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과 지켜야 하는 것의 틈새를 눈여겨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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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것과 지켜야 하는 것의 틈새를 눈여겨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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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1.08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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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시 사우(祠宇)‧사당(祠堂)‧영당(影堂)‧제각(祭閣)‧재실(齋室)‧제실(祭室)‧제단(祭壇) 조사(1)

인간 전병철(작가)

 

2023년에도 발품을 많이 팔았다. 공주 지역 구석구석을 다니며 국가나 지자체 및 문중(門中)종중(宗中)에서 옛사람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건물인 향교(鄕校)와 서원(書院)을 비롯한 사우(祠宇)사당(祠堂)영당(影堂)제각(祭閣)재실(齋室)제실(祭室)제단(祭壇)을 조사하였다. 이들은 모두 제사를 지내는 집 또는 시설을 가리키는 말로, 특별히 초상화를 모신 곳을 영당이라고 부른다. 흔히 사당이나 재실 하면 기와지붕을 한 한옥을 떠올리기 쉽다. 규모가 큰 곳은 중심 건물로 들어가는 대문(大門)이 있고, 대문도 그냥 대문이 아니라 입구가 3개인 삼문(三門)으로 된 곳도 있다.

하지만 들어가는 문이 없는 사당이나 재실도 많았다. 양옥 형태를 한 재실도 적잖게 있었고, 가정집 같은 재실도 있었으며, 창고처럼 보이는 재실도 있었다. 2층 구조로 된 재실도 있었다.

이런 다양한 사당이나 재실을 찾아 돌아다녔다. 기왕 조사하는 김에 제단(祭壇)까지 함께 조사하였다. ()은 강의, 행사, 의식 따위를 행하거나 관람하기 위하여 주변보다 높게 만들어 놓은 평평한 자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흙이나 돌로 쌓아 올린 평평한 자리를 제단이라고 하는데 조사를 해보니 제단도 다양하였다. 산신(山神)이나 토지신(土地神) 등 각종 신을 모시는 신단(神壇),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천단(天壇),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노제단(路祭壇), 장승제단 등이 있었다. 죽은 이의 시신(屍身)이 없으면 보통 단()을 세워 제사를 지내기도 하는데 각종 성씨(姓氏)의 시조는 시신이 없기에 단을 세워 제사 지내는 시조단(始祖壇)도 있었다.

그리고 제사와는 관련 없는 공덕법단(公德法壇)과 제라회맹단지(濟羅會盟壇址)라는 것까지 있었다. 공덕법단은 중국 명청 시기에 유행한 신종교로, 중국인 이덕복·장서전·김은선김복당 등을 통해 1947년 우리나라에 들어온 국제도덕협회 일관도(一貫道)의 공주 법단(法壇) 이름이다. 제라회맹단지는 취리산(就利山, 공주생명과학고 뒷산)에 있는, 665년 백제 웅진도독 부여융(夫餘隆: 의자왕 장남)과 신라 문무왕이 회맹(會盟: 모여서 맹세함)을 한 터[()]라고 전하는 장소로 현재 평평한 단은 없이 제라회맹단지라고 새긴 작은 비갈(碑碣: 머리 부분이 둥그스름한 작은 비석)만 세워져 있다.

여하튼 구석구석을 다니며 공주시에 내려오는 향교와 서원을 비롯한 사당과 재실, 제단을 찾아보았다. 눈에 띄지 않아 빠진 것도 있겠지만 나름 샅샅이 조사하였다. 다니다 보니 뭘 이런 걸 조사하냐며 반갑게 맞아주는 이가 있는가 하면 뭘 이런 것까지 조사하느냐며 핀잔을 주는 이도 있었다. 별걸 다 조사한다라며 신기하게 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이런 걸 왜 조사하냐?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이까지 있었다. 심지어 인사를 하고 사진 촬영 좀 하겠다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대뜸 화를 내듯이 그냥 가라는 이도 있었다. 그래도 이것은 다행이었다. 대부분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 경우가 많았으며, 출입은 고사하고 아예 접근하기조차 어려운 곳도 적지 않았다. 하여 셀카봉을 활용하여 빈틈으로 사진을 찍거나 옆에서, 먼발치에서 겨우 사진 촬영을 해야만 했다. 이것만 해도 천만다행, 때에 따라서는 햇빛 방향으로 사진 촬영이 불가능하여 다시 찾아가거나 주인은 물론 주변에 물어볼 사람이 없어 같은 곳을 두세 번 이상 찾아가기도 하였다.

어찌 보면 참 할 일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쓰잘데기없는 일에 시간 낭비한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럴 수 있다. 흔히 국보나 보물, 도에서 지정한 문화유산이나 적어도 향토문화유적으로 지정된 것을 조사해야 가치 있고, 그래야 알아주는 게 현실이다.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지 않았어도 최소한 일반인에게 어느 정도 알려진 문화재 정도는 조사해야 관심을 끌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지정되지 않은 문화유산인 만큼 오히려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나 싶다. 별로 관심을 쏟지 않던 것들이기에 오히려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이번 공주 지역에 있는 널리 알려진 향교와 서원을 비롯한 사우사당영당뿐만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문중(종중) 재실(제실)과 제단까지 전부 조사하였다.

문화유산에 등급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국보와 보물, 도지정문화재 등으로 나누는 것은 편의상 구분한 것이지, 국보라고 하여 더 가치 있고 문화재자료라고 하여 가치가 덜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국보보다 문화재자료가 일반인에게는 평소 쉽게 접할 수 있던 것이고 친근했던 것들이기에 훨씬 가치가 높을 수 있다. 문화유산을 국가지정문화재(국보-보물)-도지정문화재-문화재자료 방식으로 구분하다 보면 이것을 마치 등급처럼 여길 수 있어 문제가 되기도 한다. 더구나 같은 지정문화재임에도 국보 123, 보물 123호 등으로 구분하는 것 또한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마치 국보 1호가 국보 2호보다 더 가치 있고 서열이 높은 문화재로 여겨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런 문제점을 오래전부터 제기하여 현재는 123호가 폐지되어 국보나 보물이라는 말만 쓰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국보와 보물 등의 구별은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마치 국보가 보물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도 마찬가지다. 세계문화유산 지정은 좀 더 각별하게 보존에 힘쓰기 위한 것이지만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문화유산은 지정되지 않은 문화유산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쉽다. 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오히려 문화유산이 더 훼손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사람들이 세계나 국가와 시도에서 지정한 문화유산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주변에 있는, 이름 없는 문화유산에 관심을 기울이고 애정을 쏟아보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현재 공주시에 내려오는 향교서원사우사당영당제각재실제실제단에서 향교는 단 한 곳뿐이었다. 향교는 고려와 조선 시대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한 관립(官立, 국립 또는 공립) 기관으로써 이곳은 교육 목적 이외에 선현(先賢)에 대한 제사 기능을 담당하던 곳이었다. 이런 향교는 조선 시대 지방 행정 구역인 부(), (), (), ()에 하나씩 설치하였는데, 행정 구역이 지금처럼 통폐합되면서 공주나 태안처럼 1개 향교가 있는가 하면 많게는 부여처럼 4개 향교가 있는 곳도 있다. 현재 내려오는 전국과 충남에 남아 있는 향교 수를 보기 쉽고 비교하기 쉽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경상 지역에 있는 향교가 74개로 가장 많아 전국의 32%를 차지하고 있고, 전라 지역과 충청 지역은 각각 58개와 56개로 비슷하게 분포하였으며, 수도권과 강원 지역이 46개로 상대적으로 적게 분포하였다. 향교는 1현에 1개 세워졌기에 향교 수가 많은 것은 그만큼 많은 현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생각하면 향교가 많은 곳은 적은 곳보다 아무래도 영향력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점에서 경북이 40개로 가장 많고 충남이 34개로 두 번째로 많은 것을 보면 이 두 지역은 조선 시대 양반 세력과 붕당정치 영향력이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강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양반 세력과 붕당정치 영향력은 향교보다 서원과 관련지어 생각해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향교가 국공립 교육기관이었던 것과는 달리 서원(書院)은 사립 교육기관으로써 이 또한 교육 목적 이외에 선현에 대한 제사 기능을 담당하는 곳이었다. 현재 공주시에 내려오는 대표적인 서원으로는 고로서원[古老書院, 충효사(忠孝祠)], 명탄서원[鳴灘書院, 충절(忠節祠)], 용문서원[龍門書院, 명덕사(明德祠)], 충현서원(忠賢書院) 이렇게 4개가 있다.

기록에는 성봉서사(盛峰書社: 성봉서원), 요당서사(蓼塘書社: 요당서원), 운산서사(雲山書社: 운산서원) 등의 이름이 보이기도 하는데, 운산서원은 현재 그 위치만 전해지고 있을 뿐이고, 요당서원이 있던 곳에는 현재 의당초등학교가 세워져 이곳이 요당서원 터였음을 안내하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성봉서원은 성봉서사라는 이름으로 최근 복원하였으나 서원이라기보다 충정공(忠定公) 이귀(李貴)와 그의 세 아들을 모시는 사당 겸 연안이씨(延安李氏) 문중 재실로 사용하고 있다.

공주에 있는 서원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되도록 비교하기 쉽게 현재 전국과 충남에 남아 있는 서원 수를 성균관과 ()한국서원연합회 자료 등을 바탕으로 정리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현재 내려오는 전국 234개 향교 수와 비교하면 전국 서원 수는 610개로 향교보다 3배 가까울 정도로 많은 편이다. 이를 통해 조선 시대 양반 세력의 근거지 가운데 관(국가)에서 운영하는 학교인 향교보다 사립 학교인 서원의 역할이나 그 영향력이 더 컸을 것이라고 어림잡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경상 지역 서원 수는 전체 서원의 57% 정도로 반을 훨씬 넘고 있어 조선 사회에서 경상 지역 유림의 활약과 영향력이 대단하였을 것이라고 어렴풋이나마 추측할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출세하려면 과거시험을 봐야 하고, 과거 합격에는 이름난 스승이나 번듯한 서원에서 공부하며 형성한 인맥(人脈)이나 학맥(學脈)이 유리하게 작용하였기에 서원의 위상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예나 요즘이나 학교가 교육이라는 본질 이외에 출세하는 수단으로 쓰인 것은 마찬가지였다고 할까, 이상과 현실의 차이가 자못 컸다.

꼭 역사 수업을 받지 않았어도 많은 이들이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하였다라는 이야기를 들어봤을 것이다. 조선 후기 서원은 적잖은 땅과 노비를 소유한 채 군역(軍役)을 비롯한 각종 부역(賦役)과 세금을 면제받았다. 이에 서원은 탈세(脫稅)와 군역을 피하는 본거지가 되어 각종 비행과 불법을 일삼고 붕당(朋黨)을 이뤄 백성에게 피해를 주는 대상이 되었다. 이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68년부터 1871년에 걸쳐 당시 서원의 폐단을 뿌리 뽑고자 유림(儒林)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강력하게 서원 철폐(撤廢)를 밀고 나갔다. 전국 650개 서원 가운데 소수서원·도산서원·도동서원 등 모범이 될 만한 47개의 서원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정리하였다. 이렇게 650개나 되던 서원 가운데 47개만 남겼다고 하는데 2023년 현재 있는 것이 610개라고 하니 다시 원상 복구된 셈이다. ‘도로 아미타불이라고 해야 하는지, ‘문화유산의 부활이라고 해야 하는지 딱 잘라 말할 순 없지만 어쨌든 뿌리 깊은 유교 문화의 저력을 새삼 느낀다. 끊으려 해도 끊어지지 않는 끈질긴 생명력에 놀랍기도 하고, 나름 의욕을 갖고 실시한 개혁이 결국 또 좌절된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다. 이럴 바에야 개혁은 왜 했는지, 그래도 개혁은 해야만 하는, 그러나 끈질길 정도로 좌절이 반복되어 온 역사에 만감이 교차한다.

향교와 서원은 둘 다 유학(儒學)을 교육하고 선현(先賢)에 대한 제사를 담당하는 기관인 만큼 그 구조는 크게 교육 공간과 제사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제사 공간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은 향교는 대성전(大成殿), 서원은 강당(講堂)이다. 그리고 교육 공간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은 향교는 명륜당(明倫堂), 서원은 사당(祠堂)이다. (殿)과 당()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건물에도 서열이 있어 건물 이름은 건물에 모셔진 주인의 신분에 따라 다르게 지어진다고 한다. 건물 이름에 붙는 끝 글자를 가지고 (殿)-()-()-()-()-()-()-()’ 순으로 그 서열이 정해진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대성전이 명륜당보다 서열이 높은 건물이다. 결국, 향교와 서원은 교육과 제사라는 두 가지 중요한 기능 가운데 교육보다 제사를 더 소중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유교 문화에서는 선현을 제사하고 추모하는 일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향교와 서원을 비롯하여 문중마다 사당이나 재실을 세워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냈으며 집에서는 가묘(家廟: 고조 이하 조상의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던 집안의 사당)를 마련하여 제사 지내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 제사는 보통 기제사(忌祭祀)’라 하여 조상이 돌아가신 날의 전날에 음식 등을 마련하여 돌아가신 날의 가장 이른 시각(時刻)에 제사를 지냈다. 전통적으로 가장 이른 시각은 자시(子時: 111)로 그래서 대개 12시를 넘겨 제사를 지냈다. 이처럼 돌아가신 날의 가장 이른 시각에 제사를 지낸 이유는 다른 모든 일보다 우선해서 조상을 모신다는 의미와 함께 이때가 조상의 영혼(귀신)이 활동하는 데 가장 좋은 조용한 시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제사는 ‘4대 봉제사(四代 奉祭祀, 간단히 4대 봉사)’라 하여 나를 기준으로 부모(父母), 조부모(祖父母), 증조(曾祖)부모, 고조(古祖)부모 이렇게 4대조(四代祖)까지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5대조(五代祖) 이상은 일반적으로 시사(時祀)[시제(時祭), 시향(時享)] 또는 묘사(墓祀)[묘제(墓祭)]’라 하여 정해진 시기(時期)인 한식(寒食)이나 음력 10월 초하루에 산소(山所: 묘소)에서 지냈다. 다만 5대조 이상이 아닌 4대 조상까지를 묘소에서 제사 지내는 것은 사산제(私山祭)’라 하였다. 그리고 보통 5대조가 되면 가묘나 사당 등에 모셔져 있던 신위(神位)[위패(位牌)]를 꺼내 묻어야 했는데, ‘불천위(不遷位)’라고 하여 예외도 있었다. 불천위는 나라에 공을 세운 사람의 신위를 옮기지 않고 영구히 모시도록 왕이 허락한 것으로, 불천위가 되면 있던 곳에 계속 두면서 기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이런 불천위를 모신 사당을 부조묘(不祧廟)’라 한다.

이렇게 기제사는 기일(忌日)에 맞춰 12시를 넘은 한 밤에 지냈으나 우리 사회가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하면서 12시를 넘어 기제사를 지내는 게 어렵고 불편하여 저녁 시간에 제사를 지내는 일이 많아졌다. 또 여러 제사를 몰아서 한 번에 지내기도 하고, 아예 제사를 지내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더욱이 시제사(時祭祀: 시제)는 시기에 맞춰 여러 번 지내왔으나 대가족 사회에서 소가족, 핵가족 사회로 바뀌면서 문중이 해체되고 가족이 흩어져 살면서 1년에 한 번 지내기도 벅찰 만큼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또 할아버지할머니와 함께 사는 것은 고사하고 부모와 같이 사는 것마저도 점점 줄어드는 현실에 4대 봉제사는 먼 나라 풍습으로 여겨질 정도다.

이처럼 제사 지내는 일이 줄어들고 제사 지내는 일을 변변찮게 보는 요즘 같은 세태에 제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당이나 재실, 그것도 알려지지 않은 문중(종중) 재실을 조사한다는 것은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시간 낭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 더 조사하고 정리할 필요가 있기도 하다. 요즘 같은 세태에 제사를 되돌아보고, 재실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으며, 쓸모없어져 가는 재실을 앞으로 어떻게 활용하는 것이 좋을지 등등을 알아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관심조차 없는 데에 관심을 기울이는 게 진정한 관심 아닐까 싶다.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공주시 사‧사당‧영당‧제각‧재실‧제실‧제단 조사(2) "건물에도 서열이란 게 있고, 자기 얼굴에 어울리는 이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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