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의 숨어 있는 역사'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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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숨어 있는 역사'①
  • 최창석
  • 승인 2020.04.28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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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배다리 흔적. 사진=공주문화원 제공
▲1930년대 배다리 흔적. 사진=공주문화원 제공

고대로부터 중부지방의 교통의 요지 공주: 공주는 예로부터 호남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또 금강의 수운이 있어 수로교통의 요지였었는데 근대초기 1910년대부터는 육상 교통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일본의 강점이 시작된 1910년 부터 충청의 수부도시인 공주에 많은 도시기반 사업들이 건설되고 도로가 놓아진다.

특히 도로 중 가장 교통량이 많았던 도로는 청일전쟁의 수행을 위해 일제가 급히 건설한 신작로인 공청가도(公淸街道: 공주-전막-조치원-청주)였다. 당시 이재에 밝았던 공주 갑부 김갑순은 승합차 사업을 벌여 공주-조치원 여객사업을 운영하기 위해 1910년 금강 목교를 놓았다가 홍수로 유실되자 1915년 경에 배다리를 놓게 된다.

목교 터 위에 수십척의 배를 붙들어 매고 그위에 널판지를 깔아 차량의 통행을 시켰던 것이다. 191511월 조선총독부 관보를 보면 금강을 오르내리는 선박과 뗏목의 운항을 위해 공주군 금강교(배다리)를 개폐하는 시간을 고시해 놓은 것을 볼 때 그 때 배다리가 생겼을 것으로 추측한다.

내가 공주의 노인들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김갑순은 승합차 사업으로 많은 돈을 벌고도 또 배다리를 통행하는 주민들께도 통행세를 받아 당시 공주 주민의 많은 원성을 샀다고 한다.

▲물이 흥건한 금강과 공산성의 반영. 사진=벽해 최창석
▲물이 흥건한 금강과 공산성의 반영. 사진=벽해 최창석

현재 강물을 완전히 빼서 배다리가 들어났는데 나는 그런 배다리의 모습보다도 물이 흥건하게 고이도 공산성의 반영이 멋지게 보이는 금강의 모습을 되살리자고 주장한다.

배다리의 모습은 재현하거나 사진으로 보여주고 공주보 물을 가두어 강물이 출렁이고 공산성의 배경이 멋진 반영으로 나타나는 옛날의 모습이 보고 싶다. 물론 물이 오염이 되면 1년에 한 두 차례 보를 열어 빼면 될 것이다. 언제 그런 날이 올지!

▲현재 들어난 목교와 배다리 흔적. 사진=벽해 최창석
▲현재 들어난 목교와 배다리 흔적. 사진=벽해 최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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