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의 의미를 곱씹으며 보는 영화 기생충
상태바
제목의 의미를 곱씹으며 보는 영화 기생충
  • 박명순 작가
  • 승인 2022.07.28 22: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명순

▲ 사진=네이버 영화
▲ 사진=네이버 영화

 

3년 전 2019년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황금종려상으로 마케팅에 화룡정점을 찍으며 5월말에 개봉한 영화를 며칠 동안 참으며 버텨냈다. 기대가 크면 당연히 감흥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떠들썩한 분위기에 편승하기가 싫어서이지만 에어컨 바람 때문에 여름에는 영화관이 두렵다는 이유도 있다. 한낮에는 이글이글 불타는 태양열이 뜨겁기는 하지만 초여름의 선선한 공기가 아침저녁 뼛속까지 스며든다. 특별한 영화관 복장이 필요한 건 나 혼자 유별나게 추위를 타는 것이다. 여러 이유로 두 번째 관람을 했는데 비로소 투혼의 연기를 느낄 수 있었다. 처음 볼 때는 연기 따로 영화 따로 감상할 겨를이 없다.

 

▲ 사진=네이버 영화
▲ 사진=네이버 영화

 

물론 등장하는 배우들 모두의 연기가 감탄할 만했지만 송강호의 소름 돋는 연기는 놀라웠다. 조여정의 연기도 딱 어울렸다. 백치미인의 아름다움과 그 어리석음이 겹쳐질 때의 연민과 웃음이 짜릿짜릿한 재미로 스크린의 속살을 가득 채웠다. 캐릭터 한 명 한 명의 개성 있는 표정연기와 보물찾기 식으로 펼쳐진 미장센과 양파껍질처럼 겹겹으로 기생충처럼 살아가는 삶의 장면들은 해석의 재미를 주었지만 삶의 통찰과 비의(秘意)를 일깨우지 못한 채 제각각 흩어졌다.

몇몇 불편한 씬이 있었는데 이른바 19세금이라 할 만한 장면이다. 하나는 성관계 장면이고 또 하나는 칼부림과 피 흘리는 장면이다. 남편은 이 장면이 15세 관람가라는 것에 심한 불평을 토로한다.

19금 장면을 만들었지? 괜히 하나 끼워 넣은 건가?”

이 장면이 하이라이트 아닐까?’

나의 영화이야기는 보는 것, 듣는 것 그리고 순발력 있게 표현하지 못한 다중적 감정을 삭이고 버무려서 스토리텔링을 준비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관객의 시선을 집중하는 그 불편함은 많은 사람들의 욕망과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숨어있음에 집중한다. 굳이 불편한 장면을 응시해야하는 이유는 생략하고.

옷을 벗지 않은 채, 부부의 호흡은 거칠어진다. 그리고 코를 골며 깊이 잠이 든 뒤에야 기태(송강호역)네 가족은 몸을 펴고 탁자 밑에서 살금살금 빠져나온다. 그러다가 텐트의 아들이 신호를 보내자 부부는 잠시 잠이 깨기도 한다. 불빛이 비칠 때마다 동작을 멈추는 기태(송강호), 웃음이 유발되면서도 연민과 서러움이 솟구치기도 한다. 카메라는 많은 시간(10여 분) 소파의 섹스 씬에 집중한다. ‘실신상태로 떡을 치다 잔다며 기태의 아내가 남편에게 카톡을 전송한다. 관객은 이 장면을 보는 10분의 시간 제각각 감정에 부대낀다. 부부의 욕망에 편승하기도 하며 소파 밑에 벌레처럼 숨어있는 기태네 가족을 한심스럽게 여기다가도 결국은 세태풍자의 일면을 이해하며 더러운 세상이라는 한숨을 뱉을 수도 있다.

거실 소파의 정사 장면과 그 아래 탁자에 숨어있는 또 다른 가족들. 두 가족의 상하층의 표현은 너무 직설적이라 재미가 없다. 하지만 그 아래에서 카톡으로 상황을 전달받고 벌레처럼 기어서 이동하는 블랙코미디라니. 게다가 기우(최우식)는 다혜(정지소)가 보내는 카톡에 답을 주느라 안간힘을 쓰는데 과외선생이자 연인관계의 연결고리를 힘겹게 붙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금 이 시각 밤이라는 설정 속에서 대한민국 비정규직과 실업자들 취준비생과 수험생들 그들의 사생활도 소파의 아래쪽으로 겹쳐진다. 밖에는 계속 비가 내린다. 이 비가 물난리를 일으키고 수재민의 고통을 유발하지만, 오히려 폭우를 이용해 텐트를 치고 야외에서 즐기는 다송이와 그 가족들의 휴식과 욕망은 일상의 연속일 뿐이다. 침실이 아니라는 점, 바라보는 시선이 다양하게 열린 공간이라는 점, 부부만 모른다. 어쩌면 개의치 않는 것이다. 입주가정부는 투명인간처럼 취급당한다.

소파의 위아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오직 관객뿐이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현대 한국사회 빈부격차의 비판이라면 이 장면은 명장면이라 아니할 수 없다. 향락을 즐기는 위치는 소파 위이다. 그리고 그 아래 고통스럽게 몸을 구기고 숨어 있는 사람들을 카메라는 스윽 비출 뿐이지만 두 세계는 극명하게 대립된다. 지하실에서는 피비린내가 분탕질을 한다. ‘밑으로 내려가야살 수 있는 사람들끼리의 난투극은 처절하다. 서스펜스와 스릴이 절묘하게 긴장감을 부여하면서 막바지 가든파티와 인디언추장 복장을 한 기태(송강호)와 박대표(신하균). 그리고 지하실을 탈출한 지하실 남자근세의 광기. 결국은 생존권 싸움임을 관객들에게 설득하고 싶었던 것일까.

먹을 것을 위해서 목숨을 건다.”

대사에 대한 감동은 예상보다 약하다. 한 편의 영화에 빈부격차의 한국사회를 담아내면서 배우의 탁월한 연기력과 촘촘한 연출을 통한 다양한 해석의 재미와 작품의 완성도까지 흠잡을 데가 없다면 황금종려상을 받을 만큼의 성공작임에는 틀림이 없다. 아쉽게 느껴졌다면 무엇보다 기대가 컸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봉준호 영화를 볼 때마다 해소되지 않는 극심한 조갈증이 있다. 상업적 흥행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닌가의 의구심 때문이 아니다. 바짝 목이 마르게 문제의식을 키워주지만 오아시스는 제공하지 않는다. 수많은 의문을 남겨줄 뿐, 그 어떤 친절한 답은 정중히 사양한다. 살인의 추억에서 보여준 ‘1970년대 한국사회의 불안감은 이제 기생충으로 살아가는 혐오와 환멸로 돌아왔으니 형언하기 어려운 씁쓸함은 오롯이 관객만이 감당할 몫인가

 

▲ 사진=네이버 영화
▲ 사진=네이버 영화

 

마지막까지 집요하게 등장하는 을 중심으로 스토리텔링을 구성하는 것도 흥미롭지 않을까 싶다. 유학을 떠나는 친구가 귀한 이라며 주고 간 선물. 엄마는 먹을 거나 사오지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도 소중하게 닦는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된다. 복권당첨과 같은 허황한 희망을 주는 이 은 집이 매몰되는 홍수 속에서도 선택됨으로써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후 기우는 이 을 들고 다닌다. 비장한 결심을 한 표정으로 말한다. “돌이 내 몸에서 떨어지지 않아요.” 이때부터 은 비정상(?)적이라 할 권위, 능력의 의미로 전이된다.

그 돌덩이가 들어오고부터 집안에 불운이 시작되었다.

더 아래로 내려가야된다고 말하지만 그 돌덩이를 품은 채로는 결코 아래로 내려갈 수 없다. 가짜 대학생으로 고액과외 가정교사가 되면서 점차 자신의 처지를 망각한다. 딜레마를 겪어야했고 그 대가로 뇌수술을 해야 했지만 이후 고민과 진지함이 사라진듯하다. 당연히 갈등과 고통 또한 사라졌을 것이다. 오직 돈을 벌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삶을 산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우리는 누구나 알 수 있다. 돈을 벌어서 집을 사서 아버지를 구하겠다는 기우의 꿈이 실현 불가능한 자기합리화와 위안일 뿐이라는 것을. ‘이 신분상승의 기회를 잠시 열어줄지 모르지만 결국은 끝없는 추락을 예고하는 것임을.

영화가 끝난 후, 온몸으로 맴도는 상념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그 여운이 짙다는 점은 확신할 수 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봉준호 감독의 광팬은 아니다. 살인의 추억(2003), 괴물(2006), 마더(2009), 옥자(2017), 설국열차(2005), 기생충(2019)까지 비슷한 흐름이 있다. 완성도 높은 대본과 간접적인 사회고발의 컨셉이 얄미우리만치 치밀하다. 하이퍼리얼리즘의 냉혹함이랄까, 눈물겨운 동지의식이 없다. 아니, 그렇게 느껴져서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물론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 해도 천재감독, 황금종려상 이라는 레테르가 붙으면 그 값어치를 해야 한다. 봉준호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00)는 다양한 인물군상의 사생활이 서정성과 사회비판이 비유와 상징으로 녹아 시대를 예리하게 그려내지 않았는가. 이후의 작품들이 채우는 화면은 비유와 상징이 빼곡한데도 불구하고 왠지 공허하다.

영화에서 실세는 박사장(이선균)이다. 그는 절대 권력을 행사하지 않지만 존재만으로 충분히 파워를 지닌다. 지하실의 남자가 그에게 바치는 숭배감이란 구차스럽다. 내 차, 내 집이라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 등장인물 중 오직 한 사람 그만이 돈을 벌어서 월급을 주고 경제를 책임지는 것이다.

그의 존재는 등장인물 모두의 숙주이면서 우리 시대 자본의 표상이다. 그의 연기는 혐오감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역할인가 싶다. 집이라는 공간에서 그는 대접을 받기만 하는 사람이다. 가정부가 사라진 집안에서 갈비찜을 먹고 싶다고 말하며 아내가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이라며 무시하는 발언을 한다. 살림도 못 하고, 요리도 못 한다고 아무렇지 않게 흉을 보는 그에게 운전대를 잡은 기택(송강호)이 하는 말.

사모님 사랑하시지요?”

가정의 건재함을 확인하는 말이랄까, 잠시 사랑의 의미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순간이다.

사랑?”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날리다가 아랫사람에게 품격을 위장하는 말이 목구멍에서 터진다. 흔히 하는 그런 영혼 없는 말이다.

, 사랑하지요. 그럼요.”

냉소적인 표정이 클로즈업된다. 물론 결혼 20년차(큰 딸이 고2임을 감안해서) 부부에게 사랑이란 어휘는 매우 생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이선균의 연기는 그 이상의 감정을 표출한다.

사랑으로 사나, 정으로 사는 거지.”

할 때의 그런 낯섬과는 전혀 다른 색채의 감정이면서도 매우 낯익은 속물적인 맨얼굴. 권력자들이 행사하는 뻔뻔함과 천박함의 다양한 양태들이 상기되는 그런 표정을 연상시킨다. 마치 이만큼 베풀었으면 됐지, 무슨 사랑까지 바라느냐고 말하는 듯하다. 무색무취 존재자의 위상. 자신에게 고용된 운전기사에게 굳이 속내를 숨길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단도직입적 물음에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상식적인 선에서의 품위 손상으로 이어진다. 이선균의 연기는 자신의 영역을 지키면서 선심을 베푸는 평범한 중년 남자를 리얼하게 보여준다. 특권층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만큼 평범해 보이는 건 연출과 연기의 어우러짐이다. 또한 냄새라는 감각을 주요한 상징장치로 활용했다. 영화에서 냄새는 양극화된 사회계층의 선을 넘나드는 보이지 않는 강력한 그 무엇이다. 부당함의 신호이며, 살아있는 생명이고, 견딜 수 없는 악취가 되어 평화로운 가든파티의 안락함을 위협할 수도 있는 그 가난, 범죄, 불평등 고리의 악순환 자체이다.

사회적 계층이 전혀 다른 두 집안을 대변하는 것은 바로 냄새이다. 결국 이 냄새는 가난, 하층민의 표상이다. 누가 누구를 칼로 찌르고 죽이고 죽는 것이 큰 의미는 없다고 보여진다. 감독이 만들어놓은 수많은 해석의 덫에 걸려들어서 영화를 소비하는 것(재미있게 관람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영화 제목을 살인의 추억이라 만드는 것과 비슷한 설정이다. 평면적 윤리를 뛰어넘는 문제의식이라 해야 하나? 어쨌거나 결국 살아남은 자에게 기생 이외 새로운 삶의 방식은 없다. 더 아래로 내려가거나(기택), 아래로 내려간 가족을 구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빨리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거나.(기우)

기생충이란 숙주의 몸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숙주가 죽으면 살 수 없다. 나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 나아가 인간군상 자체를 기생충이라 해석한다. 등장인물이 복잡하지도 않고 많은 편이 아니다. 갈등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지도 않다. 그들은 모두 살아남기 위해서 타인의 삶을 무참히 짓밟는다. 표면적으로 보면 부유한 집의 박사장이 숙주라고 볼 수도 있지만 집을 벗어나 사회구조적 관점에서 보면 그가 가장 커다란 기생충임은 자명하다.

봉준호 감독이 처음 생각했던 제목이 데칼코마니라고 한다. 두 집안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두 집안의 이야기를 사생활의 측면에서 들여다보는 건 흥미로울 뿐이다. 기생충은 공생, 무소유, 타협의 존재라 한다. 숙주에게 해가되지 않게 존재하며 먹는 욕심도 없고 절대 남의 자리를 탐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생충은 봉준호, 디테일의 감독이라 불리우는 그의 작품성향을 잘 살려낸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살아있는 생명들을 모두 싸잡아 기생충이라 풍자하는 메시지 속에서 속이 메스꺼워지는 이 지독한 환멸감을 아, 어쩌란 말인가. 결국 딸 기정이가 묻는 계획이라는 말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시간들이 마지막을 장식한다. 봉준호는 봉준호의 자리가 있고, 채플린은 채플린의 자리가 있다. ‘가난의 자존감을 굳이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더 큰 욕심을 내자면 봉준호의 자리가 천만 흥행이 목표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소수자를 위한 영화를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건 결코 아니고, 흔들리지 않는 당파성의 자리를 지켜낼 수 있기를 감히 바란다. 봉준호라는 세계적인 감독의 앞날에 화려한 상을 뛰어넘는 무한도전의 성찰을 지지하는 이유이다.

 

▲ 사진=네이버 영화
▲ 사진=네이버 영화

 

- 기생충, 한국, 봉준호 감독, 2019년 제작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