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 같은데 잘 모르는 조병갑, 조병갑보다 더한 조병식과 조병직(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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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 같은데 잘 모르는 조병갑, 조병갑보다 더한 조병식과 조병직(14)
  • 인간 전병철
  • 승인 2026.04.08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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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관찰사 조병식의 공주집회 탄압과 고등재판소 판사 조병갑·조병직의 동학교주 재판

(14) 조병식 선정비가 충남 공주 유구, 논산 노성·부적, 서산·예산·청양, 충북 진천과 청주 문의, 그리고 경기 강화에 적잖게 전해지고 있다

동학농민혁명과 관련 있는 인물, 조병갑과 조병식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어 발품 팔아 조사했습니다. 하고 나니 조병직에 대한 정리도 필요하여 추가 조사하였습니다. 그 결과, A4로 200쪽 되는 글을 16회로 나누어 공유하고자 합니다. 재미없는 글이긴 하나, 조병갑ㆍ조병식ㆍ조병직을 알면 동학농민혁명을 아는 데 나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인간 전병철(작가)

 

8. 조병식이 남긴 흔적들

조병식이 남긴 흔적으로 대표적인 것으로는 그의 무덤이나 그를 위해 세운 선정비(善政碑), 그가 살던 집이나 관련 문화유산 등이 있다. 그런데 그의 묘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집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다. 전해지는 것으로 가장 대표적인 게 선정비이다. 여기에 조병식과 관련 있는 것으로 예산 보덕사 극락전 산신탱화(산신도)가 있다. 보덕사 산신도는 조병식의 시주로 마련된 것으로, 조병식과 흥선대원군과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기도 한데, 이 보덕사 산신탱화에 대해서는 앞에서 서술한 ‘3.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과 어사 이건창의 탄핵’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현재, 조병식 선정비로 알려진 것으로는 11기 정도 된다. 주로 강화도와 충청도에 세워진 것들인데, 조병식이 강화유수와 두 번의 충청도 관찰사는 지낸 일과 관련된 선정비이다. 이 외에도 더 있을 수 있으나 알려지지 않아 더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공주 유구읍 조병식 영세불망비(관찰사조공병식영세불망비, 1882.08.)

논산 노성면 조병식 영세불망비(순찰사조공병식영세불망비, 1892.11.)

논산 부적면 조병식 애민선정비(도순찰사조공병식애민불망비, 1892.12.20.)

예산 오가면 조병식 영세불망비(관찰사조공병식영세불망비, 1893.02.)

청양 송방리 조병식 영세불망비(순찰사조공병식영세불망비, 1883.04.)

서산 운산면 조병식 청덕선정비(관찰사조공병식청덕선정비)

강화 갑곶돈대 조병식 유혜망도영세불망비(유수겸진무사조공병식유혜망도영세불망비, 1876)

강화 갑곶돈대 조병식 애민선정비(유수겸진무사조공병식애민선정비, 1880)

강화 석모도 조병식 영세불망비(유수겸진무사조공병식영세불망비, 1876.03.)

진천 교성리 조병식 애민선정비(관찰사조공병식애민선정비)

청주 문의면 조병식 애민선정비(관찰사조공병식애민선정비)

이 가운데 충남 공주 유구 조병식 영세불망비와 논산 노성 조병식 영세불망비, 부적 조병식 애민선정비, 예산 오가 조병식 영세불망비 그리고 인천시에 있는 강화 갑곶돈대 조병식 유혜망도영세불망비, 갑곶돈대 조병식 애민선정비, 석모도 조병식 영세불망비는 세워진 연대가 확인되어 앞에 서술한 ‘2. 과거를 통해 시작한 관직 생활, 강화유수 조병식과 개항’, ‘3.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과 어사 이건창의 탄핵’, ‘5. 두 번째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과 동학농민혁명’에서 해당 시기에 맞춰 이미 소개하였다.

조병식 선정비 가운데 건립 연대가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는 충남 서산 운산 조병식 청덕선정비, 충북 진천 교성리 조병식 애민선정비, 청주 문의 조병식 애민선정비, 이렇게 3개가 있다. 이들은 모두 조병식이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일과 관련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조병식이 충청도 관찰사를 두 번(1876년 3월 15일~1878년 2월 3일 / 1891년 10월 22일~1893년 3월 19일) 지냈기에 어느 시기에 세워진 것인지 알 수 없어 앞서 서술한 ‘조병식의 관직 생활’에 해당하는 시기에 일일이 설명하지 못하였다. 하여 건립된 연대가 확인되지 않은 서산 운산 조병식 청덕선정비, 진천 교성리 조병식 애민선정비, 청주 문의 조병식 애민선정비만 여기에서 따로 소개한다.

❚조병식 청덕선정비(관찰사조공병식청덕선정비)❚

∙현재 위치_서산시 운산면 용장리 451-6(운암로 1012) 비석군(운산면행정복지센터 옆)

∙건립 시기_알 수 없음

❚조병식 애민선정비(관찰사조공병식애민선정비)❚

∙현재 위치_충북 진천군 진천읍 교성리 산41-100 진천향토민속자료전시관 동쪽 잔디밭

∙건립 시기_알 수 없음

❚조병식 애민선정비(관찰사조공병식애민선정비)❚

∙현재 위치_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두모리 140 앞마당 비석군

∙건립 시기_알 수 없음

한편, 경기도 오산시 궐동 궐리사(闕里祠)에 ‘성적도(聖蹟圖)’라는 게 전해지고 있는데, 이 성적도 출판에 김병식이 서문을 쓴 것으로 파악된다. 궐리사는 조선 전기 문신이자 공자(孔子)의 64대손인 공서린(孔瑞麟, 1483~1541)이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곳이다. 1792년(정조 17) 이곳에 사당을 세워 공자가 태어나서 살던 마을[노(魯)나라에 속했던, 중국 산둥성 지닝시 곡부(曲阜)현에 있던 마을] 이름 ‘궐리(闕里)’를 그대로 따와 ‘궐리사’라고 했다. 성적도는 공자의 생애를 그림으로 그려 해설을 붙인 것으로, 오산 궐리사 성적도는 공자의 76대손인 공재헌(孔在憲)이 1901년 중국에 건너가 여성부(呂聖符)가 손수 조각한 성적도 108면을 들여와 목판(木版)에 다시 새긴 것이다. 이를 『화성궐리사 공부자성적도(華城闕里祠孔夫子聖蹟圖)』라는 책으로 출판하면서 서문에 1902년(광무 6) 송병선(宋秉璿), 1904년(광무 8) 조병식(趙秉式)이 쓴 「성적도서(聖蹟圖序)」가 실렸으며, 서문 다음에 성적도 108면이 차례로 실려 있다. 당시 조병식은 궐리사 도약장(都約長: 향약의 조직과 운영을 담당한 직책)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Ⅳ. 나가는 글_사회 구조보다 사람이 문제다

 

2024년 12월 세상이 어수선하다. 12월 3일 대통령이 뜬금없이 계엄을 선포하여 세상을 불안하게 하더니 시민들의 저항으로 결국 ‘내란죄’로 탄핵받아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고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진행되고 있다. 주식은 떨어지고 환율이 올라 경제적으로도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앞으로 정국이 어디로 향할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동안 준비한 자료를 바탕으로 틈나는 대로 글을 써나갔다. 그리고 2025년이 되었다. 시국은 여전히 어수선한 상태에서 내용을 보강하고, 확인이 필요한 곳들을 찾아다니며 일단 글을 마무리하였다. 그런 뒤에도 보충하고 수정하기를 반복하였다.

지금까지 조사‧정리한 것 가운데 조병갑의 관직 생활을 일렬로 요약하면, 조병갑은 40년 정도 관직 생활에 몸담았으면서 실제 모친상과 징계 등으로 쉬는 기간(근 10년)도 적지 않아 대체로 17년 정도 되는 중앙직과 12년 반 정도 지방직을 역임하였다. 구체적으로는 1863년 규장각 검서관을 시작으로 1865년 홍문관 겸검서관, 병조 부사과, 1871년 의금부 도사, 1872년 통례원 인의, 1874년 사포서 별제, 사도시 주부, 통례원 인의, 1876년 제용감 주부, 평시서 영등을 역임하다가 1877년 예산현감(1877.07.26.~미확인), 1882년 비안현감(1882,03.16.~1882.10.23.), 천안군수(1882.10.23.~1885.03.28.), 1885년 직산현감(부임하지 않음), 보성군수(1885.04.15.~1886.04.02.), 1866년 풍기군수(부임하지 않음), 함양군수(1886.04.02.~1887.06.), 1877년 김해부사(1887.06.18.~1889.02.10.)를 지냈다. 1883년 천안군수로 있을 때 유배 죄인을 놓친 일로 징계받기도 했다.

그리고 김해부사에 이어 1889년 영동현감으로 발령받았으나 병을 핑계로 부임하지 않아 고부군수①로 임명(1889.04.07~3개월)되었으나 3개월 후 모친상을 당해 사직했다. 삼년상을 치른 1892년 기기국 위원으로 복직하였다가 고부군수②(1892.04.28.~1893.11.30.)로 재발령받아 만석보를 비롯한 각종 탐학과 전창혁을 사망에 이르게 하는 등 실정하여 1893년 익산군수로 발령(1893.11.30.)받았음에도 계속 고부에 머물렀다. 이에 1894년 고부군수③(1894.01.09. 유임~02.15. 파직)로 또다시 임명되었는데, 그의 탐학으로 고부봉기가 일어나자, 그 책임으로 1894년 체포(04.18.)되어 강진 고금도(완도 고금도)에 유배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이 진행되는 가운데 조병갑은 재조사(1895.03.12.)받기 위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1895년 6월 27일 내린 조칙(詔勅) “개국 504년(1895) 4월 1일 이전의 범죄 중에서 모반과 살인, 절도와 강도, 통간과 재물에 대한 협잡죄를 범한 자 외에는 석방한다”라는 대사면령으로 석방(1895.07.03.)되었다. 2년 4개월 지난 1898년 1월 법부 민사국장으로 복직하여 7월에는 고등재판소 판사까지 겸임, 1주일 후 재판장 조병직과 함께 최시형에게 사형을 선고(1898.07.18.)하였다. 그리고 한 달이 안 되어 법부 민사국장에서 사직(08.08.)했다. 마치 최시형을 재판하려고 판사가 되었던 것처럼. 이후 한참 지난 1904년 비서원 승에 임명되었으나 다음 날 사직하며 완전히 은퇴하였다. 이렇게 조병갑은 고부군수를 3번 지내는 등 주로 현령․군수를 역임하는 가운데 부정과 탐학을 저지르다 여러 차례 탄핵받았다.

그리고 근 50년을 관직에 몸담은 조병식은 1858년 승정원 가주서를 시작으로 1860년 예문관 검열, 1861년 성균관 전적. 별겸춘추, 1862년 전라우도 암행어사, 홍문관 응교, 사헌부 집의, 홍문관 교리, 1863년 예조참의, 승정원 승지, 1864년 성균관 대사성, 1865년 성천부사, 1866년 관서위유사(關西慰諭使), 1867년 이조참의, 호조참의, 승정원 승지, 1874년 강화유수, 1876년 충청도 관찰사, 1876년 중추부 동지중추부사, 이조참판을 역임하면서 이전 충청도 관찰사 때 저지른 비리로 탄핵받아 유배(1878.06.22.~1879.02.09.)갔으며, 1880년 오위도총부 부총관, 승정원 승지, 1881년 의금부 동지의금부사, 1882년 형조참판을 지내면서 이전 충청도 관찰사 때 심복으로 부리던 전제홍을 만나 때려죽인 직권남용으로 유배(1883.06.02.~1883.11.21.)갔다.

1884년 돈녕부 동지돈녕부사, 경연청 동지경연사, 1885 예조참판, 진주부사(陳奏副使), 호조참판, 내무협판(협판내무부사), 사헌부 대사헌, 형조참판, 1886년 예조판서, 동지정사(冬至正使), 1887년 형조판서, 협판내무부사, 외무독판(독판교섭통상사무), 1888년 의금부 지의금부사, 함경도 관찰사, 1890년 강원도 관찰사, 이조판서, 돈녕부 지돈녕부사, 1891년 경기도 관찰사, 중추부 지중추부사, 독판내무부사, 황해도 관찰사(임명 후 곧바로 취소), 충청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보은취회를 막아내지 못하고 동학교도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책임으로 파면되었다,

1893년 상호군에 임명되었으며, 1894년 탐학을 저지른 일로 유배(1894.07.15.~07.30.)갔다가 중추원 판중추원사로 복귀하였으며, 1896년 중추원 의관, 장례원 경, 법부대신, 1897년 비서원 경, 궁내부 특진관, 법부대신, 외부대신, 1898년 의정부 참정이 되어 궁궐에서 제 멋대로 잠을 자는 일로 면직되었으나 곧바로 중추원 일등의관으로 복귀하였으며, 황국중앙총상회의 시장 철시를 주도한 일로 유배 처분(8월경~10.11.)를 받았으나 곧바로 방면되어 의정부 찬정, 의정부 참정이 되었다. 그리고 독립협회를 탄압한 일로 유배 명령(1898.11.22.~1899.01.20.)만 받고 체포되지도 않은 채 기다리기만 하다가 결국 유배가 취소되었다.

1899년 궁내부 특진관, 경효전 제조, 중추원 의장, 임시서리법무대신사무, 농산공부대신 민영기를 함부로 체포한 일로 면직되었다가 사면받고, 1900년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되고, 의정부를 비방한 일로 파면되고 유배(1900.01.31.~03.12.)가게 되었으나 실제 유배지로 가지 않고 기다리기만 하다가 사면되어 탁지부대신, 양지아문 총재관, 주일특명전권공사, 궁내부 특진관, 법규교정소 부총재, 의정부 참정 및 경부대신임시서리, 1901년 임시서리법부대신사무, 법부대신, 궁내부 특진관, 1902년 임시서리외부대신사무, 외부대신, 1903년 서북철도국 총재, 궁내부 특진관으로 근무하였다.

1904년 의정부 참정, 서리외부대신사무, 홍문관 학사, 표훈원 총재, 내부대신, 인산시돈제사(因山時頓遞使), 1905년 임시서리표훈원총재사무, 관제이정소 의정관, 임시서리의정부의정사무 일을 하면서 법부와 상의 없이 제멋대로 처리한 일로 파면(03.07.)되었다가 곧바로 사면(03.11.)되고, 의정부 참정대신, 궁내부 특진관, 홍문관 학사, 돈녕부 판돈녕사사, 1906년 궁내부 특진관, 의왕수책시정사(義王授冊時正使), 규장각 학사, 장례원 경, 각궁 사무정리위원장, 궁내부 특진관 등을 역임하였다.

주로 중앙직에서 근무하였던 조병식은 9년 반 정도 지방에서 근무했으며, 특히 충청도 관찰사(1876.03.15.~1878.03.23. / 1891.10.22.~1893.03.19. 파면)를 2번 지내는가 하면, 왕실의 전례·의식에 대해 자문하는 등 왕실에 관한 일을 보좌하던 궁내부 특진관에는 수시로 임명되었다. 무엇보다도 맡았던 직책이 다양했던 만큼 탄핵이나 면직, 파면, 유배 등 징계를 받은 적도 많았다. 또 그만큼 사면도 많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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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글에서 조선 후기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탐관오리가 판을 친 것과 관련하여 잘못을 저지르고도 제대로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더 높은 관직으로 복직되는 것을 지적하면서 당시 사회 구조가 문제라고 하였다. 당시 조선 말기 사회는 분명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회였다. 사람이 신분으로 구별되어 차별받는 가운데 출세에 능력보다는 출신 성분이나 연줄이 더 작용하고 법도 지배층과 피지배층에게 따로 적용되는 불평등한 사회였다. 한마디로 법 따로 현실 따로인 사회였다. 말은 ‘백성이 근본’이요 ‘농자천하지대본’이라 하였지만, 현실은 전혀 그런 대접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억압받으며 사람은커녕 짐승 취급도 못 받는 세상이었다.

그런 세상이다 보니 조병갑은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르고도 벌받기는커녕 오히려 판사가 되어 동학 교주 최시형에게 사형을 선고하기까지 하였다. 조병식은 더하였다. 조병갑이 군수로 지내면서 부정부패를 저질렀다면 조병식은 도지사에 법무부 장관, 외무부 장관, 재무부 장관, 내무부 장관, 총리 등 굵직한 자리에 있으면서 공금을 횡령하고 권력을 남용하는가 하면 갖은 부정을 저질렀음에도 제대로 처벌받지 않고 사면받으며 계속 왕의 측근으로 지냈다. 잘못해도 별 탓 없으니 또 다른 부정을 저지르며 호의호식할 수 있었다.

조병갑과 조병식은 닮아도 너무 닮았다. 조병갑이 공주 마곡사 대광보전 칠성탱화 조성 불사에 부부 이름으로 시주하였다면 조병식은 예산 보덕사 극락전 산신탱화 조성 불사에 부부 이름으로 시주했다. 무엇보다도 조병갑과 조병식은 모두 동학농민혁명 발생의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다. 조병식이 공주취회 동학교도의 청원을 회피하며 그들을 탄압했다면, 조병갑은 고부군민의 원성을 사서 결국 고부봉기가 일어나게 했다.

더구나 조병갑과 조병식은 모두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고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을 때려죽이기까지 한 살인자였다. 조병갑은 전봉준 아버지 전창혁(全彰爀, 천안전씨)을 때려 죽게 하고, 조병식은 자신의 심복이었던 아전 전제홍(全濟弘, 본관은 확인되지 않음, 천안전씨일 확률이 높음)을 때려죽였다. 어쩌면 닮아도 이리 닮았는지. 하필이면 죽임을 당한 이가 둘 다 전씨(全氏)이니 우연치곤 너무 똑같다. 둘 다 살인을 저지르고도 제대로 처벌받지 않고 사면받아 관리로 복직하여 또다시 떵떵거리고 살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조병식이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인 1889년 방곡령을 내렸다면, 조병갑은 고부군수로 있을 때인 1893년 방곡령을 내렸다. 이마저도 닮았다. 그런데 방곡령은 백성을 위해 내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해 내린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하니 해도 해도 너무한, 참 어처구니없는 세상이었다.

세상이 이 지경이었던 것은 사회 구조 문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회 구조도 문제였겠지만 사람이 더 문제였을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 이후 사회 구조가 일정 부분 바뀌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후 민주 공화정이 들어선 이후에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부정부패와 가진 자들의 만행이 계속되고 있다. 사회 구조가 많이 바뀌었음에도 지배층을 비롯한 부패와 친일 앞잡이 세력이 여전히 떵떵거리며 잘살고 있다. 왜냐하면 조선 말기 탐관오리가 일제강점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이어지고 해방 이후 친일 청산을 하지 못한 탓으로 그들이 여전히 기득권층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겉만 바뀌었지, 근본적으로는 바뀌지 않은 것이다. 해방 후 사회 구조가 바뀌긴 하였지만,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사회 구조만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회 구조도 문제지만, 사람이 더 문제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사회 구조나 제도가 바뀌어도 사람이 바뀌지 않고 그대로 이어진다면 문제 또한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사람이 바로 서야 한다. 사람이 바로 서야 사회 구조도 제대로 자리 잡힌다. 사람이 바뀌어야 사회 구조가 바뀌기 마련이다. 사회 구조가 바뀌면 사람도 바뀌기 마련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정녕 사람이 바뀌어야 사회가 바뀌는 것이 아닐까 싶다.

모름지기 사람은 잘못을 저지르면 처벌받고, 잘못 했으면 책임질 줄도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도 잘살 수 있는 사회, 정직하게 살아도 잘살 수 있는 사회, 바르고 성실한 사람이 잘사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이런 사회가 살기 좋은 세상 아닐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사람이 그리운 이 어수선한 겨울에. 어쨌든 봄은 올 것이다.

<조병갑과 조병식에 대한 정리를 마무리하였으나, 조병직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어 추가하였습니다. 다음에 '조병직'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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