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를 읽는 오후, 구부러진다는 것 -류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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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를 읽는 오후, 구부러진다는 것 -류지남
  • 김혜식 기자
  • 승인 2020.04.13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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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러진다는 것 
                       
 류지남 

구부러진 것들이 있다
세상에 쓸모가 있는 것들은 대개 어디론가
살짝 구부러져 있다
지붕과 우산과 나무 그늘은 어쩌면 한통속이다

구부린다는 것은 굴복하는 게 아니라
뭔가를 품는다는 것이다
숟가락의 구부러진 힘이 밥을, 사람을 품는다
뻣뻣한 젓가락은 할수 없이 손가락을 대신 구부려야 한다

구부러진 나무뿌리가 흙을 품고 나아가는 동안
가지는 수없이 스스로를 구부려가며 열매를 기른다
그 사이에 슬쩍 새들도 깃든다

어쩌다 점심 무렵 마을 회관 가보면
평생, 자식이거나 곡식들 품느라 바싹 구부러진
녹슨 호미와 이빠진 낫들이 오글오글 모여있다

오늘 아침까지 구부러진 호미 한자루
사래 긴 콩밭 두벌 김 마치고 나온
아흔넷 남용 할머니 구십도 허리가 싱싱하다

기도하거나 사랑하는 일도 실은
누군가에게 나를 살짝 구부리는 일일 것이다.


류지남 시인 소개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공주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나왔다. 사곡중, 공주여중, 청양고, 정산고를 거쳐, 공주 마이스터고에서 여전히 푸르른 아이들과 함께 책 읽고 글 쓰며 살고 있다. 1990년 [삶의 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충남작가회의, 충남교사문학회 벗들과 더불어 술벗 글벗으로 지내고 있다. 2001년 [내 몸의 봄](내일을 여는 책)’이라는 시집을 낸 바 있다. 공주 신풍 갓골이라는 시골 고향집에서 풀과 나무를 삼아 살아가고 있다. 소를 키우는 형과 한집에 어우렁더우렁 살면서, 가끔씩 소똥을 치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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