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순의 영화이야기=『집의 무게와 가족의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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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순의 영화이야기=『집의 무게와 가족의 굴레』
  • 박명순 작가
  • 승인 2021.01.22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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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버트 그레이프
▲ 길버트 그레이프 포스터사진=네이버 영화에서
▲ 길버트 그레이프 포스터사진=네이버 영화에서

 

꽃게찜을 대접하겠노라 친정 부모님을 모시고 늦가을 대천으로 떠났다. 막상 대접은 초라했지만 만추(晩秋)는 풍성했다. 공주에는 된서리가 내렸는데 대천의 가로수와 칠갑산의 가을 단풍은 몰락을 향한 절정의 색채가 찬란하게 불타고 있었다. 노환의 부모님과 함께하는 길 떠남은 늘 지상에서의 마지막 여행처럼 절박했다.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작은 사고가 조마조마 따라붙는데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친정엄마가 차멀미를 하면서 게워낸 토사물을 치우느라 버린 봉투에 틀니가 섞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채는 바람에 우왕좌왕 하다가 저녁시간을 놓쳤다.

이튿날 100킬로 가까이 반복하면서 오던 길을 되짚어 일곱 개의 쓰레기통을 뒤져서 찾아낸 틀니는 반전의 선물이 되었다. 꽃게찜 대신 틀니로 남은 가족여행은 12일의 밋밋했던 코스에 추억의 무늬를 강렬하게 새겼다. 토사물과 뒤섞인 틀니를 찾아내 마침내 엄마에게 드릴 때, 박하사탕의 향이 막힌 가슴을 뚫었다. 그 개운한 쾌감. 여행을 통해 가족으로 지워진 삶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고 싶었던 나의 불순한 욕망은 그만큼의 적절한 대가를 치른 셈이다.

 

▲ 길버트 그레이프 한장면 사진=네이버 영화
▲ 길버트 그레이프 한장면 사진=네이버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는 가족의 굴레에 갇혀버린 길버트(조니댑)의 일상을 다루는 무겁고도 진지한 영화이다. 그 무게감을 화려한 색감과 발랄한 대사가 받쳐준다. 젊은 시절의 조니댑과 디카프리오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잘 생긴데다 연기력까지 갖춘 길버트와 어니(디카프리오) 역을 맡은 배우들의 얼굴은 낯선 매력이 넘친다.

엄마의 몸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삐걱거리고 무너져 내리는 이층집은 아버지의 유산인데 길버트의 가족은 흔들리는 그 계단처럼 아슬아슬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니까 균열 중인 집은 길버트 가족의 현실에 대한 비유인 셈이다. 생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버지 대신 집을 책임져야하는 길버트의 힘든 일상을 연상시킨다. 감당할 수 없는 생의 무게감은 고도비만인 엄마의 몸으로 표현되는데 길버트는 집의 일부가 되어 움직임이 힘든 엄마 대신 장애가 있는 남동생(어니)을 보살펴야 한다. 어니는 열 살을 넘기기 힘들 거라는 의사의 말을 비웃듯 다행인지 불행인지 18세 생일을 앞두고 있다. 어니의 생일파티를 준비하는 가족들의 들뜬 분위기에 길버트는 진심으로 맞장구를 치지 못한다. 집을 떠나고 싶다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 내적 방황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을 팽개치지 못했지만 길버트는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유부녀의 유혹에 넘어가서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왔고, 가끔은 장애인 남동생이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자신의 몸치장에만 관심 있는 여동생을 보면 울화가 치민다. 의무에 얽매어 억지로 가족과 살고 있는 자신이 싫은 것이다.

길버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일까? 여자 친구의 물음에 길버트는 가족이 함께 살 집과 여동생의 취직 그리고 엄마가 에어로빅이라도 다녔으면 좋겠다고 한다.

너를 위해 원하는 건 뭐야?”

오래도록 망설이다가 찾아낸 길버트의 진정한 욕망.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길버트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래서 영화의 원제목도 ‘What’s Eating Gilbert Grape’(길버트 그레이프를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이다. 길버트에게 좋은 사람이란 가족을 사랑으로 감당하는 사람인데, 자신이 없는 것이다. 지하실에서 시체로 발견된 아버지와, 그 충격으로 7년째 두문불출 집에 머무르며 살이 찐 몸 때문에 한 발자국도 움직이기 힘든 엄마가 그렇다. 게다가 형은 가족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집을 나갔으니, 길버트는 어린 나이에 가장의 역할을 떠맡았다.

길버트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과 가족이 주는 압박감 사이에서 고통스러워하지만 아픈 만큼 성장하고 가족애의 의미는 확장된다. 자신의 존재가치가 결국 엄마와 동생들 때문임을 길버트는 감지하고 있었다. 여자 친구를 만나달라고 엄마를 설득하는 건 이 때문이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 가족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내적 욕망에도 솔직해야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길버트는 어렴풋이 안다. 집을 떠나고 싶다는 내적욕망은 배키와의 만남을 키워나가는 힘이 되고 새로운 성장의 원동력이다.

여자 친구 배키와 바라보는 집은 낯설었다.

짓눌려서 막막하고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집이 작고 초라하게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작다니,” 길버트의 놀라움은 곧 자각이다. 가족의 무게에서 벗어나는 출구가 보이는 것이다. 길버트를 힘들게 하는 것은 집(가족) 자체가 아니라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는 두려움일 지도 모른다. 가족을 책임진다기보다 함께 살아간다는 자각. 장애인 동생의 보호자가 되어 놀림을 받거나 폭행당하지 않도록 방패막이로서의 동행자가 되는 것에 대한 자각이다.

길버트는 마침내 집을 떠난다. 집을 불태워 엄마의 시신을 장례지내는 장면은 처절하지만 외롭지 않다. 엄마가 구경거리가 되지 않길 바라는 길버트 가족 모두의 마음이 모아졌기 때문이다. 길버트 가족들이 동행자로서의 새로운 해법을 찾아낸 것이다. 아버지의 집을 태우면서 아버지 대신 살아왔던 삶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찾게 되는 비유적 장치는 이중적이다. 배키와의 지속적 만남에 대한 가능성 그리고 가족과의 동행.

가족이 함께 사는 이유는 무 토막 자르듯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이유를 묻는 건 때때로 스스로 내적욕망을 들여다보는 일이라 중요하다. 가족으로 인해 걸머진 짐만큼 내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느낌 그건 내적욕망에 충실한 결과이다.

이 영화는 가족을 위해 감당할 수 있는 무게의 짐을 묻는 영화처럼 읽힌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는 무엇인가를 솔직히 묻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일깨운다. 때로는 불필요한 가족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도록 통째로 불태우는 그런 행위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일깨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불태워야 하는 집의 무게는 얼마인가?

(1993 제작, 미국, 라세 할스트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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