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장수상회"
상태바
영화 "장수상회"
  • 박명순 작가
  • 승인 2023.10.12 14: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 장수상회. 자료제공=네이버영화
▲영화 장수상회. 자료제공=네이버영화

건장하던 대학 동기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중견시인으로 세 권의 시집을 낸 후 최고의 비상을 꿈꾸던 중이었기에 더욱 인생무상을 실감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 충격을 다스리면서 나의 마지막 인생길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환갑이 지났으니 이제는 평소의 건강 상태나 나이의 고하가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시아버님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거동은 불편했으나 정신력이 살아있었다. 일기를 쓰셨으며 힘에 겨워 하시면서도 더 많은 말씀을 하고 싶어 하셨다. 시어머님은 병석에 눕자마자 정신력마저 함께 쇠약해 지셨다. 말씀을 전혀 못하시고 인지능력이 유아 수준에 머문듯했다.

평범한 사람이 생의 마지막을 스스로 선택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정신이든 육체든 쇠약해지거나 불치병에 점령당하여 휘둘리며 살다가 최후를 맞이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상관없이 당할 일이지만 말이다. 최근에 남편과 노년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다가 좀 이르다 싶을 때 요양원을 선택하여 입주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도 쉽지 않은 것이 이르다 싶을 때가 언제인지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양가 장수집안의 내력을 고려하여 80쯤으로 일단 잠정적 결정을 내렸다. 설령 자식이라 할지라도 내 인생을 누군가 남의 손에 이끌리고 싶지 않다. 내가 결정한 경치 좋은 요양원에 입주해서 생의 마지막을 기본적인 숙식과 의료혜택을 받으며 살다 마무리하고 싶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지막까지 지금 살고 있는 오래된 아파트에서 정신을 잃거나 거동이 불편할 때까지 살게 될 것이다. 이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자식들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고, 마지막이 참혹해 질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감수해야 한다.

인생을 설계함에 있어서 노년의 삶 또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말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장수상회는 차라리 판타지를 가미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핍진감이 허약했다. 코미디를 가미한 연출이 관객에게는 부담감이 없고 너무 무겁지 않아서 좋은데 어쩐지 맥이 빠지는 기분이다. 가족에 대한 모든 기억을 상실한 아버지를 마주 대하는 비참한 현실을 잊기 위해서 꾸며낸 연극처럼 허망하기만 하다.

연극이 끝나면 그뿐 문제는 조금도 해결되지 않는다. 다만 연극에 몰입했던 그 순간의 행복과 황홀함은 남아 있으니 그것뿐이라도 좋다면 영화에 빠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영화가 현실문제 해결의 짐을 질 필요는 없다. 가볍게 웃으면서 그리고 눈물도 흘리면서 단 몇 분일지라도 문제를 느끼고 고민하고 자신을 반성할 있다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수상회는 맞춤형 가족드라마로 손색이 없다.

알츠하이머 남편과 췌장암의 아내가 함께 보낸 몇 개월이라는 무거운 내용을 담고 있지만 영상은 로맨틱 코미디처럼 잔잔한 웃음이 넘쳐난다. 재개발을 추진하여 이익을 보려는 시장사람들에 맞서는 김성칠 어르신을 등장시켜서 스릴러 기법처럼 전반부와 후반부를 나누어 호기심을 부여한다. 재개발을 반대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고장 나면 다 버리겠다는 거 아니야. 우리 같은 늙은이는 안중에 없다고.“

시간관계를 맞추어서 정리하자면 김성칠 어르신은 장수상회를 운영하며 시장에서 40여 년을 살아온 토박이다. 그런데 점차 기억을 잃어가는 병에 걸려서 급기야 가족과 시장 이곳의 모든 것을 망각한다. 가끔 정신이 돌아오면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내 이름인 임금님을 기억하고자 메모를 열심히 하지만 불가항력으로 정신을 놓게 된다. 그런 자신이 가족에게 짐이 될까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동생이 요양원으로 보내자 하지만 가족들은 이를 완강히 거부한다. 함께 살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이후 같은 장소에서 다른 인물인 것처럼 살아가는 괴팍한 노인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아들을 사장님이라고 부르며 단순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홀로 노인의 삶.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가족들이 보이지 않게 지켜주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김성칠 어르신은 모르는 사람처럼 다가온 자신의 아내와 이름을 주고받으며 설렘의 감정에 빠진다. 자신의 이름은 김성칠이고 아내의 이름은 임금님이다. 데이트도 즐기고 새로운 인생을 꿈꾸면서 보내는 행복한 시간들. 고등학교 때의 첫 만남처럼 서로 이름을 주고받으며 끌리는 마음을 은근히 표현하는 화면의 이면에는 알츠하이머의 비애가 있다. ‘임금님이라는 그 특이한 이름조차 기억 못하는 남편. 하지만 이들은 노년의 김성칠과 임금님의 연인으로 다시 만나 애틋함을 나눈다. 남은 인생이 길고 짧은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70이면 90이나 100세에 비하면 얼마나 젊은 나이인가? 시어머님은 건강에 자신이 있으셨다. 20년 동안 건강검진을 안 받았다는 걸 뒤늦게 알았으니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노화와 병마에 대처하는 방법은 무수하게 많다. 그 중에서 어떤 선택을 한들 후회가 없겠는가?

노인문제를 중심으로 볼 때 영화는 문제점이 많아 보인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요양원에 대한 거부감 문화가 잔존해 있다. 이것은 노인문제 해결에 커다란 걸림돌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김성칠 씨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알츠하이머 환자이다. 그 증상은 심각하다. 가족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는 건 슬픈 일이지만 질환을 받아들이고 치료를 우선으로 추진해야 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또한 인지능력의 저하와 기억상실은 슬픔의 차원을 넘어서 공동체에 미치는 피해와 위험성이 크기 때문에 특별한 치료와 격리의 원칙을 거부한다는 건 설득력이 약하다. ‘장수마트를 중심으로 재래시장이라는 공간을 이상적인 공동체로 부각시키는 것도 한계가 뚜렷하다.

알츠하이머 병세와 관련한 의학적 고증의 문제도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다. 가족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잃은 사람이 혼자서 살아가는 설정이 무책임해 보이는 것이다.

영화적 설정을 지나치게 논리적으로 파고드는 것이 문제가 될 소지가 없지 않지만 어찌되었든 넘겨짚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세인트 빈센트(2015. 테오도어 멜피 감독)에서 빈센트는 아내가 이른 나이에 알츠하이머에 걸려서 요양원에 입원치료중인데 3년 동안 아내의 빨래를 집으로 가져와서 해다 주고, 의사 가운을 입고 들어가서 말벗이 되어준다. 시설이 좋은 요양원의 병원비를 마련하느라 빈센트는 늘 빈털터리로 힘들게 생계를 이어간다.

노트북(2004 제작, 2020 재상영, 닉 카사베츠 감독)의 남편 또한 아내가 치매로 요양원에 입원하자 환자가 되어, 타인처럼 등장하여 아내의 벗으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낸다.

장수상회는 이들 영화에 못지않게 한국인의 정서를 움직이는 힘이 있는데 박근형, 윤여정, 조진웅, 한지민의 열연에 빠져드는 시간, 우리에게 가족이란 무엇인가 뭉클하게 오는 감동이 있다. 그것만으로도 참 좋은 영화이다. 연극으로 상연되면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이유 또한 비슷할 것이다.

그런데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환자보다 환자를 수발하는 가족이 더 힘들다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요즘은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추세라든지, 환자나 가족들이 병원 측에 능동적으로 맞서는 경우가 많다.

노인문제나 불치의 질환으로 죽음 앞에 서야 할 경우에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가 누구도 단언하기 어렵다. 하지만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일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1년이라는 기간이 정해진다면 생업을 포기하거나 많은 비용을 들이면서까지 좋은 여건을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간이 얼마가 될지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가장 합당한 방법을 강구해야 하고 그 상황에서 공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 고마운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전세계에서 최고의 의료제도를 구비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노인문제에도 조금씩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는 고령화로 인해 사회적으로 비중이 커진 노인 요양을 국가적 차원에서 감당함으로써 가족들의 부양 부담을 줄이고 노인들의 자립을 지원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20074월 제정된 노인장기요양법에 의거해 20087월부터 시행되고 있다.

아직 법의 허점이 적지 않지만 노령화 인구의 급증에 따른 제도가 나름 자리를 잡을 것이라 기대한다.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효와 가족애를 기대하기 보다는 현실적인 법적 장치와 제도의 보완을 생각하게 만든 영화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