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좋다, 만만(漫漫)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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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좋다, 만만(漫漫)해서 좋다
  • 박명순 작가
  • 승인 2022.04.18 06: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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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안 랩소디』

 

▲보헤미안 랩소디 사진=네이버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사진=네이버 영화

시는 쓰는 자의 것이 아니라 읽는 자의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영화 역시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만의 영화로 만들기 위해서는 한번 휙 보고 끝내면 안 된다. 내 안의 것들과 어우러지는 발효의 공력이 필요하다.

보헤미안 랩소디를 어미닭이 알을 품듯 공을 들였던 시간이 있었다. 천만에 육박하는 관객 수 만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영화에, 음악에 그리고 뮤지션 퀸에 홀딱 빠져들었던 사람들과 같은 배를 타는 느낌이 좋았다. 천안에서 한 번, 공주에서 두 번, 영화는 마력이 넘쳤다. 공연장에 가는 기분으로 영화관을 반복해서 찾았는데 그때마다 영화관을 가득 메운 감동이 일렁이곤 했다. 음악 영화가 주는 뻔한 스토리를 벗어나지 못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영상에는 폭발적인 호소력이 있었으니 익숙함과 낯선 매력의 조화가 그 묘미였다.

▲ 보혜미안 렙소디 사진=네이버 영화 
▲ 보혜미안 렙소디 사진=네이버 영화 

영화는 익숙한 틀에 담아낸 뮤지션 그리고 프레디 머큐리의 삶과 음악을 다룬다. 외모 콤플렉스를 지닌 가난한 이주민의 가정에서 원만하게 성장하지 못한 부적응자가 음악으로 돈과 명예를 얻자 방탕해지면서 그룹을 멀리하다가 자신의 교만을 반성하고 진정한 뮤지션의 경지에 오르는 그런 이야기는 기시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레디 머큐리의 삶에는 소외와 병마로 얼룩진 상처 입은 자의 애절함이 남다르게 다가왔다.

퀸의 보컬이자 작곡가 프레디의 삶은 행복하지 못했다. 그는 독특한 창법과 음악으로 삶의 소중함을 일깨웠다. 그의 음악과 삶은 세상과 불화로 얼룩진 현대인의 열망이 지닌 그늘진 일면과 소통한다. 이 영화의 여운이 자꾸만 내 안에서 파닥파닥 숨 쉬고 있는 상황에서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를 만났다.

4년 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관람한 오페라 리골레토이후 본격 뮤지컬은 처음이라 기대감이 컸다. 막이 내린 이후에도 노트르담 드 파리가 주는 감동으로 한동안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순수한 사랑의 의미가 주는 애틋함이 잉걸불처럼 피어오르는 무대였다. 중세시대 신의 이름으로 희생된 영혼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뜨겁게 타올랐다.

원작자인 빅토르 위고를 처음 만난 건 중학교 때였다. ‘나는 고발한다라는 그 유명한 문구를 처음 대했고 펜의 위대함을 실감했던 인물이었다. 이후 레미제라블(장발장), 노트르담의 파리를 읽었고 나도향의 벙어리 삼룡이를 읽으면서 다시 콰지모도와 에스메랄다를 떠올리기도 했다. (벙어리와 콰지모도, 그리고 주인집아씨와 에스메랄다가 겹쳐지는 분위기 때문이다.)

뮤지컬은 낭만주의 문학의 거장 빅토르위고가 이루어낸 사랑의 판타지와 비극의 의미를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끌어낸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이야기를 거론하는 건 보헤미안 랩소디를 위함이다. 노트르담 드 파리의 품격 있는 감격과, 보헤미안 랩소디의 생동감 넘치는 뭉클함을 비슷한 시기에 만나는 행운을 누릴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공연예술을 좋아하지만 뮤지컬이나 오페라를 만나는 기회는 극히 드물다. 두세 번 반복해서 관람한다는 건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영화보다 공을 들이기가 버겁기 때문에 점차 관심이 멀어진다. 예복이나 정장처럼 옷장에 모셔두는 즐거움은 있지만 막상 꺼내 입을 기회는 점차 사라지는 경우와 비슷하다고 할까?

▲보헤미안 랩소디 사진=네이버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사진=네이버 영화

뮤지컬이나 오페라 공연을 접하기 어려운 대중들에게 영화는 얼마나 고마운 매체인가를 새삼 깨달았다고 할까? 더울 때 찾는 시골 느티나무 그늘처럼 극장의 문을 여는 발걸음은 상쾌하다. 가격과 접근성 면에서 영화는 쉽고 가볍다. 옷차림조차 가뿐하다. 멜로처럼 편안하고 친밀한 영화가 대중의 심금을 울리는 건 쉽게 감정이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영화 자체의 미학적 완성도는 터무니없이 평범하다. 그러함에도 공연이 재현되는 듯 생생한 영화의 힘은 순전히 퀸의 음악이 주는 폭발력이다. 그리고 퀸의 음악을 주도하는 보컬이자 리더인 프레디 머큐리의 열정적인 삶, 그 자체이다.

제목 보헤미안 랩소디는 그룹 퀸의 대표곡이다. 보헤미안은 잘 알다시피 방랑하는의 의미이며 랩소디는 광시곡(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자유롭고 환상적인 혼성음악)’이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현실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음악의 세계를 의미한다. 전문가의 예상과 달리, 대중은 이 노래에 담긴 환희에 찬 광기와 뒤죽박죽된 상상력에 매우 즐거워했다고 한다. 길이가 길면서 가사 자체가 불편한 노래는 대중에게 낯선 매혹으로 스며드는 데 성공했다.

▲보헤미안 랩소디 사진=네이버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사진=네이버 영화

노래의 가사는 친절하지 않은 시처럼 난해하다. 하지만 좋은 시가 그렇듯 제각기 다양한 해석을 유도하면서 스스로 주체로 스며들게 한다. 불가항력의 살인 스토리가 담겨 있고 그에 대한 심판의 언어들이 나부낀다. 대략 더듬거려 보자면, 한 소년이 사람을 죽이고 엄마에게 고백하는 내용이다. 살고 싶다고 하소연하기도 하면서, 어쩌면 다시 볼 수 없을 거라고 체념하는 내용이다. 소년이 죽인 사람이 가정폭력을 일삼았던 아버지라는 해석이 일반적이기도 하다. 오페라의 형식을 가미한 것은 소년의 고백과 소년을 재판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내기 위함이다. 결국, 소년은 죽음을 선고받았고 우리는 소년의 살인이라는 범죄에 담긴 불합리한 상황을 슬퍼하는 후회와 연민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 소리가 나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탄식과 연민의 울림과 뒤섞이는 분위기를 체험한다.

 

프레디 머큐리의 열창과 대중을 움직이는 음악은 함께 부르는 힘이 있다. 우이 아 더 챔피언(We are the Champions)」 「라디오 가가(Radio GaGa)등 쉬운 선율과 그 안으로 사람을 잡아끄는 흡입력이 강하다.

나는 스타가 되려는 게 아냐, 전설이 될 거야.”

프레디는 에이즈라는 병마와 싸워야 했고 독특한 성적 취향으로 비난받기도 했지만 그의 음악을 포함한 불합리하고 난해했던 고독한 삶 자체가 인생의 희노애락미추(喜怒哀樂美醜)를 증명하는 전설이 되었다. 그 누구도 원하는 삶을 살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주어진 삶을 사랑할 뿐이다. “우리는 사회 부적응자를 위해 노래하는 부적응자라고 말하던 프레디 머큐리의 대사가 여전히 귓가를 맴돈다. 영화는 친밀하게 다가와서 끝내 낯선 매혹으로 우리의 영혼을 새로운 세계로 고양한다. 어쩌면 이 영화는 동성애자, 에이즈 환자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과 편견조차 공중 분해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좋은 영화를 가슴에 품고 세상을 사는 일은 비장의 무기를 지닌 것처럼 든든하다. 이 영화가 그렇다.

 

보헤미안 랩소디, 브라이언 싱어 감독, 2018. 미국 ·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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