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먼 자들의 도시』와 코로나 팬데믹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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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먼 자들의 도시』와 코로나 팬데믹 사회
  • 박명순 작가
  • 승인 2023.12.21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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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제공=네이버영화
▲자료제공=네이버영화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멀어 운전을 할 수 없게 된 사람 때문에 도심의 도로가 마비된다. 영문을 알 수 없어서 당황한 최초의 시력상실자는 도움을 받아 어렵게 병원을 찾는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며 “백색 안개처럼 물체가 뿌옇다”는 말을 들은 의사는 신체적 결함이 없다며 특이사항이라고 진료기록에 적는다.

이튿날 잠에서 깨어난 새벽, 의사는 자신도 백색실명 상태임을 알게 되어 아내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한다. 전염성이 강한 질환임을 자각한 의사는 병원관계자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아내와 상의 후 짐을 꾸린다. 격리조치가 시행될 것을 직감한 것이다.

상황은 빠르게 진행된다. 어떤 논의나 예고도 없이 병원은 폐쇄되고 그곳 출입자명단이 정부에 넘겨진다. 캐리어를 들어다 주며 이별을 나누던 의사의 아내(줄리안 무어)는 무장경찰들이 총을 들이대면서 휴대폰을 압수하는 상황에서 함께 차에 오른다. “나도 눈이 멀었다”고 말하자 아무런 확인 절차 없이 차는 이동한다.

폐쇄시설은 지금까지와 다른 새로운 사회가 펼쳐지는데 의사와 그의 아내가 있는 1동은 선한 의지가 발현되는 공간으로 3동은 악의 소굴로 변화한다. 총을 들고 시설을 점령하여 식량을 무기삼아 탈취, 폭행, 살인, 강간 등 온갖 악행을 일삼는다.

결국 1동 사람들이 단합하여 목숨을 걸고 대항을 하던 중, 불이 나서 우왕좌왕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이들 가운데 의사의 아내는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이다.

의사의 아내는 왜 전염되지 않는가? 영화는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자연 면역력자의 존재는 의학적으로도 입증이 가능하다. 작품 맥락상 눈 먼 사람들과 함께 기거하는 볼 수 있는 사람의 역할은 중요하다. 목격자가 눈 먼 사람일 때의 한계를 넘어서야하기 때문이다. 눈 먼 사람들의 참상을 고발할 수 있는 기록자가 목격자가 되었을 때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의 중간지점에서 독자와의 소통도 수월해진다. 의사의 아내는 다른 사람들의 눈이 되어 주고 그들을 도와준다. 당연한 말이지만 볼 수만 있어도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아주 많다.

‘본다’는 의미는 장면, 시야, 마음, 생각 등 다의성과 비유와 상징을 폭넓게 넘나들면서 상황을 전개한다.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의 간극은 눈을 떴다 감는 것처럼 단순하면서 오묘하게 진행된다.

의사의 아내는 이곳에서 남편과 젊은 여인이 정사를 나누는 장면도 보게 된다. 당황해 하는 이들에게 “이해한다. 모든 것을 이해한다. 당황하지 마라. 아무도 모른다.”

이 장면에서 ‘본다’는 의미는 ‘제대로 본다’는 것과 통한다. 삶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의미이다. 이해할 수 있다면 용서는 당연히 그 뒤를 따를 것이다. 또 하나, 볼 수 있는 자의 고통에 대하여 영화는 다각적인 신호를 보낸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정사를 나누는 장면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일 것이다. 직시한다는 것의 의미가 지닌 고통스러움을 극적으로 제시하기 위한 장치일 것이다.

시력상실자가 다수인데 단 한 명 볼 수 있는 자가 있다는 설정은 희망과 책임에 대한 메시지일 수도 있다. 의사의 아내는 ‘모든 사람을 보살필 수는 없다며 자기를 챙기라’는 남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환자를 보살피고, 식량문제를 해결하고 위험을 감수하면서 부당함에 항의하고 공동체를 지켜내기 위해 분투한다.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다수의 눈 먼 자들과 혼자 눈을 뜬 자, 어떤 입장을 선택할 수 있을까. 누구라도 어려운 결단이 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의사의 아내처럼 공동체를 위하여 자신을 헌신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실험실처럼 1동의 사람들은 점차 선한 의지가 자라는데 3동의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악을 향해 질주한다. 1동에는 볼 수 있는 의사의 아내가 있으며 3동에는 원래부터 시각을 잃고 생활했던 사람과 조폭 대장이 만나 권력을 휘두른다. 시각장애인을 악인으로 설정한 점이 걸리기는 하지만 비유와 상징으로 읽어야 할 부분이다. 다시 말하자면 남다른 능력을 지닌 두 사람이 그 위력을 개인의 탐욕에 바치느냐 집단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느냐에 따라 그가 속한 공동체가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능력이 탐욕과 결탁하여 수탈과 폭력의 극한으로 치달을 수도 있고, 의사의 아내처럼 끝없는 희생과 헌신으로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것.

인간의 본성이 선인가 악인가부터 환경에 의하여 인간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 그럼에도 희망은 존재하는 것인지 진지하게 젖어드는 시간을 만날 수 있다. 웃음 코드는 없지만 스릴러처럼 긴장감이 넘쳐나면서 철학적 사유를 이끌어 내는 깊이가 있다. 때로는 영화가 철학 도서보다 더 깊은 논제로 우리를 안내한다. 철학적 사유의 위력은 그 무엇보다 우리의 일상을 바꿀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있다.

영화는 본다는 의미를 다각적으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 ‘본다는 것의 의미’는 특별한 능력, 유일함, 사명감으로 확대된다. 헬렌 켈러의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글이 주는 감동을 떠올려 본다. 평온한 시대에서의 아름다운 세상을 ‘본다’는 것과 재난에 처한 상황을 ‘본다’는 것의 의미는 얼마나 판이한가?

1동 사람들과 수용소 탈출에 성공하자 일행 중 한 명이 하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운 좋게도 우린 앞을 보는 지도자가 있어요.”

전염병처럼 이들과 접촉한 사람들이 모두 눈이 멀게 되는 상황은 알레고리 기법이나 가상적 시나리오로 받아들여졌으나 코로나 19 팬데믹을 겪으면서 현실적으로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인류는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염병 시대를 2년 이상 넘어섰다. 설마 했던 일이 일상을 마비시키는 현실로 닥쳐온 것이다.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눈이 멀어 격리되고 일상이 송두리째 파괴되는 상황과 흡사한 점들이 많다.

전 세계에서 자행되는 감금과 격리는 전염을 막기 위한 필요에서 제기되었으며 나라별로 그 양상이 다양하지만 코로나 감염자를 대하는 피해자적 차별의 시선은 대체로 공통된다고 하겠다.

원작자 주제 사라마구는 포루투갈 출신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로 그의 작품은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오가며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꿰뚫어 이야기로 풀어낸다. 『눈 먼 자들의 도시』는 그가 73세에 마술적 리얼리즘의 기법을 적용하여 발표한 장편 소설이다.

영화가 채워주지 못한 사라마구의 문체를 몸으로 체험하고 싶다면 소설을 읽는 것도 좋을 것이다. 소설과 영화를 넘나드는 특별한 즐거움은 영혼과 육체의 만남처럼 신세계의 발견일 수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영화는 끝났으나 사유는 계속된다. 수용소 생활 이전과 이후 사랑과 자유와 생명의 소중함을 새롭게 깨달은 건 다행스럽지 않은가. 팬데믹 시대에 갇힌 우리 또한 다가올 미래의 희망을 포기할 수는 없다. 눈을 크게 뜨고 함께 집중해야 하는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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