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부러진다는 것
류지남
구부러진 것들이 있다
세상에 쓸모가 있는 것들은 대개 어디론가
살짝 구부러져 있다
지붕과 우산과 나무 그늘은 어쩌면 한통속이다
구부린다는 것은 굴복하는 게 아니라
뭔가를 품는다는 것이다
숟가락의 구부러진 힘이 밥을, 사람을 품는다
뻣뻣한 젓가락은 할수 없이 손가락을 대신 구부려야 한다
구부러진 나무뿌리가 흙을 품고 나아가는 동안
가지는 수없이 스스로를 구부려가며 열매를 기른다
그 사이에 슬쩍 새들도 깃든다
어쩌다 점심 무렵 마을 회관 가보면
평생, 자식이거나 곡식들 품느라 바싹 구부러진
녹슨 호미와 이빠진 낫들이 오글오글 모여있다
오늘 아침까지 구부러진 호미 한자루
사래 긴 콩밭 두벌 김 마치고 나온
아흔넷 남용 할머니 구십도 허리가 싱싱하다
기도하거나 사랑하는 일도 실은
누군가에게 나를 살짝 구부리는 일일 것이다.
▶류지남 시인 소개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공주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나왔다. 사곡중, 공주여중, 청양고, 정산고를 거쳐, 공주 마이스터고에서 여전히 푸르른 아이들과 함께 책 읽고 글 쓰며 살고 있다. 1990년 [삶의 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충남작가회의, 충남교사문학회 벗들과 더불어 술벗 글벗으로 지내고 있다. 2001년 [내 몸의 봄](내일을 여는 책)’이라는 시집을 낸 바 있다. 공주 신풍 갓골이라는 시골 고향집에서 풀과 나무를 삼아 살아가고 있다. 소를 키우는 형과 한집에 어우렁더우렁 살면서, 가끔씩 소똥을 치우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