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서역 칠천 리 – 실크로드 기행(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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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서역 칠천 리 – 실크로드 기행(9)
  • 조동길
  • 승인 2020.06.18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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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동 길(공주대명예교수/소설가)

 

불과 바람과 모래의 땅 화염산, 베제클릭, 고창성, 카레즈

다음 날 아침 천천히 일어나 간단한 조식을 마치고 호텔을 나섰다. 가이드의 말대로 곳곳에서 군인과 경찰이 지나가는 차를 막고 검문을 한다. 우리 차에는 우리 외에 다른 일행이 없고 좌석의 3분의 2가 비어 있는 관광버스이기 때문에 검문이 그리 까다롭지는 않았다. 노련한 가이드는 수단껏 그들을 건너뛰기도 했다. 그러나 깐깐한 사람을 만나면 일일이 여권의 사진과 본인을 대조하는 절차를 거치느라 꽤 시간이 지체되기도 했다. 아침인데도 기온이 꽤 높아 성능 좋은 에어컨은 풀가동 중이다.

 

▲화염산에 있는 영화 촬영 세트장
▲화염산에 있는 영화 촬영 세트장

30여 분을 달려 화염산에 도착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산의 모양이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최고 기온 70도를 기록한 적도 있다 한다. 여기가 우리에게 더욱 익숙하고 친근해진 것은 서유기라는 소설 때문이다. 오승은이 지은 이 소설은 당의 삼장법사가 세 제자를 데리고 서역에 가서 불경을 구해 가지고 돌아오는 이야기다. 그 과정에서 천상과 지하세계를 넘나들며 요괴를 만나 싸우기기도 하고 온갖 술수와 모략의 대결이 펼쳐지기도 하는, 요즘 말로 하면 역대 급 판타지 소설이다. 현실 세계를 벗어난 귀신, 요괴, 요정들과의 지략 대결, 반전을 거듭하는 흥미진진한 사건 전개, 그 존재감이 확고한 캐릭터, 이런 것들로 하여 이 작품은 중국의 ‘4대기서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기를 누렸다. 그 인기는 수백 년을 넘어 현재에도 애니메이션, 영화, 드라마 등으로 장르 변환을 하며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그만큼 이 작품이 시대를 초월하여 사람들의 보편적 정서나 흥미 충족에 근접해 있다는 증거일 게다.

서유기에는 손오공이 파초선을 빌려다가 불을 꺼서 그의 일행을 무사히 지나가게 했다는 화염산이 나온다. 이를 근거로 이곳엔 드라마나 영화 촬영을 위해 만들어 놓은 세트장이 몇 군데 있다. 그걸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이곳을 정부에서 국가 관광지로 개발하여 놓았는데, 각종 레저 시설과 급경사 모래 산 오르기 체험 시설 등이 인기 속에 운영 중이라 한다. 중국의 경제 호황과 관련 있을 것이다.

 

▲ 화염산의 베제클릭 전경
▲ 화염산의 베제클릭 전경

우리는 불모의 산에 개설된 구불구불한 도로를 지나 베제클릭이란 이름의 불교 유적을 찾았다. 도중에 골짜기 밑바닥으로 큰 소리를 내며 흐르는 제법 큰 강과 그 주변에 풀과 나무가 파랗게 자라고 있는 신기한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먼 곳의 만년설이 녹아 모인 물이 흐르는 거라고 했다. 거기서 잠시 멈춰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 눈앞을 채우는 녹색 식물을 보며 피로를 달랬다. 다시 얼마를 더 가 영화 촬영 세트로 설치한 서유기 속의 배경과 캐릭터 상을 지나니 바로 베제클릭이다.

베제클릭은 위구르 말로 아름답게 장식한 집이란 뜻이라고 한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막고굴 조성 시기와 거의 같은 시기에 여기 강 언덕에 굴을 파고 부처님을 모시고 예배를 올렸다. 또한 독실한 수도자들은 인적이 드문 이곳에 와서 굴을 파고 수행에 전념했다. 그리고 서역을 오가는 사람들은 여기 와서 부처님께 앞길의 무사안녕을 빌었다. 그렇게 수백 년을 이어오면서 약간씩 다른 모습의 수많은 불상과 벽화 불화가 조성되었다. 현재까지 조사된 바로는 약 80여 개의 석굴이 남아 있는데, 이들은 수행용과 예배용으로 나눌 수 있고, 석굴 아래 강 쪽으로는 수행자들이 거처했던 유적들이 남아 있다. 또한 이 근처에는 비슷한 석굴 흔적이 여러 곳에 분포되어 있기도 하다. 그래서 이곳을 포함한 전체를 천불동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생명이 있는 것은 그 어느 것도 발을 붙이지 못할 화염과 같은 죽음의 산, 그 사이로 소리를 내며 흐르는 물이 있고, 큰 나무가 푸른 잎을 흔들며 서 있다는 게 믿기 어려울 만큼 신기하기만 하다. 옛 사람들 또한 여기 와서 저 비현실적인 풍경을 바라보며 현실의 고통을 이겨내는 위안을 얻고, 또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가는 고단한 여정에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곳 주민들의 간절한 염원을 담은 이곳 불교 유적들은 14세기 무렵 이슬람세력이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극심한 훼손과 파괴를 면치 못하게 된다. 이슬람과 기독교 세력이 오래 패권을 다투며 싸웠던 현장인 터키에 가면 자신들이 점령했던 시기에 상대편 종교 시설을 허물고 그 자재를 이용해 성전을 짓거나 혹은 성화(聖畫) 등 시설물을 훼손한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종교의 본질이 사랑과 자비일진대 종교라는 이름으로 상대 종교를 파괴하고 훼철하는 일은 가장 종교답지 못한 행위가 아닐까.

여기 또한 마찬가지다. 엊그제까지 신성시되었던 불상들은 하루아침에 내동댕이쳐지고 불화는 참혹하게 파괴되었다. 석굴마다 있었을 불상은 그 행방을 알 수 없고, 벽에 그려진 불화 속의 부처와 보살들은 그 눈이 꼬챙이에 찔려 사라진 것도 있고, 얼굴 반쪽이 없어진 것도 있다. 더구나 일부 벽화들은 부분적으로 뜯겨 나가 기형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이 벽화를 뜯어다가 밭의 거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한다. 이 벽화를 조성할 때 진흙과 짚을 섞어서 벽에 바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렸는데, 그 짚을 거름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니 아무리 종교가 다르고 교리가 다르다 해도 이를 어찌 용납하고 이해할 수 있는 일인가. 차마 신앙 행위라는 말을 붙이기도 어려운 폭력과 야만 아닌가.

이런 이들의 행위는 다시 수백 년이 지나 힘과 돈을 앞세운 서구 열강들에 재현된다. 그들은 이곳을 찾아와 그나마 남아 있던 유물들을 쓸어가고 또 벽화를 뜯어 가져갔다. 당시 일본인이 반출해온 이곳 벽화 일부가 현재 우리나라 박물관에도 남아 있다고 하니 비록 우리가 한 일은 아니나 그 일말의 책임은 공유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고창성의 유적들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고창성의 유적들

약간 무거운 마음으로 그곳을 나와 고창 성으로 갔다. 고창이란 이름은 이곳에 있었던 고대 국가 이름인 동시에 도시 이름이기도 하다. 당시 서역에 분포해 있던 나라는 모두 36개에 달했는데, 그 중에 가장 잘 사는 나라는 구자 국이었고 그 다음 부자 나라가 고창 국이었다. 이 나라는 지하 수로를 이용한 농사는 물론 서역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통행료를 받아 나라 재정이 튼튼했는데, 이를 바탕으로 대규모의 고창 성을 건설했다. 외성, 내성, 궁성으로 이루어진 이 성의 면적은 2백만 제곱미터에 이르고, 거주 인구는 약 3만 명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워낙 기온이 높아 한여름에는 다른 곳으로 옮겨 더위를 피했다고 한다,

현재 이 성은 도보로 구경할 수는 없고 전기로 움직이는 전동차를 타거나 말이 끄는 수레를 이용하여 돌아보아야 한다. 따가운 햇볕 아래 그늘 한 점 없는 드넓은 성터에는 완전한 형태의 유적이나 유물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행정 기관이 있던 곳, 주민들이 거주했던 곳, 그리고 현재 가장 많은 유적이 남아 있는 이 성의 중심이었을 대불사 터 등만 볼 수 있다. 대불사는 현장법사가 한 달 동안 머물며 법회를 열었던 곳인데, 현재 남아 있는 거대한 벽체의 규모로 당시 거창했을 절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고창성 입구에 서 있는 삼장법사 동상
▲고창성 입구에 서 있는 삼장법사 동상

이런 부자 나라의 왕 국문태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서역으로 가는 현장법사를 극진히 대접했고, 또 그의 서역 왕래 경비를 거의 다 부담했다고 한다. 우리가 익히 아는 손오공이나 저팔계, 사오정 등 현장의 제자들은 사실은 고창 국 수행자들이다. 그들은 왕의 지시로 현장법사를 수행하는 제자가 되었는데, 후일 이들의 이야기가 소설로 만들어지면서 인도나 중국의 전래 신앙과 결합하여 새로운 캐릭터로 재탄생한 것이다. 어찌 됐든 이 폐허와 같은 고창 국이 없었다면 아마도 현장의 서역 왕래는 실현되기 어려웠을 것이고, 만약 그랬다면 서유기라는 불후의 소설도 존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고 보면 눈이 따가운 불볕 아래 외로이 서 있는 현장법사의 동상, 그리고 그 뒤로 펼쳐진 광활한 폐허의 땅 고창 성은 옛날과 오늘을 이어주는 살아 있는 화석일지도 모르겠다.

그 다음으로 찾은 곳은 교하 고성이다. 교하란 말 그대로 두 줄기의 물이 교차 합류하는 곳을 이른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지명이 있다. 교하는 차사라는 이름의 옛 나라 수도였던 곳이다, 이곳은 양쪽으로 강이 흐르는 사이에 30여 미터 높이의 꽤 넓은 땅이 불쑥 솟아 있는 특이한 지형이다. 원래는 지면과 수면이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나 오랜 세월 동안 물이 흙을 깎아 수면이 낮아져 생긴 현상일 것이다. 이렇게 장구한 시간에 걸쳐 형성된 이 천혜의 땅은 적을 막아내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난공불락의 천연 요새가 되었다. 깊은 물은 자연 해자가 되고 높은 절벽은 견고한 성벽 역할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여기에 나라를 세우고 도시를 건설했다.

 

▲교하 고성의 남아 있는 유적들
▲교하 고성의 남아 있는 유적들

이곳은 땅을 파내거나 깎아내지 않고 생토 그 위에 도시를 건설한 세계 유일한 곳이라 한다. 그래서일까. 이곳을 관람하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전시관 안에는 세계 유일 생토 건축이란 말과 함께 지혜 생성 지역이란 큰 글자가 걸려 있다. 지자요수(知者樂水),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는 말과 관련 있을까. 전시관을 나와 나무 몇 그루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곳을 지나면 성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그늘 한 점 없는 옛 성터엔 한낮의 불볕이 자글자글 땅을 달군다. 누군가 옆에서 42도라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더 뜨거운 것 같다. 말 그대로 숨이 헉헉 막힌다. 일행 중 몇 분은 도저히 못 가겠다고 포기했다.

무슨 대단한 보상이 주어지는 것도 아닌데, 벌겋게 단 숯불 위를 걷는 것 같은 심정으로 꾸역꾸역 걸어 올라갔다. 마치 무슨 벌을 받는 것 같기도 하다. 성 위로 올라서 보니 부분적으로 형체가 남아 있는 중앙탑, 대불사의 불상 몸체 일부, 적의 침입 등 외부 동태를 먼 곳까지 바라볼 수 있는 감시대, 그런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걸 대충 구경하고, 4대문과 궁성의 흔적도 건성으로 돌아보고, 더 이상 걷는 것은 무리라는 중론에 따라 지붕이 없는 벽체 안으로 들어가 잠시 휴식을 취했다. 예전 공공의 모임 장소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 공간에선 새파란 하늘이 마치 색깔 있는 유리를 오려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경험하기 쉽지 현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같은 공간인데도 햇볕 있는 곳은 뜨거움이 줄줄 녹아 흐르고, 벽의 그늘이 드리운 곳은 서늘할 정도로 시원하다. 기온이 높고 건조하여 모기조차 살 수 없다는 사막 기후의 특징인가 보다. 안으로 더 들어가면 유명한 탑림이 있고 거기 백여 개의 탑이 있다 하는데, 제 아무리 희귀한 유물이라 해도 지금으로선 시원한 물 한 컵만 못하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흥미를 끌지는 못했다. 포기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내려와 일행과 합류하였다. 타는 것 같은 목을 촉촉이 축여주는 시원한 주스 한 잔, 그 쾌감은 천금과도 바꾸고 싶지 않을 만큼 강했다.

 

▲교하 고성의 대불사 유적
▲교하 고성의 대불사 유적

버스의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조금 활기를 되찾아 위구르 사람이 포도 농사를 짓는 농가를 방문했다. 버스 창밖 곳곳에 보이는 건 거의 대부분 포도밭이다. 포도밭 한 쪽엔 대개 벽에 구멍이 숭숭 뚫린 허름한 건물이 하나씩 서 있다. 수확한 포도를 말리는 시설이라 한다. 그런데 가장 비싸게 팔리는 좋은 품질의 포도는 밭에서 직접 익혀 건조한 것으로 그 생산량이 아주 적고, 시중에 유통되는 거의 대부분의 상품은 이렇게 건조장에서 말린 것이라 한다. 아직 수확 철이 아니라 우리가 방문한 농가에서는 작년에 생산된 것을 팔고 있었다. 씨를 빼서 말린 건포도와, 따로 건조 시킨 포도 씨를 팔고 있었는데, 1킬로에 중국 돈으로 5백 위안이니 만만한 값이 아니다.

오늘 일정 마지막 순서로 카레즈를 구경하러 갔다. 카레즈는 약 3천 년 전에 건설된 지하수로다. 천산산맥의 고봉에 쌓인 만년설이 녹아 흐르는 물을 식수나 농업용수로 사용하려면 그 물을 수로를 파 끌어와야 한다, 그런데 이곳의 기온이 워낙 높아 지상에 만든 수로의 물은 얼마 못 가 다 증발해 버린다. 물은 생존과 직결된다. 물이 없으면 살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물을 얻기 위한 시도를 계속했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그들이 찾아낸 방법은 지하에 수로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비나 기술이 부족한 상태에서 지하에 수로를 건설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수도 없이 실패하고 또 도전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많은 희생 끝에 그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수직의 우물을 파고 그 우물 바닥을 다시 수평으로 연결하는 공사 방식을 고안해냈다. 그들은 이 방식으로 지하에 거미줄 같은 수로를 건설했다. 현재도 사용되고 있는 이 수로의 길이는 총 5천 킬로에 이른다고 하며, 이곳을 통해 공급되는 물은 이곳 사람들의 식수와 곡물 재배로 활용되고 있으니 그야말로 생명수라 할 수 있다.

 

▲지하수로 건설 과정을 보여주는 전시물
▲지하수로 건설 과정을 보여주는 전시물

원래 지하에 수로를 건설하는 방식은 사막이 대부분인 이슬람 지역에서 들어왔다고 한다. 그것을 이렇게 대규모로 오래 사용할 수 있도록 견고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를 중국의 3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기도 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를 가능하게 사람들의 의지라고 생각한다. 참담한 실패,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떨쳐내고 이를 성공시킨 힘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죽음을 이겨내기 위한 절박함이 아니었을까. 새삼 인간의 위대함을 되새기게 하는 현장이다. 수로 건설 장면을 재현해 놓은 박물관과 일부 개방된 지하 수로를 구경하는 것으로 일정을 마쳤다.

 

▲지하 수로로 흘러가고 있는 물과 카레즈 명패
▲지하 수로로 흘러가고 있는 물과 카레즈 명패

이곳 투루판에서 꼭 보고 싶었으나 일정에 들어있지 않아 포기해야 했던 곳이 아스타나 고분과 소공탑, 박물관 등이다. 아스타나 고분엔 중국 천지창조의 신화인 복희와 여와가 새겨진 벽화가 있고, 또 우리나라 단군신화와 비슷한 스토리의 유적도 있다는데 볼 수 없어 아쉬웠다. 또한 공룡 화석과 사막의 무덤에서 발견된 미라가 전시되고 있는 박물관, 이슬람과 위구르 건축 양식을 결합하여 세운 중국에서 제일 높다는 소공탑 등도 눈으로는 못 보고 마음으로만 보아야 해서 아쉽기 그지없었다. 세상 일이 모두 마음먹은 대로 되는 곳이 있다면 거긴 우리 현실과 거리가 먼 딴 세상일 것이다. 안 되는 것도 있고, 얻지 못하는 것도 있는 그런 세상이 더 살맛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으로 아쉬움을 달래며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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