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 같은데 잘 모르는 조병갑, 조병갑보다 더한 조병식과 조병직(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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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 같은데 잘 모르는 조병갑, 조병갑보다 더한 조병식과 조병직(03)
  • 인간 전병철
  • 승인 2026.03.14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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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관찰사 조병식의 공주집회 탄압과 고등재판소 판사 조병갑·조병직의 동학교주 재판

(03) 예산군수와 천안군수도 지낸 고부군수 조병갑, 그의 선정비가 함양·김해에 이어 천안에서 발견되다

동학농민혁명과 관련 있는 인물, 조병갑과 조병식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어 발품 팔아 조사했습니다. 하고 나니 조병직에 대한 정리도 필요하여 추가 조사하였습니다. 그 결과, A4로 200쪽 되는 글을 16회로 나누어 공유하고자 합니다. 재미없는 글이긴 하나, 조병갑ㆍ조병식ㆍ조병직을 알면 동학농민혁명을 아는 데 나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인간 전병철(작가)

 

3. 추천받아 시작한 관직과 예산·천안·보성·함양·김해·고부 수령 조병갑

 

조병갑은 영의정 조두순의 조카이고, 흥선대원군과도 연줄이 닿았으며, 총리대신(국무총리) 이완용과 사돈 관계이고, 충청도 관찰사(도지사)와 이조판서(내무부 장관) 등을 지낸 심상훈과 사돈간이었다. 여기에 충청도 관찰사와 형조판서·법부대신(법무부 장관) 등을 지낸 조병식과는 8촌 형제이며, 외무대신(외교부 장관)․법부대신 등을 지낸 조병직과는 14촌 형제이다. 이런 집안 배경과 연줄을 바탕으로 조병갑은 관직 생활을 순탄하게 누리며 부정을 저지르고 잘못을 저질러도 곧바로 복귀하여 다시 높은 관직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그런 조병갑은 관직 생활에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그의 관직 이력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자료는 지금까지 따로 없었으며, 전해지는 이야기 가운데에는 잘못 전해지는 것도 적잖게 있다. 이에 사실 확인과 함께 종합적인 정리가 필요하였다. 다만 자료가 많지 않아 당시 관리들의 이력을 파악할 수 있는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와 『고종실록(高宗實錄)』 기록 등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았다.

■1863 규장각 검서관■ 조병갑은 당시 관료 조직이나 사회 구조에 적잖은 문제가 있는 조선 말기에 관직 생활하였다. 그는 19세(옛 나이 20세) 나이인 1863년(철종 14) 1월 규장각(奎章閣: 왕실 도서관이지 학술 및 정책을 연구하는 기관) 검서관(檢書官)으로 추천되었다. 검서관은 규장각의 문서를 관리하는 종7품 벼슬로 서책(書冊)의 교정(校正) 따위를 맡아본 잡직(雜職)이다. 정조(正祖)가 학식 있는 서자들을 등용하기 위해 만든 직책이며, 주로 추천받아 임명되었다.

이렇게 서자 출신인 조병갑은 과거시험이 아닌 추천으로 검서관으로 입사(入仕: 처음으로 벼슬자리에 나감)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다만 누구에 의해 추천되었는지 이에 관해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1865 홍문관 겸검서관 / 병조 부사과■ 이조 규장각 검서관이던 조병갑은 1865년(고종 2) 6월 홍문관 겸검서관(兼檢書官), 병조 부사과(副司果)에 임명되었다. 겸검서관은 홍문관·규장각에 속한 벼슬로, 보통 다른 기관에서 겸임하는 관직이었다. 그리고 부사과는 중앙 군사 조직 오위(五衛)에 딸린 종6품 무관 벼슬로, 녹봉(祿俸: 봉급)을 주기 위한 관직으로써 현직에 있지 아니한 문관, 무관, 음관(蔭官: 시험을 통하지 않고 부모의 후광으로 등용된 관리) 및 잡직(雜職: 기술직)에 있는 사람들로 뽑았다.

■1871 의금부 도사■ 1871년(고종 8) 6월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에 임명되었다. 고종 9년 4월 해주 지역에서 역적을 사로잡아 압송하여 죄인을 왕이 친히 국문(鞫問: 왕의 명령으로 중죄인을 신문·심문하는 일)하려고 하였는데, 국문하려면 금부도사가 전원 대령해야 하나 당시 의금부 도사 조병갑이 어머니 병으로 지방에 있는 탓에 인원을 갖출 방법이 없었다. 이에 인원 문제를 이조에서 논의하여 다른 이와 서로 자리를 바꾸도록 처리하였다.

■1972 통례원 인의■ 1872년(고종 9) 12월 통례원(通禮院) 인의(引儀)에 임명되었다. 통례원은 조선시대 조회(朝會)와 제사에 관한 의례(儀禮)를 맡아보던 관청으로 세조 때의 통례문(通禮門)을 고친 것이며, 1895년 다시 장례원(掌禮院)으로 고쳐졌다. 인의는 조선시대 통례원에 딸린 종6품 문관으로 정원은 6원이다. 겸인의(兼引儀)를 서벽(西壁)이라 하고 인의(引儀)를 동벽(東壁)이라 하였다. 1466년(세조 12) 관제(官制) 개정 때 전에 있던 봉례랑(奉禮郞)을 고친 이름이다. 1894년(고종 31) 종백부(宗伯府)로 개편되면서 폐지되었다.

■1874 사포서 별제 / 사도시 주부 / 통례원 인의■ 1874년(고종 11) 2월 사포서(司圃曙) 별제(別提)에 임명되고, 7월에는 사도시(司䆃寺) 주부(主簿, 종6품), 통례원 인의에 다시 임명되었다. 사포서는 왕실 소유의 원포(園圃: 울안 밭)를 관리하며 채소를 공급하던 관청이다. 사도시는 조선시대 내선(內膳: 대궐 내의 음식)의 미곡(米穀: 쌀과 곡식)을 구입·지출하는 일을 담당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으로, 호조 소속 기관이었다. 1882년(고종 19) 관제 개혁 때 폐지되었다.

■1875 『윤발』과 『일성록』 보충작업 참여■ 『윤발(綸綍)』과 『일성록(日省錄)』을 보충하는 일에 참여하여 1875년(고종 12) 6월에 왕으로부터 수령(守令: 각 고을을 맡아 다스리던 지방관. 절도사·관찰사·부윤·목사·부사·군수·현령·현감 따위)에 제수(除授: 천거에 의하지 않고 임금이 직접 벼슬을 내림)하라는 전교(傳敎)를 받았으며, 『윤발(綸綍)』과 『일성록(日省錄)』을 보충하는 일을 마친 7월에는 겸검서관(兼檢書官)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여기에서 『윤발은 왕의 말씀을 모은 책, 『일성록』은 왕의 일기책이다.

■1876 제용감 주부 / 평시서 영■ 1876년(고종 13) 3월 제용감(濟用監) 주부(主簿)로 임명되고, 같은 해 7월에는 평시서(平市署) 영(令)으로 임명되었다. 제용감은 조선시대 왕실에서 쓰는 의복(비단, 베, 염색 작업)이나 식품(인삼 등)에 관한 업무를 관리하던 기관으로, 정(正) 1인, 부정(副正) 1인, 첨정(僉正) 1인, 판관(判官) 1인, 주부(主簿) 1인, 직장(直長) 1인, 봉사(奉事) 1인, 부봉사(副奉事) 1인, 참봉(參奉) 1인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이곳에 딸린 이속(吏屬: 아전, 구실아치 *구실아치는 벼슬아치 밑에서 일을 보던 사람)으로는 서원(署員) 20인과 고직(庫直) 8인이 있었다. 평시서는 조선시대 시전·도량형·물가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기관으로, 겸직인 제조(提調) 1인과 영(令, 종5품) 1인, 주부(主簿, 종6품) 1인, 직장(直長, 종7품) 1인, 봉사(奉事, 종8품) 1인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이속(吏屬: 아전, 구실아치)으로는 서원(署員) 5인, 고직(庫直) 1인, 사령(使令) 11인이 있었다.

■1877 예산현감■ 19세 나이(옛 나이 20세)에 관직 생활을 시작한 조병갑은 그동안 중앙의 여러 관청에 근무하다가 33세(옛 나이 34세·35세) 나이인 1877년(고종 14) 7월 26일 예산현감(禮山縣監, 종6품)으로 발령받아 처음으로 지방 수령이 되었다.

■1882 비안현감 / 천안군수, {중징계(벌금과 강등)}■ 1882년(고종 19) 3월 16일 비안현감(比安縣監, 종6품, 비안현은 현 경북 의성군)이 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23일 천안군수(天安郡守, 종4품)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1883년(고종 20) 8월 11일 유배 가는 죄인을 놓친 천안군수를 잡아다 심문하고 처벌할 것을 왕께 요청하는 형조(刑曹)의 장계가 올라왔다.

【죄인을 놓친 천안군수 조병갑을 나문할 것 등을 청하는 형조의 계】 또 아뢰기를, “방금 충청도 천안군수 조병갑이 보고한 것을 보니, ‘본조(本曹)에서 정배(定配: 귀양살이할 곳을 정하여 죄인을 유배시킴) 보낸 흑산도 충군(充軍: 죄를 범한 자를 군역에 복무하도록 한 형벌) 죄인 이창인(李昌仁)이 지난 5월 18일에 본군(本郡)에 압송되어 이르렀기에, 별도로 장차(將差: 죄인 등을 호송하여 가거나 수취 등을 위해 파견된 나장과 차사)를 정해서 다음 역참으로 인솔해 보냈습니다. 그런데 공주목(公州牧) 광정역(廣亭驛)에 이르러 장차가 잠에 빠져든 야밤을 틈타 죄인 이창인이 어둠 속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래서 나장(羅將)들을 많이 풀어 한 달 이상을 기형(譏詗: 남모르게 엿봄)하였습니다만, 아직도 붙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보고가 지체되기에 이르렀는데, 거행하는 도리로 볼 때 두렵고 민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정배(定配)의 법의(法意: 법률의 근본 취지)가 얼마나 엄하며 전후로 신칙(申飭: 단단히 타일러 경계함)한 것이 또 어떠하였습니까. 계하(啓下: 임금의 결재‧허락을 받음)된 막중한 죄인을 잘 단속하지 못해 호송할 때마다 매번 도망치는 폐단이 있으니, 외읍(外邑)의 거행(擧行: 명령대로 행함)이 매우 놀랍습니다. 천안군수 조병갑은 해부(該府: 해당 부서)로 하여금 나문(拿問: 죄인을 잡아다가 신문함)하여 처벌하도록 하고, 인솔해 간 장차들은 본도(本道)로 하여금 형률에 의거하여 형배(刑配: 죄인을 때린 후 귀양보내는 형벌)하도록 하소서. 도망간 죄인에 대해서는 좌우변 포도청에 분부하여 기한을 엄히 정해 기찰(譏察: 엄중히 살핌)하여 잡게 하는 한편, 해도(該道: 해당 도)의 각 진영으로 하여금 포졸을 풀어 잡아 들이도록 한 다음, 잡히기를 기다렸다가 해당 형률을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승정원일기』 2915책(탈초본 134책) 고종 20년 8월 11일 무오 23/27 기사 1883년 光緖(淸/德宗) 9년

이에 유배 죄인을 놓치고 이를 빨리 보고하지 않은 죄로 조병갑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구격죄인(具格罪人: 수갑과 차꼬를 채우고 칼을 씌워 놓은 죄인)이 갇혀 있을 때는 현재 갇혀 있는 죄인을 으레 의금부 안에 함께 둘 수가 없으므로 8월 18일 그를 풀어주자는 의금부 의견에 따라 일단 감옥에서 풀려났다.

【의금부, 죄인 조병갑을 구류에서 풀어줄 것을 왕께 아룀】 의금부가 아뢰기를, “이번처럼 구격죄인(具格罪人: 수갑과 차꼬를 채우고 칼을 씌워 놓은 죄인)이 갇혀 있을 때에는 현재 갇혀 있는 죄인을 으레 본부(本府) 안에 함께 둘 수가 없으니, 현재 갇혀 있는 죄인 조병갑을 우선 보방(保放: 보증금을 받거나 보증인으로 세우게 하고, 형사피고인을 한때 구류에서 풀어 줌)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승정원일기』 2915책(탈초본 134책) 고종 20년 8월 18일 을축 7/7 기사 1883년 光緖(淸/德宗) 9년

그리고 의금부는 조병갑을 다시 잡아들여 조사하였는데, 8월 28일 그의 병세에 차도가 없으니 보방[保放=보석(保釋): 보증금을 받거나 보증인을 세워 피고인을 구류에서 풀어줌]할 것을 왕께 청하였으며, 왕은 이를 하락하였다. 또 한편 의금부는 조병갑이 억울함을 호소하기를 거짓말로 한다며 조병갑에게 때리는 등의 고문을 가하며 조사할 수 있도록 왕께 청하였으나 왕은 때리면 조사하지 말고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하였다.

【의금부, 조병갑을 다시 가두어 조사하였는데 병세가 차도가 없으니 보석시키겠다고 왕께 아룀】 의금부가 아뢰기를, “보방한 죄인 홍병희(洪秉僖) 등을 다시 가두어 조율(照律)하고, 이정규(李廷珪) 등은 다시 가둔 다음 의처하였으며, 조병갑(趙秉甲)은 다시 가둔 다음 공초(供招)를 받아들였는데, 병세가 한결같이 차도가 없으니 모두 그대로 보방(保放)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승정원일기』 2915책(탈초본 134책) 고종 20년 8월 28일 을해 21/55 기사 1883년 光緖(淸/德宗) 9년]

【의금부, 전 천안군수 조병갑을 다시 가두고 논의하여 처벌할 것을 왕께 아룀】 또 계목(啓目)에, “전 천안군수(天安郡守) 조병갑(趙秉甲)이 원정(原情: 사정을 하소연함)에 운운(云云)하였습니다. 전지(傳旨) 안의 죄상에 대해 범범(泛泛: 데면데면, 조심스럽지 않은 모양)하게 지만(遲晩: 죄인이 자기 죄를 인정할 때에 너무 오래 속여서 미안하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라 하였으니, 형추(刑推: 죄인을 때리며 조사함)하여 실정을 캐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판부(判付: 올라온 사안에 대해 임금이 허락함)하기를, “형추(刑推: 죄인의 정강이를 때리며 캐어 묻는 일)는 그만두고 의처(疑處: 의논하여 처리함)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2915책(탈초본 134책) 고종 20년 8월 28일 을해 35/55 기사 1883년 光緖(淸/德宗) 9년

○조병갑 징계(벌금과 강등)○ 조병갑을 다시 잡아 가두어 재조사하면서 의금부는 병을 이유로 조병갑을 보석시키기도 하였으나 죄를 묻지 않을 수는 없었다. 1883년 8월 29일, 의금부에서 더는 조병갑에 대한 징계를 미룰 수 없다며 조병갑이 지은 죄는 장(杖) 100대에 해당하는 돈을 내는 죄라고 왕께 보고하자, 왕은 그리 하라고 하면서 “공(功)과 의(議: 남의 잘못을 들어 나무람)로 각각 1등을 감하라.” 하였다. 이렇게 조병갑은 벌금형과 2등급 강등(降等)되는 중징계를 받았다.

【의금부, 유배 가는 죄인을 놓친 천안군수 조병갑의 죄에 대해 논의한 것을 왕께 아룀】 의금부 계목에, “… 천안군수 조병갑에 대한 본부의 의계(議啟: 임금이 명령한 일을 신하들이 의논하여 아룀) 안에, ‘충군(充軍)할 유배 죄수는 진실로 신중하고 엄하게 다루어야 하는데, 미리 단속하고 신칙(申飭)하지 못하여 마침내 도중에 도망치는 일이 벌어졌으니, 법의(法意)로 헤아려 볼 때 해당하는 처벌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조율하니, 죄가 장일백(杖一百)은 수속(收贖: 형벌을 돈으로 대신함)하는 데에 해당하며, 공죄(公罪)입니다.” 하였는데, 판부(判付)하기를, “그대로 윤허한다. 공(功)과 의(議)로 각각 1등을 감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2915책(탈초본 134책) 고종 20년 8월 29일 병자 38/42 기사 1883년 光緖(淸/德宗) 9년

이런 징계를 받았음에도 1884년(고종 21) 2월 충청감사(忠淸監司, 충청도 관찰사) 남일우(南一祐)는 왕께 천안군수 조병갑에 대해 말하길 ‘치적이 좋은 수령’이라고 아뢰기도 하였다. 남일우는 1882년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관청의 부실한 재정과 조세제도를 정비하여 흉년으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었다고 하는 관리다(그의 선정비가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안보리, 충남 논산시 연산면 연산리, 경북 영주시 풍기읍 성내리 등에 전해지고 있다).

【전 충청감사 남일우가 천안군수 조병갑 등 지방 수령의 치적에 대해 왕께 아룀】 전 충청감사가 입시(入侍)하였다. … 상(上: 임금)이 이르기를, “사관(史官)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고, … 이어서 하교하기를, “수령의 치적은 누가 좋고 누가 못한가?” 하자, 남일우가 아뢰기를, “잘하지 못한 자는 이미 고과(考課)에 낮추어 매겼고, 우수한 성적으로는 겸 보령부사(兼保寧府使) 양주성(梁柱星), 홍주목사(洪州牧使) 김상봉(金商鳳), 천안군수(天安郡守) 조병갑(趙秉甲), 대흥군수(大興郡守) 최희진(崔喜鎭)이 가장 나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네 수령은 치적이 과연 가장 잘 드러난 자인가?” 하자, 남일우가 아뢰기를, “고루 실적이 있어서 도내에서 칭송이 큽니다.” 하였다. … 상이 이르기를, “전 충청감사는 먼저 물러가라.” 하고, 이어 사관에게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또 물러가라고 명하니, 승지와 사관이 차례로 물러 나왔다. -『승정원일기』 2920책(탈초본 134책) 고종 21년 2월 25일 신미 13/13 기사 1884년 光緖(淸/德宗) 10년

천안군수 조병갑은 ‘실적이 있어서 도내에서 칭송이 크다’라고 남일우가 왕께 아뢴 것처럼 조병갑이 선정을 베풀었는지(?), 2009년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매당리 565-1번지(매당리 댕댕이마을에서 쇠골마을 사이 컨테이너 주택 밭 중간쯤)에서 그의 선정비 ‘군수조후병갑청휼애민선정비(郡守趙侯秉甲淸恤愛民善政碑)’가 발견되었다. 이 비석은 지붕이 없는 비갈(碑碣) 형태로 발견되었는데.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현재 다른 곳으로 옮겨져 받침돌만 남아 있다. 비석이 있던 이곳은 공주에서 천안으로 넘어가는 길목으로, 이곳 주민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곳은 옛날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주변에 주막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1885 직산현감(부임하지 않음) / 보성군수■ 유배 가는 죄인을 놓친 일로 1883년 8월 중징계받아 2등급 강등된 천안군수 조병갑은 1885년(고종 22) 3월 28일 직산현감(稷山縣監, 종6품, 직산현은 오늘날 천안시 직산읍)으로 발령받았다. 그러나 부임하지 않았다. 군수에서 현감으로 가는 게 멋쩍다고 생각했을까, 부임하지 않고 로비하여 뒷배가 작용한 것일까, 결국 4월 15일 보성군수(寶城郡守, 종4품)로 임명되어 이후 1년 정도 보성에서 근무했다.

■1886 풍기군수(부임하지 않음) / 함양군수■ 보성군수 조병갑은 1886년 4월 2일 풍기군수(豐基郡守)로 발령받았다. 그러나 부임하지 않고 서울로 올라왔으며, “갑자기 신병이 위중해서 부임할 가망이 전혀 없다”라고 장계를 올렸다. 결국 조병갑은 함양군수(咸陽郡守)에 임명된다. 이처럼 부임하지 않고 결국 새로 임명받는 일이 반복된 데는 아무래도 든든한 백이 작용했을 것이다.

【풍기군수 조병갑과 함양군수 김재순과 서로 바꿈】 또 이조(吏曹)의 말로 아뢰기를, “풍기군수 조병갑의 정장(呈狀) 안에, ‘제가 수유(受由: 말미‧휴가를 받음, 또는 그 말미)를 받아 상경하였는데 신병이 갑자기 위중해져 부임할 가망이 전혀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파출(罷黜: 현직을 파면하는 동시에 관등을 깎아내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함양군수 김재순(金載舜)과 서로 바꾸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2947책(탈초본 135책) 고종 23년 4월 29일 임진 19/30 기사 1886년 光緖(淸/德宗) 12년]

1886년 4월 29일 함양군수로 발령받은 조병갑은 1886년 7월 함양 임지에 도착했으며, 10월에는 함양군수를 역임한 아버지 조규순의 선정비 ‘군수조후규순영세불망비(郡守趙侯奎淳永世不忘碑, 1849년 8월 건립)’의 비각(碑閣: 비석을 보호하거나 기념하기 위해 세운 건물)을 세워 옮겼다고 한다. 이 조규순의 선정비가 현재 경남 함양군 함양읍 교산리 ‘상림공원’ 안 역사인물공원 비석군(碑石群: 여러 개의 비가 한곳에 모아져 있는 곳)에 전해지고 있다.

조병갑은 1년 2개월 정도(1886.04.~1887.06.) 함양군수로 근무하였다. 그가 1887년 6월 김해부사로 발령받아 함양을 떠나게 되자 7월에 그의 선정비 ‘군수조후병갑청덕선정비(郡守趙侯秉甲淸德善政碑)’가 세워졌다. 이 조병갑의 선정비는 아버지 조규순의 선정비와 함께 현재 함양 상림공원 안 역사인물공원 비석군에 전해지고 있다.

■1887 김해부사■ 함양군수 조병갑은 1887년(고종 24) 6월 18일 김해부사(金海府使)로 발령받아 8월에 김해부사로 부임하여 1889년 2월 10일까지 약 1년 6개월 동안 근무하였다. 김해부사로 부임한 지 1년이 조금 지난 1888년 9월에 자신의 선정비 ‘부사조후휘병갑영세불망비(府使趙侯諱秉甲永世不忘碑)’를 세웠다고 한다. 현재 조병갑 영세불망비는 경남 김해시 생림면 봉림리 생림면행정복지센터(옛 생림면사무소) 앞마당 주차장 끝에 있는 비석군에 전해지고 있다, 이곳에는 경상도 관찰사 이호준(李鎬俊: 이완용 양아버지)과 영의정 심순택(沈舜澤)의 선정비(공덕비)와 함께 생림면 출신 이유인(李裕寅) 송덕비는 물론 이유인이 고종 황제의 덕을 칭송하기 위해 마을 동쪽 끝에 선은대(宣恩臺)를 쌓고 세웠던 비석인 ‘선은대비(宣恩臺碑)’까지 이렇게 다섯 개의 비석이 나란히 전해지고 있다.

 

이들 공덕비가 세워진 내력에 대해서는 『월간조선』 2006년 11월호에 소개된, 다음과 같은 ‘1986년 작고한 마을 주민 김상하 씨의 유필(遺筆)’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조선(朝鮮) 고종(高宗) 21년(1884)에 김해시(金海市) 생림면 지역에 극심한 가뭄으로 농작물이 개무(皆無: 전혀 없음) 상태로 민생(民生)이 도탄(塗炭) 지경이었다. 이때 지방 유지들이 피해지역의 지세(地稅) 면제 건의서를 김해(金海) 부사 조병갑(趙秉甲)에게 제출한바, 조병갑(趙秉甲) 부사는 이를 도관찰사에게 상신(上申)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이호준(李鎬俊)은 이곳을 순시하고 그 사실을 조정(朝廷)에 주청(奏請)한바, 영의정 심순택(沈舜澤)의 주선으로 전면 면제 혜택을 받았다. 그 후 이곳 생림면민의 성금(誠金)으로 고종 25년(1888) 9월에 선은대(宣恩臺)를 세웠고 동시에 조병갑(趙秉甲) 부사, 이호준(李鎬俊) 관찰사, 심순택(沈舜澤) 영의정의 공덕비(功德碑)를 세웠다.

■1889 영동현감(부임하지 않음) / 고부군수(1)■ 1889년(고종 26) 1월 7일 영동현감(永同縣監)으로 발령받았으나 부임하지 않다가 4월 초에 가서야 “저는 부임하는 길에 신병이 갑자기 중해져서 부임할 가망이 전혀 없습니다”라고 핑계를 대었다. 결국 45세(옛 나이 46세) 나이인 1889년 4월 7일 고부군수(古阜郡守)로 발령받게 되었다.

이에 대해 영동현감에 임명된 조병갑은 부임하지 않고 민영준[閔泳駿=민영휘(閔泳徽), 1852~1935, 일제강점기 자작 작위를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을 통해 여흥민씨(驪興閔氏) 명성황후에게 7만 냥을 뇌물로 바쳐 고부군수 자리를 매관매직하였다고 이야기도 전한다. 하지만 뇌물 7만 냥을 받쳤다는 자료가 확인되지 않는 만큼 좀 더 확인이 필요하다.

【영동현감 조병갑과 고부군수 송병두와 서로 바꿈】 또 이조(吏曹)의 말로 아뢰기를, “영동현감 조병갑의 정장(呈狀) 안에, ‘저는 부임하는 길에 신병이 갑자기 중해져서 부임할 가망이 전혀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개차(改差: 벼슬아치를 다른 이로 바꿈)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고부군수(古阜郡守) 송병두(宋秉斗)와 서로 바꾸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2984책(탈초본 136책) 고종 26년 4월 7일 임오 23/37 기사 1889년 光緖(淸/德宗) 15년

조병갑은 1889년 4월에 고부군수로 발령받았으나 3개월 후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여 군수직을 사퇴하고 이후 3년간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다(이때 상을 당한 어머니는, 아버지 조규순의 본처인 전주이씨는 조병갑이 태어난 지 2년 되는 1846년에 사망하였으므로 조병갑을 낳은 친어머니 측실 김해김씨로 짐작된다). 다만 후임 군수 송병필(宋秉弼)이 1889년 8월에 부임했으므로 이때까지는 조병갑이 군수직을 수행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조병갑은 1892년 5월에 고부군수로 재임명되어 다시 부임하게 된다.

■1892 기기국 위원 / 고부군수(2)■ 조병갑은 어머니상(喪)을 치른 3년 후인 1892년(고종 29) 4월, 병기(兵器: 무기)를 만드는 기관인 기기국(機器局)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기기국 위원으로 임명된 지 26일 만인 4월 28일(양력 5월 24일) 고부군수로 재발령받았다. 5월에 고부군수로 부임해 온 조병갑은 기존의 만석보(예동보) 아래에 필요하지도 않은 새로운 보(洑: 저수지, 새로 쌓은 보도 ‘만석보’라 함)를 쌓는가 하면 약속을 어기고 수세를 거두었다. 보를 쌓는 데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고 임금을 주지 않는 등 가혹한 행정을 펼쳤다. 흉년이 들어 살아가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는데도 1893년 농민들에게 강제로 고액의 세금을 징수했다. 부유한 농민들을 잡아들여 갖가지 죄명을 씌워 2만 냥 정도의 재물을 빼앗았으며, 이전에 태인현감을 지냈던 아버지 조규순의 송덕비를 세운다고 강제로 1,000냥 정도를 거두어 챙기기도 하였다.

현재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 556-2번지 ‘호남 제일의 정자’ 피향정(披香亭, 보물) 경내에 1893년 2월 조병갑이 세운 아버지 조규순의 송덕비 ‘현감조후규순영세불망비(縣監趙侯奎淳永世不忘碑)’가 전해지고 있다.

○전창혁 사망○ 1893년 6월, 전봉준 아버지 전창혁(全彰爀, 1827~1893)[전승록(全承祿)]은 김도삼(金道三)·정익서(鄭益西) 등과 중심이 되어 사람들을 모아 고부관아로 몰려가 수세(水稅: 물세)를 감해 줄 것을 진정하였다. 그러나 전창혁은 주동자로 몰려 심한 매를 맞고 쫓겨났다.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전창혁은 사망하였다.

이런 전창혁의 사망과 관련하여 적잖은 곳에서 “고부군수 조병갑은 1893(또는 익산현감으로 전임 갔을 때) 모친상을 당하자, 부조금 2,000냥을 강제로 걷는 일로 전창혁과 갈등이 생겨 그래서 조병갑이 전창혁에게 곤장(棍杖)을 심하게 때려 그 장독(杖毒)으로 전창혁이 죽게 되었다”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다. 조병갑이 모친상을 당한 것은 1889년 고부군수로 부임했을 때이지 1893년이 아니다. 전후 관계가 맞지 않는다. 따라서 잘못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동뉴스(2020.12.15.) 「조병갑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어… 」에 소개된,

“기생 출신 조병갑의 어미가 죽었다. 조병갑은 어미 상을 치르느라 고부군수직을 그만뒀다. 그때 조병갑에게 빌붙어 호사를 누리던 말 깨나 짓거리던 고부군 유지(有志: 지역에서 명망 있고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부조금을 모았다. 2,000냥이었다. 유지들은 부조금을 고부 향교 김성천 장의와 전직 장의 전창혁(全彰爀)에게 맡겼다. 전직 장의 전창혁은 곧 전봉준의 아버지였다. 그런데 현직 향교 장의 김성천은 마음이 달랐다. 그는 조병갑이 다시 고부군수로 복직할 줄을 몰랐다.

김성천은 “추호도 선정을 베푼 적이 없고 기생 어미의 죽음에 무슨 놈의 부의(賻儀)냐!” 하고 큰소리치고는 맡은 부조금을 마음대로 처분해 버렸다. 그런 뒤 김성천은 곧 저승 식구가 돼 버렸다. 어미 거상을 마친 조병갑은 물이 좋은 고부군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거액의 뇌물을 바쳐 다시 고부군수로 복직했다. 그는 어미 죽음 부조금부터 챙겼다. 그러나 장본인 김성천은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무덤을 파서 해골을 앉혀 놓고 ‘부조금을 내놔라,’라고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살아 있는 전창혁이 조병갑에게 끌려갔다. 전창혁은 나졸들이 휘두르는 곤장을 맞고 조병갑 발밑에서 뻗어 버렸다. 아들 전봉준이 아버지 전창혁을 업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한 달 만에 전창혁은 한 많은 세상을 돌아섰다. 나이 66세, 동네 아이들 훈장 노릇을 하던 전봉준은 기가 막혔다. 그는 조병갑을 아버지 원수로 못 박았다. 반드시 조병갑을 죽여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어 아버지 영전에 술을 한 잔 따르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라는 글은 전후 관계가 충돌하지 않는다. 다만, 조병갑이 뇌물을 바쳐 군수로 복직했다는 것과 조병갑이 전창혁을 잡아간 것처럼 이야기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이상의 이야기를 종합하여 다음처럼 정리하면 어떨까 싶다.

조병갑은 1889년 4월에 고부군수로 발령받았으나 3개월 후 모친상을 당하여 군수직을 사퇴하고 이후 3년간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다만 후임 군수 송병필(宋秉弼)이 1889년 8월에 부임했으므로 몇 달간은 조병갑이 군수직을 수행하였다. 조병갑이 모친상을 당하자, 고부군 유지들이 부조금 2,000냥을 모아 고부향교 장의(掌議) 김성천(金成天)과 전직 장의 전창혁에게 맡겼다. 김성천은 조병갑이 다시 부임할 줄 모르고 맡은 부조금을 마음대로 써버렸다. 1892년 5월에 조병갑이 다시 고부군수로 부임하여 3년 전 유지들이 걷었다는 부조금을 챙기려 하였다. 그러나 부조금을 맡았던 김성천은 이미 죽은지라 김성천과 함께 부조금을 맡았던 전창혁에게 화살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전창혁을 비롯한 고부 사람들이 세금을 감해 줄 것을 호소하러 관아에 왔다. 이때 조병갑은 앙갚음으로 전창혁 등을 감옥에 가두고 매질하였다. 그 후유증으로 전창혁은 사망하였다.

이렇게 정리하면 이야기의 전후 관계가 맞아 돌아가고 사실관계가 정확해진다. 어쩌면 원래 전후 줄거리가 이런 이야기인데 전해지는 과정에서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여러 번 부임하다 보니 앞뒤가 맞지 않은 채로 이야기가 바뀐 것은 아닐까 싶다. 꼼꼼히 살펴볼 일이다.

○방곡령 선포○ 1893년(고종 30) 10월 군수 조병갑은 전라도 고부에 방곡령(防穀令)을 선포(宣布: 세상에 널리 알림)하였다. 방곡령은 특정 지역에 식량이 부족해지는 일이 일어났을 때 다른 지역으로 식량을 빠져나가는 것을 금지하는 조치이다. 농산물 가격을 안정시키며 농민과 지역민을 보호하고자 취하는 정책이다. 이런 방곡령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조병식(趙秉式)이다.

함경도 관찰사이던 조병식은 1889년 9월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곡식 수출을 금지하는 방곡령을 선포하였다. 이에 일본은 방곡령을 내리려면 한 달 전에 미리 통보해야 한다는 규정을 근거로 항의하였다. 조정에서도 방곡령 철회를 주장하였으나 조병식은 그대로 밀고 나갔다. 일본은 조병식 처벌과 함께 일본인 상인이 본 손해 배상을 요구하였으며, 조정은 이러한 일본의 요구에 굴복, 결국 조병식을 강원도 관찰사로 전출시키고 함경도 방곡령을 해제하였다. 또 일본에 적잖은 배상금을 지급했다.

방곡령에 대한 평가에는, 방곡령은 우리 상인과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발표한 것이라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오히려 방곡령은 지방관이 자기 이익을 챙길 곡식이 부족해지자 선포한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조병식이 살아온 면면을 보면 그는 백성을 위하던 관리가 아니었으며, 조정의 명령을 듣지 않고 방곡령을 밀고 나간 데에는 뭔가 다른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심지어 조병식은 조병갑보다 더 심한 탐관오리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방곡령은 함경도에 이어 강원도에서도 발표(1890)되었으며, 이후 몇몇 지방에서도 방곡령이 발표되었다. 조병식의 8촌 동생인 고부군수 조병갑도 방곡령을 선포(1893)하였다. 이에 대한 평가를 보면, 당시 조병갑이 방곡령을 선포한 것은 농민을 위한 게 아니라 군수가 방곡 전후의 곡가(穀價: 곡식의 가격) 차이를 이용하여 이익을 취할 의도로 선포한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하원호, 한국근대경제사연구, 신서원, 1997, 184쪽).

■1893 익산군수(가지 않음)■ 고부군수 조병갑이 문제를 일으키자, 조정에서는 1893년(고종 30) 11월 30일 익산군수(益山郡守)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조병갑은 익산으로 가지 않고 고부에 남아 조세 장부를 정리하며 그대로 눌러앉았다.

【조병갑, 익산군수로 발령받았으나 고부군수로 계속 남아 있음】 조병갑은 11월에 고부민(古阜民)의 정소(呈訴: 소장을 관청에 냄) 사건이 일어나면서 그의 탐학상이 폭로되어 1893년 11월 30일 자로 익산군수로 전임(轉任: 다른 관직이나 다른 지역으로 옮김)되었으나, 후임자들이 고부군수로 임명을 받고도 부임하지 못한 채 다른 지역의 수령으로 전임되거나, 신병(身病) 등을 이유로 사직하였기 때문에 조병갑은 계속 고부군수로 남아 있었다. –정창렬, 「고부민란연구」 하, 『한국사연구』 49, 1985.

사실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임명된 데에는 이조판서 심상훈의 추천이 있어서였다. 그런데 이 추천 자체가 문제였다. 이조판서 심상훈이 조병갑을 익산군수로 추천한 일에 대해 1893년 12월 3일, 이조에서 논의하여 결국 익산군수 발령이 보류되었다. 고려․조선시대에는 상피제(相避制)라는 제도를 통해 일정한 범위 내의 친족간에 같은 동일한 관사(官司: 관아, 관직)나 통속관계(統屬關係: 일정한 통제 아래에 소속된 관계)에 있는 관사에 취임하지 못하게 하거나 청송관(聽訟官: 법관)·시관(試官: 시험관) 등이 될 수 없도록 하였다. 따라서 이조판서 심상훈이 추천하는 이조 소속 관직에 조병갑을 임명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조병갑의 장남 조찬희가 심상훈의 딸과 결혼하여 조병갑과 심상훈은 친사돈 간이 되므로 추천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멍청하게 추천’한 잘못된 추천이었다.

【이조판서 심상훈이 친사돈 간인 조병갑을 익산군수로 추천한 일에 대해 논함】 정규섭(鄭圭燮)이 이조의 말로 아뢰기를, “지난 12월(11월의 오기일 듯함) 30일 정사(政事) 가운데 익산군수(益山郡守) 조병갑이 본조(本曹)의 판서 심상훈(沈相薰)과 친사돈 간으로 상피(相避: 서로 피함)해야 할 혐의가 있는데도 멍청하게 의망(擬望: 3명의 후보자로 추천하는 일)해 들여 낙점을 받기까지 하였습니다. 원래의 망통[望筒: 3명의 후보자를 추천하는 삼망(三望)을 기록한 단자를 넣는 통]을 시행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시행하지 말라고 전교하였다. -『승정원일기』 3041책(탈초본 138책) 고종 30년 12월 3일 신해 9/14 기사 1893년 光緖(淸/德宗) 19년

심상훈(沈相薰, 1854~1907)은 공조판서 심응택(沈應澤)의 아들로,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이며, 흥선대원군의 장인인 민치구(閔致久)의 외손자이다. 하여 흥선대원군이 이모부가 되고, 고종 황제와는 이종사촌이며, 명성황후의 친족(親族: 친척)이기도 하다. 1874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 1882년 수구당의 한 사람으로 임오군란 때 장호원에 피신하고 있던 명성황후와 연락하여 청군을 끌어들여 흥선대원군을 청국으로 납치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 때 경기도 관찰사로서 개화당 지지자로 위장하여 고종과 명성황후와 연락을 취해 또다시 청군을 끌어들여 독립당의 혁신 정부를 전복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어 충청도 관찰사로 나아가 동학교도의 탄압에 앞장섰으며, 이후 공조판서, 이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는 가운데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친러시아 경향을 띤 수구파 내각의 탁지부대신이 되어 악화(惡貨)인 백동화(白銅貨)와 같은 보조화(補助貨)를 찍어내 유통 질서 혼란을 초래하여 독립협회로부터 탄핵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1905년 민영환, 조병세 등과 을사늑약 반대 상소를 올렸으나 끝내 조약이 체결되자, 자결하려 하였으나 고종의 만류로 포기하였다. 1906년 표훈원 총재, 강원도 관찰사, 1907년 궁내부 대신, 궁내부 특진관 등으로 있다가 사망하였다.

심상훈은 1885년 3월 2일부터 1886년 5월 10일까지 충청도 관찰사로 근무하기도 하였는데,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때인 고종 22년(1885년) 신원사를 중수하면서 어수선한 나라가 일신발전(一新發展)하여 신기원(新紀元)이 이룩되기를 염원하는 의미로 신원사(神阮寺)를 신원사(新元寺)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또 심상훈은 충청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동학교도 탄압에 앞장섰다고 하는데, 이때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이다. 심상훈이 충청감사로 있던 때는 1885년과 1896년이며, 동학농민혁명이 전개된 시기는 일반적으로 1892년 10월 공주취회(1차), 삼례취회(1차), 11월 삼례취회(2차), 12월 공주취회(2차), 1893년 2월 서울 광화문 복합상소, 3월 보은취회, 원평취회에서 동학교도들이 모여 상소하고 시위하던 교조신원운동을 비롯하여 주로 1894년 1월 고부봉기, 3월 무장봉기, 9월 삼례봉기, 청산기포, 10월 우금티전투와 이후 전국에서 산발적으로 활동으로 이어진 시기이다.

이런 점에서 1892년 공주취회 때 동학교도를 탄압하였던 충청도 관찰사인 조병식보다 1885년 당시 충청도 관찰사인 심상훈이 먼저 동학교도를 탄압에 나섰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랬던 심상훈의 선정비가 여럿 전해지고 있다. 파악되는 것으로는 충남 논산시 상월면 신충리 상월행정복지센터 안 비석군 ‘관찰사심공상훈영세불망비(觀察使沈公相薰永世不忘碑)’, 당진시 합덕읍 합덕리 합덕제 중수비 비석군 ‘순찰사심상훈영세불망비’, 서산시 읍내동 서산시청 앞 비석군 ‘순찰사심공상훈영세불망비(巡察使沈公相薰永世不忘碑)’, 예산군 대흥면 동서리 대흥중고등학교 앞 비석군 ‘관찰사심후상훈흥학애민선정비(觀察使沈侯相薰興學愛民善政碑)’, 아산시 영인면 성내리 비석군 ‘관찰사심공상훈영세불망비(觀察使沈公相薰永世不忘碑)’,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비석군 ‘탁지대신심공상훈청덕선정비(度支大臣沈公相薰淸德善政碑)’ 등이 있다. 이렇게 충남에 5기, 강원도에 1기, 총 6기(基) 정도 확인되고 있다.

여하튼 조병갑이 1893년 11월 30일 고부군수에서 익산군수로 발령 났음에도 부임하지 않고 고부에 계속 남아 있는 가운데 그 후임으로 이은용이 발령받았으나 이은용도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 신좌묵, 이규백, 하긍일, 박희성, 강인철 순으로 발령이 났으나 이들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결국 이은용은 1893년 12월 24일 안악군수로 발령 나게 되며, 이렇게 한 달 남짓한 기간(39일 동안) 서류상으로 고부군수가 6명이나 바뀌었으나 실제 고부군수 자리는 비어 있었다. 하여 조병갑이 고부에 계속 남아 있는 가운데 전라감사(전라도 관찰사) 김문현(金文鉉)은 조병갑을 고부군수로 유임(留任: 그대로 머무르거나 머무르게 함)시킬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계속 남아 있는 가운데 1893년 12월 전봉준은 고부 사람 60명과 함께 조병갑에게 폐정개혁을 요구하는 등소(等訴: 여러 사람이 이름을 이어서 써서 관청에 올려 하소연함)를 다시 제출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전봉준공초(全琫準供草)」, 『동학농민혁명자료총서』 18, 15~16쪽). 이처럼 폐정개혁을 위한 여러 번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봉준은 손여옥(孫如玉, 손화중의 조카), 최경선(崔景善) 등 농민 대표 20여 명과 함께 고부군 서부면 죽산리 대뫼부락(현 신중리 주산마을)에 있는 송두호(宋斗浩)의 집에 모여 결의문을 작성하고 20명이 사발처럼 동그랗게 연명한 사발통문을 작성하였다. 본격적인 동학농민혁명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다음애 '4. 세 번째 고부군수 조병갑과 동학농민혁명'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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