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는 문화재만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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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문화재만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이 있다
  • 전병철 작가
  • 승인 2022.02.07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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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본적 및 공주 관련 독립유공자(독립운동가)

전병철(작가, 전 역사교사)

 

나는 금강과 더불어 살아왔다. 금강 상류인 충남 금산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대전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다 공주사대에 입학하면서 그때부터 금강 중류인 공주에서 줄곧 살았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금산으로 돌아가 잠깐 있긴 하였지만, 첫 직장 발령마저 공주로 난 까닭으로 공주와 첫 인연을 맺은 이래 지금까지 줄곧 40여 년을 공주에서 자리를 틀고 살고 있다. 태어난 고향은 금산이지만 살아온 고향은 공주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만큼 공주는 내 마음은 물론 나의 삶 속에 때론 자잘하게 때론 굵직하게 벌어진 이런저런 일들로 뿌리를 내린 정든 곳이자 소중한 곳이 되었다. 비록 공주 토박이는 아니어도 나는 공주사람으로 살아왔으며, 공주는 내가 자랑스러워하는 곳이자 사랑하는 곳이 되었다.

1981년 공주를 처음 찾았을 때 가장 눈에 띈 것은 아무래도 대학이었다. 공주는 조그마한 동네에 공주사대와 공주교대, 간호전문대까지 있는 도시였으며, 여기에 중·고등학교도 많아 교육도시로 불리는 곳이었다. 또한 공주는 금강 백사장과 함께 금강철교가 눈에 훤히 들어오는 공산성’, 교과서에서 익히 들어온 석장리 구석기 유적지무령왕릉’, ‘우금티 전적지가 있는 곳, 여기에 유서 깊은 백제문화제가 열리는 역사문화도시였다.

 ▲우금티 알림터(왼쪽)와 시비(오른쪽)  ⓒ전병철
 ▲우금티 알림터(왼쪽)와 시비(오른쪽)  ⓒ전병철

40여 년이 지난 지금, 공주사대와 간호전문대가 종합대로 승격하여 공주대학교로 바뀌고, 충남과학고가 새로 들어서는 가운데 학생 수가 예전만큼은 못해도 공주는 여전히 교육도시 역할을 다하고 있다. 또 석장리에 박물관이 들어서고, 공산성과 무령왕릉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우금티에도 알림터시비가 조성되는 등 공주는 한층 역사문화도시로서의 얼굴을 하고 있다.

요즘, 사람들이 공주 하면 떠올리는 것은 무엇일까? 역시 세계문화유산 무령왕릉과 공산성을 생각하기 쉽고, 지금도 교과서에 나오는 대로 석장리 구석기 유적지와 동학농민혁명 우금티 전적지를 기억할 것이다. 또 공주 하면 백제문화제, 최근 같으면 알밤축제를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널리 알려진 공주 인물로는 무령왕(일본에서 태어남), 성왕, 망이·망소이(대전 출신), 영규 대사, 김종서, 전봉준(전북 고창 출신), 김옥균, 김갑순을 비롯하여 최근 인물로는 김종필(충남 부여 출신), 박동진, 박찬호, 박세리(대전 출신), 나태주(충남 서천 출신)를 먼저 떠올릴지도 모른다. 이처럼 공주 하면 문화유산이 많은 역사도시로 기억하고, 여기에 최근 대중적으로 알려진 사람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또 공주 하면 인물보다는 문화유산을 더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공주는 문화유산(문화재)만 있는 게 아니라, 역사적인 인물도 많이 있다. 알아 두면 좋을 사람이 많은 곳이다. 교과서나 최근에 널리 알려진 인물만 있는 게 아니라 공주 출신이거나 공주와 관련 있는 인물이 많이 있다.(다른 지역도 마찬가지겠지만) 우선 공주시가 20193월부터 202112월까지 선정한 ‘이달의 공주역사인물’에 수록된 인물을 정리해 보면,

▲ 이달의 공주역사인물  ⓒ공주시청
▲ 이달의 공주역사인물  ⓒ공주시청
  • 여성 독립운동가 유관순과 김현경(20193)
  • 임시정부를 이끌다, 김구와 오익표(20194)
  • 일동장유가를 저술하다, 퇴석 김인겸(20195)
  • 나라를 위한 충정, 독립운동가 오강표(20196)
  • 20세기 최고의 명창, 박동진(20197)
  • 청주성전투를 승리로 이끌다, 승병장 영규대사(20198)
  • 백제의 중흥을 이끌다, 무령왕(20199)
  • ()과 절의(節義)의 상징, 절재 김종서(201910)
  • 반봉건반외세를 외치다, 우금티전투의 동학농민군(201911)
  • 청백리의 표상, 강백년(201912)
  • 피란길의 인연, 고려 현종과 김은부(20201)
  • 항일구국의 신념을 만주에서 펼치다, 독립운동가 이호원(20202)
  • 근대 여성교육의 어머니, 사애리시(20203)
  • 전통 불화의 맥을 잇게 한 최고의 화승, 금호당 약효(20204)
  • 조선 제일의 침의, 허임(20205)
  • 충의정신 실천한 삼형제 만경 노씨 삼의사 노응환노응탁노응호(20206)
  • 기호유학의 대표적인 유학자, 초려 이유태(20207)
  • 공주의 풍경을 시로 노래하다, 조선통신사 신유(20208)
  • 백제 중흥의 기반을 다지다, 동성왕(20209)
  • 신이 된 사기장, 이삼평(202010)
  • 충현서원을 세워 호서유학의 씨를 퍼뜨리다, 고청 서기(202011)
  • 충절을 지킨 형제, 이명성이명덕(202012)
  • 공주의 향약절목을 만들어 풍속을 교화시키다, 화산 정규환(20211)
  • 조선의 개혁을 시도하다, 개화사상가 김옥균(20212)
  • 독립만세를 외치다, 이기한이병림(20213)
  • 신돈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다, 석탄 이존오(20214)
  • 역사에 기록된 우리나라 최초의 효자 향덕(20215)
  • 고마나루에서 의병을 일으키다, 중봉 조헌(20216)
  • 중고제 판소리의 중심, 공주 명창 황호통이동백(20217)
  • 우리나라 최고의 인문지리지 택리지를 쓰다, 청담 이중환(20218)
  • 동성왕과 무령왕의 아버지 곤지(20219)
  • 굳건한 독립정신을 보여준 항일독립운동가 성암 이철영(202110)
  • 대쪽 같은 기개의 상징, 한재 이목(202111)
  • 동복 오씨, 공주를 고향삼다, 수촌 오시수(202112) 등이 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등장하여 익히 아는 인물도 있고, 이리저리 들은 이야기로 이름이라도 들어본 인물도 있고, 아예 모르고 처음 듣는 인물도 있다. 공주에 와서 문화재만 볼 게 아니라 이들 인물도 만나고 가면 더 좋지 않을까 싶다. 앞으로도 공주시는 이달의 공주역사인물을 계속 선정·홍보함으로써 역사문화도시 공주의 면모를 다진다고 하니 한번쯤이라도 귀 기울여 살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그리고 공주는 독립유공자도 적잖게 배출한 고장이다.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독립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에 따른 순국선열(殉國先烈)과 애국지사(愛國志士)를 말하며, 일제의 국권침탈(1895) 전후로부터 19458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에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한 자(순국선열)나 항거한 사실이 있는 자(애국지사)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건국포장 또는 대통령표창을 받은 자이다. 일반적으로는 독립유공자라는 말 대신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로 서훈(20211231일 기준)된 자료를 살펴보면,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정보는 본적(本籍: 호적이 있는 지역)을 기준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독립유공자 전체(북한·해외 포함) 17,066명에서 경상북도(2,331), 전라남도(1,367), 경상남도(1,361) 다음으로 충청남도는 1,571(대전·연기 포함)이다. 대전 본적 37명과 연기(현 세종) 본적 46명을 뺀 충청남도 본적만으로는 독립유공자가 1,488명이 된다.

충청남도 본적 독립유공자 1,571명 가운데 청양(247), 홍성(246), 서산(185), 아산(137) 다음으로 공주 본적 서훈자는 122명이 된다. 그리고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여성은 전체 17,066명 가운데 544, 충청남도 본적 1,571명 가운데 22, 공주 본적 122명 가운데 3명으로 김현경, 노예달, 이은숙이 이에 해당한다. 공주 본적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122명을 분야별로 정리하면,

  • 의병투쟁 15(강덕보, 김문주, 노성삼, 노원섭, 노치흠, 이덕경, 이병승, 이사건, 이상구, 이원선, 이원오, 이춘성, 이학현, 장남일, 최경휴),
  • 국내항일 13(고영국, 구무언, 김찬진, , 안병두, 윤명재, 윤석영, 이문협, 이상래, 이철영, 장춘섭, 조석홍, 현창석),
  • 학생운동   5(구자훈, 김순태, 박명렬, 백세기, 이철하),
  • 계몽운동   2(심원택, 이학순),
  • 31운동 74(강억쇠, 강태윤, 강태하, 강혁주, 구영서, 권중윤, 김동식, 김백룡, 김병헌, 김사현, 김삼룡, 김상규, 김순명, 김영휘, 김오룡, 김좌록, 김지성, 김진억, 김현경, 김희봉, 노규현, 노사문, 노상우, 노예달, 문백룡, 박병문, 박복만, 박승익, 박영선, 박윤근, 박준빈, 박한용, 백병기, 서순석, 신필범, 안만길, 유석우, 유성배, 유진태, 윤원식, 윤창선, 이건우, 이교영, 이규남, 이규상, 이기한, 이돈석, 이동엽, 이병림, 이병호, 이상욱, 이승현, 이영한, 이우상, 이원묵, 이자설, 이정춘, 이홍규, 이희도, 장기현, 장연용, 전정길, 정재철, 조병옥, 조재형, 최범성, 최병한, 최태식, 최현철, 현우석, 홍사철, 황병주, 황연성, 황타관),
  • 임시정부   2(오익표, 장수태),
  • 광복군      1(윤태현),
  • 중국방면   3(윤여복, 이은숙, 이춘구),
  • 만주방면   4(강범진, 김형동, 이관직, 이호원),
  • 노령방면   1(강명세),
  • 일본방면   2(김만제, 정낙진) 등이 있다.
▲공주 출신 독립운동가(왼쪽부터) 장춘섭, 최병한, 오익표, 윤태현,  이은숙  ⓒ국가보훈처
▲공주 출신 독립운동가(왼쪽부터) 장춘섭, 최병한, 오익표, 윤태현,  이은숙  ⓒ국가보훈처

공주에 본적을 둔 독립유공자에는 의열투쟁(義烈鬪爭)이나 문화운동 분야에 속한 분은 한 명도 없으며, 미주(美州)나 다른 해외에서 활동한 분은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공주 본적 독립유공자 122명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는 가운데 의병과 광복군 활동을 포함한 무장투쟁은 물론 3·1운동, 그리고 농민운동, 학생운동, 계몽운동을 포함한 자강운동(自强運動: 실력양성운동 *예전에는 애국계몽운동이라고도 하였으나 요즘에는 사용하지 않는 편이다), 임시정부 활동을 포함한 외교활동 등 다양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전체 122명 가운데 74명으로 60%나 되는 3·1운동이 가장 많은 분야는 차지하고 있는데, 그만큼 3·1독립만세운동은 우리 민족 전체가 참여한 거족적인 독립운동이자 대표적인 독립운동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공주시독립유공자기념비  ⓒ전병철
▲공주시독립유공자기념비  ⓒ전병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교과서에서나 접할 수 있었는데, 우리 지역 공주 출신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고 광복군으로 활약하였다는 사실에 놀랍기도 하고 한편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한다. 또한 중국과 만주를 비롯하여 러시아, 일본 등 먼 타향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분이 우리 공주에도 있었으니 공주가 자랑스럽기조차 하다. 또한, 국내에서 일본군과 직접 맞서 싸운 의병이 적지 않았고, 일제의 온갖 회유와 압력에 굴하지 않고 일제 정책에 순응하지 않은 이들도 적지 않았다. 깨어있거나 배운 이들은 민족의식을 드높이는 활동을 하고, 공주공립고등보통학교(공주고)와 공주영명학교(영명고) 학생은 일제 식민지교육에 매몰되지 않고 동맹휴학(同盟休學) 등의 방법으로 일제가 저지르는 불의(不義)에 기꺼이 저항하였다.

공주 본적 독립유공자 122명 이외에 본적은 공주가 아니지만 공주와 관련이 많은 독립유공자도 있다. 대표적인 독립유공자로는 김구(황해 해주), 오강표(충남 연기, 현 세종), 오동진(평북 의주), 유관순(충남 천안), 조병옥(충남 천안), 강윤(충남 논산), 노명우(충남 부여), 유우석(충남 천안), 현석칠(평남 평양) 등이 있다.

▲공주 관련 독립운동가(왼쪽부텨) 오강표, 오동진,  조병옥, 유우석, 현석칠  ⓒ민주당/독립기념관/국가보훈처
▲공주 관련 독립운동가(왼쪽부텨) 오강표, 오동진,  조병옥, 유우석, 현석칠  ⓒ민주당/독립기념관/국가보훈처

이들은 공주 출신이나 본적이 공주가 아니어도 공주에 머물면서 독립운동을 하거나 공주지역에 기념비 등이 세워져 있는 분들이다. 김구는 마곡사에서 출가하여 스님으로 지냈으며, 오강표는 일제 침략에 분개하여 공주향교에서 순국한 분이다. 오동진은 만주에서 무장독립운동을 장군으로서 공주형무소에서 순국하신 분이며, 유관순은 공주에서 영명여학교를 다녔으며, 조병옥은 영명학교(영명중)에 편입하여 졸업하였다. 공주지역 3·1운동은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졸업생·기독교인을 중심으로 41일 공주시장에서 일어났는데, 이때 주도적 역할을 한 이들이 강윤, 노명우(공주영명학교 학생), 유우석(유관순 오빠), 현석칠(기독교 목사)이다. 이때 함께 한 사람으로 영명학교 교사 김관회(金寬會, 공주 출신)와 영명학교 조수로 근무하던 김수철(金洙喆, 공주 출신, 감리교 목사)도 있지만, 김관회는 1998년 건국포장을 받았다 하나 현재 취소되었는지 국가유공자로 검색되지 않으며, 김수철은 변절하여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 그리고 1960년 대통령 선거 당시 민주당 후보로 나왔으나 병으로 갑자기 사망한 조병옥은 해방 후 미군정청 경무부장, 이승만 정부 내무부장을 역임하면서 제주 4·3항쟁 진압을 지휘하고, 거창 민간인학살사건에 책임질 자리에 있어 비판받기도 하는 독립유공자이다.

공주 본적 독립유공자 122명의 이름을 보면 처음 듣는 분이 많을 것이고, 공주 관련 대표적인 독립유공자 9명도 김구와 유관순, 조병옥은 들어본 이름이지만 나머지는 낯선 분일 것이다. 30여 년간 학교 현장에서 역사를 가르쳐왔던 필자도 부끄러울 만큼 대부분 처음 듣는 이름이 많다. 그만큼 우리가 국가나 영웅 중심으로 역사를 배웠고 또 그렇게 접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와 영웅 중심의 역사에 치중하다보니 정작 내가 사는 지역과 나와 비슷한 사람의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편이다. 주변에 있어도 그냥 지나쳐 버리고 소홀히 대하였다. 이제라도 역사를 바라보는 눈을 크게 떠 내 주변 역사에도 관심을 기울인다면 색다른 경험과 함께 쏠쏠한 재미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런 점에서 거족적인 독립운동이자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가 나온 3·1운동, 학교에서 오랜 기간 역사를 배웠음에도 정작 배우지 못하고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공주지역 3·1독립만세운동을 간단하게나마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3·1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가운데 공주지역에서는 37일 영명학교 졸업생과 재학생이 앵산공원(櫻山公園, 3·1중앙공원)에서 모여 만세운동을 시도한 것과 함께 312일 공주시장과 공주 부근에서 만세시위 시도가 있었다. 공주시장 시위는 일본 경찰에게 사전에 알려져 계획하던 이들이 붙잡히고 시위 자체를 강력히 막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공주 부근에서는 천도교가 중심이 되어 경찰서 습격을 시도하였으나 일본군이 출동하여 막는 바람에 313일 강제로 해산되었다.

▲공주 '3·1중앙공원'의 유관순열사상과 4·19학생혁명기념비  ⓒ전병철
▲공주 '3·1중앙공원'의 유관순열사상과 4·19학생혁명기념비  ⓒ전병철

공주지역에서의 본격적인 만세운동은 314일 유구시장에서 일어난 시위를 시작으로 315일과 317일 공주시장 시위로 이어지는 가운데 41일 공주시장을 비롯하여 정안면(41일과 2), 유구면(41), 장기면(현 세종시, 41일과 3), 의당면(41일과 2), 계룡면(42), 우성면(42), 탄천면(43), 주외면(44) 목동면(44), 반포면(45) 등 공주지역 전체로 확산하였다.

유구 장날(3·8일장)314(음력 213) 오후 4시경 천도교인 황병주(黃秉周)가 유구시장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조선독립만세”(조선독립만세인지, 대한독립만세인지 정확한 확인은 안 됨)를 외치자 많은 이들이 모여들어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일본 순사(巡査: 경찰, 당시 헌병경찰)가 해산하라고 하였으나 만세를 부르는 군중이 오히려 증가하여 500여 명에 이르렀다. 순사들이 황병주를 체포하여 유구주재소(駐在所: 경찰 파출소)로 강제로 데려가자 그를 구출하고자 이승현(李升鉉)과 황연성(黃璉性) 등이 주재소로 몰려가 항의하며 주재소 문과 창문 등을 때려 부수었다. 황병주 외 20여 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유구주재소에서 붙잡혀 있다가 공주경찰서로 끌려갔다.

▲유구 3·1독립만세운동 기념비(공주시 유구읍 석남리)  ⓒ전병철
▲유구 3·1독립만세운동 기념비(공주시 유구읍 석남리)  ⓒ전병철

유구시장 시위에서 만세를 부르다 사람들이 체포되어 끌려간 것에 격분한 김희봉(金喜鳳)은 공주 장날(1·6일장)317(음력 216) 공주시장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시장에 있던 군중 1,000여 명이 호응하며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 순사가 출동하여 김희봉을 체포함으로써 이날 시위는 잦아들었다.(이틀 전인 315일 공주 시내에서 300여 명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자 일본 순사와 수비대원이 강력하게 저지한 일도 있었다)

잠시 잠잠하던 시위는 공주지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공주 장날이기도 한 41(음력 31)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졸업생·목사 등을 중심으로 공주시장에서 독립만세시위가 다시 일어났다. 324일 천안 예수교회 목사 안창호(安昌鎬), 영명학교 교사 김관회(金寬會)와 현언동(玄彦東), 영명여학교 교사 이규상(李圭尙), 동경 유학생 오익표(吳翼杓)와 안성호(安聖鎬), 그리고 김사현(金士賢) 등이 모여 41일 공주시장에서 독립만세시위를 할 것에 합의하고 각자 역할을 나누었다. 아는 사람을 통해 몰래 독립선언서1,000여 장을 인쇄하고 태극기도 만들고 다른 학교와 연락하여 동참할 것을 권유하는 등 차근차근 준비하였다. 마침내 41일 오후 2시 공주시장에서 독립선언서가 나눠지고 태극기가 휘날리며 조선독립만세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던 일본 경찰이 달려들어 시위는 진압되고 이날 독립운동을 이끈 이들은 저녁에 다시 모여 협의를 하던 중에 체포되어 공주경찰서와 공주형무소로 끌려갔다. 당시 공주읍내에는 충남도청과 도경, 공주경찰서, 헌병분견대 등 주요 기관이 다 있고, 감시와 단속이 아주 심한 탓에 공주읍내 만세시위는 더 확산하지 못하였다.

▲3·1독립만세사적비/기념비(공주시 정안면 석송리)  ⓒ전병철
▲3·1독립만세사적비/기념비(공주시 정안면 석송리)  ⓒ전병철

41일 공주시장에서만 시위가 있었던 게 아니라 정안면 석송리에서도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유학자 이기한(李綺漢)과 이병억(李秉億) 등이 중심이 되어 석송리에서 주민 20~30명이 아침에 모여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정안면 소재지인 광정리를 향해 행진하는 가운데 운궁리와 내송리(내촌리) 주민 등이 합세하여 참가자가 300여 명으로 늘어났다. 광정리에 도착한 시위대는 광정시장에서 만세를 외치다 광정리주재소 담장을 부수고 유리창을 깨뜨리는 등 시위를 이어가다 오후 3시경 해산하였다. 하지만 광정리에서 석송리로 돌아가던 길에 석송리 모퉁이 주막거리에서 주민 30여 명이 시위 소식을 듣고 출동한 일본 순사와 마주치면서 충돌이 일어나 격렬한 격투가 벌어져 10여 명이 중상을 입고 일본 순사가 쏜 총탄에 맞아 이병림(李秉霖) 1명이 사망하였다. 이에 주민들이 횃불을 들고 다시 광정리에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43일까지 횃불시위를 이어갔다.

정안면만이 아니었다. 41일 공주지역 곳곳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41일 밤 8시 유구(維鳩)에서는 산 위에 횃불을 피워놓고 천변(川邊)에서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장기면(현 세종시) 도계리 주민 약 100여 명이 마을 뒷산에 올라 태극기와 함께 횃불을 피워 밤 9시경부터 다음 날 오전 2시까지 독립만세를 불렀다. 의당면에서는 주민 400여 명이 여러 장소에서 각각 무리를 지어 독립만세를 부르고 다음 날인 42일에도 주민 600여 명이 여러 곳에서 만세를 불렀다.

42일에는 계룡면 경천리에서 주민 1,000여 명이 경천시장을 중심으로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고, 우성면 쌍신리와 도천리 주민들은 밤에 산 위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횃불 시위를 하였으며, 정안면 대산리에서도 만세시위를 하였다. 43일에는 탄천면 각 마을에서 약 1,500여 명의 주민들이 마을 산 위에 올라가 횃불시위를 하며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장기면 대교리에서도 만세시위를 펼쳤다. 44일에는 주외면(현 웅진동) 영당리와 목동면(현 이인면) 이인리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고, 45일에는 반포면 상신리에서 만세시위가 있었다.

▲기미년3·1독립만세운동기념탑(공주시 웅진동)  ⓒ전병철
▲기미년3·1독립만세운동기념탑(공주시 웅진동)  ⓒ전병철

계속되는 시위에 놀란 공주경찰서는 병력을 출동시켜 총검으로 시위 군중을 해산시키는가 하면 시위를 주도한 인물과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주민을 체포하는 등 강력히 탄압하였다. 조선헌병대사령부가 작성한 조선소요사건일람표를 보면 공주지역 만세시위로 1명이 죽고 13명이 부상하였으며 총 86명을 검거하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많은 이들이 독립만세시위로 일제 탄압에 시달리고 고생하였으며, 감방 생활을 하는 등 갖은 고통을 겪었다.

어쩌면 공주는 독립운동의 고장'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공주 본적 독립유공자 122명을 배출한 고장이다. 또 공주와 관련 있는 대표적인 독립유공자 9명과 함께 알려지지 않은 적잖은 독립운동가가 살거나 머물던 고장이다. 하여 공주에 오면 문화재만 보고 갈 것이 아니라 사람도 만나고 가면 더 좋지 않을까 싶다. 혹 독립운동의 고장 공주에 와서 모르던 독립유공자 한 분만이라도 알고 가면 이게 오늘날 우리가 할 수 있는 독립군 활동이 아닐까 싶다. 독립운동이라고 따로 있는 게 아니며, 목숨 바쳐 싸우는 거창한 것만이 독립운동인 것은 아닐 것이다.

여하튼 공주에 오면 세계문화유산 공산성이나 무령왕릉, 석장리 구석기유적지 등 유명한 곳만 둘러볼 게 아니라 공주와 함께 하였던 인물, 기왕이면 널리 알려진 사람보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거나 소홀히 하였던 사람을 만나고 가면 훨씬 좋지 않을까 싶다. 모름지기 역사문화도시 공주에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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