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 공주취회 및 동학교도를 탄압으로 대응했으나 파면·유배당하고, 그의 선정비가 논산·예산·청양에 전해지고 있다
동학농민혁명과 관련 있는 인물, 조병갑과 조병식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어 발품 팔아 조사했습니다. 하고 나니 조병직에 대한 정리도 필요하여 추가 조사하였습니다. 그 결과, A4로 200쪽 되는 글을 16회로 나누어 공유하고자 합니다. 재미없는 글이긴 하나, 조병갑ㆍ조병식ㆍ조병직을 알면 동학농민혁명을 아는 데 나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인간 전병철(작가)
5. 두 번째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과 동학농민혁명
■1891 경기도 관찰사 / 중추부 지중추부사 / 독판내무부사 / 황해도 관찰사(임명되었다 취소) / 충청도 관찰사(2)■ 조병식은 1891년(고종 28) 3월 13일 경기감사(京畿監司, 경기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다시 외직으로 나갔다. 경기감사로 임명된 다음 날인 3월 14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도 임명되었는데, 지중추부사는 중추부(中樞府, 중추원)의 정2품 관직인 지사(知事)로, 정원은 6명이었다. 위로는 영사(領事, 정1품) 1명과 판사(判事, 종1품) 2명이 있고, 아래로는 동지사(同知事, 종2품) 8명, 첨지사(僉知事, 정3품) 8명 등이 있었다.
1891년 6월 28일에는 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 오늘날 내무부 장관)의 임무를 맡았으며, 9월 19일에는 황해감사(黃海監司, 황해도 관찰사)로 임명되고, 같은 날 충청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로 단독 추천되었다. 그리고 황해감사 이경직(李耕稙)이 그대로 황해감사로 유임되자, 조병식은 10월 22일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결국 경기감사 조병식은 황해감사 임명되었다가 며칠 만에 충청감사로 임명되어 조병식은 계속 외직에 근무하게 된다.
【독판내무부사에 경기감사 조병식을 차하하라는 전교】 조창하에게 전교하기를, “경기감사 조병식을 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로 차하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010책(탈초본 137책) 고종 28년 6월 28일 경신 10/31 기사 1891년 光緖(淸/德宗) 17년
【조병식을 황해감사로 제수】 전교하기를, “충청감사의 자리가 비어있으니 황해감사 이경직(李耕稙)을 제수하고, 황해감사의 대임에 경기감사 조병식(趙秉式)을 … 제수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013책(탈초본 137책) 고종 28년 9월 19일 경진 7/34 기사 1891년 光緖(淸/德宗) 17년
【충청도수군절도사에 조병식을 단독 추천】 병비(兵批)에, … 충청도 수군절도사에 조병식(趙秉式)을 단부하고, … 겸총리사(兼摠理使)에 민영상(閔泳商)을 단부하였다. -『승정원일기』 3013책(탈초본 137책) 고종 28년 9월 19일 경진 27/34 기사 1891년 光緖(淸/德宗) 17년
【충청감사에 전 황해감사 조병식을 제수하라는 전교】 김경규에게 전교하기를, “충청감사의 자리가 비어있으니, 전 황해감사 조병식(趙秉式)을 제수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3014책(탈초본 137책) 고종 28년 10월 22일 계축 4/10 기사 1891년 光緖(淸/德宗) 17년
고종은 충청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도순찰사 공주목사(忠淸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都巡察使公州牧使)로 제수받은 조병식에게 1891년 12월 1일 교지를 내려 두 번째 충청감사로 중책을 맡긴 뜻을 깊이 헤아려 감사의 직무를 다하는 데 힘쓰라고 당부하였다. 교지에는 이전에 조병식이 방곡령을 밀고 나간 것에 대해 ‘곡식을 무역하자는 일본 사람들의 요청을 물리쳐서 먼 지역을 위엄으로 복종시켰다’라며 칭찬하는 내용도 있고, 강화유수 겸 진무사로 있을 때 요충지를 잘 다스렸다고 칭찬하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공적을 크게 여겨 두 번째로 감사의 중책을 맡긴다는 내용의 충청감사 조병식에게 내린 교서】 왕이 이르기를, “황해감사에 제수했던 총명(寵命)을 돌려 은혜로운 윤음(綸音)을 크게 펴서, 충청감사의 중책을 맡기니 감사(監司)를 두 번 맡는 것이다. 이러므로 큰 공적에 대해 내가 크게 여기고 가상하게 여겨서, 이에 많은 말을 하고도 또 거듭 되풀이하여 말하는 것이다. 경은 대대로 벼슬한 전형적인 가문이며 고관(高官)으로서 훌륭한 인망이 있다. 총명하고 기억력이 좋은 자질은 이미 뛰어난 문장력에 나타났고, 치밀하고 자세하며 숙련된 재주는 작은 법도도 빠뜨리지 않았다. 나라를 빛나게 하는 데에 훌륭한 이름을 드날려 한원(翰苑)에 오르고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으며,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큰 계책을 펴서 정부(政府)를 관장하고 외무(外務)를 감독하였고, 곡식을 무역하자는 일본 사람들의 요청을 물리쳐서 먼 지역을 위엄으로 복종시켰다. 전형(銓衡)하는 직임을 맡은 이조의 장관이 되어서는 공도(公道)를 널리 펴지게 하였고, 보장(保障)이 되는 강화(江華)를 진무(鎭撫)하게 되어서는 군사를 단련시키고 무기를 정밀하게 하였으며, 기전(畿甸)의 요충지를 관할하게 되어서는 관리가 두려워하고 백성이 은혜롭게 여겼다. 돌아보건대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으니, 어찌 보탬이 적다고 하겠는가. … 백성들을 품고 보호하는 데에 방법이 있으니, 그 누구에게 맡겨야 하겠는가. 이에 경에게 충청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도순찰사 공주목사를 제수하노니, 경은 능히 중책을 맡긴 나의 뜻을 체득하여 힘써 감사의 직임을 다하는 데에 힘쓰라. 경이 감사로 있을 때의 치적을 칭송하는 노래가 아직 전하고 있으니, 응당 지방으로 부임하는 정채(精彩)가 전보다 배나 될 것이다. …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는 것이니, 잘 알았으리라 생각한다.” 하였다. 수찬 윤종영(尹鍾永)이 지어 올렸다. -『승정원일기』 3016책(탈초본 137책) 고종 28년 12월 1일 신묘 25/28 기사 1891년 光緖(淸/德宗) 17년
■1892기사(?) / {징계(감봉)}■ 양주조씨대종회 족보 ‘조병식’에 대한 기록 뒷부분 “高宗二十九年壬辰入耆社”에 따르면, 조병식은 ‘고종 29년 임진년(1892), 기사에 들어갔다’라고 밝히고 있다. 기사(耆社)는 70세 이상 정2품 이상의 중신(重臣)을 경로하고 예우하기 위해 만든 기구로, 기로사(耆老社)․기로소(耆老所)․기소(耆所)라고도 하였다. 인원은 왕을 포함하여 제한이 없고, 나이와 관직에 따라 기로소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이들을 기로소 당상(堂上)이라 불렀다. 기로소는 왕과 조정 원로의 친목, 연회 등을 주관하고 명부를 관리하는 등의 일 외에는 별다른 직무가 없지만, 관리로서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을 큰 명예로 여겼다.
조병식이 70세로 기사에 들어갔다는 1892년은 그가 1823년 출생하였다는 것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양주조씨대종회 족보 ‘조병식’에 대한 기록 앞부분에서는 “壬辰(一八三二)生”이라고 하여 조병식이 1832년생이라고 밝히고 있다. 같은 족보에 서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기로소는 70세 이상 정2품 이상의 관리에게 자격이 부여되었지만, 통상적으로는 기로(耆老)는 ‘60세 이상의 노인’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1832년생인 조병식이 60세쯤 되는 1892년에 기사에 들어갔다고 기록한 것이 아닌가 싶다. 더구나 1892년 당시 조병식은 충청도 관찰사로 있었는데, 예전 같으면 60세 만해도 꽤 많은 나이였다. 과연 70세 나이의 중신을 지방 관리로 근무하게 했을까 싶다. 60세라면 몰라도 말이다. 한편, 1901년 8월 16일 조병식이 올린 상소에 “다행히 성대한 시대를 만나 지금 이렇게 기로사(耆老社)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으니, 병은 비록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신에게는 실로 영광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1901년 70세(만 69세)로 기로소 당상이 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런 점에서 조병식의 출생 연도는 1823년보다 1832년이 맞지 않을까 싶다.
○조병식 징계(감봉)○ 1892년 9월 2일 조병식이 올린 장계가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공주 쌍수산성(공산성) 안의 향사당(鄕射堂: 수령을 보좌하고, 향리를 감찰하는 고을 사림들로 조직된 향촌 자치 기구인 향청·유향소 건물)이 오래전에 화재로 사라진 것을 안타깝게 여겨 다시 짓게 되었다. 이때 충청감사 조병식은 왕께서 직접 건물 현판 글씨를 써 내려주는 ‘어필사액(御筆賜額)’를 청하는 장계를 올렸다. 이에 대해 의정부에서는 어필사액은 왕이 알아서 내리는 것이지 아래에서 청하는 게 아니라고 꾸짖으며 올라온 장계를 되돌려 보내고 해당 관리에게 죄를 묻을 것을 왕께 청하였다. 한마디로 오만(放恣)하고 방자(傲慢)하다는 것이다. 예의가 없고 건방지다는 것이다. 이에 조병식은 감봉 처분을 받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조병식은 상소를 올려 법대로 처벌하고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책임으로 사직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왕은 “사직하지 말고, 감사의 책무에 더욱 힘쓰라”라고 하였다.
【공주 향사당의 어필 사액을 청한 충청감사 조병식에게 월봉의 형전을 시행할 것 등을 청하는 의정부의 계】 한광수가 의정부의 말로 아뢰기를, “방금 충청감사 조병식의 장계에 대한 등보(謄報)를 보니, 공주 판관 송병종(宋秉琮)의 첩정(牒呈: 하급 기관에서 상급 기관에 직무에 관한 사항의 보고 및 청원을 위해 올린 문서)을 일일이 들어 말하기를, ‘본주(本州)의 쌍수산성(雙樹山城)에 어필(御筆)로 써서 내린 향사당(鄕射堂: 조선시대 향촌 자치 기구로 이용된 청사)은 지지난 기묘년(1819, 순조 19)에 화재로 소실되어 온 고을 사람들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당우(堂宇)를 중건하려 하니, 어필 사액(賜額)을 내리도록 묘당(廟堂: 의정부)으로 하여금 품지하여 분부하게 해주소서.’ 하였습니다. 쌍수산성의 옛 자취가 사라져 전해지는 것이 없으므로 사림이 탄식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편액을 써서 반포하는 일 같은 경우는 아래에서 우러러 청하는 것이 아니니, 비록 읍보(邑報)로 말미암아 그렇게 한 것이지만 잘 살피지 못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원래의 장계를 도로 내려보내되, 해당 도신(道臣)은 월봉(越俸: 잘못을 저지른 관리의 봉급을 감봉함)의 형전(刑典)을 시행하고 해당 수령은 함사추고(緘辭推考: 6품 이상 관리가 가벼운 죄를 지었을 때 서면으로 그 죄과를 심문하던 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승정원일기』 3026책(탈초본 138책) 고종 29년 9월 2일 정해 8/17 기사 1892년 光緖(淸/德宗) 18년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충청감영(忠淸監營, *감영은 관찰사가 직무를 보던 관청, 오늘날의 도청)이 있는 공주에 동학교도들이 모여 교조신원운동을 펼쳤다. 동학농민혁명의 불씨가 공주에서 달아오르기 시작하였다.
○공주취회(1차)○ 1892년 10월 20일경 서병학(徐炳鶴)·서인주(徐仁周)·손병희(孫秉熙)를 비롯한 동학교도 1천여 명이 충청감영이 있는 공주에 모여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신원(伸冤: 억울함을 풀어줌)과 함께 동학에 대한 탄압을 중지해 주기를 호소하는 교조신원운동을 펼쳤다[제1차 공주취회(公州聚會), 공주집회]. 당시 동학은 금지된 상태였다. 1864년 교조 최제우가 좌도난정(左道亂政: 삿된 도로 정도를 어지럽힘)의 죄목으로 처형된 이후 동학은 탄압을 받아왔다. 그럼에도 동학의 교세는 수그러들지 않고 1890년대 초반 삼남 지역(충청·경상·전라도)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로 확산하였다. 이에 당황한 조정은 1892년 1월 동학을 금지한다는 ‘동학금단령(東學禁斷令)’을 내렸으며, 이에 동학금단령을 빙자한 탐관오리들의 동학교도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동학교도들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는 가운데 동학의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은 청주 일대에 접소(接所: 동학의 집회 장소)를 정하고 공주, 전주 등지를 돌며 포교 활동을 펼쳤다. 이때 서병학과 서인주는 최시형에게 교단에서 시급히 할 일은 교조 신원이라고 주장하며 교도들의 복합 상소를 건의하였다. 최시형은 교조 신원의 당위성을 인정하며 교조신원운동을 허락하였으나, 복합 상소는 반대하였다. 이에 동학교도들이 충청감영이 있는 공주에 모여 교조신원운동을 펼치게 되었다.
1892년 10월 20일 공주 충청감영에 모임 동학교도들은 공주의송소(公州議送所) 이름으로 「각도동학유생의송단자(各道東學儒生議送單子)」를 충청감사에게 제출하였는데, 의송단자는 일반인이 관찰사나 순찰사 등에게 올리는 소장(訴狀: 상소하는 장부)으로, 일종의 민원서(民願書, 진정서)이다. 동학교도들이 제출한 의송단자 내용은 ‘동학은 이단이 아니라 유불선 3교의 장점만을 취한 것이기에 유교와 다를 바 없으며, 이단의 무리로 몰린 교도들을 석방해 줄 것과 교조 최제우의 신원을 조정에 전달해 주기를 호소’하는 것이었다.
충청감사 조병식은 10월 22일 ‘동학은 정학(正學)이 아니라 이단이며 단지 사학(邪學)일 뿐’이라고 규정하고, “동학을 금하고 금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조가(朝家: 조정, 정부)의 처분에 달린 것이므로 감영에 와서 호소할 일이 아니다.”라고 답변하면서 사실상 동학교도들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10월 24일 각 지방 수령에게 ‘동학을 금한다는 핑계로 불법적인 수탈을 하지 말라’는 내용의 관자(關子: 동등한 관청이나 아래 관청에 보내는 공문서)를 내려 우호적인 자세를 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조병식은 여관과 식당을 생업으로 하는 이들에게 엄한 처분을 내려 동학교도들에게는 밥을 팔지 못하게 하고, 밥을 파는 이들을 모두 옥에 가두었다고 한다. 그는 바람에 동학교도들은 먹을 길이 끊어져 결국 해산하였다고 한다.
【충청감영에 모인 천여 명의 동학교도들을 엄한 처분을 내려 내쫓음】 임진년(1892) 10월 26일 동학도 천여 명이 금영(錦營, 충청감영)에 모여 동학을 행하라는 취지로 감히 정소(呈訴: 소장을 관청에 내어 정식으로 청원·소송을 제기하는 행위)하자, 금백(錦伯,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씨가 엄한 처분을 내려서 내쫓았다. 또한 금부(錦府, 공주부) 안에서 여사(旅舍)로 생업을 하는 백성 중 동학도에게 밥을 파는 자는 모두 옥에 가두게 함으로써 먹을 길을 끊으니 동학도가 모두 해산하였다고 한다. (주석)조병식(趙秉式)씨가 엄한 처분을 내려서 내쫓았다. 동학도가 공주에 집결한 것은 10월 20일경으로, 동학도의 정소에 대해 충청감사가 답을 내린 날은 10월 22일이었다. -『시문기(時聞記)』 임진년(1892)[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국근대사료DB > 동학농민혁명자료총서 > 시문기 > 임진(壬辰)]
이처럼 교조 신원을 호소하고 동학을 탄압하는 것을 중지해 줄 것을 호소하기 위해 공주에 모인 동학교도들에 대해 충청감사 조병식은 민원을 거절하는가 하면, 책임을 회피하고, 겉으론 우호적인 척하면서 뒤로는 동학교도를 탄압하는 가운데 공주집회를 해산시켰다. 하지만 교조 신원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동학교도의 시위는 공주집회가 끝이 아니었다.
여하튼 조병식은 공주취회를 탄압한 장본인으로서 동학농민혁명의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라고 볼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이 공주취회부터 시작하였다면 동학농민혁명은 조병식으로부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고부군수 조병갑 이전에 충청감사 조병식이 있었다.
○삼례취회(1차)○ 공주집회에서 충청감사 조병식이 각 지방 수령에게 동학교도에 대한 불법적인 탄압을 금하는 공문을 내린 일에 한편 고무되기도 한 동학교단은 1892년 10월 27일 각처의 두령들에게 “포내(包內) 도우(道友)를 관섭(管攝)하여 일제히 삼례역(參禮驛)에 래회(來會)하라”는 통유문(通諭文)을 띄웠다. 이에 수천 명의 동학교도가 삼례에 모여들었으며, 모여든 교도들은 전라감사 이경직(李耕稙)에게 ‘수도인(修道人) 상해(傷害)’와 ‘약재살인(掠財殺人)’ 행위를 규탄하는 의송(議送)을 제출하였다[제1차 삼례취회(參禮聚會), 삼례집회].
○삼례취회(2차)○ 1892년 11월 1일 ‘삼례도회소(參禮都會所)’ 이름으로 동학교도들이 다시 전북 완주군 삼례읍에 모여 11월 1일과 7일 2회에 걸쳐 ‘교조 최제우의 정당성과 동학 탄압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자신들의 요구를 국왕에게 전해줄 것을 청원하는 소장(訴狀)을 전라감사 이경직에게 제출하였다[제2차 삼례취회(參禮聚會), 삼례집회].
○공주취회(2차)○ 1892년 12월 1일 공주·옥천·영동·환강(황간)·서영·신도(신도안) 등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 동학교도 1만 7천여 명이 공주에 다시 모여 ‘동학을 인정하고, 관리들이 동학교도로부터 받은 뇌물을 되돌려 줄 것’ 등을 요청하는 내용의 소장(訴狀)을 충청감사 조병식에게 제출하였다. 지난 10월에 이어 또다시 시위하며 탄원서를 제출하였다[제2차 공주취회(公州聚會), 공주집회]. 공주에 다시 동학교도들이 모이자, 충청감사 조병식은 해산 명령을 내렸다. 이에 동학교도는 대부분 공주에서 해산하였으나, 일부 동학교도들은 해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주·신도 등지에 다시 모여 집회를 이어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교조 신원과 동학 인정을 요구하는 동학교도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시위를 이어가는 동학교도들에 대한 탄압은 여전하였다.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 1892년 11월과 12월, 조병식이 선정을 베풀었다는 비석(비갈)이 논산 노성면과 부적면에 세워졌다. ‘순찰사조공병식영세불망비(巡察使趙公秉式永世不忘碑)’와 ‘도순찰사조공병식애민선정비(都巡察使趙公秉式愛民善政碑)’가 그것이다. 논산시 노성면에 있는 조병식 영세불망비는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이 선정을 베풀다 것을 잊지 않겠다고 세운 것으로, 그의 공적이 비갈에 새겨져 있으나 마모가 심해 글자를 파악하기 어렵다. 노성면 읍내라 번영회관 앞에 비석군에 있었으나 현재는 노성주민자치센터 앞으로 옮겨져 있다. 논산시 부적면에 있는 조병식 애민선정비는 충청감사 조병식이 은진(恩津) 지방을 순찰할 때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주고 보살펴준 일을 기리고자 세웠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그의 공적이 비석에 새겨져 있으나 마모가 심해 글자를 파악하기 어렵다. 현재 도로와 건물 구석에 일부는 땅에 묻힌 채 서 있다. 관리가 되지 않고 방치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조병식 영세불망비(순찰사조공병식영세불망비)❚
∙현재 위치_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230-1(노성산성길 9) 노성주민자치센터 앞
∙건립 시기_1892년 11월
❚조병식 애민선정비(도순찰사조공병식애민선정비)❚
∙현재 위치_논산시 부적면 마평구리 75(부적로 2) 부적식당 앞 구석
∙건립 시기_1892년 12월 20일
1893년 2월에도 충남 예산에 조병식 선정비가 세워졌다. ‘관찰사조공병식영세불망비(觀察使趙公秉式永世不忘碑)’가 그것이다. 1893년 2월이면 교조신원운동으로 시국이 어수선한 때이다. 이럴 때 선정비가 세워졌다.
❚조병식 영세불망비(관찰사조공병식열세불망비)❚
∙현재 위치_충남 예산군 오가면 역탑리 238-2(오가중앙로 56-5) 비석군(역탑1리마을회관 앞)
∙건립 시기_1893년 2월
○서울 광화문 복합상소○ 1892년 10월부터 동학교도들이 공주와 삼례 등에서 여러 차례 모여 교조 신원과 동학 인정 등을 바라는 상소를 올리며 시위하였지만, 충청감사 조병식과 전라감사 이경직(李耕稙, 1841~1895)은 ‘동학을 금지하고 안 하고 하는 일은 관찰사가 결정할 일이 아니고 조정을 결정할 일’이라고 하면서 책임 회피하였다.
이에 동학교도들은 1893년 2월 11일(양력 3월 28일)~14일에 서울 광화문 앞에 대규모로 모여 엎드려 곡(哭)하며 집단으로 임금에게 상소하였다[광화문 복합상소(光化門伏閤上疏)]. 이에 고종의 전교를 내려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 그 업에 임하라. 그러면 소원에 따라 베풀어 주리라” 하였다. 동학교도들은 왕의 말을 믿고 해산하였다. 그러나 약속과 달리 조정은 동학교도들을 체포하는 등 거세게 탄압하였다.
○보은취회○ 광화문 복합상소 이후 정부가 동학에 대한 탄압을 더 강화하자, 동학교단 지도부는 이에 맞서 대규모 집회를 계획했다. 2대 교주 최시형은 1893년 3월 10일 통문(通文)을 보내 교조 최제우가 처형당한 날을 맞아 충북 보은에 집결할 것을 명령했다. 마침내 충청도·전라도·경상도를 비롯해 강원도와 경기도 등 각지의 동학교도 3만여 명이 충북 보은군 산외면 장내리(帳內里)에 수만 명 동학교도가 다시 모였다. 이들은 3월 11(양력 4월 27일)일부터 4월 2일(양력 5월 17일)까지 교조 신원 요구는 물론 탐관오리와 세도가(勢道家)들을 처단할 것과 척왜양(斥倭洋: 왜와 서양을 배척함)을 주장하며 시위를 계속하였다[보은취회(報恩聚會), 보은집회].
○원평취회(금구취회)○ 또 남접 중심의 동학교도들이 전북 금구현 원평리(金溝懸 院坪里,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장터에 대규모로 모여 외세 반대와 탐관오리 축출 등을 주장하며 1893년 3월 11일부터 4월 5일까지 시위를 이어갔다[원평취회(院坪聚會), 원평집회].
■1893 {충청도 관찰사에서 파면}, 오위 상호군■ 1893년(고종 30) 3월 충북 보은에 전국 동학교도 수만 명이 집합하자 보은군수 이중익(李重益)과 충청감사 조병식은 해산 명령을 내리며 탄압으로 맞섰다. 정부는 보은 출신 어윤중(魚允中)을 양호선무사(兩湖宣撫使)로 삼아 보은에 급파하였다. 사정을 살핀 어윤중은 “탐관오리가 횡행하는 것을 분히 여겨 백성을 위해 그 목숨을 바치려는 자가 여기에 들어왔고, 외국 오랑캐가 우리 이권을 빼앗는 것을 통분히 여겨 그들을 내쫓는다고 큰소리치는 자가 여기에 들어왔고, 부정한 관리의 학대를 받아도 호소할 곳 없는 자가 여기에 들어왔고, 농사를 지어도 남는 곡식이 없고 장사를 해도 남은 이익이 없는 자가 여기에 들어왔고, 빚을 지고 모진 독촉을 견디지 못하는 자가 여기에 들어왔다”라고 보고하였다. 어윤중의 보고를 받아들인 정부는 책임을 물어 충청감사 조병식을 파직하였으며, 군대를 동원한 어윤중의 압박과 회유 속에 최시형은 해산을 명령하였다.
○조병식 파면○ 여하튼 조병식은 동학교도 집회를 제대로 막지 못하고 오히려 동학교도가 확산하는 것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책임으로 충청도 관찰사에서 파직(파면)된다. 일반 사전에서는 1893년 1월에 경질되었다고 서술하고 있으나, 3월 초에도 충청감사로 근무한 기록이 있고, 1893년(고종 30) 3월 19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추천되었다가 같은 날 임명이 취소되고, 조병호가 충청감사로 임명된 것으로, 3월 19일쯤에 파직된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한참 뒤인 10월 4일 상호군(上護軍: 5위에 속한 정3품 당하관 무관직)에 추천된다.
【판의금부사에 조병식을 낙점하였다】 의금부사의 전망단자를 들이니, 조병식(趙秉式)을 더 써넣어 낙점하였다. -『승정원일기』 3032책(탈초본 138책) 고종 30년 3월 19일 신축 5/22 기사 1893년 光緖(淸/德宗) 19년
【조병식을 체직시키고 판의금부사에 서형순을 대신하다】 조병식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가 곧 체직(遞職)시키고 서형순(徐衡淳)으로 대신하였다. 조병호(趙秉鎬)를 충청감사로 삼았다. -『고종실록』 30권, 고종 30년 3월 19일 신축 1번째 기사 1893년 조선 개국(開國) 502년
【상호군에 조병식을 추천】 병조가 구전 정사를 하였다. 상호군에 조병식, 대호군에 이승순(李承純), 부호군에 엄주한(嚴柱漢), 부사과에 신광오(辛光五), 이상을 모두 단부하였다. -『승정원일기』 3039책(탈초본 138책) 고종 30년 10월 4일 임자 33/52 기사 1893년 光緖(淸/德宗) 19년
1893년 11월 7일 양호선무사 어윤중은 조병식의 탐학에 대한 장계를 올리며 처벌할 것을 왕께 아뢰었다. 장계 내용을 보면, 조병식은 사람됨이 탐욕스럽고 마음이 더러운 자이며, 그가 저지른 탐학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라고 한다. 조병식은 “사람의 좋지 못한 일을 들추어, 불효하고 화목하지 못하고 간음한 것 등 각종 명목으로 죄안을 얽어 만드는데, 처음에는 사람을 보내어 겁을 주어 공갈 협박하다 그 뜻을 이루지 못하면 끝에는 곧바로 그들의 산업을 몰수”하는 등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가렴주구했다는 것이다. 또 조병식은 “동학을 금지하고 단속한다고 말하며 말은 비록 이단을 배척한다고 하면서 생각은 모두 재물을 훔치려는 것”이라며 그 진상을 밝혔다. 한마디로 부정부패를 저질러도 너무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탐관오리로 알려진 조병갑이 저지른 비리는 조병식에 비해 ‘새 발의 피’에 불과할 것이다.
【선무사 어윤중이 탐오한 죄인인 조병식의 처벌을 아뢰다】 양호선무사 어윤중(魚允中)의 장계에, ‘전 충청감사 조병식의 탐오하고 포악한 정절(情節: 정황, 사정)에 대하여 조사하고 성책(成冊)하여 올려보내니 그의 죄상을 의정부에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이 장계에서 열거한 것을 보면 범장(犯贓: 장물임을 알면서도 사고파는 행위)한 수량이 많을 뿐만 아니라 사리에 어긋나게 처리한 일도 많으니, 묘당(廟堂)에서 품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고종실록】 30권, 고종 30년 11월 7일 신유 1번째 기사 1893년 조선 개국(開國) 502년
【선무사가 조병식의 탐학을 조사하여 장계를 올림】 의정부에 도착한 공문서와 하교이다. 곧 양호선무사 어윤중의 장계를 보니, 임금의 윤음(稐音: 윤허한 전교)을 널리 선포한 후에 보은의 비도들이 이미 모두 귀화하여 해산하였으나, 충청도 전 관찰사는 질서를 바로잡고자 지역을 조사하여 책임을 묻기를 더욱 각별하게 하였는데, 무리가 모인 이유를 아뢴 장계를 잃어버렸고, 이미 올린 어사의 의견은 그대로 내버려둘 수가 없으니, 잠시 먼저 붓으로 지워버리는 법[形削之典]을 시행하십시오. 탐학과 불법에 이르러서는 이미 말하기를 “찾아 조사하지 못했다”라고 하니, 다시 선무사로 하여금 실상에 따라 특별히 조사하게 하여 장계로 아뢰게 해야 합니다. 비답(批答)하여 윤허한 전교(傳敎)입니다. 전교한 내용의 말뜻을 받들어 살펴 시행할 일입니다. 신은 이달 초 9일에 공주목에 도착하여 전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이 탐학한 정황은 대충 조사해 보았는데, 관찰사로 임명된 이후 정령(政令: 행정 명령)이 몹시 가혹하고 끝없이 가렴주구(苛斂誅求)하여 진실로 근래에는 들어보지도 못하였습니다. 사방으로 번진(藩鎭)을 살펴보고 마땅히 두터운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생각해야 하는데, 다시 충청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니, 어찌 옛날의 허물을 덮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가문은 충성스럽고 절개가 있으나, 그의 사람됨은 탐욕스럽고 마음이 더러우며, 그의 벼슬은 현달하지만, 그의 행동은 협박하여 물건을 빼앗으니, 돈을 탐하는 냄새가 세상에 넘쳐 득과 실을 걱정하는 대부(大夫)가 된 것이 애석합니다. 욕심이 절절 넘치고 땅을 석권하여 거리끼고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으로 자처합니다. 그가 내리는 정령을 말하면 당나라와 주나라의 종이에 쓴 비밀 공문서처럼 귀신도 짐작할 수 없어 다듬지 않은 모난 나무로 특별히 형장(刑杖)을 만들어 목숨을 곧바로 판결합니다. 죄인을 상급 관리에게 넘기는 것이 진실로 관례이지만, 재산을 몰수하고 죽이는 것을 차 마시고 밥을 먹는 것과 같이 하고, 군교(軍校)와 차인(差人)은 계속 보내 만나는 사람마다 난리를 당한 것과 같습니다. 계속 거두어들이는데 그 근거를 캐보면 공납이 아닙니다. 사람의 좋지 못한 일을 들추어, 불효하고 화목하지 못하고 간음한 것 등 각종 명목으로 죄안을 얽어 만드는데, 처음에는 사람을 보내어 겁을 주어 공갈 협박하다 그 뜻을 이루지 못하면 끝에는 곧바로 그들의 산업을 몰수합니다. 잡기(雜技), 송속(松贖 소나무를 벌목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를 베고 그 대가로 돈을 바치는 것), 토호(土豪), 임채(任債), 각 읍 아전들의 경비, 공전(公錢)을 징수하고 남은 것, 옛날에 경채(京債: 경저리·영저리가 백성의 공납을 대납해 백성이 그들에게 진 빚)를 멋대로 징수한 것, 계를 핑계한 돈[契錢], 송사로 빚진 것 외에 거두어 가로챈 것, 직함을 빌려주고 받은 돈[借㗸錢], 종이의 징수를 지정한 돈[差紙錢]은 많은 읍이 재정을 늘리는 명목인데, 심하게 거두어 끝이 없습니다. 폐단을 보충한다고 핑계 대면서 혹은 이곳저곳의 장부에 옮겨 적고, 사람의 귀와 눈을 가려 그 재물이 머물 곳을 궁리하였는데 모두 개인 주머니를 채운 후에 그만둡니다. 그것을 조사하여 찾아낼 때에는 슬픈 저 무고한 사람들은 죄인의 발과 목에 채우는 쇠사슬 사이에서 구르면서 하느님을 부르고 아버지를 부르지만 막막하여 구제될 수가 없고, 죽으려 하여도 또한 할 수가 없습니다. 이들 모두 대대로 임금이 남긴 백성인데, 이를 참지 않으면 어느 것을 참을 수 있겠습니까? 백성들이 그들의 산업에 애착을 갖고 지키려는 것은 목숨보다 심함이 있으니, 이것이 있으면 살아갈 수가 있고 이것을 잃어버리면 죽기 때문입니다. 하루아침에 천금의 자본과 백 무(畝)의 토지를 이리의 입에 집어넣고 그들 처자를 이끌고 길거리를 헤매면서 돌아갈 곳이 없게 되었으니, 이것은 진실로 누가 시켜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동학을 금지하고 단속한다고 말하는 것은, 말은 비록 이단을 배척한다고 하면서 생각은 모두 재물을 훔치려는 것입니다. 전 영장 윤영기(尹泳璣)는 귀신과 같은 거간꾼이 되어 그사이를 조종하였고, 전 공주진 영장 이존필(李存馝)은 손가락질하며 사주하고 멋대로 불러들여 그로 하여금 그 무리를 끌어들이도록 하여, 돈이 있는 사람은 재산을 탕진하고서 다행히 달아나게 무사하지만, 돈이 없는 사람은 혹은 죽고 혹은 유배시킵니다. 또한 백성이 조금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있는 사람은 동학의 이름에 멋대로 집어넣어 모두 없는 죄를 교묘하게 꾸밉니다. 이에 그 무리가 혹시 참지 못하여 그 무리를 불러 모아 같은 소리로 진영 아래에 운집하여 복수하려고 합니다. 이 관찰사의 속마음은 겁을 주려고 하면서 다시 침학하지 않는다는 뜻을 각 읍에 글로 써서 보내었고, 그 후에는 묵인하여 허락하였다고 핑계대면서 더욱 거리낌이 없게 되었는데, 올봄이 가장 심하였습니다. 영진(營鎭)의 공문서를 구해 살펴보고, 읍과 마을에서 전해 들은 소문을 조사하여 대개 갖게 된 것입니다. 남몰래 주고받은 것으로, 몰래 수갑을 채워 빼앗은 것, 서울 사람이 지방의 읍에서 어렵게 채방(採訪)한 것, 영속(營屬)들이 같은 악한 무리와 짜고 서울 집에 숨겨놓은 것은 신이 진실로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공문서의 전한 소식에 의거하여 명백한 것을 서로 참작하여 모아 수를 집계하니, 이것은 열 개 가운데 두세 개에 불과합니다. 각 읍의 진휼을 보충하기 위한 돈 61,600냥은 전부 진휼에 사용하지 않고, 온궁(溫宮)의 수리비라고 한 40,000냥이며, 산성을 수축하는 비용이라 한 20,000냥은 계산하여 마감하였는데, 온궁의 수리비는 온양군이 보고한 실제 수는 8,000냥에 불과한데 이 또한 징수한 돈을 조사하여 옮긴 것이며, 산성의 공사는 이미 각종 명목으로 함부로 징수하여 기록된 돈은 거짓으로 기록한 게 사실입니다. 보은군의 대동전(大同錢)은 3,400냥이고, 옛날의 경채(京債)라고 칭한 것은 향리를 잡아 가두고 빼앗았으나 공납을 충당하기 어려웠고, 태안(泰安)의 기속전(技贖錢)은 66,000냥인데, 탐학한 수령을 풀어주고 멋대로 징수하여 한 읍이 거의 텅 비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가장 애통하고 분한 것은 공주의 백성 오덕근(吳德根) 등의 마을 터를 빼앗고자 별업(別業, 별장)을 운영하면서 간음하였다고 꾸미고 진영에 여러 오씨(吳氏)를 붙잡아 가두고 위협해 죽이고 그 가산을 몰수했으며, 군대를 보내 징 소리를 울리면서 춥고 눈 오는 겨울밤에 그 남자의 부인을 내쫓았는데, 죽은 늙은이와 어린이가 5∼6명이며 촌락이 텅 비게 되어 풀과 나무들도 서로 불쌍하게 여깁니다. 공주의 김현익(金顯益)·박태순(朴台淳)·고성룡(高成龍), 은진의 최성숙(崔成叔), 홍주의 박계화(朴桂和), 홍산의 김팔서(金八瑞) 등은 혹은 집안에 간음한 사람이 있다고 칭하고 혹은 직함을 빌려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아산의 김상준(金相俊)은 죄수로 만들어 공주 진영에 옮기고 수만 냥을 내도록 책임 지우고, 형구로 신문하고 주리를 틀었는데 그 백성이 이행하지 못한 것 같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을 끊었습니다. 연산의 전(前) 감역(監役) 이익제(李益濟)는 그 아들과 이웃 여자가 간통했다고 꾸며 이웃 여자를 죽게 하고, 우선 빼앗은 뇌물이 1만 냥이며, 진잠현감 이시우(李時宇)를 시켜 이웃 여자의 시체를 파서 검사하고 옥에 가둔다고 협박하여 연산과 은진의 좋은 논 20여 석락(石落)을 빼앗아 재산을 탕진하게 하였습니다. 지방의 읍에 공문을 보내 각각 양안(量案)을 작성하여 해당 민에게 되돌려 주었습니다. 그밖에 백성의 토지와 보(洑)를 함부로 빼앗아 자기 소유로 한 것이 있으며, 개인의 빚을 일가에게 징수하고, 화를 인척에게 연좌시키는 것도 있으며, 뜻대로 사람의 무덤을 파서 다른 사람의 입장(入葬)을 허용하였으며, 이미 무덤을 파고는 그로 하여금 다시 장례를 치르도록 한 것도 있었습니다. 교체되어 돌아간 후에도 남은 위력이 아직도 두렵게 하여, 예산의 부잣집은 가격을 지급하지 않고 강제로 차지하였으며, 천안의 옛 무덤은 표시를 하여 모두 파냈습니다. 또한 뇌물을 받은 범죄가 탄로 날까 봐 두려워하여 김제홍(金濟弘)을 죽이고, 그 마을을 협박하여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게 하였으니, 비록 그가 선하지 못한 것을 가리고자 하여도 더욱 그 계획이 날마다 옹졸하였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도내 공사전(公私錢)을 훔치고 빼앗은 당백전(當百錢)이 644,391냥이고, 엽전은 108,390냥 정도인데, 인명에 따른 돈의 액수는 특별히 모두 책으로 엮어 올려보냅니다. 이 관찰사는 고관대작의 이름난 문벌 출신으로 몸은 덕으로 교화하는 지위를 계승하여 진실로 임금의 은혜를 갚으려고 하여 먼저 백성을 보호해야 하거늘, 오직 가렴주구를 일로 삼아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고 백성의 원망을 샀으니, 그 죄상은 의정부가 아뢰어 처리할 것을 청합니다. 이 관찰사가 불법을 자행한 것은 한 영(營)에서 저지른 것으로, 백성들에게 서로 간악하고 찾아내서 한 도(道)를 시끄럽게 하였으니 징계하여 경계해야 합니다. 전 영장 윤영기와 이존필, 공주의 신천서(愼天瑞), 영리(營吏) 고복은(高福殷)과 서형쾌(徐亨快)는 그의 매와 개가 되어 옥에 가두어 뇌물을 거두면서, 모든 것을 간섭하고 피해를 백성에게 끼쳤으니, 청컨대 모두 담당 벼슬아치와 관찰사의 죄상을 참작하고 감안하여 처단하시기 바랍니다. 비도들이 이미 해산하여 조사할 안건은 끝났으니 신은 마땅히 다시 갈 길을 가겠습니다. 사신(使臣)이 되어 보잘것없음이 사람의 말에 이미 나왔으니 진실로 감히 도성의 문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물러나 삼가 살려고 합니다. 공손하게 임금의 처벌을 기다립니다. 이러한 연유를 모조리 장계에 적어 곧바로 올립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조선시대사료DB > 동학농민혁명자료총서 > 취어 > 선무사채탐조병식탐학장문
이렇게 조병식이 저지른 비리가 밝혀지고 충청감사에서 파면된 때임에도 1893년 4월 청양에 조병식 선정비가 세워졌다. ‘관찰사조후병식영세불망비(巡察使趙公秉式永世不忘碑)’로, 현재 청양군청 안 비석군에 전해지고 있다.
❚조병식 영세불망비(순찰사조공병식열세불망비)❚
∙현재 위치_충남 청양군 청양읍 송방리 100(문화예술로) 비석군(청양군청 청양군의회 옆 정원)
∙건립 시기_계사년(癸巳年, 1893) 4월
■1894 {유배}, 중추원 판중추원사■ 비리를 저지르고 탐학한 짓을 저지른 조병식의 죄상이 낱낱이 드러나, 마땅히 그에 대한 처벌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조병식 유배○ 왕은 결국 탐학을 저지른 죄인 조병식에 대해 1894년(고종 31) 7월 15일 전 충청감사 조병식을 호남 바닷가에 귀양보내라고 명령하였다. 이로써 조병식은 충남 당진 면천면 지역에 구금된다.
【탐오죄를 지은 조병식을 처벌할 것을 명하다】 전교하기를, “탐장(貪贓: 벼슬아치가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탐하는 행위)하는 일이 이미 많았는데 처사가 합당하지 못하니, 남의 비난이 없더라도 유독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이 사람의 이런 소문을 들으니 지극히 통탄스럽다. 해가 지나도록 마감 짓지 않은 것에는 원래 참작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전전 충청감사 조병식에게는 호남 바닷가에 귀양보내는 형벌을 적용하고, 전 남양부사(前南陽府使) 임치재(任穉宰)는 형구를 채워서 잡아다가 남간(南間: 죽일 죄인을 가두던, 의금부 안 남쪽에 있던 감옥)에 가두라.” 하였다. -『고종실록』 32권, 고종 31년 7월 15일 기축 2번째 기사 1894년 조선 개국(開國) 503년
【의금부에서 조병식을 면천군에 투비하였다고 아뢰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조병식(趙秉式)을 면천군(沔川郡)에 투비(投畀: 죄인을 지정한 곳에 귀양보냄)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고종실록』 32권, 고종 31년 7월 15일 기축 3번째 기사 1894년 조선 개국(開國) 503년
하지만 조병식은 귀양을 간 지 보름만인 1894년(고종 31) 7월 30일 풀려난다. 유배 가다가 풀려나 버린 셈이다. 엄청난 죄를 지은 것에 비해 처벌이 너무 가벼웠다. 처벌받은 게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9월 23일 조병식의 죄를 씻어 주고 다시 복직시키라는 왕의 명에 따라 9월 24일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임명된다.
판중추원사는 중추원(中樞院)의 으뜸 벼슬로, 원래 정2품 벼슬이었는데 중추원이 중추부로 바뀌면서 판중추원사는 판중추부사로 바뀌고 종1품 관직이 되었다. 중추원은 고려시대 왕명 출납, 궁궐 경호, 군정[軍政: 군국기무(軍國機務)] 등을 담당한 핵심 중앙 관청으로, 추밀원(樞密院)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조선 건국 후에는 기능이 축소되어 왕명 출납은 승정원(承政院), 군정은 병조(兵曹)로 이관되는 가운데 2품 이상의 고위 관료들에게 예우 차원에서 주는 명예직 기관으로 성격이 바뀌어 중추부(中樞府)로 이어졌다. 그리고 1894년 갑오개혁 때 의정부에 속한 내각의 자문기관으로 부활하여 입법부의 성격을 띠는 의회 역할을 하기도 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 자문기관이 되어 실제 입법권이 없이 조선의 귀족이나 유력자들을 포섭하여 일제 식민 통치를 돕는 친일 기구로 전락하였다.
【죄인 조병식을 풀어주라고 전교하였다】 충청감사 이헌영(李永)의 계본(啓本)에, 죄인 조병식을 면천군(沔川郡)에 귀양보냈다고 한 일에 대해, 풀어주라고 윤조영에게 전교하였다. -『승정원일기』 3048책(탈초본 139책) 고종 31년 7월 30일 갑진 4/23 기사 1894년 光緖(淸/德宗) 20년
【조병식을 방송하라고 명하다】 투비(投畀: 유배) 죄인 조병식(趙秉式)을 풀어주라고 명하였다. -『고종실록』 32권, 고종 31년 7월 30일 갑진 1번째 기사 1894년 조선 개국(開國) 503년
【조병식을 탕척하고 서용하라고 명하다】 귀양 갔다가 방송된 죄인 조병식(趙秉式)을 탕척(蕩滌: 죄를 씻어 주고 깨끗하게 함)하고 서용(敍用: 다시 벼슬자리에 등용함)하라고 명하였다. -『고종실록』 32권, 고종 31년 9월 23일 병신 1번째 기사 1894년 조선 개국(開國) 503년
【의정부가 판중추원사에 조병식을 단부하였다】 의정부가 판중추원사에 조병식(趙秉式)을 단부하고, … 첨지중추원사에 이민섭(李敏燮)을 단부하였다. -『승정원일기』 3050책(탈초본 139책) 고종 31년 9월 24일 정유 6/25 기사 1894년 光緖(淸/德宗) 20년
■1895 재조사, 사면■ 조병식이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복권되어 고위직 관리로 임명된 것에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았는지, 시간이 꽤 지난 1895년(고종 32) 3월 22일, 그를 다시 조사할 것을 왕께 청하는 일도 있었다. 재조사 결과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확인되지 않으나, 6월 27일 내려진 대사면령에 따라 재물을 탐한 죄인 조병식도 사면받았다.
【판중추원사 조병식을 나문할 것 등을 청하는 총리대신 등의 계】 또 아뢰기를, “판중추원사 조병식(趙秉式)은 여러 차례 지방관을 맡으면서 탐오와 잔학을 끝도 없이 자행하여 학정과 위협으로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고 함부로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또 이로 인해 소요가 격발되었는데, 아직 해당 처벌을 받지 않아 공론이 비등합니다. 법무아문(法務衙門)으로 하여금 나문(拿問: 잡아다 조사함)하도록 하고, 부정하게 축재한 재산은 조사하여 추징한 뒤에 처벌하소서. 그리고 고금도(古今島)에 도배(島配)된 죄인 조필영(趙弼永)은 여러 해 운송을 감독하였는데, 오로지 가혹한 정치를 일삼아 그 피해가 도내에 가득하고 비적의 난을 양산하였으니, 이미 도배되었다고 해서 그냥 둘 수가 없습니다.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압상하도록 하고, 다시 철저히 심문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그대로 윤허한다는 칙지를 받들었다. -『승정원일기』 3056책(탈초본 139책) 고종 32년 3월 22일 계사 4/11 기사 1895년 開國 504년 光緖(淸/德宗) 21년
【1895년 6월 27일 칙령(대사면령)】 법부대신이 아뢰기를, “범장죄인(犯贓罪人) 채장묵(蔡章默)·심능필(沈能弼)·이용직(李容直)·신채희(申采熙)·서정철(徐廷喆)·민영은(閔泳殷)·신학휴(申學休)·민형식(閔炯植), 탐도죄인(貪饕罪人) 조병식(趙秉式)·조필영(趙弼永), 고금도(古今島)에 안치(安置)된 죄인 조만승(曺萬承), 임자도(荏子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된 죄인 민영준(閔泳駿), 녹도(鹿島)에 도배(島配)된 죄인 임치재(任穉宰), 지도(智島)에 도배된 죄인 조준구(趙駿九), 고금도에 도배된 죄인 민영주(閔泳柱)․박수만(朴受晚)․김태욱(金泰郁), 금산군(金山郡)에 찬배(竄配)된 죄인 이용태(李容泰), 영양군(英陽郡)에 정배된 죄인 김세기(金世基), 거제군(巨濟郡)에 위리안치된 죄인 김문현(金文鉉), 원주군(原州郡)에 도삼년(徒三年)으로 정배된 죄인 민병석(閔丙奭), 용천군(龍川郡)에 유배된 죄인 백은수(白殷洙), 정주군(定州郡)에 찬배된 죄인 이정규(李廷珪), 문경군(聞慶郡)에 유배된 죄인 민영순(閔泳純)을 모두 풀어주도록 각 해도(該道)의 도신에게 분부하겠습니다. 삼가 감히 아룁니다.” 하니, 그대로 윤허한다는 칙지를 받들었다. -『승정원일기』 3060책 (탈초본 139책) 고종 32년 6월 27일 병신 4/5 기사 1895년 開國 504년 光緖(淸/德宗) 21년
○양력 사용○ 을미개혁으로 우리나라는 1895년 9월 9일 태음력을 폐지하고 태양력을 채택, 음력 개국 504년 11월 17일을 양력 개국 505년 1월 1일로 결정하였다. 즉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우리나라 각종 연표나 역사에 등장하는 날짜는 대개 1895년 11월 16일 이전 날짜는 예전대로 음력 날짜이며, 1895년 11월 17일부터는 1896년 1월 1일로 시작하는 양력 날짜이다. 본 글에서도 1895년 11월 16일 이전 날짜는 음력을 기준으로, 1895년 11월 17일부터는 1896년 1월 1일로 시작하는 양력 날짜를 기준으로 하였다.
<다음에 '6.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끄떡없는 조병식'으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