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의 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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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의 유령
  • 박명순 작가
  • 승인 2023.11.27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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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만난 『오페라의 유령』은 종합예술로서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한 편의 영화가 이토록 폭발적인 정념과 안타까운 여운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 새삼 놀랍고 감탄스러웠다. 작품성과 흥행성을 동시에 만족시킨 영화이기에 음악과 연기에 사족을 달 필요는 없을 듯하다.

필자가 굳이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영화 외적인 것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이다. 이 영화는 나에게 수많은 질문을 품게 하였다.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을 품은 영화는 고정관념을 뒤흔든다. 그만큼 새롭게 세상을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게 한다. 그 질문 가운데 하나는 ‘왜 영화를 보는가’, 이 질문은 당연히‘우리는 영화를 통해서 무엇을 얻는가’와 통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영화는 ‘내가 살아왔던 세상, 내가 살고 싶은 세상, 내가 몰랐던 세상을 체험’할 수 있게 한다. 그 체험이 주는 감동은 현재의 나를 이성(理性)과 무관하게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게 하거나 판타스틱한 세계로 인도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15년 전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만났지만 집중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모임에서 단체관람으로 영화관에 입장했는데 뮤지컬영화에 익숙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영상세계 그 자체에 집중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희미하게나마 잔존해 있는데 외모의 미추(美醜)로 선악(善惡)을 대비시키는 구도에 분노가 폭발하여 음악이며 전체적인 흐름을 놓쳐버렸다. 다양한 문화와 예술을 즐기기에는 식견이 부족했고 신념만 강했다. 당시 민족주의와 페미니즘에 몰입해있던 터여서 오페라와 유령이라는 서구성향의 판타지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독선적 성향도 한몫 거들었을 터였다. 물론 지금도 이 영화에 담긴 외모비하가 거슬리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말 그대로 ‘옥의 티’일 뿐이다.

최근 이 영화를 다시 만났는데 기대 이상 깊이 매료되었다. 같은 영화를 이토록 깊이 풍성하게 읽어낼 수 있을 줄이야, 참으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15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얼마나 달라졌는가? 세월의 무상함조차 느껴진다. 그 변모를 발전과 후퇴의 관점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세월의 흐름은 늘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며 어제와 오늘 우리 모두는 새로운 모습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O.S.T.는 무겁고 음울하다. 유령이 주인공이니 당연히 애상과 비애가 그 중심에 깔릴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아름다운 여인과 흉측한 유령의 만남, 그리고 잘생긴 남자의 청혼과 질투하는 유령의 분노. 고대설화의 한 장면 같은 흐름이다.

유령이 산다는 오페라하우스에서 흉흉한 사건이 벌어진다. 그 과정에서 갑자기 주인공이 배역을 포기하여 신인인 크리스틴이 프리마돈나로 발탁이 된다. 크리스틴은 그동안 보이지 않는 누군가로부터 특별레슨을 받았는데 그 실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특별레슨을 한 인물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등장한다. 가면 없이는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 그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나는 추리기법으로 흥미를 유발한다. 우리는 유령의 존재를 실체적 인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인간 내면의 선과 악으로 이해할 때, 보다 폭넓은 감상이 가능해진다. 판타지 기법을 읽어내는 것이다.

팬텀(에릭)은 태어나면서부터 흉측한 외모로 괴롭힘과 놀림을 받아왔다. 그를 해하려는 사람을 피해서 오페라 하우스의 지하에서 남들의 눈을 피해 살아왔던 세월들을 상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새 그는 가장 낮은 곳에서 오페라 하우스의 모든 것을 장악할 수 있는 실력자로 성장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앞에 나설 수 없는 그가 선택한 건 크리스틴이었다. 그녀에게 자신의 음악을 전수하고 지하세계에서 지상의 무대로 진출하고자 시도한 것이다. 그녀의 아름다움과 선량함에 접근하여 아버지처럼 스승처럼 군림하려했다. 더 나아가 그녀를 통하여 자신의 삶을 보상받으려 한 것이다.

크리스틴은 팬텀(에릭)을 아버지가 보낸 천사라 여기며 존경하고 흠모했으나 흉측한 외모를 보는 순간 자신이 품었던 환상에서 깨어나 그를 떠난다.

크리스틴에게 데이트를 청했던 라울은 극장 후원자이며 번듯하게 생긴 청년이다. 어린 시절 같은 동네에서 자란 소꿉친구이다. 팬텀(에릭)은 음악적 영감을 주었으며 아버지같이 의지할 수 있는 무한한 애정을 느끼면서 깊이 끌렸으나 이제는 아니다. 크리스틴은 오페라의 여주인공이 되었으며 자신을 지켜줄 라울도 있다. 더 이상 지하실의 팬텀(에릭)에게 휘둘릴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팬텀(에릭)은 제거의 대상이 되며 그 앞잡이가 된 건 라울과 크리스틴이다.

가면을 쓰고 무대에 등장한 팬텀(에릭)의 정체를 크리스틴은 직감한다. 전율할만한 노래에 매료되면서도 크리스틴은 가면을 벗겨 그를 궁지에 몰아넣는다. 유령의 정체는 밝혀지고 그를 향해 총을 쏘는 설정은 잔인무도함이 극치에 달한다. 병력을 동원한 경찰과 합류한 무리들이 그 하나를 잡기 위해 극장을 온통 뒤집어 놓는다.

팬텀(에릭)은 자신의 뮤즈이자, 분신과도 같은 크리스틴에게 반복하여 구애하지만 거절당하자 그녀를 납치한다. 크리스틴을 향한 집착은 결국 라울과 크리스틴의 진정한 사랑을 확인하게 만들 뿐이다. 라울은 목숨을 걸고 크리스틴을 구하기 위해 지하세계로 향한다.

지하세계는 버림받은 자, 추방당한 자의 공간이다. 그곳을 지배하는 팬텀(에릭)은 오페라의 무대에 진출했지만 결국 다시 추방당한다. 뒤늦게 그의 아픔을 이해한 크리스틴은 진심이 담긴 키스를 보낸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라울을 지키기 위한 자기희생일 뿐이다.

지하세계와 지상세계는 다시 단절된다. 그리고 수십 년이 흘러서 오페라하우스는 폐쇄되고 마지막으로 남은 물건들이 경매로 처분되는 흑백영상이 지난날의 화려함을 돋보이게 한다. 휠체어에 앉은 라울의 모습은 인간존재의 허약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크리스틴은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팬텀(에릭)의 흉측한 외모와 무모한 도전은 어쩌면 모든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숨은 야망이다. 잠재의식으로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다가 발현되는 야망은 인간에게 축복인지 징벌인지 쉽게 단언하기는 어렵다.

영화는 인간의 다중적인 내면과 예술세계의 복잡성이 만나서 폭발하는 영상을 관객에게 선물한다. 그 안에는 화려한 무대와 아름다운 선율 그리고 바리톤과 소프라노의 화음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다.

『오페라의 유령』은 선악의 대비로 교훈적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영화와는 거리가 멀다. 예술의 세계가 지닌 빛과 그림자, 인간의 이중적 속성을 미추의 상징으로 제시하는 것일 뿐이다.

음악의 세계, 예술의 세계는 지하와 지상을 넘어설 수 있는가? 오페라의 유령이 주는 메시지는 좋은 예술이란 무엇인가? 를 돌아보게 된다. 대중의 인기와 예술적 완성도의 괴리를 생각하게 한다.

“그는 천재예요. 건축가이자 디자이너고 작곡자이자 마술사죠.”

팬텀(에릭)을 아끼는 기리 부인은 악마의 자식이라며 구경거리로 삼았던 잔인한 세상으로부터 그를 구해주었으나 끝까지 지켜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팬텀(에릭)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가능성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는 버림받은 추방자에서 오페라의 숨은 권력으로 스스로를 유령화하였을 때만 존재가 가능했다. 자신의 실력으로 지상세계의 사랑과 예술을 인정받고자 하였을 때 그는 제거되었다. 그의 존재는 지하에서만 허락된 것이다.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지상으로 진출하는 순간 그는 위협적인 존재로서 다수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제거 대상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묻고 싶다. 그에게 겸손의 미덕을 요구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가. 그는 구출의 대상이지 결코 제거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말하고 싶다.

프랑스의 추리 작가 가스통 르루(Gaston Leroux)가 1910년에 발표한 소설을 원작으로 해서 만든 영화다. 1925년에 처음 영화로 제작된 이래 뮤지컬과 영화로 다양하게 제작되어 현재까지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오페라의 유령』, 조엘 슈마허(Joel Schumacher)감독, 2004년 제작, 미국, 1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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