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공주에서 은둔하다 판사가 된 조병갑, 최시형을 재판하고 청양에 살다 공주에 묻히다
동학농민혁명과 관련 있는 인물, 조병갑과 조병식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어 발품 팔아 조사했습니다. 하고 나니 조병직에 대한 정리도 필요하여 추가 조사하였습니다. 그 결과, A4로 200쪽 되는 글을 16회로 나누어 공유하고자 합니다. 재미없는 글이긴 하나, 조병갑ㆍ조병식ㆍ조병직을 알면 동학농민혁명을 아는 데 나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인간 전병철(작가)
5. 판사가 된 조병갑의 최시형 사형 선고와 청양 거주
○조병갑 은둔○ 조병갑이 석방된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해서 확실히 알려진 것이 없다. 동학농민혁명이 진압되었어도 조병갑은 여전히 동학농민군의 눈을 피해 공주시 유구읍 동해리 사락골 등에서 숨어 살다가 나중에는 양주조씨 집성촌인 공주시 신풍면 평소리에서 지낸 것으로 짐작된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으로는 공주동해리산향계(公州東海里山饗契) 관련 27개의 문서가 있는데, 그 가운데 「상계원(上契員) 좌목(座目)」에 따르면, 조병갑은 병신년(丙申年, 1896)에 동해리산향계에 가입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고부에서 달아난 조병갑은 농민군의 눈을 피해 예산 대흥, 공주 등을 전전하다가 식솔들과 함께 시국이 잠잠해지는 몇 년 동안 공주 동해리 선학동에 은거하던 중이었다. 바로 그 무렵 동해리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산향계에 가입한 것이다(강성복, 「공주동해리산형계문서」, 『한국민속대백과사전』).
동해리산향계에 가입한 조병갑이 산신제를 지낼 때 축문을 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동해리 산신제는 태화산 기슭에 형성된 동해리에서 가장 먼저 형성된 마을인 재궁동(齋宮洞) 서북쪽 7부 능선에 있는 바위 앞 평평하게 다져 놓은 제단에서 산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이 점점 커지면서 산제당(山祭堂) 건물을 새로 짓고 두 차례나 옮기는 과정을 거쳐 1985년 지어진 산제당이 현재 마을 앞(동북쪽 산 아래, 유구읍 동해리 산151-2) ‘도깨비 바위’ 옆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매년 음력 10월 3일 열리는 ‘태화산 산왕대신 산신제’는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아직도 800kg이 넘는 황소를 잡아 산신(山神)에게 제사 올리는 전국에서 보기 드문 산신제이다.
○1897 대한제국 광무개혁○ 1897년(고종 34년, 광무 원년) 10월 12일 고종은 대한제국(大韓帝國, Empire of Korea)을 선포하고 황제에 올랐으며, 연호를 광무(光武)로 하고 개혁(광무개혁)을 추진에 나갔다. 국방을 강화하고자 국가 전체 예산의 40% 정도를 군사비에 배정하여 신식 무기 구매, 중앙군(친위대와 시위대) 및 지방군(진위대) 증설 등을 추진하고 무관학교를 설립(1898)하고 원수부를 설치(1899)하였다. 신교육령을 발표하여 실업학교와 의학교 등 각종 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상공업 진흥과 양전 사업(1898)을 꾀하는가 하면 지계(地契: 토지 문서)를 발급(1901)하여 근대적 토지제도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99년에 발표한 ‘대한국 국제(大韓國國制)’는 근대 주권 국가로서 자주독립을 선언한 것이긴 하지만 황제에게 입법·행정·외교·군대 등 모든 분야를 통솔할 수 있는 절대 군주권을 주어 오히려 전제군주제가 강화되었다. 이는 시대적 요구인 입헌군주제나 공화제와는 거리가 있었다. 이처럼 광무개혁은 일제가 주도한 개혁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자주적으로 추진한 개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나 광무개혁 역시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한편, 대한제국 시기(1897년 10월 12~1910년 8월 29일)를 구한말(舊韓末)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구한말은 대한제국 시기만을 가리키는 것만 아니라 넓게는 조선 말기에서 대한제국 시기까지를 구한말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조선 말기 시작을 언제부터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철종 즉위, 흥선대원군 집권, 강화도조약 체결 시기 등 다양한 의견이 있다.
■1898 법부 민사국장 / 고등재판소 판사 / 민사국장 사직■ 1898년 1월 2일(음력 1897년 12월 10일) 조병갑은 법부(法部) 민사국장(民事局長)에 임명되었다. 1895년 6월 27일 대사면령으로 1895년 7월 3일(양력 8월 22일) 석방된 조병갑은 공주를 비롯한 지방에서 전전하다가 2년 4개월 만에 민사국장이 되어 중앙 무대에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법부는 이전의 형조(刑曹)가 1894년 갑오개혁에 따라 법무아문(法務衙門)으로 개편되고, 1894년 4월에 다시 법부로 바꾼 관청으로, 오늘날 법무부에 해당하는 기관이다. 법부 의장에 대신(大臣, 오늘날 장관), 그 아래에 협판(協辦, 오늘날 차관), 국장(局長)을 두었다. 법부의 국(局)은 민사국, 형사국, 검사국, 회계국 이렇게 4국을 두었으며, 민사국과 형사국은 1등 국, 검사국은 2등 국, 회계국은 3등 국이었다. 민사국의 주요 업무는 민사사건 재판, 재판소 설치, 재판소를 감독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법부(法部) 민사국장(民事局長)에 임명】 비서원 승(秘書院丞) 이승연(李承淵), 현릉 영(顯陵令) 정숙조(鄭肅朝)를 의원면직하였다. 비서원승에 조중목(趙重穆)을 … 법부(法部) 민사국장(民事局長)에 조병갑(趙秉甲)을 임용하였다. -『승정원일기』 3091책(탈초본 139책) 고종 34년 12월 10일(양력 1월 2일) 을축 8/13 기사 1897년 光武 1년 光緖(淸/德宗) 23년
【조병갑을 법부 민사국장에 임명함】 4품(品) 조병갑(趙秉甲)을 법부 민사국장(法部民事局長)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5등에 서임하였다. -『고종실록』 37권, 고종 35년 1월 2일 양력 2번째 기사 1898년 대한 광무(光武) 2년
큰 죄를 짓고도 제대로 처벌받지 않고, 유배당하였다가도 운이 좋은지 사면받아 풀려나고, 석방되었음에도 두려워 숨어지내던 조병갑은 다시 벼슬길에 올라 재기할 기회가 생겼다. 어째서 이렇게 탐관오리 조병갑이 부활할 수 있었을까? 조병갑은 영의정 조두순과 조카뻘로 흥선대원군과도 연줄이 닿았으며, 총리대신(국무총리) 이완용과도 사돈뻘인 관계이고, 이조판서(내무부 장관) 심상훈과는 사돈간, 여기에 법부대신(법무부 장관) 조병식과는 8촌 형제, 법부대신 조병직과는 같은 집안사람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갖고 있었다. 이런 배경과 연줄이 있었기에 잘못된 일을 해도 제대로 처벌받지 않고 다시 출세하는 혜택을 누린 게 아닐까 싶다. 당시 조선 말기 사회 모순, 사회 구조 문제를 그대로 보여 주는 것처럼 말이다.
○최시형 체포○ 광무개혁이 추진되던 구한말 1898년 5월 25일(음력 4월 6일), 동학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이 강원도 원주에서 체포되었다. 동학을 전파하랴 관군을 피해 다니랴 37년을 보따리 하나만 짊어지고 돌아다녔다고 해서 ‘최보따리’라는 별명이 붙은 최시형은 동학교도 송경인(宋敬仁)의 밀고로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고산리 송골마을에서 관군에게 체포되었다(혹 충북 옥천에서 체포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원주에서 체포된 것이 맞을 것이다). 체포된 최시형은 여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재판받게 된다.
○조병갑 독단○ 1898년 7월 9일 『독립신문』 「잡보」에 고등재판소 민사국장 조병갑이 민사재판을 독단으로 처결하는 전횡을 꼬집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이 당시 고등재판소는 조선시대 의금부(義禁府)에 해당하는 기관으로, 이후 의금부는 시대순으로 의금사(義禁司), 법무아문 권설재판소(法務衙門權設裁判所),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 평리원(平理院), 대심원(大審院), 통감부 고등법원(統監府高等法院) 등으로 바뀌었다.
【국장 독단】 조병갑씨가 고등재판소 민사국장을 한 후에 몇 달을 시무도 하지 않고 자기 집에 앉아서 월봉만 먹다가 시무한지 불과 며칠이 못 되어서 민사국에 이왕 결안된 일을 간혹 번안도 하며 판사와 과장은 재판소에 간섭 못 하게 하고 조씨가 혼자 민사를 처결한다니, 대저 조씨는 이전에 수령도 많이 지내었고 또 고부군수로 있을 때에 치적이 제일 높아서 동학 난을 평정한 일등 공훈은 세계가 이왕 다 아는 바이라. 여간 고등 재판소 민사국 사무 같은 것이야 조씨의 능란한 수단으로 독단하기가 무엇이 어려우리오. -『독립신문』(光武 2년 7월 9일 토요일) 「잡보」 ‘국장 독단’
법부 민사국장 조병갑은 고등재판소 예비판사를 겸임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1898년 7월 11일(음력 5월 23일) 법부 민사국장 고등재판소 예비판사 겸임을 의원면직(依願免職: 본인 요청에 따라 그 직에서 물러나게 함)하고 대신 법부 민사국장 겸 고등재판소 판사로 임명되었다. 이제 조병갑은 법부 민사국장에 고등재판소 판사를 겸하게 되었다.
【법부 민사국장 겸 고등재판소 판사에 임명】 법부 협판(協辦)에 주석면(朱錫冕)을, 한성재판소 판사(判事)에 김의제(金義濟)를 … 임용하였다. … 법부 민사국장 고등재판소 예비판사 조병갑의 겸임을 의원면직하였다. 법부 민사국장 조병갑을 겸임 고등재판소 판사에, 법부 참서관 김택(金澤)을 겸임 고등재판소 예비판사에 임용하였다.-『승정원일기』 3097책(탈초본 139책) 고종 35년 5월 23일(양력 7월 11일) 을해 7/9 기사 1898년 光武 2년 光緖(淸/德宗) 24년
법부 민사국장 조병갑이 고등재판소 판사로 임명된 데에는 당시 법부대신 조병직(趙秉稷, 조병갑과 14촌 형제, 조병직이 조병갑보다 11살 위 형)의 추천에 따라 고종이 임명한 것으로 보고 있다. 조병갑의 민사국장 겸 고등재판소 판사 임명과 관련하여 ‘대한민국 법원-대국민서비스-법원사람들’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조병갑 같은 탐관오리가 대한제국 고등재판관 판사로 임명된 것은 그동안 몇 차례 사회 개혁을 했었음에도 여전히 관리 제도에 문제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람이 그렇게 없었을까?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있었음에도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청산되지 않고 실력보다 연줄이 더 큰 작용하는 사회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최시형 사형○1898년 7월 11일 민사국장에 판사까지 겸한 조병갑은 판사 임명 1주일 만인 7월 18일(음력 5월 30일) 동학교주 최시형에 대한 재판에서 배석판사 두 명 가운데 한 명으로 참석하여 재판장 조병직과 함께 최시형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게 한 원인을 제공한 자가 제대로 처벌받기는커녕 오히려 판사가 되어 동학 최고 지도자로서 동학농민혁명을 이끌었던 지도자를 재판하였다니, 그것도 사형을 선고하였다니! 선악이 뒤바뀐 엉터리 재판이자 제대로 된 세상이 아니었다.
서소문감옥에 갇혀 재판받던 최시형은 체포된 지 근 2개월, 고등재판소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지 이틀 만인 1898년 7월 20일(음력 6월 2일) 좌포청(左捕廳, 좌포도청, 육군법원, 단성사 극장 뒤편) 사형집행장 ‘처교죄인 동학괴수 최시형(處敎罪人 東學魁首 崔時亨)’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 교수대(絞首臺)에서 오후 5시경 결국 71세(옛 나이 72세) 나이로 사형당하였다. 동학 1대 교주 최제우(崔濟愚)에 이어 좌도난정(左道亂正: 어긋나는 주장으로 세상을 어지럽힘)이라는 똑같은 죄목으로 2대 교주 최시형마저 처형당하였다. 세계 종교사에 일찍이 없는 일이었다. 최시형이 사형을 당한, 현재 서울 종로구 묘동 59번지(1호선 종로3가역 9번 출구 인도)에는 ‘최시형 순교터’, ‘좌포도청 터’, 단성사 터, ‘천주교 신자 순교터’라고 안내하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법부 민사국장 겸 고등재판소 판사인 조병갑은 1898년 8월 8일(음력 6월 21일) 본인 요청에 따라 법부 민사국장에서 물러났다. 정확히 무슨 이유로 민사국장을 그만두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아마 당시 조병갑에 대한 비난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 때문에 그만둔 것은 아닐까 싶다. 여하튼 최시형을 재판하기 위해 판사가 되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법부 민사국장 조병갑 의원면직】 법부 민사국장 조병갑(趙秉甲)과 외국어학교 교관(敎官) 김필희(金弼熙)의 본관(本官)을 의원면직(依願免職)하였다. -『승정원일기』 3098책(탈초본 139책) 고종 35년 6월 24일(양력 8월 11일) 병오 7/9 기사 1898년 光武 2년 光緖(淸/德宗) 24년
○조병갑의 변명○ 여하튼 민사국장에서 물러난 조병갑은 다른 사람을 시켜 자신을 변명하는 내용의 기사를 1898년 8월 19일 『독립신문』 「잡보」에 「죠씨의 ᄉᆞ젹」이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은 글을 실기도 하였다. 원래 신문에는 한글 전용으로 실렸으나, 이해를 돕기 위해 아래와 같이 한자와 설명을 추가하여 소개한다.
【죠씨의 ᄉᆞ젹】 세계에서 모두 이르기를 조병갑 씨가 고부군수로 있을 때에 학민(虐民: 백성을 학대함)을 과히 하다가 동학 난리를 시초로 일으켰다고들 하기에 우리도 또한 그런 줄로만 믿었더니 지금 뉘 편지를 본즉 조병갑 씨가 갑오년에 고부군수로 있을 때에 해군(該郡: 해당 군) 포리(捕吏: 포도청․지방관아에 딸려 죄인을 잡던 구실아치) 등이 해군 경내 패류(悖類: 말이나 행실이 도리에 어긋나고 거칠며 염치없는 못된 무리) 박가(朴家) 등 삼십여 명을 부동(符同: 좋지 않은 일에 어울려 한통속이 됨)하여 작요(作擾: 소동․난동을 일으킴)하였는데, 그해 삼월에 안핵사 이용태 씨가 해군(該郡)에 당도한즉 작요하던 백성이 다 헤어졌으니, 이것이 민요(民擾: 민란)라 이를는지, 동요(動搖: 소란)라 이를는지. 민요는 고부민요 수개월 전부터 고산 등 각 군에서 먼저 일어났고, 동요는 보은 등 각 군 지방에서 1893년 가을에 일어났고, 갑오동요는 전봉준이가 4월에 무장에다 방을 걸고 고창 등 각 군에서 작요한 것은 그때 감사 김문현 씨의 등보(謄報: 보고)가 있었으니 고부동요가 아닌 것은 가히 알겠으며, 또 민요로 말할진대 백성이 관장(官長)의 탐혹을 못 이겨 일어났다 할진대 조병갑이가 범죄 사실이 없는 것은 그때 명사관 조명호, 안핵사 이용태, 염찰사 엄세영, 감사 김문현이 5번 사실을 말하였으되 소위 장전(臟錢: 옳지 못한 짓으로 획득한 부정한 돈)이라 이르던 16,000냥 안에 2,800냥은 당초에 허무하고 13,200여 냥은 보폐(補弊: 폐단을 바로잡음, 또는 공익을 위해 벼슬아치들이 녹봉의 일부를 덜어 보태던 일)가 분명한지라 만일 안핵사 이용태가 빨리 장계(狀啓: 사신·관찰사·지방 관리 등이 조정에 올리는 보고서)를 하였더라면 조병갑은 다만 민요로 논감(論勘: 죄상을 논하여 다스림)만 당하였을 것을 이용태가 무단히 석달을 끌다가 비로소 무장군 동요 일어난 후에 겨우 장계를 하여 그해 정월에 갈려 간 조병갑으로 하여금 5월에 와서야 파직되고 귀양 간 일을 당하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저간의 시비는 세계 제 군자가 각기 짐작을 하시오. 우리는 그 가부를 논단 아니하고 다만 그 편지 대강만 기재할 따름이요.” -『독립신문』(광무 2년 8월 19일 금요일) 「잡보」 ‘죠씨의 ᄉᆞ젹’
‘죠씨의 ᄉᆞ젹’ 내용을 살펴보면, 조병갑은 자신이 고부군수로 있을 때 발생한 고부봉기는 안핵사 이용태가 내려와 곧바로 해결되었으니,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고부봉기가 일어나기 전부터 다른 곳에서 봉기가 있었으며, 동학농민혁명은 무장에서 일어난 것으로 자기 지역에서 일어난 봉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백성을 탐학하여 봉기가 일어났다고 하지만 자신에게 범죄 사실이 없는 것은 이미 안핵사 이용태, 감사 김문현 등이 다섯 번이나 말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이용태가 빨리 조정에 알렸더라면 자신은 가벼운 처벌을 받았을 터인데 이용태가 3개월을 끌다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뒤에야 조정에 알리는 바람에 자신이 파직당하고 귀양까지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억울하다는 것이다. 큰 죄를 지은 바가 없는데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게 만든 장본인으로 오해받고 중징계까지 받아 억울하다는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이 조병갑 한 명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당시 감투만 쓰면 백성을 수탈하던 시대였으니 단순하게 어느 한 명의 탐관오리로 인해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게 아닐 것이다. 일개 지방 군수였던 조병갑만을 탓할 일도 아닐 것이다. 조병갑보다도 더한 탐관오리였음에도 아무런 문제 없이 살아온 이들이 적잖게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반성은커녕 자기변명에만 급급하고 심지어 자기 잘못이 아니라 남 탓을 내세우는 조병갑의 뻔뻔함에 말문이 막히기도 한다. 해도 해도 너무하였다.
■1904 비서원 승 / 은퇴■ 60세(옛 나이 61세․62세)에 접어든 조병갑은 1904년(고종 41) 6월 21일(음력 5월 8일) 비서원 승(祕書院丞)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비서원 승에 임명된 다음 날 사직하였다. 비서원은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갑오개혁 때 개편된 궁내부(宮內府)에 소속되어 대한제국 때는 황명의 출납과 기록을 맡았다. 오늘날 대통령비서실에 해당하는 비서원에서는 경(卿) 1명을 칙임관(勅任官)으로 선임하고, 승(丞) 3명을 주임관(奏任官), 낭(郞) 2명을 판임관(判任官)으로 선임하였다. 칙임관·주임관·판임관은 1894년 갑오개혁 때 마련된 제도로, 문관은 정1품~종2품을 칙임관, 3~6품을 주임관, 7~9품을 판임관으로 분류하였는데, 당상관(堂上官)과 비견되는 칙임관은 총리대신이 각 아문 대신 등과 협의해 3명을 추천하면 그중에서 왕이 직접 임명하였다. 주임관은 해당 아문 대신이 선발해 총리대신에게 보내면 총리대신이 가부를 논의한 뒤 왕께 올리어 임명하고, 판임관은 해당 아문 대신이 인원을 선발해 시험을 거치게 한 뒤 대신이 추천하여 왕께 여쭈어 임명하였다.
【비서원 승에 조병갑을 임명】 비서원(秘書院) 승(丞) 조강환(曺康煥) … 의원면직(依願免職)하였다. 정3 조병갑(曺秉甲)을 비서원 승에 임용하고, … 강종우(康鍾祐)를 위생청결소 사무위원에 임명하였다. -『승정원일기』 3171책(탈초본 141책) 고종 41년 5월 8일 병술 3/6 기사 1904년 光緖(淸/德宗) 30년
【조병갑, 비서원 승에서 사직】 비서원 승 조병갑(趙秉甲), … 숭덕전 참봉(崇德殿參奉) 박종래(朴淙來)를 의원면직하였다. -『승정원일기』 3171책(탈초본 141책) 고종 41년 5월 9일 정해 2/4 기사 1904년 光緖(淸/德宗) 30년]
이후 조병갑의 행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는 편이다. 어쩌면 나이가 들어 비서원 승을 곧바로 사직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내지 않았나 싶다. 다만 이후 조병갑의 행적에 대해서는 충남 청양에서 일어난 1907년 아들 ‘조창희가 조찬희로 개명’한 일과 1909년 ‘그 아비에 그 자식’ 사건, ‘명의주의 고소’ 사건 등 그의 아들과 관련된 몇몇 자료들을 통해 일부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아들 조찬희○ 조병갑의 아들(장남) 조찬희는 청양 벽함정(碧涵亭)이 있는 곳에 살면서 자신의 이름이 원래 조창희(趙昌熙)였는데 조찬희(趙瓚熙)로 바꾼 사실을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17일 자 신문에 실었다.
○청양 거주○ 1907년 7월 3일 『황성신문(皇城新聞)』에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는 제목으로 조병갑의 동정을 알 수 있는 기사가 실렸다. 충남 청양에 사는 조병갑이 벽함정 뒤편 기슭 참봉 민준식 조상 묘와 접한 땅에 무덤을 써 민씨(閔氏) 형제로부터 항의받았다. 이에 서로 다투다 소송이 벌어져 결국 군수가 공정하게 판결하여 무덤을 파내라고 하였으나, 조병갑 아들 조찬희는 이곳 산언덕은 판서 민응식 집안으로부터 빌린 것이라고 핑계를 대며 무덤을 파가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 제목부터가 흥미롭다. 더구나 참봉 민씨 집안과 다투는 일에 판서 민씨 집안과의 연줄을 내세워 상대방을 위압하는 모습이 참 그렇다.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떵떵거리는 꼴이 어디선가 많이 보던 모습이다. 기사 제목대로 그 아비에 그 자식이다.
한편, 위 『황성신문』 1907년 7월 3일 자 기사를 보면 조병갑은 관직을 은퇴하고 청양에 사는 장남 조찬희와 함께 벽함정이 있는 마을에서 산 것이 확인된다. 그런데 기사에 나오는 ‘15살 된 둘째 아들’은 누구를 말하는지 모르겠다. 조병갑이 족보에 없는 또 다른 어느 첩과 낳은 둘째 자식인지, 그것도 15년 전(1892년, 나이 48세) 고부군수로 근무할 때 나은 늦둥이인지 등등 이에 대한 자료가 전혀 없어 확인할 길이 없다.
조병갑의 흔적을 찾고자 그가 말년에 장남 조찬희와 살았던, 벽함정이 있는 마을(현 백세마을)을 찾아가 보았지만, 그들이 살던 집은 물론 그 흔적마저 남은 게 없었다. 조찬희를 기억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마을 이장은 물론 동네 분들에게 조찬희를 물어봐도 처음 듣는 이름이라고 하였다. 한편 조씨 집안 어르신이 있다고 하여 이장님의 도움으로 어르신까지 만나보았으나 풍양조씨가 아닌 한양조씨로 어르신 또한 조찬희를 전혀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조찬희나 조병갑에 관한 이야기조차 들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벽함정과 마을만 둘러보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청양 벽함정이 있는 마을에 살던 조찬희와 그의 아버지 조병갑에 대해서는 기록으로만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조병갑의 아들 조찬희는 기호흥학회 청양군지회 평의부장을 맡아 활동한 것으로 확인된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애국계몽운동가들은 국권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교육을 진흥시키고 산업을 발달시키는 데 있다고 생각하여 대한자강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를 설립하였다. 일제 탄압으로 대한자강회는 1907년 강제 해산되고 11월에 대한협회를 설립하여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런 시기에 학교설립 등 교육 진흥 사업을 체계적으로 추진하고자 지역별로 여러 단체가 설립되었는데, 서울에 있는 기호(畿湖: 경기도와 황해도 남부 및 충청도 북부) 출신 사람들을 중심으로 1908년 1월 서울에서 기호흥학회가 조직되고, 이어 각 지역에 산하 조직이 만들어졌다. 청양에도 기호흥학회 산하 기구가 1909년 2월 20일에 조직되었으며, 당시 조병갑 집안은 청양에서 나름 지역 유지(有志: 마을이나 지역에서 명망 있고 영향력을 가진 사람)에 해당하였는지 조찬희가 기호흥학회 청양군지회에 참여하여 활동하게 된 것이다.
【청양의 애국계몽운동】 국채보상운동이 시들해져 갈 무렵 재경 기호인(畿湖人)들을 중심으로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가 창립되었다. 을사조약 이후 만들어진 여러 애국계몽단체들 중 그 중심적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였다. 그런데 1907년 8월 일제에 의해 대한자강회가 강제 해산되고 그 명맥은 그해 11월에 결성된 ‘대한협회(大韓協會)’로 이어지게 된다. 이 시기 학교설립 등 교육진흥사업 추진을 위해 각 지역별로 여러 단체들이 만들어졌는데, 기호흥학회도 그 중 하나였다. 기호흥학회는 재경 기호 출신 인사들을 중심으로 서우학회, 한북흥악회, 호남학회에 이어 1908년 1월 19일 설립되었다. 본회 조직을 정비한 후, 기호흥학회는 조직적인 활동을 위해 지회 설립에 박차를 가했다. 청양군지회는 서산지회(1908. 5. 10 설립) 다음으로 1909년 2월 20일 홍주와 함께 같은 날 각각 설립인가를 받았다. 지회장은 김용현(金容玹), 부회장은 조재도(趙載道), 총무는 최선재(崔善在), 교육부장은 이용하(李龍夏), 그 외 임원은 다음과 같았다. … 평의부장 조찬희(趙瓚熙), 평회원은 유상준(兪商濬) 외 29명이었다. 청양군지회는 다른 지회보다 많은 회원 수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점은 청양의 민족의식이 다른 인근 지역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었음을 말해준다. 청양군지회의 재정은 다른 조직들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회원들의 회비와 유지들의 기부금으로 충당되었는데, 그 사용처는 많은 부분 지역민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강습회나 정치 연설대회 등 교육과 계몽사업이었다. 특히 학교 설립과 운영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청양군지회 같은 경우 ‘청무학교(靑武學校)’라는 사립학교를 운영하였던 걸로 보이는데 학제나 교수과목, 정원 등의 구체적인 운영상황에 대한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청양군지』(2018) 제2권 청양의 역사와 전통 제3편 역사, pp.200-201.
○조병갑 노환○ 조병갑 아들 조찬희가 기호흥학회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지역 사람과 마찰이 있었던 보인다. 조찬희는 1909년 5월 22일 자 『황성신문』에 아버지 조병갑을 변호하는 글을 실었는데, 이는 1909년 5월 7일 자 『대한매일신보』와 1909년 5월 8일 자 『황성신문』에 자신의 아버지를 조롱하는 듯한 글이 실렸기 때문이다.
그 자초지종을 요약하면 대략 이렇다. 청양읍에 거주하는 명의주(明義柱)라는 이가 청양에 학교를 설립하는 일에 충분한 경비가 있었음에도 군수가 돈을 너무 걷어 문제가 되었으며 민심이 시끄러웠다. 이에 소송까지 벌어져 서울서 재판받게 되었는데 권세가 있는 조병갑이 서울에 올라가 주선하였으나 이미 판결이 났다며 이런 내용을 신문에 광고하였다. 이에 조병갑 아들 조찬희는 자기 아버지가 서울에 올라간 것은 2월 초에 병 치료를 위해 간 것으로, 학교를 건립 일보다 먼저 있던 일이라고 밝히면서 자신의 교임(校任: 향교 직원, 또는 학교 임원)에 감정을 품은 명의주가 자기 대신 아버지를 모욕하고 무고하는 것이라고 반박하는 글을 신문에 광고하였다.
1909년 5월 신문 광고를 통해 명의주라는 사람과 조병갑 아들이 서로 다툰 일이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이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는다. 다만 조찬희가 아버지를 변호하는 글을 통해 당시 조병갑은 청양에 아들과 함께 살면서 1909년 2월 초에 병 치료를 위해 서울에 올라간 사실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12 조병갑 사망■ 조병갑은 1912년 7월 7일(음력 5월 23일) 68세(옛 나이 70세) 나이로 사망하였다. 늙어 병이 들어 죽은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묘는 공주시 신풍면 평소리에 있다고 확인되며, 공주시 신풍면 평소리 산15-5 두 개의 산자락 가운데 동쪽 산자락에 있는 무덤이 조병갑 묘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조병갑 묘의 동쪽 공주시 신풍면 평소리 산15-2 산자락에는 조병갑의 아버지 조규순 묘가 자리하고 있다. 또 평소리 서쪽 산자락에는 조병갑의 작은 형인 조병협의 차남 조경희 묘와 조경희 아들 조중한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이 외에도 공주시 신풍 평소리에는 조병갑의 큰형인 조병섭의 장남 조성희 묘가 자리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조병갑의 친어머니 김해김씨 무덤 등 적잖은 양주조씨 무덤들이 있다.
조병갑의 무덤에는 묘비석(墓碑石)은 물론 혼유석(魂遊石), 상석(床石), 망주석(望柱石) 등 아무런 부속물 하나도 없다. 아예 봉분(封墳)뿐이다. 아마 동학농민혁명의 빌미를 제공한 자로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탄받는 탐관오리이다 보니 굳이 밝히려고 하지 않으려고 아무것도 세우지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주변에 잔디나 풀도 별로 없고 봉분이 짐승들로부터 파헤쳐진 것인지 허물어진 상태에 몇몇 구멍이 보이기도 하였다. 분위기가 쓸쓸하고 으슥하기도 하였다. 조병갑이 살아 영화를 누리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후손들이 관리하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명당이라 묘를 썼는데 막상 명당이 아니라 그런지, 관리가 되지 않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보기 흉할 정도로 방치되어 있었다.
<다음에 '6. 조병갑의 자식과 자손'으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