한 둘째 아들과 함께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케빈은 수십 명의 친구들을 살해했습니다. 게다가 동생과 아버지의 목숨까지 해친 잔혹함은 인간적 온기를 손톱만큼도 느끼기 힘든 괴물처럼 나타납니다. 영화는 비현실적으로 무겁지만 지독하게 현실적입니다. 미국에서 자주 일어나는 총기난사사건의 가족들이 짊어졌던 고통과 슬픔이 고스란히 겹쳐지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 집중하는 조명 인물은 가해자 케빈이 아니라 그의 엄마입니다. 케빈의 행위가 수많은 가족을 불행에 빠뜨렸음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그의 엄마인 것이지요. 동시에 그녀는 케빈을 이해하려고 가장 많은 노력과 정성을 들이는 사람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케빈을 뱃속에 가졌을 때 그녀는 자신의 자유가 침해될까 매우 두려웠습니다. 유명 여행가였던 그녀는 유목민처럼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으니 막연히 정착생활에 대한 두려움이 컸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임신과 출산과 자녀양육에 대한 공포감이 있다고 합니다. 저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었지만 드러내놓고 발설하지 못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케빈은 어렸을 때부터 과잉행동을 보였고, 그만큼 그녀의 육아는 힘들었지만 노력하는 엄마의 모습을 충실하게 이행했습니다. 그녀가 지극한 헌신과 정성으로 케빈을 품어주지는 못했으나, 서툴고 미숙한 엄마일망정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특별히 예민했고, 두뇌도 명석해보였으나 케빈은 끝내 사고를 쳤습니다. 취미로 시작했던 활쏘기 실력으로 성인이 되기 하루 전날 축제 진행 중이던 체육관의 문을 잠그고 화살을 쏘았어요. 수십 명이 죽었고, 그들의 가족은 케빈을 향한 증오심을 그녀에게 폭발합니다. 현관에는 늘상 계란과 토마토를 던진 자국이 남아 있고,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이 적혀있습니다. 그녀의 일과는 그 협박성 흔적을 지우는 일로 시작합니다.

감독은 피해자 가족의 고통을 가감 없이 그려내면서도 폭력의 복잡한 정체를 천착하고 싶은 것입니다. 아들이 죄인이므로 엄마가 그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오래된 논리의 유통기한은 왜 소멸하지 않는 걸까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인천초등생 살인사건의 가해자 부모에게 비난의 화살을 날리지 않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물며 피해자 부모는 어련하겠습니까.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폭력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세상입니다.

영화는 가해자와 피해자로 양분하는 시선에 조심스러운 물음을 던집니다.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을 형용할 말은 어차피 없습니다. 그렇다할지라도 케빈의 엄마가 그들의 먹잇감이 되어 고통 받는 삶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병원에 수감된 케빈 대신 그의 엄마에게 폭언과 폭행이 행사됩니다.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그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으나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사건의 트라우마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솔직히 말해서 케빈의 엄마가 가장 큰 피해자입니다. 남편도, 딸도 잃고 사회에서 매장되었으니까요.

살인자의 엄마로서 살아가기, 살인자의 엄마에게 분노 폭발하기, 카메라 앵글은 온전하게 그녀에게 집중합니다. 피해자의 가족들이 그녀를 미워하고 공격하는 건 그녀가 아들을 잘못 키웠다는 것에 대한 응징인가요? 하물며 직접 피해자가 아닌 사람들조차 그녀를 벌레처럼 기피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불행한 일들과 당당하게 맞섭니다. 그녀는 엄마가 되기 전부터 충실하게 살아왔지요. 엄마가 되어서도 최선을 다해서 살았습니다. 원하지 않았던 엄마라는 자리, 준비가 소홀하고 미흡했지만 끝까지 노력했습니다. 실수도 있었고, 분통을 터뜨리며 케빈을 팽개치거나 울음소리가 듣기 싫어서 유모차를 끌고 방치하기도 했습니다만, 차선을 다해 엄마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습니다.

맘충이라는 신조어가 있습니다. 그녀들은 시도 때도 없이 기저귀를 갈아야 하고 우윳병을 꺼내야 합니다. 유모차를 끌고 쇼핑을 하는 엄마를 비난하는 네티즌들이 만든 말입니다. 엄마에게 벌레 같다는 혐오감의 표현을 사용하는 세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엄마는 위대하다’, ‘모성애가 중요하다하지만 이러한 언어가 결국은 여성차별적 가치관의 고리에 연결되어 있음은 두말하면 잔소리입니다. 여성이라는 약자를 고상하게 부려먹기 위해 더 많은 의무와 책임을 부여하여 구속의 테두리를 넓고 튼튼하게 만든 가부장제의 산물이라 할 수 있지요.

에바는 모성신화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는 중입니다. 그녀 역시 어린 시절 사랑이 충만한 가정에서 성장하지 못한 듯합니다. 모성애라는 것이 천성적인 것이 아니라 학습의 결과임을 슬쩍 비추어줍니다. 에바는 성장과정의 애정결핍을 여행가로서의 열정으로 승화했던 여인입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엄마가 된 그녀는 당황스럽고 자신에게 화가 나 있는 상태입니다. 육아에 전념하지만 실수가 많고 서투른 엄마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자유분방했던 삶과 성공적인 여행자로서의 경단녀가 된 삶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릅니다.

안타까운 건 에바가.

너 때문에 나는 불행해졌어.”

라고 아들에게 말하지 않았어야 합니다. 행복과 불행의 주체는 자신이 아닌가요. 누구 때문에 불행해지지 않는 독자적 존재가치를 스스로 찾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불합리한 존재로서 미숙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이상이 크고 열정적일수록 현실의 문제에 적응하기는 더욱 어렵고요.

에바는 고통스러운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분노의 표적으로 온갖 수모를 겪지만, 당연히 마을을 떠나지도 않고요. ‘살인자 엄마로서 머무르기로 결심을 굳힙니다. 모성애 때문이 아니라 독자적인 인격체로서의 삶을 개척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케빈 역시 동등한 인격체입니다. 케빈이 자신이 저지른 행동을 성찰할 수 있기를 에바는 간절히 바랍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왜 그랬어.”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의 저자 수클리볼드는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너무도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부모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소년이 살인마가 된 현실을 그 자체로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라는 물음 대신, ‘어떻게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충분히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야만 대형 참사의 비극을 방지할 수 있는 어떻게의 해답에 근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2011 제작, 영국, 린 렘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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